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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항해하면서 발견한 다시 읽고 싶은 글을 스크랩했습니다. 인터넷 공간이 워낙 넓다보니 전에 봐 두었던 글을 다시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래서 스크랩할만한 글을 갈무리합니다. (출처 표시를 하지 않으면 글이 게시가 안됩니다.)

21세기와 생명교회론

생명환경자연 박재순............... 조회 수 3140 추천 수 0 2002.11.15 09:0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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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출처/열린교회홈페이지

들어가는 말: 왜 생명교회론인가?

생명 교회론을 말하는 이유는 세 가지이다. 첫째 교회의 본질이 생명이고 교회라는 기관이 유기적 생명체이기 때문이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살고, 모든 제직과 기관과 교인들이 예수의 생명과 말씀으로 이어져서 움직이는 유기적인 공동체이다. 둘째 21세기에 지구화와 발전된 산업기술.생명공학에 의해 초래된 생태학적 위기와 생명력의 고갈이 초래되었고 이런 상황은 교회로부터 생명력과 생명사랑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인간성 상실, 공동체 붕괴, 세계관의 혼란에 직면해서 교회는 삶의 근원과 힘과 목적을 드러낼 과제를 안고 있다.

셋째 한민족의 오랜 염원인 밝고 따뜻한 삶을 교회 안에서 이루어야 하기 때문이다. 한민족은 춥고 어두운 중앙 아시아의 우랄 알타이 산악 지역으로부터 수 천, 수 만 년 동안 밝고 따뜻한 삶(밝은 땅=밝달=배달)을 찾아 해 뜨는 동쪽으로 오다가 드디어 동북아시아와 한반도에 이르렀다. 한민족은 동북아시아의 넓은 들에서 떠오르는 해를 보았고, 태평양 넓은 바다 위로 장엄하게 솟아오르는 해를 보았다. 한민족은 오랫동안 시련과 좌절을 겪은 끝에 드디어 참 생명의 빛(해님)인 예수를 만났다. 한민족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 안에서 오랫동안 그리던 밝고 따뜻한 삶을 누려야 한다. 교회는 밝고 따뜻한 삶을 향한 한민족의 오랜 염원을 이루는 자리가 되어야 한다.


생명 교회론은 교회의 본질을 생명으로 보고 교회를 유기적 생명체로 보는 것뿐 아니라 생명체로서의 교회를 이해하고 느끼는 방식 자체가 생명적이어야 함을 뜻한다. 지성적 분석과 작업만으로는 살아 있는 기관으로서의 교회를 파악할 수 없다. 오히려 삶 속에서 삶에 대해 터득한 민감한 감수성과 이해를 통해서 생명으로서의 교회에 접근할 수 있고 교회의 생명적 본질과 신비를 이해할 수 있다.


교회는 예수의 삶과 죽음과 부활의 결과로 생겨났고, 예수의 영과 생명으로 존속한다. 교회는 예수의 생명 공동체이다. 그러나 로마제국에 의해 공인된 후 교회는 지상의 예수의 삶에서 점차 멀어지게 되었다. 예수의 삶에서 멀어진 교회는 부와 권력을 얻고, 웅장한 교회당을 세웠으나 복음의 힘을 잃고 영적 생명력을 잃게 되었다.

오늘의 교회도 예수의 삶에서 멀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서양의 동양 침범과 함께 선교사들을 통해 교회가 전 세계에 퍼졌고 양적으로 크게 성장했으나 교회의 생명력은 약화되는 것으로 보인다. 미국과 유럽 교회의 영적 복음적 활력이 쇠퇴하고 있으며, 아시아에서 가장 역동적이고 활발하다는 한국교회도 영적 생명력이 급속히 소진되는 징후가 보이고 있다.

오늘 한국교회는 생존의 위기를 맞고 있다. 시대의 변화하는 삶에 떠밀려 표류하다가 과거의 유물로 남을 것인가 아니면 새 천년 새 시대의 변화하는 삶의 중심을 잡고 새 문명의 산실이 될 것인가? 교회가 힘있게 살아서 새 천년, 새 문명의 영적인 그루터기가 되려면 교회 안에 예수의 생명이 충만하고 이 시대의 삶의 중심을 붙잡고 이 시대의 삶에 예민하게 감응하고 응답할 수 있어야 한다.

예수의 생명이 교회의 본질이고, 교회는 시대의 삶에 감응하는 산 공동체라면, 우리의 삶 속에서 삶에 대한 느낌과 이해와 울림을 통해 교회를 느끼고 보고 이해해야 한다. 서재의 책상에서 개념과 지식과 정보만으로 만든 교회론은 성서의 교회이든, 오늘의 교회이든 생명으로서의 교회의 본질과 실상을 드러낼 수 없다. 오늘의 삶 속에서만 성서의 생명사건을 이해할 수 있듯이, 오늘의 삶 속에서만 생명체로서의 교회의 본질을 파악할 수 있다.


1. 21세기와 교회

교회의 본질과 실상을 생명으로 보고 생명 교회론을 말하기 전에 21세기의 생명이해와 생명문제를 짚어 보기로 하자. 21세기에는 생태학적 위기, 지구화, 생명복제와 사이버 공간의 확대로 특징지어지는 기술공학의 발달이 두드러진다. 생태학적 위기나 지구화, 생명복제와 사이버공간의 확대는 모두 기술공학에서 비롯된 것이다. 생태학적 위기, 지구화, 생명복제는 인간과 생명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과 도전이면서 새로운 가능성을 시사한다.

그 동안 인류는 농업혁명, 산업혁명, 정보혁명을 거쳐 왔다. 하나의 혁명을 거칠 때마다 획기적인 생산력 증대가 이루어졌고 생산력 증대를 위해서 자연과 인간의 관계가 재조정되고 사회제도와 가치관과 이념이 바뀌었다. 세 가지 혁명을 통해 자연에 대한 인간의 지배와 수탈이 심화되고, 소수 엘리트에게 정보와 권력이 집중되었다. 그리하여 자연생태계의 파괴와 인간성 상실과 공동체성의 붕괴 현상이 자연과 인간의 삶을 근본적인 위기 속으로 빠트렸다.
이 세 가지 혁명이 앞으로도 지속되겠지만 눈앞에 닥친 생명의 위기를 극복하려면 생태학적 혁명이 요청된다. 생태학적 혁명은 생태학적 삶의 원리에 따라 자연과의 관계가 재조정되고 사회제도와 사회관계가 새롭게 형성되어야 한다. 생태학적 원리 다시 말해 생태학적 가치관과 이념, 생태학적 철학이 새로운 사회와 문명의 토대와 원리가 되어야 한다.

생태학적 원리는 공존과 상생의 원리이다. 뭇 생명은 서로 이어져 있으며 함께 살아간다. 하나가 죽으면 다른 것도 죽고 하나가 살면 다른 것도 산다. 이것은 '너'를 살림으로써 '내'가 사는 원리이다. 21세기는 공존과 상생의 생태학적 원리를 익히고 실현함으로써 새 천년 새 문명을 여는 시대가 될 수 있다.

그런데 공생과 상생의 원리는 인간의 가치관과 삶의 근본적인 쇄신을 요구하고, 인간의 근본적인 쇄신은 깊은 영성과 신앙체험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다. 생태학적 혁명이 이루어질21세기 새 시대에는 생명을 살리고 돌보는 일, 몸을 지키고 살리는 일, 공동체를 이루는 일이 가장 중요한 일이 된다. 교회는 서로 살리고 돌보고, 더불어 사는 삶의 자리가 되고, 생명공동체적 영성의 산실이 되어야 한다.


2. 생명 교회론

1) 교회론의 반성

그 동안 주도적인 학자들의 교회 이해는 교회를 예수의 삶과 분리시키고 오늘 우리의 삶에서 분리시키는 경향이 있었다. 르와지는 예수는 하나님 나라를 선포했는데 교회가 왔다고 했고, 불트만은 선포자 예수가 선포의 대상 그리스도가 되었다고 했다. 이로써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과 교회가 분리되고 역사적 예수와 신앙의 그리스도가 분리되었다. 역사와 신앙의 분리, 역사적 예수와 복음선포의 내용이 분리되었다.

더 나아가서 신학과 교회의 초석을 놓은 초대선교사 바울이 예수의 삶과 복음을 변질시키고 변형시킨 것으로 평가되었다. 예수는 생동적이고 자유로운 삶의 복음을 전한 혁신적인 예언자이고, 바울은 교리적이고 교회적이며 가부장제적 사회체제에 순응한 타협적인 인물로 여겨졌다. 예수(=하나님 나라운동)와 바울(=교회)은 서로 대립되고 대조되었다.

서구학자들의 이런 논의는 삶에서 유리된 계몽주의적 이성과 아카데미즘이 성서(예수와 초대교회, 바울)의 생명운동에 가한 폭력이었다. 계몽주의의 편협한 역사개념에서 역사와 신앙이 분리되었고, 후대의 제도화되고 무력해진 교회, 예수의 삶과 복음에서 멀어진 교회에 대한 이해가 성서이해에 반영되었다.

만일 서구의 학자들이 개념과 언어만 가지고 성서를 읽지 않고, 삶의 상황 속에서 삶에 대한 절실한 관심과 갈망을 가지고 성서를 보았다면 예수와 바울, 예수의 하나님 나라운동과 초대(고대)교회의 생명적 연속성, 생명유기체적 연속성을 보았을 것이다. 예수를 믿고 따랐던 제자들과 초대교회 교인들의 삶 속에서는 역사적 예수와 신앙적 그리스도가 분리될 수 없었고, 신앙과 역사가 분리되지도 않았다. 삶 속에서 보면 예나 지금이나 신앙과 역사는 분리될 수 없다. 학자들의 서재, 이론과 관념의 실험실 속에서만 역사와 신앙이 분리된다. 성서의 삶의 세계, 오늘 우리의 삶의 세계에서는 역사와 신앙이 분리되지 않는다. 신약성서의 저자들이나 인물들, 문서들에서는 역사적 예수와 신앙의 그리스도 사이에 갈등이 없다.

예수와 교회, 예수와 바울 사이에 시대적 상황적 차이가 있고 그 차이가 그들의 삶과 말에 미묘한 차이를 가져왔을 수 있다. 바울은 율법학자로서 새로운 삶을 얻었고, 팔레스틴 밖 헬레니즘 세계의 선교사였다는 점에서 예수와는 달랐다. 그러나 그 차이를 넘어서서 바울의 삶과 가르침은 예수의 생명에 집중되었다. 예수의 삶과 가르침의 정신과 원리를 교회공동체 속에 실현하려고 안간힘을 썼고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봄으로써 교회와 그리스도의 역사적 간격을 넘어서려 했다.

예수운동과 초대교회의 삶은 얼마나 가까운가! 예배공동체와 밥상공동체로서 초대교회의 기쁨과 감사는 예수의 생명잔치를 반영한다.(사도2:46) 초대교회는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교운동의 연장이고 계승이다. 초대교회는 지상의 예수가 없는 상태에서 예수의 영과 함께 다시 올 예수를 기다린 공동체이다. 지배와 정복, 전쟁과 살육, 회의와 자살, 탐욕과 잔학에 빠진 헬레니즘 문명 속에서 초기 기독교의 나눔과 섬김, 영원한 생명에 대한 확신과 부활생명의기쁨과 축제, 높은 도덕성은 기독교가 삶의 종교, 죽음을 이긴 부활생명의 종교임을 드러낸다.

예수의 삶과 바울의 삶은 서로 울리고 통하고 일치한다. 바울의 삶의 치열함과 지극함은 예수운동의 급진성과 철저성을 반영한다. 예수를 만나 변화된 바울은 사나 죽으나 예수만을 생각하고 예수만을 위해 살았다. 바울 속에 산 것은 예수였다.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언제나 예수의 죽임 당하심을 우리 몸에 짊어지고 다닙니다. 그것은 예수의 생명을 우리의 몸에 나타나게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 있으나, 예수를 위하여 늘 몸을 죽음에 내맡깁니다. 그것은 예수의 생명이 우리의 죽을 몸에 나타나게 하려는 것입니다."(고후4:10-11)

예수를 만나서 삶의 대전환을 이룬 바울이 세운 신학과 교회도 예수 생명의 복음에 비추어 보고 바울의 극적이고 절실한 삶에 비추어 보아야 한다. 예수.교회.바울의 연속성과 동속성은 삶 속에서 확인된다. 오늘 우리의 신앙과 선교의 삶 속에서 볼 때 민중의 삶의 자리에서 볼 때 그 연속성과 동속성이 보인다. 예수와 바울의 삶의 공명과 공감은 우리의 삶에서 느껴지고 확인된다.


우리가 초대교회와 바울의 시대로 돌아갈 수 없듯이, 오늘의 교회가 초대 교회와 바울의 교회를 모방하거나 흉내낼 수 없다. 온 피조세계와 인류의 삶의 근거이고 바탕이며 목적인 하나님과 예수의 생명에로 늘 돌아가야 하지만, 예수와 바울의 시대로 돌아갈 수는 없다. 하나님은 인간으로 하여금 다른 누구를 모방하고 흉내내기를 바라지 않고, 스스로 그 시대와 그 상황에서 삶의 사명을 이루기를 바라신다. 삶은 남이 대신 살 수 없는 것이다. 뭇 생명은 스
스로 자기에게 주어진 본분과 사명을 이루어야 한다. 생명체로서의 교회에게는 주어진 이념이나 모범, 정해진 틀이 없다. 그 시대 그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새롭게 주시는 일과 사명을 스스로 감당해야 하고, 하나님이 원하는 교회의 모습과 일을 스스로 이루어가야 한다.


2) 통전적 교회론

서구신학에서 예수운동과 삶에서 교회를 분리시키고, 신학자들과 교파들이 교회를 특수한 기능과 성격으로 특화시키고 강조한데 반하여 디이트리히 본회퍼는 믿음과 삶(복종)을 일치시키고 교회의 본질을 '더불어 있음'과 '서로 위함', 다시 말해 공동체적 삶의 근거와 원리로 보았다. 그리스도의 대리적 죽음에서 인류의 파괴된 공동체가 회복되며 이 회복된 공동체가 교회이다.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참된 공동체이며, 세상에서
인간이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의 공동체적 삶에로 들어가는 자리이다.

그는 박사학위논문 '성도의 교제'에서 "(교회)공동체로서 존재하는 그리스도"를 말한다. 그에 따르면 교회는 역사 안에서 그리스도의 현재이기 때문에 교회사는 세계사의 숨은 중심이다."예수가 타자를 위한 존재"임으로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타자를 위한 삶'을 살아야 한다고 본 그는 나치스 정권의 폭력으로 고통 당하며 죽어 가는 사람들의 삶의 한 가운데로 들어가 교회 공동체의 사명과 본분을 감당하려고 했다.

본회퍼는 타자를 위한 예수의 삶과 대리적 죽음을 교회의 본질과 근거로 보았다. 교회의 구조와 원리를 '더불어 있음'과 '서로 위함'으로 보았다. 더불어 있음과 서로 위함은 공동체적 삶의 구조와 원리이며 오늘의 말로 표현하면 공생과 상생이다. 교회는 더불어 살고 서로 위해 사는 생명 공동체이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생명공동체라면 교회는 복합적이고 유기체적인 체제이고 제도이며, 죽음을 넘어 살아나는 생명사건이며, 성도의 생동하는 사귐이다. 그 동안 가톨릭 교회는 교황과 제도에 의한 사도적 연속성을 교회의 본질로 보았고, 루터교회와 개혁교회는 교회를 말씀사건으로 보았고, 회중교회는 회중의 사귐으로 보았다.

교회가 삶의 공동체라면 교회는 통전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생명 교회론에서는 가톨릭 교회의 제도 교회론과 개혁교회의 말씀사건 교회론과 회중교회의 회중교회론이 결합되어야 한다. 이 세 가지는 모두 생명 교회의 필수적인 부분과 요소이다.

첫째 생명교회는 제도적 연속성과 유기적 체제를 존중하고 지켜야 한다. 모든 생명체는 유기적 조직과 체계를 가지고 있다. 신앙과 생명의 운동도 조직과 체계를 요구한다. 뼈대와 살가죽이 없는 생명체가 존속할 수 없듯이, 제도와 체제가 없는 교회도 존속할 수 없다. 제도와 체제가 없는 교회는 역사의 거센 시련과 도전을 견딜 수 없다.

둘째 뭇 생명체의 세포들이 끊임없이 죽고 다시 살아나듯이, 늘 생성하고 소멸하며, 창조하고 갱신하듯이, 교회는 회개하고 용서받고 새로 살아나는 말씀사건, 죽고 다시 사는 말씀사건을 통해서 발생한다. 교회는 사건이고 과정이다. 루터와 칼빈의 신학을 이은 칼 바르트는 교회를 말씀사건으로 보았다. 말씀사건이 일어나면 교회이고 말씀사건이 일어나지 않으면 교회가 아니다.

교회는 제도로 머물 수 없다. 하나님의 말씀과 생명을 만나는 사건, 회개와 갱신의 사건이 일어나야 산 교회이다. 생명 자체도 유기적 조직과 체계만으로 살 수 없고, 끊임없는 생명사건, 교류와 소통, 신진대사의 활동이 순간순간 일어나야 하듯이, 하나님의 생명사건이 일어나야 교회이다.

셋째 교회는 성도의 사귐이다. 체제와 사건이 교회의 본질적 요소와 성격을 나타내지만 그것만으로는 산 공동체를 이룰 수가 없다. 생명의 유기체적 체제로서 제도가 필요하고 신앙의 실존적 순간에 일어나는 말씀사건이 필요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산 생명체가 될 수 없다. 서로 용서하고 돌보고 사랑하는 사귐을 가질 때, 교회는 비로소 산 공동체가 된다.

제도, 말씀사건, 사귐, 이 세 가지는 모두 교회의 본질에 속한다. 세 가지가 모두 교회의 본질적 요소로서 생동할 때 교회는 힘있게 살아난다.

3)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교회

동방정교회는 교회를 하나님과 인간의 신비로 보고, 하나님.우주.인간의 모상(模像: eikon)으로 설명했다. 교회는 지상의 천국이며, 그리스도의 신비로운 몸에 참여함으로써 교인들은 신적 성품, 하나님의 존재와 생명에 참여하게 된다. 그리스도의 신비로운 몸으로서의 교회를 강조한 동방정교회는 사도계승권을 "공동체로서의 교회가 처음으로 형성되고 공동체 안에서 그리고 공동체에 의하여 형성된 오순절 사건"으로 이해한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성만찬과 세례는 예수의 몸을 이루는 사건이다. 성만찬을 제정함으로써 예수는 믿는 이들의 몸과 맘속으로 들어왔다. 예수의 살과 피가 믿는 이들의 살과 피 속으로 들어온 것이다. 자기의 몸에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지닌 사람들의 모임이 교회이다. 세례는 그리스도 안에서 죽고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다시 살아나는 예식이다. 세례를 통해서 자기에게 집착하고 자기를 중심에 세우는 낡은 삶을 버리고 예수의 생명에 참여하며,
예수를 중심에 모신다.

세례와 성만찬이 의례적인 종교의식에 머물지 않으려면 말씀사건, 성령사건이 일어나야 한다. 말씀사건과 성령사건이 일어남으로써 비로소 회개와 갱신이 일어나고 죽고 다시 사는 일이 일어난다. 예수 안에서 죽고 다시 살아나면 예수의 삶을 살게 된다. 바울처럼 사나 죽으나 자기 속에 예수의 삶이 살아 있고 예수의 삶이 세상을 채우게 해야 한다. 그러므로 교회공동체는 예수의 삶을 사는 공동체이다.

죄인으로서 더불어 살기 때문에 교회 안에서 갈등과 분열이 일어나기 쉽다. 법적 구속력도 없고, 돈이나 권력으로 묶어 주는 끈도 없기 때문에 교회는 쉽게 갈라지고 깨질 수 있다. 교회의 구조와 체제가 너무 연약하기 때문에 목회자와 당회는 권위주의적 형태의 교회를 선호하기 쉽다. 권위주의적 목회와 교회운영이 쉽고 강력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예수의 말씀과 생명에 근거하지 않은 권위는 삶을 억압하고 위축시키며 신앙적 삶의 기쁨과 즐거움을 빼앗는다. 한 사람, 또는 몇 사람이 위에서 군림하고 지배하는 교회는 피라미드와 같은 형태가 되어, 무덤처럼 생기를 잃고 만다. 예수의 말씀과 생명은 자유롭고 활기차게 한다. 일곱 가지 빛깔이 서로 어우러져 아름다운 무지개를 이루듯이, 서로 다른 성격과 능력을 지닌 이들이 서로 어우러져 무지개처럼 하나의 그리스도의 몸을 이룬다.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려면 약함과 부드러움을 감수해야 한다. 부드럽고 연약하고 깨지기 쉬운 상태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생명의 줄로 하나로 이어져야 한다. 말씀과 생명의 줄로 이어져서 사랑과 평화, 자유와 평등의 아름다운 무지개를 펼쳐야 한다.

어떻게 서로 다른 성격과 능력을 지닌 이들이 어우러져 무지개처럼 아름다운 공동체를 이룰 수 있을까? 어떻게 서로 다른 죄인들이, 신분과 지위, 남성과 여성, 부자와 가난한 자, 젊은이와 노인이 함께 무지개 교회를 이룰 수 있을까? 이것은 인간적으로 보면 불가능한 기적이다. 본래 교회는 예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생명의 기적 위에 서 있다. 교회의 존재 자체가 기적이다. 생명 자체가 기적이다. 생명은 서로 다르고 다양하고 복잡하고 복합적이면서도 하나로 이어져 있고 서로 통하며 교감과 공명 속에 있다. 생명은 상처받을 수 있고 파괴되고 죽을 수 있다. 연약하고 깨지기 쉬운 생명이 서로 다르고, 다양하고 복잡하고 복합적으로 변화생성 발전하면서도 뭇 생명이 생태계 안에서 서로 하나로 이어져 있고 공명하고 공감한다. 교회가 생명체라면 서로 다르면서도 하나로 이어지고 공명하고 공감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죄인들의 공동체가 서로 다르면서도 공명하고 공감하는 무지개 공동체가 되려면, 서로가 서로에게 작은 제사장이 되어 서로 용서하고, 서로 위해서 기도하고, 사랑으로 돌보아 주어야 한다. 죄인들로서 서로 용서하고 위해 주는 공동체가 되려면 율법주의의 올무에서 벗어나야 한다. 율법주의는 개인적 자아에 매이게 함으로써 서로 위함과 더불어 있음을 불가능하게 한다. 율법주의는 자기와 남을 정죄하거나, 끝없는 자기정당화와 남에 대한 비판과 정죄에
빠진다. 율법주의에 빠지면 죄와 죽음의 힘에 매이며, 서로 용서하고 축복하고 돌보는 삶의 축제에서 멀어진다. 죄인들임에도 불구하고, 죄인들로서 무지개 공동체를 이루려면, 복음의 말씀과 성령의 감동, 믿음과 은총의 자유에 의지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교회는 관념이나 교리에 매이지 말고 몸의 감수성을 길러야 한다. 눈의 아픔을 귀가 알고 발의 아픔을 손이 알아야 하듯이, 교인들 사이에 서로의 아픔을 구체적으로 함께 나누며 참여하는 사귐이 있어야 한다. 머리의 관념, 가슴의 감정에만 매이지 말고 배(창자와 자궁)의 느낌과 생각을 존중해야 한다. 배의 느낌과 생각이 몸의 감수성이다. 배에서 느끼고 생각하는 것은 삶의 바닥에서 느끼고 생각하는 것이다. 배의 느낌과 생각은 남의 몸과 서로 통할 수 있다. 예수는 몸으로 느끼고 생각했기 때문에 사람들의 몸과 맘을 움직였고, 삶을 기적을 일으켰던 게 아닐까?!

4) 바닥에 뿌리 내리는 교회

생명력을 지닌 교회, 힘차게 자라나며 일하는 교회는 바닥에 뿌리를 깊게 내리는 교회이다. 모든 생명력은 아래에서 위로 올라오고, 모든 생명사건과 활동은 끄트머리, 일선현장에서 일어난다. 기계장치나 제도는 중앙에서 통제하고 조정해야 하지만 살아 있는 생명체는 중앙에서 통제하고 지배하면 이내 시들고 만다. 생명의 본질은 스스로 하는 것, 자발성, 자유이기 때문이다. 바닥과 일선의 교회들에서 활력이 없으면 그 교단은 생기를 잃고 무력해진다.

교단이 활력을 얻으려면 교단 안의 모든 기관들과 교회들이 자유롭게 연대하고 협력하며 사귐을 갖도록 해야 한다. 교단은 함께 공감할 수 있는 뚜렷한 비전을 제시하고 목회와 선교를 위한 바른 신학과 성서 지식을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 교단과 중앙기구의 일은 모든 교회와 인물들이 각자 지닌 능력과 자원과 열정을 온전히 다 쓸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교회의 기관과 기능들이 제대로 힘차게 움직일 수 있게 해야한다. 눈이 하는 일을 귀가 대신하려 해서도 안 되고, 손이 하는 일을 발이 하겠다고 나서도 안 되며, 머리가 하는 일을 가슴이 하겠다고 해서도 안 되고, 배가 하는 일을 머리가 하겠다고 나서도 안 된다. 있을 것이 있을 곳에 있게 하고, 있는 자리에서 맡은 일을 온전히 다 하게 해야 한다.

교회가 활력을 찾으려면, 경직되고 형식적인 교리와 제도와 법의 속박을 할 수 있는 대로 제거함으로써 교회들이 자유롭게 자유로운 형태와 모습으로 활동할 수 있게 해야 한다. 교회는 민들레 씨앗처럼 어느 곳이든 뿌리를 내리고 생명 교회를 일구어 낼 수 있어야 한다.

대형교회, 제도교회의 틀에서 자유로워짐으로써 다양한 모습의 교회가 나와야 하고 다양한 목회와 선교의 형태가 나와야 한다.

3. 생명교회의 형태와 구실

1) 생명 교회의 형태와 권위

교회는 목자가 먹이고 이끄는 목자와 양의 형태(가톨릭, 정교회), 교사가 가르치고 지도하는 스승(교사)과 제자(학생)의 형태(개신교), 회중의 공동체적 사귐의 형태(퀘이커, 회중교회)로 존재했다. 교회의 조직적인 체제와 관계를 중심으로 교회형태를 나눈 것이다.

목자와 양, 스승과 제자의 형태는 권위주의적 성격을 지니고 있지만 큰 교단과 큰 교회를 이루었다. 비교적 자유로운 회중의 사귐 형태는 소종파로 남았으나 퀘이커나 메노나이트파는 활발한 선교활동을 펼치고 있다.

이 세 가지 형태는 현실 교회에서 분명하게 구분되지 않고 뒤섞여 있다. 가톨릭 교회에서도 목자와 양의 형태가 두드러지지만 스승과 제자, 회중의 사귐 형태도 나타나며, 개신교의 주류를 이루는 루터파와 개혁파 그리고 감리교에도 설교자로서의 목사와 청중으로서 스승과 제자의 형태가 두드러지지만 목자와 양, 회중의 사귐 형태도 나타난다.

교회를 생명, 생명사건으로 보면 이 세 가지 형태가 다 요구된다. 교회를 자라나는 생명공동체로 볼 때, 먹여주고 길러주는 목자와 양의 관계가 있어야 하고, 가르치고 배우고 익히는 스승과 제자의 관계도 있어야 한다. 또한 성도의 사귐도 필요하다. 그러나 이 세 가지 형태의 교회론은 교회로 하여금 교회 안에 머물러 있게 한다. 교회 안의 관계와 조직에 관심이 머물러 있다. 또 교회 안에서 비민주적이기 쉽고 정태적으로 흐르기 쉽다.

교회가 정말 살아 있는 성숙한 생명공동체라면 교회는 세상 속에서 죽어 가는 생명을 살리는 일을 적극적으로 해야 한다. 예수가 세상의 약함과 질고를 짊어지고 아픔을 나눔으로써 세상을 치유하고 살리고 세상에 생명을 풍성하게 했듯이(마태8:17), 세상에서 어린양의 구실을 해야 한다. 본회퍼가 말하듯이 타자를 위한 존재로서 교회는 공생과 상생의 자리, 마당이 되어야 한다.

교회는 세상을 살리는 희생양과 종으로서 권위주의와 비민주성을 버리고 민주적이고 겸허한 자세와 관계를 형성해야 한다. 목자와 양의 관계로 교회를 구성한다고 해도 목회자 홀로 목자의 구실을 독점하지 않고, 평신도들 가운데 작은 목자들을 많이 세워서 목자의 구실을 감당하게 해야 한다. 또한 스승의 자리를 목회자 홀로 독점하지 않고 작은 교사, 스승들을 세워서 스승의 사역을 감당하게 한다. 더 나아가서 실질적인 협동목회까지 나갈 수 있어야 한
다. 행정, 교육 담당 목사를 부목사로 두는 정도가 아니라 각 부서가 독립적으로 움직이게 하는 공동의 사역을 할 수도 있다. 교회의 형태와 존재방식은 새로운 시도와 실험들이 끊임없이 이루어질 것이고 새로운 형식의 교회가 모색될 것이다.

그러나 교회는 부와 권력, 법적 강제력을 갖진 못한 공동체로서 매우 취약하다. 교회는 생명 외적인 힘이나 장치에 의존하지 않고 생명 자체, 생명활동 그 자체에 의존하고 있다. 삶에 호소하고 삶을 움직임으로써 교회는 스스로의 힘과 권위를 세운다.

그러므로 교회의 권위와 힘은 사랑과 일의 지혜, 말씀과 영의 권위밖에 없다. 돈과 권력에 의한 강제력을 지닌 권위는 교회의 참된 권위를 손상시키고 교회의 본질을 파괴한다. 교회는 예수의 생명체로서의 본질에 맞게 나눔과 섬김의 권위, 말씀과 영의 권위, 지혜의 권위를 세워야 한다.

교회는 세상적인 힘을 갖지 않은 약한 공동체이기 때문에, 짓밟고 파괴하는 세력 앞에 연약하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서 교인들과 목회자는 서로를 비우고 낮아짐으로써 교회의 권위를 스스로 세워가야 한다. 교회의 권위는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이다. 교회의 가운데를 예수 그리스도에게 비워 드림으로써 교회는 힘있게 설 수 있다. 가운데를 비움으로써 가운데가 생긴다. 교회에서 서로 가운데를 차지하려고 하면 교회는 생명력을 잃고 경직되며 노쇠해진다.
당회원들과 중요한 제직들이 스스로를 가볍게 여기고, 자기의 생각이나 주장을 자유롭게 접을 수 있을 때, 교회의 중심은 든든히 세워지고 교회는 활력을 얻는다.


2) 생명교회의 구실: 세상을 살리는 어린양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존재하는 교회는 목자와 양, 스승과 제자, 성도의 사귐으로만 머물 수 없다. 교회 안에만 머물지 않고 세상 죄를 진 어린양으로서 세상을 살린 예수 그리스도처럼 세상의 죄와 죽음의 현실 속으로 들어가서 세상을 살려야 한다. 어린 양 예수처럼 세상 한 가운데서 죄와 허물, 더러움과 치욕을 스스로 감당하고 밝고 따뜻한 생명의 나라를 열어야 한다.

어린양 예수는 스스로 희생하고 스스로를 녹이고 비움으로써 죄인들이 공생과 상생의 삶을 살게 한다. 죄인들끼리 직접 부딪치면 갈등과 대립이 일어나기 마련이다. 그러나 예수의 생명과 말씀이 생화학작용을 일으켜 서로를 녹여 주면, 죄인들도 서로 사랑하고 서로 하나가 될 수 있다.

생명교회는 자신과 남을 정죄함으로써 서로를 죄와 죽음에로 이끄는 율법주의를 벗어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죽고 함께 살아남으로써 더불어 살고 서로 살리는 생명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교회는 생명을 살리고 돌보며 치유하는 자리가 되고 삶의 축제마당이 되며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증거하고 드러내는 곳이 되어야 한다. 예배, 교육, 심방, 친교를 통해서 예수의 치유하고 살리는 생명을 증거하고 드러내야 한다.


(1) 생명 교회는 더불어 있는 교회이다. 상처받고 죽어 가는 자, 버림받고 절망하는 자와 더불어 있음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더불어 있음을 증거하고 드러낸다. 홀로 버림받은 이에게 더불어 있음은 은총이고 축복이며 복음이다. 더불어 있음으로 생명의 위로를 주고 생명의 불씨를 살려낸다.


(2) 생명 교회는 서로 살리는 교회이다. 교회는 서로 위해 있고 서로를 살린다. 네가 삶으로 내가 사는 상생의 삶을 체험하고 확인한다. '나'를 살리기 위해 십자가에 죽은 예수는 나를 살리기 위해 죽음으로써 영원한 부활생명을 얻었다. 교회는 네가 삶으로 내가 산다는 생명의 진리를 익히고 실현하는 마당이다.


(3) 생명 교회는 치유하는 교회이다. 함께 울고 함께 웃음으로써, 질고와 연약함을 나누어짐으로써 교회는 영과 육의 질병들과 상처들을 치유한다. 예수의 생명 안에서 한 생명이고 한 생명이면 서로 생명기운을 나눌 수 있고 상처와 질병을 치유할 수 있다. 절망, 좌절, 원망, 저주에서 벗어나 믿음으로 축복하고 축복 받으며 편안히 죽는 것도 충만한 생명의 치유이다. 교회의 삶은 서로가 서로에게 치유를 주는 삶이 되어야 한다.

(4) 생명 교회는 삶의 축제마당이다. 웃음과 울음은 삶의 순수한 표현이다. 웃음과 울음을 잃은 사람은 삶의 근원성과 본래성을 잃은 것이다. 잘 웃고 울게 하자. 삶의 축제는 웃음과 울음으로 표현된다. 교회 공동체는 예수의 부활생명을 기리고 축하하는 잔치마당이다.


(5) 생명 교회는 축복하고 격려하는 교회이다. 용서받은 죄인으로서 서로를 축하하고 위로하고 힘이 된다. 영적 축복만이 아니라 물질적 축복과 몸의 건강을 기원해 주는 교회여야 한다. 참으로 생명을 사랑하고 돌보는 교회라면 당연히 교인들의 삶이 잘 되고 복 받기를 바래야 한다.

(6) 생명교회는 죽고 다시 사는 교회, 늘 새로워지는 교회이다. 교회에서 교인들의 삶이 새롭게 정비되고 힘을 얻을 수 있어야 한다. 예수와 함께 죽고 부활생명으로 힘차게 솟구치는 교회여야 한다.

4. 세상적 삶의 중심과 일치로서의 교회

1) 세상적 삶의 중심으로서의 교회

'더불어 있음'과 '서로 위함'의 삶을 살고 그 길을 연 예수 그리스도는 참된 생명이고 참된 생명에 이르는 길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면 피조 세계의 삶, 국가와 문명의 삶은 근거와 목적, 방향과 중심을 잃고 무너진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된 공동체로서 예수의 생명을 증거하고 드러내며 누리는 공동체이다. 국가, 사회, 가정의 공동체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더불어 있음'과 '서로 위함', '공생'과 '상생'의 힘에 근거해서 존재한다. 더불어 살 수 없고, 서로 위해 살 수 없을 때, 모든 공동체는 무너진다. 가정, 사회, 국가, 인류 공동체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주어진 공생과 상생의 힘에 의지해서 존속한다. 그러므로 교회는 세
상 공동체의 목적과 근거와 힘을 지니고 있다.

모든 삶의 목적은 더불어 힘있고 아름답게 사는 것이다. 그것이 창조자가 뭇 생명체에 준 삶의 목적이고 사명이다. 더불어 서로 위해 힘차게 아름답게 살 때 창조자의 뜻과 목적이 이루어진다. 그 때 창조자 하나님께 영광이 돌려진다. 온 인류, 온 피조세계가 정의와 평화, 자유와 사랑 안에서 활기차고 아름답게 사는 것이 삶의 최고목적이고 꿈이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 꿈과 목적을 이룰 힘과 사명을 지니고 있다.

그리스도와 함께 교회는 세상의 숨은 중심이다. 교회는 세상에서 가장 연약한 존재이면서 가장 존귀한 존재이다. 교회는 세상의 모든 제도와 기관과 기구들, 국제연합(UN), 국가, 대기업, 학교보다 소중하며 존귀하다. 교회는 산 위에 있는 동네로서 온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빛을 비춤으로써, 세상의 제도와 기관들이 본분을 다하게 해야 한다. 교회는 국가와 문명이 죽을 길에서 벗어나 살길로 가도록 예수의 생명 길을 드러내고 그 길로 앞서 가
야 한다.


2) 세상을 하나되게 하는 교회

그리스도 안에서 교회는 한 몸을 이룬 생명공동체이다. 참 생명은 하나이다. 생명은 사랑으로 사는데 사랑은 하나로 느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참 생명이고 참 사랑이기 때문에 모든 이가 그리스도 안에서는 하나이다.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임을 고백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에 온 것은 교회도 하나, 세상도 하나이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리스도 안에서 온 세상이 한 집이 된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라는 것은 획일적인 하나가 아니며, 어느 하나를 배제하고 억누른 하나가 아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라는 것은 온갖 다양한 꽃이 함께 활짝 피듯이, 사랑과 자유 속에서 서로 교감하고 공명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하나됨' 안에서 생명은 완성되고 해방된다. 이 하나됨은 다양성 속의 일치이며 서로 다름 속에서의 하나됨이고, 복잡하고 복합적인 합일이다.

한겨레의 정신적 원형질은 '한'이다. 한겨레는 한을 제 이름으로 삼았고, 절대자 신을 한님이라고 불렀다. 한은 '크고 하나임'이고 '밝고 환함'이다. 한겨레는 하나됨을 열망한다. 하나됨을 갈망하기 때문에 하나를 느끼지 못하면 하나를 느낄 수 있는 단위로 갈라진다. 한겨레가 쉽게 갈라지는 것처럼 보여도 역설적으로 갈라지는 것 자체가 하나됨을 열망하는 것의 다른 표현이다. 지역감정과 남북분단을 넘어 큰 하나됨을 기대하고 열망하고 있다. 분열과
갈등의 골이 깊은 만큼 하나됨의 열망도 크고 깊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갈등과 분열에 너무 익숙해 있다. 장로교단만 100개가 넘을 만큼 갈라지고 또 갈라졌다. 그리고 이른 바, 진보와 보수로 나뉘어 있다. 진보교회는 사회.역사의 현실에 헌신적이고 책임적으로 참여했으나 복음적 신앙의 활력을 잃는 경향이 있고, 보수교회는 복음적 신앙의 열심은 있으나 사회역사적 책임을 감당하지는 못했다.

오늘날 아시아 선교를 위해, 민족통일과 북한선교를 위해 한국교회는 크게 하나되어야 한다. 기독교신앙과 복음이 한국교회의 하나됨을 요구하고, 한겨레가 남북분단과 지역감정을 극복하고 하나되기를 열망하기 때문에 교회는 하나되어야 한다. 민족의 하나됨과 아시아 선교를 위해 한국교회가 하나로 될 때, 보수교회도 진보교회도 온전해지고 교회로서 제 구실을 하게 된다.

한국교회의 신앙은 보수 정통주의의 복음주의신앙, 진보교회의 책임적 행동신앙, 오순절 교회의 뜨거운 체험적 신앙으로 갈라지고 있다. 교회를 생명으로 보고, 신앙을 삶의 자리에서 본다면 세 가지 신앙은 하나로 통합될 수 있고 또 마땅히 통합되어야 한다.

복음적 신앙과 은총은 삶을 긍정하고 삶에 자유를 줄 것이고 책임적 행동신앙은 삶을 실현하고 성취하게 할 것이고, 뜨거운 체험적 신앙은 삶의 열정과 힘을 줄 것이다. 믿는 사람의 생각과 의식이 한쪽으로 치우치게 할뿐이지 믿는 사람과 교회의 삶 자체는 세 가지를 온전하게 요구한다.

예수와 바울의 삶을 보면 복음적인 자유와 책임적 행동과 뜨거운 체험적 신앙이 함께 있음을 알 수 있다. 한민족의 전통 종교적 삶과 신앙의 원리는 "하나를 잡아 셋을 포함하고"(執一含三), "셋이 만나 큰 하나로 돌아간다"(會三歸一)는 말로 나타난다. 셋이 어우러져 큰 하나를 이룬다는 원리는 삼위일체적 삶의 진리와 통할 수 있고, 복음적 신앙, 책임적 행동신앙, 뜨거운 체험신앙을 한 데 묶을 수 있는 원리가 된다.

하나이기를 열망하는 한겨레의 문화적 정신적 원형질을 물려받은 한국 그리스도인들은 교회의 신앙적 일치와 선교적 협력을 이룸으로써 민족통일과 지구촌 연대 그리고 아시아선교에 앞장 설 수 있다. 한국교회는 분단을 극복하고 한민족이 하나로 살 수 있는 지혜와 힘을 닦아내고, 지구화하는 세상에서 인류가 지역, 인종, 종교, 정치.경제의 갈등과 대결을 넘어서 평화롭게 사는 지혜와 힘을 닦아내야 한다.


5. 사이버 공간과 교회의 선교

유승원 교수에 따르면 인터넷 시대는 "극도로 분화된 세계 속에서 개별 컴퓨터로 개인화된 인간들이 인터넷이란 아나키적 언로의 관계망 속에서 무한대로 팽창하는 정보를 공유하여 이루는 가상 공동체(Virtual Community)를 경험하며 사는 시대이다." 이것은 "다른 영역의 삶이 인터넷 공동체에 의해 전적으로 대체된다는 뜻은 아니다. 그보다는 전통적 영역의 생활공간에 강력한 삶의 공간이 하나 더 추가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전통적 영역의 생활 공간은 새롭게 추가된 가상 공간의 영역에 의해 심각한 영향을 받는다."

21세기에 인터넷의 역동적이며 거대한 공간이 열릴 것이다. 이미 인터넷, 사이버 공간은 빠르고 무한한 정보의 바다, 역동적이고 종합적인 정보와 교류의 공간을 열어놓는다. 매혹적인 동영상과 아름다운 음악, 신속하고 무한히 자유로운 정보의 교류와 나눔은 무한한 가능성을 열어 놓는다. 인터넷의 동영상, 음악과 색채와 역동적인 화면은 매혹적이다.

그런가 하면 인터넷은 인간의 생명을 파괴하고 영혼을 오염시키는 나쁜 정보도 얼마든지 유통시키고 몸과 인격을 배제함으로써 인간의 삶을 상징과 숫자와 기호로 해체할 수 있다. 거짓과 폭력이 난무하고 음해하고 파괴하는 정보를 신속하게 많이 유통시킴으로써 인간의 존엄성을 유린하고 인간에 대한 신뢰와 예의를 짓밟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터넷 공간은 누구나 자유롭고 신속하게 많은 정보를 나누고 전함으로써 민주적이고 자유로운 공간을 창출할 수 있다. 그리고 갈수록 인터넷을 통해 교류하고 삶의 문제들을 처리하는 사람들이 늘어날 것이다. 인터넷은 교회 공동체를 해체하는 세력이 될 수 있는 동시에 선교의 황금어장이 될 수 있다.

이미 사이버 교회가 등장하고 사이버 교회론이 논의된다. 텔레비전을 통해 집에서 예배드리는 재택 교회의 등장도 예상된다. 앞으로 '사이버 교회'도 많이 나타나고 집에서 텔레비전의 예배를 보는 이들도 늘어날 것이다. 그러나 몸의 직접적인 참여가 없는 교회는 참 교회가 아니다. '사이버 교회'에서 교인들이 자신의 캐릭터를 만들어 놓고 그 캐릭터에게 세례를 주고 성만찬을 준다고 해도 그것은 몸과 영이 함께 죽고 사는 사건을 일으킬 수 없다. 거기서
는 몸과 맘을 주고받는 사귐을 나눌 수가 없다. 또한 안방에서 텔레비전을 통해서 웅장한 예배당에서 하는 훌륭한 성가대의 찬양을 들으며, 뛰어난 설교자의 설교를 듣는 것으로 예배를 대신하며 교회에 출석하지 않는 그리스도인들도 나올 것이다. 그런 그리스도인이 텔레비전에서 예배를 진행하는 설교자와 성가대에게 온라인으로 헌금을 바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으로서 양심적으로 살려고 애를 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사람이 어쩌면 훌륭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을는지는 모르지만 집에서 홀로 예배 드리는 것을 교회라고 할 수도 없고, 그런 사람을 교인이라고 할 수도 없을 것이다. 어떤 식으로든 몸을 배제한 사귐은 교회의 성도의 사귐이 아니다.

몸을 배제한 구원이 없듯이 몸을 배제한 사귐도 없다. 창조자 하나님, 성육신한 하나님, 십자가에 달려 죽고 몸으로 부활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몸 없는 사귐으로 만족할 수 없다. 인터넷에서는 흙과 몸이 없다. 인터넷을 통해서 몸을 살리고 돌보며 몸을 동영상으로 매혹적으로 표현할 수도 있다. 그러나 거기서는 생명의 씨앗이 싹트지 않고, 잡아 줄 손이 없고 끌어안을 몸이 없다. 인격과 마음과 몸이 거기에 표현될 수는 있지만 그것이 마음과 몸
그 자체는 아니다.

산 유기체로서 몸이 빠진 인터넷 공간에 교회 공동체가 설 수는 없다. 다만 그 공간으로 생명 교회의 기능과 활동이 연장 될 수 있다. 인터넷에서 새로운 사귐과 나눔과 봉사를 할 수 있으며, 영적 신앙적 깨달음을 나누고 서로를 돌볼 수도 있다. 갈수록 많은 사람들의 눈과 귀가 인터넷의 역동적이고 매력적인 공간으로 쏠릴 것이다. 사람들의 눈과 귀가 쏠리는 곳에서 복음을 전하지 않을 수 없으며, 성서적 믿음의 지식과 지혜와 깨달음을 나누지 않을 수 없다. 인터넷에서는 세계인들이 동시에 연결되고 접촉해서 힘과 지혜와 물질을 모을 수 있다. 크고 빠른 연결망을 통해 서로 하나되는 교회와 세상을 만들어 갈 수 있다.

마치는 말: 아시아 선교를 위해 일어나는 한국교회

아시아에서는 홀로 한국교회가 복음적 영성과 물질적 축복을 풍성하게 받았다. 조상들의 종교적 열성과 영성도 풍부하게 물려받았다. 오늘 한국교회가 분열된 부끄러운 모습을 드러내고 있지만 한국교회에는 영적, 물질적, 인적 자원이 적지 않다.

나는 오늘 한국교회가 부끄러운 모습과 행태를 떨쳐 버리고 아시아 선교를 위해 크게 일어나 서로 손을 잡는 길이 한국교회가 갱신되고 개혁되는 지름길이라고 생각한다. 지금 서로 옳고 그름을 따져서 회개하고 새롭게 될 수 있다면 마땅히 그렇게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될 것 같지가 않다.

오히려 눈을 밖으로 돌려서 곧 선교의 문이 열릴 북한동포들과 12억 중국인들에게 선교적 관심을 쏟고 선교의 사명을 깨닫고 선교의 준비를 하다 보면 물욕과 명예욕에 눈먼 교회 지도자들이 눈을 뜨고 새로운 신앙의 열정과 선교의 사명을 깨닫게 되지 않을까? 인도의 힌두교와 카스트 제도 밑에서 3,500년 동안 짐승보다 못한 대접을 받은 2억 명의 불가촉천민들(달릿)의 참혹한 삶을 보기만 하면 자신의 교회적 업적과 성취에 도취한 사람들이 아시아 선교의 열정과 사명감에 불타게 되지 않을까?

나는 1997년 12월에 보름 동안 인도에서 불가촉천민 신학자들과 활동가들을 만나서 대화를 나누면서 불가촉천민들의 참혹한 삶을 살펴보았다. 절대빈곤 속에서 체념과 좌절에 빠져 사는 이들에게는 선교의 손길이 얼마나 절실하게 요구되는지를 느낄 수 있었다. 한국교회 속에 예수의 생명이 살아 있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적 생명과 공동체적 사귐을 갈구하는 굶주린 2천 만 북한동포들과 12억 중국인들과 2억 불가촉천민들의 부르짖음과 호소를 외면하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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