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무엇이든 › [칼럼니스트No.999]느림의 미학

이규섭 | 2004.05.24 15:02:50 | 메뉴 건너뛰기 쓰기
2004년 5월 15일

이규섭
http://columnist.org/kyoos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한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두고/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곽재구, ‘사평역에서’ 중에서>

사평역은 어디에도 없다. 시인의 상상이 사평역을 만들고, 사평역은 우리의 뇌리에 실제처럼 존재한다. 유리창마다 수수꽃같은 성애가 낀 간이역 대합실. 녹 쓴 난로에 톱밥을 넣으며 하염없이 완행열차를 기다리는 풍경이 눈에 선하다.

기차길 옆 마을에 살았던 필자는 기적소리를 들으면 고향 풍경이 떠오른다. 대합실과 플레트 홈은 기다림의 설렘과 헤어짐의 아쉬움이 교차하는 공간이다. 청회색 어둠을 가르며 달리는 새벽 통근열차를 타고 통학하던 시절의 기억이 톱밥난로의 불빛처럼 아른거린다.

개구리들의 합창이 자지러지는 짧은 봄밤이나, 잉잉거리며 우는 바람이 문풍지를 흔들던 긴 겨울밤,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밤 열차’가 기적을 울리며 지나가는 소리를 들으면 어딘가 훌쩍 떠나고 싶다는 충동에 사로잡히곤 했다. 그 때부터 역마살이 끼기 시작했는지 돌아다니는 버릇은 여전하다.

고교시절, 중앙선 영주역에서 강릉까지 12시간의 기차여행은 긴 탑승시간 만큼이나 기억에 오래 남아있다. 봉화-태백-삼척 등 백두대간 등줄기를 넘어가는 영동선은 지형도 험하지만, 완행열차는 석탄을 실은 화물차량 뒤에 서너 칸 객실을 달고 운행했다. 서울의 저탄장에 바닥이 보이면 나라가 시끄러울 정도로 연탄이주연료이던 그 때 그 시절이다.

장을 본 산골 아낙네들의 구수한 수다와 차창을 스쳐 가는 산내들의 풍경이 지루함을 덜어주었다. 심포리역에서 나한정역을 오르는 철길은 너무 가팔라 기차는 전진과 후진을 반복하며 숨을 가쁘게 몰아 쉬었다. 지금도 남아 있는 스위치백 구간이다.

서민들의 애환을 싣고 서민들의 발 구실을 해왔던 통일호 완행열차가 고속철도 개통으로 기적소리를 멈췄다. ‘더플 백’을 멘 신병들을 싣고 다녔던 야간열차도, 서울과 의정부를 오가며 추억과 낭만을 실어 나르던 교외선도 추억 속으로 사라졌다.

통일호는 6.25전쟁이 끝난 뒤 1955년 광복절에 맞춰 남북통일을 기원하며 등장했고, 시속 80㎞의 특급열차로 승객들의 인기를 한 몸에 받았다. 통일호의 명성은 1960년에 등장한 시속 95㎞의 무궁화호에 가려 시들해졌다. 1983년 새마을호의 출현으로 완행열차로 전락하더니 고속철도의 등장과 함께 역사 속으로 완전히 자취를 감췄다.

고속열차 바람에 통일호는 용도폐기 됐지만, 끈질긴 생명력으로 살아남은 곳이 정선선 ‘꼬마열차’다. 객차 한 칸 달랑 달고 증산역에서 구절리역까지 정선 아라리 가락 따라 산골짜기를 하루 3회 왕복한다.

정선선을 운행하던 마지막 비둘기호가 조락의 슬픔처럼 사라진 것은 2000년 11월 어느 날, 사라지는 것을 기억 속에 담아두려 비둘기호 열차에 올랐다. 마주보고 앉는 초록 융단의 좌석이 설치된 낡은 객차. 한겨울이면 한가운데 시커먼 석탄난로를 피워 난방을 할 만큼 허름했지만 통학하던 학생들의 해맑은 웃음소리와 정선장을 오가던 할머니의 깊은 주름살이 살가웠다.

산골 주민들의 발구실 명분과 답사여행 붐을 타고 통일호로 이름이 바뀌어 운행해 오던 꼬마열차는 고속철도 등장으로 ‘통근열차’라는 어쭙잖은 이름으로 바뀌었으나 역사의 뒤편으로 밀려나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다.

전국을 반나절로 이어주는 ‘꿈의 철도’ 고속철은 시속 300㎞를 상징하듯 빠르게 생활의 변화를 가져다 줄 것이다. 고속철은 앞으로 시베리아?중국을 거쳐 유럽으로 이어지는 새로운 철의 실크로드 구상을 위한 출발점이 될 것이라는 기대감도 있지만, 느린 것들은 푸대접받고 날 쌘 것들만 대접받는 것 같아 씁쓸하다.

어느 시인은 ‘죽도록 그리우면 기차를 타라’고 했지만, 완행열차 차창을 스치는 풍경을 느긋하게 바라보며 그리움을 반추할 여유마저 사라졌다. 속도가 가치를 창출하는 시대에 우리의 삶도 속도경쟁에 휘말릴 수밖에 없게 됐다.

요즘 유럽인들 사이에 삶의 속도를 늦추자는 ‘다운시프트족(Downshift?느림보족)’이 늘고있다. ‘슬로 푸드(Slow food)’다 ‘슬로 라이프(Slow life)’다 해서 금전적 수입과 사회적 지위에 구속되지 않고 인생을 느긋하게 즐기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추세다. ‘빨리빨리’로 대변되는 우리들의 삶의 양식에도 ‘느림의 미학’이 아쉽다.

- CEO Report 2004.0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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