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무엇이든 › 자아를 버리는 거룩한 용기

5101 | 2004.03.08 12:33:00 | 메뉴 건너뛰기 쓰기
자아를 버리는 거룩한 용기

 이지선 자매의 이야기를 모르는 분은 없으실것입니다.
화상으로 흉칙하게 일그러진 자신의 얼굴을 처음
거울을 통해 비춰보았을때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나는 새로운 나에게 인사를 했다.지선아 안녕
옛날의 나도 이지선이고 지금의 나도 이지선이다.
나는 다시 거울속에 있는 낯선 나에게 인사를 했다.
지선아 사랑해..."
 이것은 아무도 할수없는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수있는 한사람에게 부어진 용기의 행위입니다.
전혀 받아들일수 없는 새로운 자기를
받아들일수 있음은 진정한 용기입니다.
 신앙의 길로 접어들어 얼마간 지나다 보면
자아의 문제와 맞닥뜨리게 됩니다.
하나님의 거룩하고 흠이 없는 성결하심에
우리의 자아는 대적이되고 걸림돌이 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내가 날마다 죽노라고 이 자아의
싸움에 대하여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시대의 가장 큰 용기는
자아를 버리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주님을 따른다고 고백하는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사실 자기 의지와 뜻을 많이 버리고
지금까지 따라왔을것입니다.
그러나 자아의 문제는 얼마간의 내뜻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에 굴복시키는 정도의 문제가 아닙니다.
세상에서도 얼마든지 목적을 위해서
자기 뜻을 굴복시키는 일은 있기 때문입니다.
 자아를 버린다는 것은 지금까지 살아온
“나”와 이별하는 존재의 문제입니다.
이것은 사랑하는 부모나 가족을 삶의 저편너머로
보내야하는 고통과 슬픔을 능가하는것입니다.
사랑하는 가족와의 이생에서의 이별의 슬픔이
크나큰 고통이 되듯이 많은 세월 내안에 살고있었던
내 자아와의 이별도 말할수 없는 고통을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이지선 자매가 거울에 비친 어찌보면
괴물과도 같은 외적인 자기자신을 받아들이고
옛날의 아름다웠던 자신과 이별하는 일처럼
자아를 버리는 일은 상당한 용기가 필요합니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나”를 가장 사랑하기에
죽음의 저편으로 나를 날마다 넘기우는 일은
용기있는 그리스도인들만이 할수있는것입니다.
 구원받은 신자일지라도 옛 자아를 그대로
가지고 사는경우가 많을것입니다.
자아를 날마다 죽음의 저편너머로 장사지내는 고통없이
행복하게만 산다는것도 사실 문제가 있는것입니다.
육신을 입고 있는 이유로 어느사람도
진리위에서 한결같이 바위같을순 없으니까요.
억지로 버릴려고 해도 버려지는것도 아닐것입니다.
위대한 이 용기야 말로 하나님께서 그분께 향한 신실한
영혼에게 빛으로 비쳐주실 때 가능할것입니다.
 용기는 사랑의 행위입니다.
사랑하는 부모는
자식을 위하여 목숨도 내놓을수 있습니다.
자아를 버릴 수 있는 이 거룩한 용기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시작됩니다.
신앙의 어떤 행위를 시도하기 이전에
하나님을 사랑하기를 힘써야 할것입니다.
신앙의 어떤 행위를 많이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얼마나 사랑하는가가 중요한 일입니다.
 늘 그분의 은혜를 느끼며
그 은혜가 너무 감사하고 감사해서 살아갈 때
오랫동안 정들고 길들었던 “나”를 보고서
“안 녕”이라고 인사할 수 있는 용기를 덧입게 될것입니다.
 지선자매가 지금의 자신에게 부어진
그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옛날모습과 결코
바꾸고 싶지 않다고 자신있게 고백한것처럼
떠나 보낼때에만 진정으로 우리는 “나”를
사랑할수있게 될것입니다.
비로소 새로운 “나”와 만나게 될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만들어 주신
아름다운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나”이기에
이전모습이 아무리 훌륭했다할지라도
결코 바꾸고 싶지 않은 사랑스러운 “나”인것입니다.
그 새로운 “나”에게 날마다 “사랑해”라고 인사하며
오늘도 진정한 행복가운에 살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2004.3.4  의의 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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