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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막8:22-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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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허태수 목사 |
참고 : | 춘천성암교회 http://sungamch.net |
예수님과 함께하는 기적
막8:22-26
2010.1.10
프란츠 파농(Frantz Fanon)은 그의 책 [검은 피부, 흰 가면]이라는 책에서, 식민지 원주민이 그들을 지배하는 자들에 대하여 느끼는 열등감과 부러움, 그리고 그들과 같이 되려고 하는 갈망을 잘 분석하였습니다. 이 책에서 그가 가장 먼저 주목하는 것은 식민지 원주민에게 나타나는 언어의 문제입니다.
식민지 원주민은 자기들의 말을 쓰는 것을 창피하게 여기고 오히려 식민 지배국의 말을 쓰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깁니다. 이를테면 프랑스의 식민지인 서인도제도의 흑인은 프랑스어를 자기의 모국어처럼 유창하게 하면 할수록 그만큼 더 백인에 가까워진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모국어인 끄레올 말을 사용하는 것을 촌티 나는 것으로 여기며, "프랑스 말도 못해?"하는 경멸조의 말을 듣지 않으려고 온갖 노력을 다합니다. 프랑스에 도착한 흑인은, 흑인은 R음을 잘 발음하지 못한다는 믿음을 깨뜨리려고, 필사적으로 발음 연습을 할 뿐만 아니라 필요 이상으로 R음을 강조하여 발음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언어는 사람에게서 단순한 의사를 전달하는 도구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폴 발레리(Paul Valery)라는 언어학자는 언어를 가리켜 '육체에 깃든 신'이라고 까지 했습니다. 식민지배 때문이건 외국 문화의 침범 때문이건 자기의 말을 잃어버리는 사람은 동시에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의 이스라엘은 로마의 식민지배아래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언어인 히브리어는 주로 종교 문학의 언어로 사용되었습니다. 학자들의 것이었죠. 그리고 일상생활을 하는 데는 주로 아람어를 사용하였습니다. 아람어는 히브리어와 마찬가지로 북서 지방의 셈어족에 속합니다. 그러나 헬레니즘 시대 초기부터 식민지배국의 말인 헬라어가 행정 언어로 사용되기 시작했습니다. 아람어가 있기는 했지만, 헬라어가 일상 회화와 사업에서 점점 더 많이 사용되었습니다. 헬라어의 영향력이 커진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로마의 식민지배 정책에 따라 팔레스타인을 포함한 동부의 여러 속주에 헬라 도시들이 많이 건설된 때문입니다. 그 도시들은 헬라어와 헬라문화를 퍼뜨리는 전진 기지였습니다. 다른 하나는, 파농이 분석한 바와 같이, 식민지배국의 언어를 배워서 그들의 문화를 받아들이고 그들에게 인정을 받으려고 하는 식민지 사람들의 열망 때문입니다. 팔레스틴에 거주하던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 지방에 새로 건설된 헬라 도시들을 통해서 헬라 문화를 받아 들였습니다. 그들에게 헬라 문화는 새롭게 다가온 세계적인 문화였습니다. 그 문화권 안에서 그들의 신앙을 인정받기 위해서라도 그들은 헬라어를 말하고 쓰는 법을 익혀야 했습니다.
따라서 유대인의 책들은 헬라어로 쓰여 지기 시작했고, 아람어와 히브리어로 기록된 글들은 헬라어로 번역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팔레스틴의 주민들 가운데서 헬라오를 능숙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은 교육을 받은 소수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과 그를 따르는 사람들은 그러면 어떤 언어를 썼을까요? 그렇습니다. 아람어입니다. 그들은 교육을 많이 받지도 못했고, 학자도 아니었습니다. 거의가 낮은 계층의 사람들이었습니다. 당연히 예수님의 말씀도,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도 아람어로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습니다. 그런데 그걸 전해 받은 성서기록자들은 복음서를 쓸 때 헬라어로 썼습니다. 이미 헬라어가 그 당시 가장 큰 영향력 가운데 들어섰기 때문입니다. 점점 아람어는 밀려서 삶의 뒤안길에 처박히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그의 모국어인 아람어로 우리에게 전해지 지 않고 이스라엘 나라를 지배하던 침략국의 말인 헬라어로 기록되고 전해졌다는 사실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삼국유사를 기록한 일연에게 삼국유사를 우리말로 하라고 했으면 쉽고 이해하기 좋았겠어요. 그런데 우리가 글이 없으니까 한문으로 써 놓았잖아요. 아마 한문으로 쓸 수 없는 이야기들은 그냥 버려졌을 거 아닙니까? 성서의 언어에서도 이런 안타까움이 있는 겁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다행스럽게도 마가복음에는 예수님이 하셨던 아람어 말씀 몇 마디가 헬라어 표기로 보존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달리다굼. 5:41], [에바다. 7:34], [엘로이 엘로이 레마 사박다니. 15:34]입니다. 첫 번째 것은 회당장 야이로의 딸에게 "소녀야, 내가 네게 말한다. 일어나거라"하는 뜻으로 하셨던 말씀입니다. 다음 것은 귀 먹고 말 더듬는 사람에게 "열리라"는 뜻으로 말씀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기 직전에 외치시는 말씀입니다. 회당장의 딸 이야기는 다른 복음서에도 나오긴 하지만 '달리다굼'이라는 말은 없습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아예 그런 명령은 등장하지 않습니다(9:25). 누가복음에서는 그 말 대신에 "아기야 일어나거라"하는 헬라어 번역문만이 나옵니다. "엘로이 엘로이..."하는 예수님의 외침은, 누가와 요한에서는 나오지 않습니다. 마태에서만 아람어가아니라 히브리어로 "엘리 엘리...."로 되어 있습니다(27:46). 귀 먹고 말 더듬는 사람을 고쳐 준 이야기는 다른 복음서에는 나오지 않습니다. 다른 복음서 기자들은 사용하지 않는 아람어를 마가 기자가 사용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달리다굼'은, 죽어가는 아이를 보고 예수님께 달려왔다가 돌아가기도 전에 아이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그 아이의 부모 앞에서, 기적이라도 일어나지 않으면 안 될 그런 절망스러운 상황에서 예수님이 외친 말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어떻게 그 정황의 이 외침을 문자로 기록할 수 있겠습니까? 그 말은 오히려 그 부모의 고통에 동참하여 함께 아파하고 원통해 하면서 쏟아내는 절규인 것입니다. 그것은 차라리 '엉엉-'하는 울음이고, '아-'하는 고통의 탄식인 것입니다.
귀 먹고 말 더듬는 사람을 고친 이야기(막7:31-37)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예수님은 어떤 초자연적인 능력을 가져서 말씀만으로, 리모콘 누르듯이 기적을 일으킨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기적에는 명령과 결과만 있지 어떤 과정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에서는 예수님의 치료행위에 대해서 구체적인 묘사가 등장합니다. 예수님은 그를 사람들이 없는 한적한 곳으로 따로 데려가서, 손가락을 그의 귀에 넣고, 침을 뱉어서, 그의 혀에 손을 대었습니다(33).
이와 유사한 일은, 벳새다의 눈먼 사람을 고칠 때에도 그의 두 눈에 침을 바르고 손을 얹었지요(막8:23). 나면서부터 눈먼 사람을 고칠 때도 땅에 침을 뱉어서 그것으로 진흙을 개어 그의 눈에 바르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하였습니다(9:6-7). 로마의 역사가 타키투스의 수에토니우스도 베시파시아누스 황제가 눈먼 사람의 눈 거플에 침을 발라서 눈을 뜨게 한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치유와 그들의 치유가 다른 것은, 예수님은 사람이 없는 한적한 장소에서 그렇게 했다는 것이고, 황제는 여러 사람이 보는 앞에서 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만으로도 초자연적인 능력을 행할 수 있는 분이라고 믿는 사람들은 예수님이 이렇게 민간요법 같은 행위를 하는 것에 대해서 마땅하게 생각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은 어떤 기적을 일으키기까지 예수님이 쏟는 온갖 열정과 정성을 간과하는데서 생기는 편겨입니다. 그렇다고 명령을 내린다고 즉시 낫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의 기적은 단계적으로 이루어지기도 합니다. 벳새다의 눈먼 사람을 고치는 이야기를 보세요. 처음에 예수님이 침을 바르고 묻습니다. "무엇이 보이느냐?" 그랬더니 그가 말합니다. "사람들이 보입니다. 나무같은 것들이 걸어 다니는 것이 보입니다."(막8:24) 단번에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의 눈에 다시 손을 얹습니다. 그제 서야 똑똑히 보게 되었습니다. 지난주에 보았던 실로암 기적 사건도 얼마나 지극 정성을 들여서 그로 하여금 보게 하였는지요.
'에바다'라는 탄식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 보아야 합니다. 귀가 먹은데다가 말까지 제대로 못하는 그는 식민지배 아래서 억눌려 살아야 했습니다. 아니, 당시의 이스라엘의 가난하고 못배운 모든 사람을 상징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이때 예수님의 심정은 애굽에서 종살이 하며 고통중에 신음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는 하나님의 심정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의 귀에 손가락을 넣고, 침을 뱉어서 그것을 그의 혀에 대는 것은 그의 아픔, 괴로움, 고통을 나누는 것이고, 그래서 꼭 고쳐주고 싶은 간절한 그리고 정성스러운 모습인 것입니다. 그리고는 하늘을 우러러 탄식을 합니다(막7:34). 여기서 탄식은 '신음'과 같습니다. 그의 안타까운 처지를 함께 아파하면서 신음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신음 끝에 외치신 말이 바로 '에바다'입니다. 그 말을 어떻게 헬라어로 번역할 있었겠어요?
'엘로이 엘로이 레마 사박다니"는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의 처절한 심정을 그대로 드러낸 절규입니다. 가끔 우리는 생각하기를, '하나님의 아들이 이렇게 나약한 모습을 갖고 있다니' 합니다. 그렇습니다, 나약한 모습입니다. 모두 다 도망가고 혼자 남겨진 상황에서 그 외마디를 토해놓고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나 그 말 한마디가 예수님의 삶 전체와 그의 진실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 한마디에서 우리는, 그가 얼마 후에 다시 살 것을 미리 알고서 십자가 위에서 연극을 한 게 아니라, 실제로 가장 큰 고통 속에서 십자가를 지고 죽음을 받아 들였음을 알 수 있지 않습니까? 바로 그 십자가, 바로 그 처절하게 버림받은 죽음에서 부활의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엘리 엘리...'하는 그 절망과 탄식과 고통의 절규가 곧 부활을 생생하게 해 준다는 말입니다.
이런 탄식과, 신음과 절규는 예수님의 삶 속에서만 우러난 것입니다. 그러니 그 삶 속에서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런 말을 어떻게 문자적으로 번역할 수 있겠습니까? 로마의 식민지배 아래에서 신음하는 사람들의 아픔에 동참하면서 외치는 예수님의 탄식을, 그 식민지배국의 군대에 체포되어 사형을 당하는 예수님의 마지막 말을 어떻게 그 식민지배국의 말로 옮길 수 있겠느냐 말입니다. 마치 안중근 의사가 죽으면서 일본말로 '조선이여 영원하라'고 하는 것과 같지 않습니까? 나중에 어쩔 수 없이 헬라어로 복음서를 적고는 있지만, 그래도 예수님의 그 처절한 탄식과 신음, 그 마지막 말만이라도 예수님의 모국어로 쓰고 싶었던 것이 마가 기자의 심정이 아니었겠어요?
헬라어로 도저히 옮길 수 없는 그 말을 하신 다음에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죽은 아이가 일어났으며, 귀 먹고 말을 더듬던 아이의 귀가 열리고 혀가 풀렸습니다. 치욕의 십자가가 영광의 십자가로 바뀌었습니다. 예수님이 쏟아낸 그 말, 아니 아람어 단어 몇 개가 사건을 일으키고 기적을 일으키는 능력이 되었습니다. 기적은 고통받는 그들과 하나가 되어 함께 아파하는데서 일어났습니다. 그런 하나 됨은 그들이 사용하는 것과 같은 말을 사용할 때만 가능합니다. 미국사람과 하나가 되려면 영어를 해야 하듯이 말입니다. 그들의 탄식과 한숨을, 소망과 기쁨을 그대로 뿜어낼 수 있는 모국어를 사용하지 않고는 그들을 치유할 수도, 기적을 일으킬 수도 없습니다. 예수님의 기적은 바로 언어, 그들이 사용하는 그 말에 있었던 것입니다.
마가 기자는 이러한 점을 알았기 때문에 예수님의 모국어 몇 개를 그대로 두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는, 그저 아람어 단어 몇 개를 장식물로 남겨 두려는 게 아니라, 로마의 식민지배 아래서 짓눌려 병들고 신음하는 사람들과 하나가 되어, 같은 말을 하고, 함께 아파하면서 기적을 일으키신 예수님의 삶을 드러내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의 거친 숨소리와 입김이 서린 말을 살려내는 게 이 시대 우리의 삶이기도 합니다. 그때 '예수님과 함께'하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
막8:22-26
2010.1.10
프란츠 파농(Frantz Fanon)은 그의 책 [검은 피부, 흰 가면]이라는 책에서, 식민지 원주민이 그들을 지배하는 자들에 대하여 느끼는 열등감과 부러움, 그리고 그들과 같이 되려고 하는 갈망을 잘 분석하였습니다. 이 책에서 그가 가장 먼저 주목하는 것은 식민지 원주민에게 나타나는 언어의 문제입니다.
식민지 원주민은 자기들의 말을 쓰는 것을 창피하게 여기고 오히려 식민 지배국의 말을 쓰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깁니다. 이를테면 프랑스의 식민지인 서인도제도의 흑인은 프랑스어를 자기의 모국어처럼 유창하게 하면 할수록 그만큼 더 백인에 가까워진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모국어인 끄레올 말을 사용하는 것을 촌티 나는 것으로 여기며, "프랑스 말도 못해?"하는 경멸조의 말을 듣지 않으려고 온갖 노력을 다합니다. 프랑스에 도착한 흑인은, 흑인은 R음을 잘 발음하지 못한다는 믿음을 깨뜨리려고, 필사적으로 발음 연습을 할 뿐만 아니라 필요 이상으로 R음을 강조하여 발음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언어는 사람에게서 단순한 의사를 전달하는 도구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폴 발레리(Paul Valery)라는 언어학자는 언어를 가리켜 '육체에 깃든 신'이라고 까지 했습니다. 식민지배 때문이건 외국 문화의 침범 때문이건 자기의 말을 잃어버리는 사람은 동시에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의 이스라엘은 로마의 식민지배아래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언어인 히브리어는 주로 종교 문학의 언어로 사용되었습니다. 학자들의 것이었죠. 그리고 일상생활을 하는 데는 주로 아람어를 사용하였습니다. 아람어는 히브리어와 마찬가지로 북서 지방의 셈어족에 속합니다. 그러나 헬레니즘 시대 초기부터 식민지배국의 말인 헬라어가 행정 언어로 사용되기 시작했습니다. 아람어가 있기는 했지만, 헬라어가 일상 회화와 사업에서 점점 더 많이 사용되었습니다. 헬라어의 영향력이 커진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로마의 식민지배 정책에 따라 팔레스타인을 포함한 동부의 여러 속주에 헬라 도시들이 많이 건설된 때문입니다. 그 도시들은 헬라어와 헬라문화를 퍼뜨리는 전진 기지였습니다. 다른 하나는, 파농이 분석한 바와 같이, 식민지배국의 언어를 배워서 그들의 문화를 받아들이고 그들에게 인정을 받으려고 하는 식민지 사람들의 열망 때문입니다. 팔레스틴에 거주하던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 지방에 새로 건설된 헬라 도시들을 통해서 헬라 문화를 받아 들였습니다. 그들에게 헬라 문화는 새롭게 다가온 세계적인 문화였습니다. 그 문화권 안에서 그들의 신앙을 인정받기 위해서라도 그들은 헬라어를 말하고 쓰는 법을 익혀야 했습니다.
따라서 유대인의 책들은 헬라어로 쓰여 지기 시작했고, 아람어와 히브리어로 기록된 글들은 헬라어로 번역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팔레스틴의 주민들 가운데서 헬라오를 능숙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은 교육을 받은 소수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과 그를 따르는 사람들은 그러면 어떤 언어를 썼을까요? 그렇습니다. 아람어입니다. 그들은 교육을 많이 받지도 못했고, 학자도 아니었습니다. 거의가 낮은 계층의 사람들이었습니다. 당연히 예수님의 말씀도,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도 아람어로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습니다. 그런데 그걸 전해 받은 성서기록자들은 복음서를 쓸 때 헬라어로 썼습니다. 이미 헬라어가 그 당시 가장 큰 영향력 가운데 들어섰기 때문입니다. 점점 아람어는 밀려서 삶의 뒤안길에 처박히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그의 모국어인 아람어로 우리에게 전해지 지 않고 이스라엘 나라를 지배하던 침략국의 말인 헬라어로 기록되고 전해졌다는 사실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삼국유사를 기록한 일연에게 삼국유사를 우리말로 하라고 했으면 쉽고 이해하기 좋았겠어요. 그런데 우리가 글이 없으니까 한문으로 써 놓았잖아요. 아마 한문으로 쓸 수 없는 이야기들은 그냥 버려졌을 거 아닙니까? 성서의 언어에서도 이런 안타까움이 있는 겁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다행스럽게도 마가복음에는 예수님이 하셨던 아람어 말씀 몇 마디가 헬라어 표기로 보존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달리다굼. 5:41], [에바다. 7:34], [엘로이 엘로이 레마 사박다니. 15:34]입니다. 첫 번째 것은 회당장 야이로의 딸에게 "소녀야, 내가 네게 말한다. 일어나거라"하는 뜻으로 하셨던 말씀입니다. 다음 것은 귀 먹고 말 더듬는 사람에게 "열리라"는 뜻으로 말씀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기 직전에 외치시는 말씀입니다. 회당장의 딸 이야기는 다른 복음서에도 나오긴 하지만 '달리다굼'이라는 말은 없습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아예 그런 명령은 등장하지 않습니다(9:25). 누가복음에서는 그 말 대신에 "아기야 일어나거라"하는 헬라어 번역문만이 나옵니다. "엘로이 엘로이..."하는 예수님의 외침은, 누가와 요한에서는 나오지 않습니다. 마태에서만 아람어가아니라 히브리어로 "엘리 엘리...."로 되어 있습니다(27:46). 귀 먹고 말 더듬는 사람을 고쳐 준 이야기는 다른 복음서에는 나오지 않습니다. 다른 복음서 기자들은 사용하지 않는 아람어를 마가 기자가 사용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달리다굼'은, 죽어가는 아이를 보고 예수님께 달려왔다가 돌아가기도 전에 아이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그 아이의 부모 앞에서, 기적이라도 일어나지 않으면 안 될 그런 절망스러운 상황에서 예수님이 외친 말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어떻게 그 정황의 이 외침을 문자로 기록할 수 있겠습니까? 그 말은 오히려 그 부모의 고통에 동참하여 함께 아파하고 원통해 하면서 쏟아내는 절규인 것입니다. 그것은 차라리 '엉엉-'하는 울음이고, '아-'하는 고통의 탄식인 것입니다.
귀 먹고 말 더듬는 사람을 고친 이야기(막7:31-37)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예수님은 어떤 초자연적인 능력을 가져서 말씀만으로, 리모콘 누르듯이 기적을 일으킨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기적에는 명령과 결과만 있지 어떤 과정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에서는 예수님의 치료행위에 대해서 구체적인 묘사가 등장합니다. 예수님은 그를 사람들이 없는 한적한 곳으로 따로 데려가서, 손가락을 그의 귀에 넣고, 침을 뱉어서, 그의 혀에 손을 대었습니다(33).
이와 유사한 일은, 벳새다의 눈먼 사람을 고칠 때에도 그의 두 눈에 침을 바르고 손을 얹었지요(막8:23). 나면서부터 눈먼 사람을 고칠 때도 땅에 침을 뱉어서 그것으로 진흙을 개어 그의 눈에 바르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하였습니다(9:6-7). 로마의 역사가 타키투스의 수에토니우스도 베시파시아누스 황제가 눈먼 사람의 눈 거플에 침을 발라서 눈을 뜨게 한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치유와 그들의 치유가 다른 것은, 예수님은 사람이 없는 한적한 장소에서 그렇게 했다는 것이고, 황제는 여러 사람이 보는 앞에서 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만으로도 초자연적인 능력을 행할 수 있는 분이라고 믿는 사람들은 예수님이 이렇게 민간요법 같은 행위를 하는 것에 대해서 마땅하게 생각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은 어떤 기적을 일으키기까지 예수님이 쏟는 온갖 열정과 정성을 간과하는데서 생기는 편겨입니다. 그렇다고 명령을 내린다고 즉시 낫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의 기적은 단계적으로 이루어지기도 합니다. 벳새다의 눈먼 사람을 고치는 이야기를 보세요. 처음에 예수님이 침을 바르고 묻습니다. "무엇이 보이느냐?" 그랬더니 그가 말합니다. "사람들이 보입니다. 나무같은 것들이 걸어 다니는 것이 보입니다."(막8:24) 단번에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의 눈에 다시 손을 얹습니다. 그제 서야 똑똑히 보게 되었습니다. 지난주에 보았던 실로암 기적 사건도 얼마나 지극 정성을 들여서 그로 하여금 보게 하였는지요.
'에바다'라는 탄식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 보아야 합니다. 귀가 먹은데다가 말까지 제대로 못하는 그는 식민지배 아래서 억눌려 살아야 했습니다. 아니, 당시의 이스라엘의 가난하고 못배운 모든 사람을 상징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이때 예수님의 심정은 애굽에서 종살이 하며 고통중에 신음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는 하나님의 심정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의 귀에 손가락을 넣고, 침을 뱉어서 그것을 그의 혀에 대는 것은 그의 아픔, 괴로움, 고통을 나누는 것이고, 그래서 꼭 고쳐주고 싶은 간절한 그리고 정성스러운 모습인 것입니다. 그리고는 하늘을 우러러 탄식을 합니다(막7:34). 여기서 탄식은 '신음'과 같습니다. 그의 안타까운 처지를 함께 아파하면서 신음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신음 끝에 외치신 말이 바로 '에바다'입니다. 그 말을 어떻게 헬라어로 번역할 있었겠어요?
'엘로이 엘로이 레마 사박다니"는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의 처절한 심정을 그대로 드러낸 절규입니다. 가끔 우리는 생각하기를, '하나님의 아들이 이렇게 나약한 모습을 갖고 있다니' 합니다. 그렇습니다, 나약한 모습입니다. 모두 다 도망가고 혼자 남겨진 상황에서 그 외마디를 토해놓고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나 그 말 한마디가 예수님의 삶 전체와 그의 진실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 한마디에서 우리는, 그가 얼마 후에 다시 살 것을 미리 알고서 십자가 위에서 연극을 한 게 아니라, 실제로 가장 큰 고통 속에서 십자가를 지고 죽음을 받아 들였음을 알 수 있지 않습니까? 바로 그 십자가, 바로 그 처절하게 버림받은 죽음에서 부활의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엘리 엘리...'하는 그 절망과 탄식과 고통의 절규가 곧 부활을 생생하게 해 준다는 말입니다.
이런 탄식과, 신음과 절규는 예수님의 삶 속에서만 우러난 것입니다. 그러니 그 삶 속에서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런 말을 어떻게 문자적으로 번역할 수 있겠습니까? 로마의 식민지배 아래에서 신음하는 사람들의 아픔에 동참하면서 외치는 예수님의 탄식을, 그 식민지배국의 군대에 체포되어 사형을 당하는 예수님의 마지막 말을 어떻게 그 식민지배국의 말로 옮길 수 있겠느냐 말입니다. 마치 안중근 의사가 죽으면서 일본말로 '조선이여 영원하라'고 하는 것과 같지 않습니까? 나중에 어쩔 수 없이 헬라어로 복음서를 적고는 있지만, 그래도 예수님의 그 처절한 탄식과 신음, 그 마지막 말만이라도 예수님의 모국어로 쓰고 싶었던 것이 마가 기자의 심정이 아니었겠어요?
헬라어로 도저히 옮길 수 없는 그 말을 하신 다음에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죽은 아이가 일어났으며, 귀 먹고 말을 더듬던 아이의 귀가 열리고 혀가 풀렸습니다. 치욕의 십자가가 영광의 십자가로 바뀌었습니다. 예수님이 쏟아낸 그 말, 아니 아람어 단어 몇 개가 사건을 일으키고 기적을 일으키는 능력이 되었습니다. 기적은 고통받는 그들과 하나가 되어 함께 아파하는데서 일어났습니다. 그런 하나 됨은 그들이 사용하는 것과 같은 말을 사용할 때만 가능합니다. 미국사람과 하나가 되려면 영어를 해야 하듯이 말입니다. 그들의 탄식과 한숨을, 소망과 기쁨을 그대로 뿜어낼 수 있는 모국어를 사용하지 않고는 그들을 치유할 수도, 기적을 일으킬 수도 없습니다. 예수님의 기적은 바로 언어, 그들이 사용하는 그 말에 있었던 것입니다.
마가 기자는 이러한 점을 알았기 때문에 예수님의 모국어 몇 개를 그대로 두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는, 그저 아람어 단어 몇 개를 장식물로 남겨 두려는 게 아니라, 로마의 식민지배 아래서 짓눌려 병들고 신음하는 사람들과 하나가 되어, 같은 말을 하고, 함께 아파하면서 기적을 일으키신 예수님의 삶을 드러내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의 거친 숨소리와 입김이 서린 말을 살려내는 게 이 시대 우리의 삶이기도 합니다. 그때 '예수님과 함께'하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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