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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막5:24-3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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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허태수 목사 |
참고 : | 춘천성암교회 http://sungamch.net |
당신은 예수님과 통하는 사이입니까?
막5:24-34
2010.1.17
오늘 설교의 제목에 대해서 다른 설명이 필요 있겠습니까? 만약 이 물음에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다면 그는 행복한 신앙인입니다. 그러나 만약, '잘 모르겠다'든지, '아닐지도 모른다'든지, '뭐가 통하는 건가?'하고 의문을 갖는 사람이라면, 그는 아마도 행복한 사람은 아니라고 말해도 틀리지 않을 것입니다. 서로 통하지 않는 사람하고 같은 자리에 있거나 함께 산다는 것만큼 불행한 일이 없음을 우리가 너무나 잘 알기 때문입니다.
12년 동안이나, 쉴 새 없이 하혈 하는 병을 앓아온 여인이 있었습니다. 여러 의사에게 보이면서, 고생은 이루 말할 수 없었고, 재산도 다 탕진했습니다. 그렇다고 병이 차도가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되레 더 나빠져 있었습니다. 이 여인에 대한 이와 같은 설명은 최악의 불행한 상황을 말해주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내거나 병을 고쳐주는 이야기 서두에는 대개 귀신이나 병마에 시달리는 사람의 비참한 처지가 적나라하게 묘사되곤 합니다만, 이 여인의 경우는 그 어느 경우보다도 더 비참합니다. 사람이 하루 이틀 피를 쏟아도 쓰러집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12년 동이나 그랬다고 하니, 그 고통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게다가 병을 고쳐보려고 있는 재산을 다 바쳤는데도 상태는 더 나빠졌다는 것입니다. 절망도 끝이 있다면, 이 여인의 처지는 이제 절망의 끝에 이른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기적 이야기의 특징은 바로 이와 같이 절망적인 상황에 처한 사람들이 그대로 망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놀랍게도 다시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이 여인도 그 마지막 순간에 그 지긋지긋한 병마로부터 풀려나는 기적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것은 초월적인 능력을 가진 예수님이 그 가엾은 여인에게 특별한 혜택을 베푼 것입니까? 아닙니다. 성서 어디를 보아도 예수님이 그런 초월적인 능력을 베푸는 장면은 없습니다. 이를테면, 안수를 한다든가, 그 여인의 손을 잡아 일으킨다든가 하는 장면은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에게 자신이 무엇을 해 주었다고 말하는 대신에, 오히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하면서 그 여인을 격려해 주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물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이 여인에게 말했다는 그 [믿음]이 무엇인가를 말입니다. 어떤 믿음이기에 그와 같은 기적을 일으키는 것입니까? 그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사도신경을 암송하면서 고백하는 바와 같이, '하나님을 믿습니다...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성령님을 믿습니다'하고 고백하는 그런 믿음을 말하는 것일까요? 그것도 믿음이기는 하지만, 이 여인에게 예수님이 말씀 하시는 그 [믿음]하고는 틀리는 것입니다. 그런 고백적인 믿음은 예수님 돌아가시고 난 한참 뒤에 생긴 것입니다. 이 기적 이야기에서 이 여인의 믿음을 알 수 있는 구절은 이것입니다.
"이 여인이 예수의 소문을 듣고서, 뒤에서 무리 가운데로 끼어 들어와서는,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었다. 이 여인은 '내가 그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나을 터인데!'하고 말했던 것이다"(27-28).
이 여인이 '뒤에서' 왔고 또 '무리가운데서' 왔다는 상황 설명은 이 여인의 처지가 세상에 떳떳하지 못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하혈하는 여인과 가까이 하는 것을 부정 탄다고 생각을 했고(레15:25), 여인의 부정한 하혈은 죄의 상징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러니 그가 어떻게 얼굴을 들고 세상에서 살 수 있었겠어요. 그러나 여인은 이제 그것 때문에 예수님을 만나는 일을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이제는 죽기 아니면 살기의 양자택일만이 남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여인의 마지막 희망은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었습니다. 이 여인은 이 마지막 희망을 붙잡으려고 밀고 당기는 무리들 틈에 끼어들었던 것입니다. 그리고는 손을 뻗어 그의 몸에, 옷에 손을 대었던 것입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그녀를 가로막는 모든 장애물을 극복하고 마침내 예수에게 나아온, 예수님의 옷을 만진 그 행동을 보고 예수님은 '믿음'이라고 했던 것입니다.
성서의 이 시점에서는 믿음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교회가 조직화되면서 점차 믿음에 대한 이해가 변화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믿음하면,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는 고백을 하는 것이 믿음이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이 여인의 '믿음'도 바로 '예수님이 그리스도임을 믿는 믿음'이라고 말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 믿음,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믿는 믿음이 기적을 일으켰다는 말을 하려는 것인데,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마가복음보다 후대에 기록된 마태복음을 비교해 보면 금 새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본문과 같은 내용을 마태복음은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그 여인은 속으로 '내가 그의 옷자락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나을 터인데!'하고 생각했던 것이다. 예수께서 돌아서서 그 여자를 보시고 '기운을 내어라,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하고 말씀하셨다. 바로 그 때에 그 여자가 나았다"(마9:21-22).
얼핏 보기에는 마가복음의 내용과 다른 게 없는 것 같지만 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먼저 마태복음 21절을 마가복음 28절과 비교해 보면, 마가복음에는 없는 '속으로'라는 문구가 마태복음에는 있습니다. 이 짧은 문구가 있고 없음에 따라 전체의 내용이 달라집니다. 마가복음은 여인이 실제로 내 뱉은 말이 되지만, 마태복음은 혼자 속으로 생각만 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마가복음의 그 말은 곧 행동이지만, 마태복음의 그 '생각'을 행동이라고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마가복음에서 말하는 [믿음]은 그 여인이 말하는 그 행동입니다. 그것은 그저 말만하고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손을 뻗어서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는 행동과 이어져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태복음에서는 그런 행동은 없고 그저 속으로 한 생각을 [믿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내면적으로 또는 이론적으로 무엇을 믿는 것이 되는 셈입니다. 그 믿음은 예수의 능력에 대한 믿음일 수도 있고 예수님이 그리스도임을 믿는 믿음일수도 있습니다. 좀 더 쉽게 말씀드려 볼까요?
마가복음에서 예수님이 말하는 믿음은, 절망을 극복할 수 있다는 적극적인 확신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나 마태복음에서는 행동과는 무관한, 마음속 생각 또는 내면적인 믿음에 불과합니다.
그러면 여인은 언제 병이 나았습니까? 여인이 어려운 상황을 뚫고 나가서 예수님의 몸에 손을 대자마자 나앗습니까? 아니면 마태복음에서처럼 속으로 '날거야'하고 있는데 예수님이 그걸 아시고 돌아서서 그 여자를 보시고 '기운을 내어라,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하고 말씀하신 그 직후에 그 여자의 병이 나았습니까? 마가복음에는 옷에 손을 대자마자 나았다는 것이고, 마태복음에는 예수님이 말씀을 하신 뒤에야 나았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의 기적은 주도권이 예수님에게 있습니다. 그러나 마가복음의 이 기적에는 여인의 주도적인 행동이 작용을 합니다. 여인이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는 그 순간, 예수님도 모르게 어떤 능력이 예수님에게서 여인에게로 이동을 했습니다. 그 순간 예수님도 자기에게서 능력이 나간 줄은 알지만 그게 누구에게 왜 나간 줄은 알지 못했으므로, "누가 내 옷에 손을 댔지?"하고 제자들에게 묻고 있는 것입니다. 그 여인의 적극적인 믿음과 행동이 예수님의 능력을 예수님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빼내고 있는 것 같은 모습이 아닙니까?
마가복음에 나오는 여인의 적극적이고 주도적인 믿음에 대한 증언은 계속됩니다. 마가복음에는 여인이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댄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마태는 '옷'이 아니라 '옷자락'이라고 적고 있습니다. 이 여인이 밀고 당기는 무리들 속에서 살짝 예수님의 옷에만 손을 대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몸에 손을 댄 것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묻습니다. "누가 내 옷에 손을 댔느냐?" 그랬더니 제자들이 뭐라고 대답을 했는지 아십니까? "무리가 선생님을 에워싸고 떠밀고 있는 판에 누가 나에게 손을 대었냐고 물으십니까?" 여기서 예수님은 분명히 '내 옷에'라고 말씀을 하셨는데, 제자들은 그 말을 듣는 즉시 '나에게'라는 의미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누가 자신의 몸에 손을 댔느냐고 물은 것이지, 옷에 대해서는 생각지 않고 있었다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그러면 왜 마태는 다르게 쓰고 있는 것입니까? 하혈하는 여인이 마땅치 않았던 것입니다. 마태로부터 이 이야기를 들을 교우들을 생각했던 것입니다. 부정한 여인이 감히 예수님의 몸에 손을 먼저 댔다는 것이나, 그렇게 부정하여 손가락질 당하는 여인의 버릇없는 행동을 '믿음'으로 간주할 수 없었던 것이고, 그렇게 해서 그 여인의 병이 고쳐졌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싫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여인은 그대로 부정한 채로 남겨두고, 거룩하고 능력이 많은 예수님의 자비에 의해서 일방적으로 병을 고친 것으로 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마가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은 그럴 의도가 전혀 없으십니다. 모든 과정과 결과를 여인의 행동에 두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마가복음의 특징입니다.
예수님은 누가 자기 몸에 손을 댄 것을 알아차리고서, 그렇게 한 사람이 누군가 알아보려고 둘러보았습니다. 그 여인은 자기에게 일어난 일을 스스로 알고 있으므로 두려워하여, 떨면서, 예수님에게로 나아와 엎드려 사실대로 다 말하였습니다(32-33). 병을 고친 기쁨은 둘째고 그는 사회규범상 돌에 맞아 죽을 짓을 했기 때문입니다. 병을 고쳐주신 예수님을 높이려는 경외심 때문에 그런 게 아닙니다. 그 여인은 자신의 병이 나은 것을 '몸'으로 알았다고 했습니다(29). 이야기의 결국은 이렇습니다.
12년 동안이나 하혈을 하며 고생하던 여인은 온갖 사회적인 장벽을 무릎 쓰고 예수님의 몸에 손을 댔습니다. 그리고 그의 몸이 달라진 것을 금 새 알았습니다. 자신의 몸으로 예수님의 몸을 만지자 예수님의 몸에서 능력이 빠져 나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알았고 그 즉시 여인의 몸은 병으로부터 풀려났습니다. 자, 뭡니까? 옷자락을 만져서 된 일이 아니라 몸을 만졌기 때문에 생긴 일입니다. 다시 말해 그 여인의 경험은 곧 '몸의 경험'인 것입니다. '몸의 경험'이라 함은 다시 '만남의 경험'인 것입니다. 예수님과 여인이 서로 '통하는 사이'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히 몸과 몸이 부딪히는, 자연스런 만남이 아닙니다. "무리가 선생님을 에워싸고 떠밀고 있는데, 누가 나에게 손을 대었냐고 물으십니까?"(31)하는 제자들의 말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예수님을 떠밀면서 예수님의 몸에 손을 댄 사람은 그 여인 말고도 무수히 많았습니다. 그런데 그 많은 사람 가운데서 어떤 한 사람의 손이 자기에게 닿는 것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은 분명 특별한 일인 것입니다, 이 사실에 우리가 주목을 해야 합니다. 그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밀면서 그의 몸에 손을 대었는데, 어찌하여 예수님의 능력은 그 여인에게만 전해졌다는 말입니까? 2천 년 전 절망의 맨 끝에 병든 몸을 끌고 와서 무리 속에서 어렵게 손을 뻗어 예수님의 몸에 손을 댄 그 여인과, 수많은 사람들의 부대낌 속에서도 유독 그 여인의 그 행위만 몸으로 느낄 수 있었던, 여인과 예수님의 사이에 도대체 무엇이 작용했다는 말입니까? 무엇이 두 사람 사이에 통하고 있었냐 말입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안심하고 가거라. 그리고 이 병에서 벗어나서 건강하여라"(34). 예수님은 그것이 믿음이라고 말하고 계십니다. 여인과 예수만이 통했던 그것은 바로 여인의 그와 같은 행동 즉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그 많은 사람 가운데서 오직 그 여자에게로만 능력이 나가고 그 여자만이 병을 고침 받는 기적을 맛보는 것은, 그것을 그 여인이 몸으로 알고 예수님도 몸으로 느낀 것은, 그래서 두 사람 사이에 무엇인가가 통한 것은, 오직 그 행동하는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은 아무런 문제도 없는 사람이 또는 더 많은 욕심을 구하기 위해 머릿속으로만, 입으로만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믿는 믿음과는 다른 것입니다. 그것은 더 할 수 없이 비참한 고통 가운데서, 그래도 좌절하지 않고 다시 일어서는 믿음입니다. 예수님의 옷에 손이 닿기만 해도 나을 거라는 말하고 그대로 행동하는 믿음입니다. 말할 뿐만 아니라 병든 몸으로 군중들을 비집고 들어가 손을 뻗쳐서 예수님의 몸에 손을 대는, 행동하는 믿음입니다. 이제 예수님이 마지막 희망인 줄 알고 최후의 마지막 힘을 다하는 믿음인 것입니다. 그 믿음이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유독 여인과 예수님이 통하게 된 통로였습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이 믿음이 없이는 누구도 예수와 통하지 못합니다. 예수와 통하려면 이래야 합니다. 말로는 안 됩니다. 이론으로도 되지 않고, 햇수로 되거나, 직분으로 예수님하고 통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딸아"하고 부르는 예수님의 음성에서 그리고 이어지는 그 다정한 위로의 말에서 그 여인에 대한 예수님의 한없이 뜨거운 사랑을 느낄 수 있지요. 예수님의 입김이 서린 그 사랑의 말을 들을 수 있는 길은 오직 행동하는 믿음뿐입니다.
누가 어디에 있든지 핸드폰으로 서로 통화할 수 있는 세상입니다. 그러나 반드시 핸드폰을 가진 수만큼 사람들이 더 행복해지고, 쓸쓸함을 이기고, 만남의 기쁨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수없이 고백을 하면서도 왠지 공허함을 느끼고 뭔가 더 화려한 것이나 물질적인 보장을 향한 갈구를 멈추지 못하는 것도 그런 이치와 같습니다. 수없이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고백하고 사도신경과 주기도문을 암송하면서도 늘 확신 없이 목말라 하는 이유도 동일합니다. 예수님과 통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여인을 보세요. 우리처럼 수 십 년 동안 밤낮으로 그리스도 고백을 하지 않았는데도 예수님으로부터 단박에,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하는 애정 어린 칭찬과 격려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자신에게 물어야 합니다. 나는 과연 예수님과 통하는 사인가? *
막5:24-34
2010.1.17
오늘 설교의 제목에 대해서 다른 설명이 필요 있겠습니까? 만약 이 물음에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다면 그는 행복한 신앙인입니다. 그러나 만약, '잘 모르겠다'든지, '아닐지도 모른다'든지, '뭐가 통하는 건가?'하고 의문을 갖는 사람이라면, 그는 아마도 행복한 사람은 아니라고 말해도 틀리지 않을 것입니다. 서로 통하지 않는 사람하고 같은 자리에 있거나 함께 산다는 것만큼 불행한 일이 없음을 우리가 너무나 잘 알기 때문입니다.
12년 동안이나, 쉴 새 없이 하혈 하는 병을 앓아온 여인이 있었습니다. 여러 의사에게 보이면서, 고생은 이루 말할 수 없었고, 재산도 다 탕진했습니다. 그렇다고 병이 차도가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되레 더 나빠져 있었습니다. 이 여인에 대한 이와 같은 설명은 최악의 불행한 상황을 말해주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내거나 병을 고쳐주는 이야기 서두에는 대개 귀신이나 병마에 시달리는 사람의 비참한 처지가 적나라하게 묘사되곤 합니다만, 이 여인의 경우는 그 어느 경우보다도 더 비참합니다. 사람이 하루 이틀 피를 쏟아도 쓰러집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12년 동이나 그랬다고 하니, 그 고통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게다가 병을 고쳐보려고 있는 재산을 다 바쳤는데도 상태는 더 나빠졌다는 것입니다. 절망도 끝이 있다면, 이 여인의 처지는 이제 절망의 끝에 이른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기적 이야기의 특징은 바로 이와 같이 절망적인 상황에 처한 사람들이 그대로 망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놀랍게도 다시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이 여인도 그 마지막 순간에 그 지긋지긋한 병마로부터 풀려나는 기적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것은 초월적인 능력을 가진 예수님이 그 가엾은 여인에게 특별한 혜택을 베푼 것입니까? 아닙니다. 성서 어디를 보아도 예수님이 그런 초월적인 능력을 베푸는 장면은 없습니다. 이를테면, 안수를 한다든가, 그 여인의 손을 잡아 일으킨다든가 하는 장면은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에게 자신이 무엇을 해 주었다고 말하는 대신에, 오히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하면서 그 여인을 격려해 주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물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이 여인에게 말했다는 그 [믿음]이 무엇인가를 말입니다. 어떤 믿음이기에 그와 같은 기적을 일으키는 것입니까? 그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사도신경을 암송하면서 고백하는 바와 같이, '하나님을 믿습니다...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성령님을 믿습니다'하고 고백하는 그런 믿음을 말하는 것일까요? 그것도 믿음이기는 하지만, 이 여인에게 예수님이 말씀 하시는 그 [믿음]하고는 틀리는 것입니다. 그런 고백적인 믿음은 예수님 돌아가시고 난 한참 뒤에 생긴 것입니다. 이 기적 이야기에서 이 여인의 믿음을 알 수 있는 구절은 이것입니다.
"이 여인이 예수의 소문을 듣고서, 뒤에서 무리 가운데로 끼어 들어와서는,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었다. 이 여인은 '내가 그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나을 터인데!'하고 말했던 것이다"(27-28).
이 여인이 '뒤에서' 왔고 또 '무리가운데서' 왔다는 상황 설명은 이 여인의 처지가 세상에 떳떳하지 못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하혈하는 여인과 가까이 하는 것을 부정 탄다고 생각을 했고(레15:25), 여인의 부정한 하혈은 죄의 상징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러니 그가 어떻게 얼굴을 들고 세상에서 살 수 있었겠어요. 그러나 여인은 이제 그것 때문에 예수님을 만나는 일을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이제는 죽기 아니면 살기의 양자택일만이 남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여인의 마지막 희망은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었습니다. 이 여인은 이 마지막 희망을 붙잡으려고 밀고 당기는 무리들 틈에 끼어들었던 것입니다. 그리고는 손을 뻗어 그의 몸에, 옷에 손을 대었던 것입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그녀를 가로막는 모든 장애물을 극복하고 마침내 예수에게 나아온, 예수님의 옷을 만진 그 행동을 보고 예수님은 '믿음'이라고 했던 것입니다.
성서의 이 시점에서는 믿음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교회가 조직화되면서 점차 믿음에 대한 이해가 변화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믿음하면,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는 고백을 하는 것이 믿음이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이 여인의 '믿음'도 바로 '예수님이 그리스도임을 믿는 믿음'이라고 말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 믿음,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믿는 믿음이 기적을 일으켰다는 말을 하려는 것인데,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마가복음보다 후대에 기록된 마태복음을 비교해 보면 금 새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본문과 같은 내용을 마태복음은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그 여인은 속으로 '내가 그의 옷자락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나을 터인데!'하고 생각했던 것이다. 예수께서 돌아서서 그 여자를 보시고 '기운을 내어라,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하고 말씀하셨다. 바로 그 때에 그 여자가 나았다"(마9:21-22).
얼핏 보기에는 마가복음의 내용과 다른 게 없는 것 같지만 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먼저 마태복음 21절을 마가복음 28절과 비교해 보면, 마가복음에는 없는 '속으로'라는 문구가 마태복음에는 있습니다. 이 짧은 문구가 있고 없음에 따라 전체의 내용이 달라집니다. 마가복음은 여인이 실제로 내 뱉은 말이 되지만, 마태복음은 혼자 속으로 생각만 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마가복음의 그 말은 곧 행동이지만, 마태복음의 그 '생각'을 행동이라고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마가복음에서 말하는 [믿음]은 그 여인이 말하는 그 행동입니다. 그것은 그저 말만하고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손을 뻗어서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는 행동과 이어져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태복음에서는 그런 행동은 없고 그저 속으로 한 생각을 [믿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내면적으로 또는 이론적으로 무엇을 믿는 것이 되는 셈입니다. 그 믿음은 예수의 능력에 대한 믿음일 수도 있고 예수님이 그리스도임을 믿는 믿음일수도 있습니다. 좀 더 쉽게 말씀드려 볼까요?
마가복음에서 예수님이 말하는 믿음은, 절망을 극복할 수 있다는 적극적인 확신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나 마태복음에서는 행동과는 무관한, 마음속 생각 또는 내면적인 믿음에 불과합니다.
그러면 여인은 언제 병이 나았습니까? 여인이 어려운 상황을 뚫고 나가서 예수님의 몸에 손을 대자마자 나앗습니까? 아니면 마태복음에서처럼 속으로 '날거야'하고 있는데 예수님이 그걸 아시고 돌아서서 그 여자를 보시고 '기운을 내어라,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하고 말씀하신 그 직후에 그 여자의 병이 나았습니까? 마가복음에는 옷에 손을 대자마자 나았다는 것이고, 마태복음에는 예수님이 말씀을 하신 뒤에야 나았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의 기적은 주도권이 예수님에게 있습니다. 그러나 마가복음의 이 기적에는 여인의 주도적인 행동이 작용을 합니다. 여인이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는 그 순간, 예수님도 모르게 어떤 능력이 예수님에게서 여인에게로 이동을 했습니다. 그 순간 예수님도 자기에게서 능력이 나간 줄은 알지만 그게 누구에게 왜 나간 줄은 알지 못했으므로, "누가 내 옷에 손을 댔지?"하고 제자들에게 묻고 있는 것입니다. 그 여인의 적극적인 믿음과 행동이 예수님의 능력을 예수님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빼내고 있는 것 같은 모습이 아닙니까?
마가복음에 나오는 여인의 적극적이고 주도적인 믿음에 대한 증언은 계속됩니다. 마가복음에는 여인이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댄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마태는 '옷'이 아니라 '옷자락'이라고 적고 있습니다. 이 여인이 밀고 당기는 무리들 속에서 살짝 예수님의 옷에만 손을 대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몸에 손을 댄 것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묻습니다. "누가 내 옷에 손을 댔느냐?" 그랬더니 제자들이 뭐라고 대답을 했는지 아십니까? "무리가 선생님을 에워싸고 떠밀고 있는 판에 누가 나에게 손을 대었냐고 물으십니까?" 여기서 예수님은 분명히 '내 옷에'라고 말씀을 하셨는데, 제자들은 그 말을 듣는 즉시 '나에게'라는 의미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누가 자신의 몸에 손을 댔느냐고 물은 것이지, 옷에 대해서는 생각지 않고 있었다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그러면 왜 마태는 다르게 쓰고 있는 것입니까? 하혈하는 여인이 마땅치 않았던 것입니다. 마태로부터 이 이야기를 들을 교우들을 생각했던 것입니다. 부정한 여인이 감히 예수님의 몸에 손을 먼저 댔다는 것이나, 그렇게 부정하여 손가락질 당하는 여인의 버릇없는 행동을 '믿음'으로 간주할 수 없었던 것이고, 그렇게 해서 그 여인의 병이 고쳐졌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싫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여인은 그대로 부정한 채로 남겨두고, 거룩하고 능력이 많은 예수님의 자비에 의해서 일방적으로 병을 고친 것으로 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마가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은 그럴 의도가 전혀 없으십니다. 모든 과정과 결과를 여인의 행동에 두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마가복음의 특징입니다.
예수님은 누가 자기 몸에 손을 댄 것을 알아차리고서, 그렇게 한 사람이 누군가 알아보려고 둘러보았습니다. 그 여인은 자기에게 일어난 일을 스스로 알고 있으므로 두려워하여, 떨면서, 예수님에게로 나아와 엎드려 사실대로 다 말하였습니다(32-33). 병을 고친 기쁨은 둘째고 그는 사회규범상 돌에 맞아 죽을 짓을 했기 때문입니다. 병을 고쳐주신 예수님을 높이려는 경외심 때문에 그런 게 아닙니다. 그 여인은 자신의 병이 나은 것을 '몸'으로 알았다고 했습니다(29). 이야기의 결국은 이렇습니다.
12년 동안이나 하혈을 하며 고생하던 여인은 온갖 사회적인 장벽을 무릎 쓰고 예수님의 몸에 손을 댔습니다. 그리고 그의 몸이 달라진 것을 금 새 알았습니다. 자신의 몸으로 예수님의 몸을 만지자 예수님의 몸에서 능력이 빠져 나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알았고 그 즉시 여인의 몸은 병으로부터 풀려났습니다. 자, 뭡니까? 옷자락을 만져서 된 일이 아니라 몸을 만졌기 때문에 생긴 일입니다. 다시 말해 그 여인의 경험은 곧 '몸의 경험'인 것입니다. '몸의 경험'이라 함은 다시 '만남의 경험'인 것입니다. 예수님과 여인이 서로 '통하는 사이'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히 몸과 몸이 부딪히는, 자연스런 만남이 아닙니다. "무리가 선생님을 에워싸고 떠밀고 있는데, 누가 나에게 손을 대었냐고 물으십니까?"(31)하는 제자들의 말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예수님을 떠밀면서 예수님의 몸에 손을 댄 사람은 그 여인 말고도 무수히 많았습니다. 그런데 그 많은 사람 가운데서 어떤 한 사람의 손이 자기에게 닿는 것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은 분명 특별한 일인 것입니다, 이 사실에 우리가 주목을 해야 합니다. 그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밀면서 그의 몸에 손을 대었는데, 어찌하여 예수님의 능력은 그 여인에게만 전해졌다는 말입니까? 2천 년 전 절망의 맨 끝에 병든 몸을 끌고 와서 무리 속에서 어렵게 손을 뻗어 예수님의 몸에 손을 댄 그 여인과, 수많은 사람들의 부대낌 속에서도 유독 그 여인의 그 행위만 몸으로 느낄 수 있었던, 여인과 예수님의 사이에 도대체 무엇이 작용했다는 말입니까? 무엇이 두 사람 사이에 통하고 있었냐 말입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안심하고 가거라. 그리고 이 병에서 벗어나서 건강하여라"(34). 예수님은 그것이 믿음이라고 말하고 계십니다. 여인과 예수만이 통했던 그것은 바로 여인의 그와 같은 행동 즉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그 많은 사람 가운데서 오직 그 여자에게로만 능력이 나가고 그 여자만이 병을 고침 받는 기적을 맛보는 것은, 그것을 그 여인이 몸으로 알고 예수님도 몸으로 느낀 것은, 그래서 두 사람 사이에 무엇인가가 통한 것은, 오직 그 행동하는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은 아무런 문제도 없는 사람이 또는 더 많은 욕심을 구하기 위해 머릿속으로만, 입으로만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믿는 믿음과는 다른 것입니다. 그것은 더 할 수 없이 비참한 고통 가운데서, 그래도 좌절하지 않고 다시 일어서는 믿음입니다. 예수님의 옷에 손이 닿기만 해도 나을 거라는 말하고 그대로 행동하는 믿음입니다. 말할 뿐만 아니라 병든 몸으로 군중들을 비집고 들어가 손을 뻗쳐서 예수님의 몸에 손을 대는, 행동하는 믿음입니다. 이제 예수님이 마지막 희망인 줄 알고 최후의 마지막 힘을 다하는 믿음인 것입니다. 그 믿음이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유독 여인과 예수님이 통하게 된 통로였습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이 믿음이 없이는 누구도 예수와 통하지 못합니다. 예수와 통하려면 이래야 합니다. 말로는 안 됩니다. 이론으로도 되지 않고, 햇수로 되거나, 직분으로 예수님하고 통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딸아"하고 부르는 예수님의 음성에서 그리고 이어지는 그 다정한 위로의 말에서 그 여인에 대한 예수님의 한없이 뜨거운 사랑을 느낄 수 있지요. 예수님의 입김이 서린 그 사랑의 말을 들을 수 있는 길은 오직 행동하는 믿음뿐입니다.
누가 어디에 있든지 핸드폰으로 서로 통화할 수 있는 세상입니다. 그러나 반드시 핸드폰을 가진 수만큼 사람들이 더 행복해지고, 쓸쓸함을 이기고, 만남의 기쁨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수없이 고백을 하면서도 왠지 공허함을 느끼고 뭔가 더 화려한 것이나 물질적인 보장을 향한 갈구를 멈추지 못하는 것도 그런 이치와 같습니다. 수없이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고백하고 사도신경과 주기도문을 암송하면서도 늘 확신 없이 목말라 하는 이유도 동일합니다. 예수님과 통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여인을 보세요. 우리처럼 수 십 년 동안 밤낮으로 그리스도 고백을 하지 않았는데도 예수님으로부터 단박에,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하는 애정 어린 칭찬과 격려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자신에게 물어야 합니다. 나는 과연 예수님과 통하는 사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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