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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막14:22-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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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이한규 목사 |
참고 : | 이한규 http://www.john316.or.kr |
고난주간(특) 축복과 저주는 자신이 결정합니다
< 성찬에 담긴 3대 의미 >
성찬에는 3가지 중요한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첫째, ‘은혜에 대한 감사의 의미’입니다. 성찬을 영어로 유카리스트(Eucharist)라고 하는데 그 말은 ‘감사’란 뜻입니다. 즉 성찬의 핵심 의미는 감사에 있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잔을 나눠주기 전에 먼저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23절). 그것은 감사의 우선성과 중요성을 말해줍니다. 감사는 축복 받은 후에 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감사 표현을 해야 진짜 축복이 주어집니다. 신앙생활의 기초는 먼저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둘째, ‘주님께 충성하는 서약의 의미’가 있습니다. 성찬은 주님과의 언약을 새롭게 하면서 십자가의 헌신을 다짐하는 충성 서약과도 같은 것입니다(24절). 가끔 십자가와 헌신을 설교하면 어떤 사람들은 이제까지 그렇게 많이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또 마음속에 감동을 느끼고 헌신하려고 합니다. 반면에 어떤 사람은 “부담이 된다.”고 하며 십자가를 피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십자가의 헌신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존재가 강 건너 불구경 하듯 부담 없이 신앙생활 하려는 모습은 결코 복된 모습이 아닙니다.
셋째, ‘성도간의 복된 교제의 의미’가 있습니다. 성찬은 성도들끼리 사랑의 교제를 하고 서로의 필요를 나누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그래서 성찬에 참여할 때마다 “어떻게 하면 형제와 더욱 평화롭게 지내기를 힘쓸까?”를 새롭게 다짐하는 계기로 삼아야 합니다. 성도의 최대 축복인 평화는 겸손한 마음으로 상대를 인정해주고 주님 안에서 하나 되기를 힘쓸 때 얻습니다(엡 4:3). 지금 교회 및 교단 간의 벽이 얼마나 높습니까? 개신교의 가장 큰 약점이 바로 그것입니다. 선교가 무엇입니까? 마음을 열고 벽을 낮추는 것이 선교입니다.
< 축복과 저주는 자신이 결정합니다 >
목회자들의 모임에 가면 초면에 대뜸 “어느 교단 소속이요?”라고 묻는 목회자들이 있습니다. 그런 언어가 듣는 상대방에게 얼마나 거만한 태도로 보이겠습니까? 처음 만나서 대뜸 “어느 대학 출신이요?”라고 물으면 좋게 보이겠습니까? 성도는 다리를 놓는 사람들이 되어야지 벽을 쌓는 사람들이 되면 안 됩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군자는 뜻이 안 맞아도 항상 화합하고 소인은 뜻을 같이하면서도 항상 불화한다.”
진짜 큰 사람은 작은 것 가지고 싸우지 않습니다. 다양성은 일치의 한 표현입니다. 보수파와 진보파는 서로 “나의 부족한 분야와 부분을 저들이 메워주고 있구나!”라고 서로 격려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하늘과 땅의 그 엄청난 차이까지 이어주려고 선교사의 마음을 가지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런 예수님의 큰마음과 큰 생각과 선교하는 마음을 가지고 사랑을 실천하며 사십시오.
주님은 산상수훈에서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는다.”고 말씀했습니다. 결국 가장 성공한 사람은 돈과 명예를 얻은 사람이 아니라 평화를 만드는 사람입니다. 아무리 지위가 높아지고 돈을 많이 벌어도 사방에 원수를 만들고 평화를 만들지 못한 사람은 실패한 사람입니다. 결국 성도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싸워서 이기는 것’이 아니라 ‘평화를 낳는 것’입니다.
물론 성도들의 의견이 모두 같을 필요는 없습니다. 의견은 달라도 됩니다. 의견이 다른 것 때문에 상처받지 말고 차이를 인정해주십시오. 예를 들어, 천년설에 대해서 전천년설, 후천년설, 무천년설이 있는데 그것 때문에 너무 싸울 필요 없습니다. 학설이 다르다고 천지가 개벽되는 것은 아닙니다. 본질이 같다면 학설의 불일치는 용납하고 다른 의견을 정중하게 표출하면 다른 의견을 말할 수 있는 자유를 주십시오.
어느 날, 성 프랜시스의 제자들이 물었습니다. “선생님, 어떻게 하면 선생님처럼 겸손해질 수 있습니까?” 프랜시스가 대답했습니다. “예수님을 한번만 진실로 쳐다보게나. 그러면 인간은 결코 교만할 수 없네.” 자랑과 시기가 넘치는 것은 예수님과 점차 멀어지는 증거이고 사랑과 용서가 넘치는 것은 예수님과 가까워지는 증거입니다. 누가 저주 받고 누가 축복 받습니까? 그것은 관상쟁이나 점쟁이가 결정하지 않고 자신이 결정합니다. 이웃을 짓밟으면 저주 받고 이웃을 섬겨주면 축복 받습니다.
남의 짐을 져주면 신기하게도 내 인생의 짐은 훨씬 가볍게 되고 남의 상처를 싸매주면 신기하게도 내 인생의 상처는 훨씬 줄어듭니다. 결국 기적을 추구하며 기적의 종을 찾고 기적 집회를 찾는 것보다 연약한 자를 찾아 사랑과 수고의 손길을 베푸는 것이 더욱 기적적인 삶의 주인공을 만듭니다. 물론 사랑만큼 정의도 중요하다는 사실을 항상 전제하며 사랑해야 합니다. 그처럼 공의를 바탕으로 펼쳐진 사랑은 반드시 큰 역사를 이끌어냅니다.
ⓒ 글 : 이한규http://www.john316.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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