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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막10:23-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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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허태수 목사 |
참고 : | 2010.6.26 성암교회 http://sungamch.net |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낙타
막 10: 23-26
눅 19: 1-10
예수 믿는 사람들의 주요 관심사는 구원이라 할 수 있습니다. 구원이라고 하면 대부분은 예수를 믿으면 죄 사함을 받아 사후에 영혼이 천당에 가는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교회에 열심히 나와야 하고, 기도를 열심히 해야 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물론 성서 공부도 열심히 하고 교회를 섬기는 일에 성의를 다 해야 합니다. 십일조와 감사헌금도 성의 껏 바쳐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구원도 얻을 뿐만 아니라 병을 고침 받는 은혜라든지, 사업이 잘된다거나, 자식들이 좋은 대학, 좋은 직장, 좋은 배필을 얻게 된다고 믿고 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의 교회를 유지하는 종교적인 근간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정말 그런 것들이 구원받은 표시이며, 또 구원 그 자체일요?
마가복음서 10장에 기록된 부자 청년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일반적으로 성도들이 추구하는 그런 것들이 정말 구원인 것 같지 않습니다. 이 부자 청년은 위에서 말한 모든 조건에 해당하는데도 불구하고, 예수님에게 '어떻게 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느냐'고 묻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율법을 잘 지켜왔습니다. 성실하게 성전에 예물도 바쳤습니다. 모든 면에 있어서 모범적으로 하나님을 섬긴 사람입니다. 그리고 남부럽지 않은 부자입니다. 일반적인 사고로 보면 틀림없이 구원을 받았고, 물질의 복까지 받은 사람입니다. 사람들은 그런 그를 부러워 하고 인정했을 것입니다. 요즘으로 치면, 교회 나가서 모든 게 잘 된, 축복 받은 사람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예수님에게 와서 어떻게 하면 구원을 얻을 것이냐고 물었다는 것입니다.
그 청년의 진지한 모습을 본 예수님은 그를 [사랑하셨다]고 성서는 기록을 합니다. 율법을 잘 지키는 사람들은 흔히 교만해져서 자기들의 거룩함을 남에게 돋보이게 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청년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율법을 성실하게 지켜보아도 그것으로 만족하다는 것을 느끼지 못한 그는 겸손히 예수님에게 나와서 구원의 길을 물은 것입니다.
이것이야 말로 쉽게 볼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우리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 생활을 성실하게 하면서도 그것만으로 구원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이게 다가 아니다'는 생각이 들어야 하는데, 오늘 한국 교회와 성도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세속적인 교회가 가르치는 것에 안주하고 있습니다. '이게 다가 아니다'는 깨달음으로 진리를 추구해야 진정한 구원의 길로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부자 청년이 그랬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그에게 구원의 길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있는 것을 다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고 나를 따르라."
이 말을 들은 청년은 울상이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예수님 옆에서 떠나가고 말았습니다. 이것을 보신 예수님은 서글픈 심정으로 이렇게 말씀 하셨습니다.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란 낙타가 바늘 구명으로 들어가는 것 보다 힘든 것이다." 이 말에 제자들은 깜작 놀랩니다. 이렇게 성실하게 율법을 지킨 사람이, 그래서 모두에게 존경을 받는 사람이 구원을 받지 못한다면 도대체 누가 구원을 받을 수 있을 것이냐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리자 예수님은 “사람의 힘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은 하실 수 있으시다."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이 놀라운 일을 하시려면 전제 조건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회개입니다. 예수님은 그 선교 초부터 “회개하라 하나님 나라가 임하였다.”라고 선포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예배를 드릴 때마다 죄의 고백을 합니다. 그러나 회개란 무엇인가요? 그냥 말로 자기가 잘못한 일을 고백하는 것이 아닙니다. 회개란 가던 길을 돌아서는 것입니다. 이 청년의 경우 돈을 사랑하고 이로 말미암는 향락을 즐기고 주위 사람들의 존경을 받아왔었습니다. 구원을 얻으려면 그 길에서 돌아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에게 가진 것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예수님의 뒤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삶의 방향을 바꾸라는 것입니다. 부자 청년은 이런 결단을 내릴 수가 없어서 머리를 떨어트리고 돌아섰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가는 것 보다 힘들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180 도 방향전환을 한 부자의 이야기가 누가복음서에 기록이 되어있습니다. '바늘구멍으로 들어간 낙타의 예'입니다. 그것은 세리장 삭개오의 이야기입니다. 삭개오는 악착같이 돈을 모았던 부자입니다. 그런데 그가 예수님을 만나자 완전히 삶의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사는 방식이 달라졌습니다. 예수님이 그의 집을 방문하여 그와 같이 식탁에 앉아서 음식을 나누자 그는 일어서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가 가진 것의 반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겠습니다. 제가 남을 속여먹은 것이 있으면 4 배나 갚겠습니다." 여기서 [서서 말했다]는 구절이 주요합니다. 당시 가진 사람들은 비스듬히 누워서 식사를 했습니다. 그렇게 식사를 하던 삭개오가 감격에 차서 일어섰다는 것입니다. 난쟁이가 섰다고 해봐야 그리 신통한 일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삭개오의 변화와 전환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그가 새사람이 되었다는 것의 표시입니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가기 시작하는 장면인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기적이 일어났을까요?
이 물음의 대답을 얻으려면 뽕나무 위로 올라가는 삭개오의 심정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는 값진 의복을 입은 세리장입니다. 그런 그가 사람들이 손가락질을 하는데도 불고하고 뽕나무 위로 올라갑니다. 그의 심정이란 아무도 알 수 없는 피눈물이 흐르는 것입니다.
그는 태어나면서 난쟁이였습니다. 나이 들면서 동리의 다른 아이들은 모두 하늘을 향해서 무럭무럭 자라는데 삭개오의 키는 땅에 붙은 듯이 자라지 않았습니다. 안타갑기 그지없었습니다. 다른 어린이들은 서로 신나게 노는데 삭개오 만은 외롭게 따돌림을 당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모두 그를 손가락질 하면서 ‘하나님에게 저주받은 자’ 라고 비방을 합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이렇게 병신으로 태어난 것은 하나님의 저주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의 부모들도 어떻게 이런 자식이 태어나서 이런 비방을 받는 것이냐고 한탄했을 것이니 어린 마음에 그 상처가 어떠했겠어요.
그러나 나이 들어가면서 앙심에 찬 그는 이 세상을 향해서 원수를 갚고 싶었습니다. 그리다가 생각해 낸 것이 세리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로마를 등에 지고 인정사정없이 세금을 긁어냄으로 그들을 괴롭히겠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세리가 된 그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세금을 긁어모았습니다. 이렇게 되면 유대인들은 그를 더욱 멸시합니다. 그렇게 되면 삭개오는 더 앙심을 품고 세금을 긁어냅니다. 이렇게 유대인과 삭개오의 사에는 날로 적개심이 증가했습니다. 이렇게 부자가 되기는 했으나 홀로 집에 와서 침상에 눕는 삭개오의 심정이란 외롭기 그지없었음에 틀림없습니다. 그 호화로운 침대가 마치 바늘방석과도 같았을 것입니다. 홀로 드는 고량진미가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무도 이해해 주는 자가 없이 살다가 죽을 것을 생각하는 그의 심정이란 비수로 찌르는 것과도 같았을 것입니다. 홀로 있는 그의 나날이란 서글프기 만 했을 것입니다. 그리던 어느 날 놀라운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예수라고 하는 한 갈릴리 청년이 세리와 창녀들 까지 사랑으로 껴안아 주면서 새로운 나라를 세운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세울 나라를 그 청년은 하나님의 나라라고 부른 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삭개오의 심정은 물방아처럼 뛰기 시작했습니다. 자기와 같은 세리, 그리고 천대받는 창녀들을 껴안아 새 나라를 세운다니 놀랍기 그지없었습니다. 그는 벌떡 일어나서 그를 찾아가려고 했습니다. 그를 만나면 그의 앞에 새로운 세계가 전게될 것만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다시 주저앉습니다. ‘아무리 그 청년의 마음이 너그럽다고 해도 자기와 같은 악랄한 세리장 까지를 받아줄 수는 없으리라'는 생각이 그를 주저앉게 했던 것입니다.
그리던 어느 날, 그 예수가 그가 사는 동네로 찾아오신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그의 가슴은 다시 고무공처럼 부풀어 올랐습니다. 그를 한 번 보기라도 해야지. 어떤 분이시기에 세리와 창녀까지 껴안아 주시는 지 한번 내 눈으로 보기라도 해야지. 그래서 그는 그가 오신다는 거리에 달려 나갔으나 키가 작은 그는 인파에 쌓인 그를 볼 길이 없었습니다. 사람들 사이를 뚫고 나가려 생각을 했으나 그를 따돌리는 사람들이 이를 허락할 리 없었습니다. 환경보다 앞선 그의 마음이 그를 길 가에 서 있는 뽕나무위로 올라가게 했습니다. 그를 향해 손가락질 하는 무리들의 조소를 들은 척 하지 않고서 말입니다. 그는 뽕나무 잎 사이로 다가오는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을 바라보았습니다. 그의 심정은 부러움과 질투로 가득 찼을 것입니다. “나도 저들 가운데 한 사람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마음이 그를 요동치게 했습니다. 제자들과 화기애애하게 이야기 하시면서 오시던 예수님이 그가 있는 뽕나무 밑에 오시더니 가시던 발걸음을 멈추시고 그를 쳐다보시는 것이 아닙니까? 그리고 그를 쳐다보시는 그의 눈에는 눈물이 글썽거리고 있은 것입니다. 삭개오 일생에 본 일이 없는 인정어린 눈이었습니다. 어쩔 줄을 몰라 하는 삭개오에게 그는 부드러운 음성으로 “삭개오야. 내려오너라. 내가 오늘 너의 집에 머물겠다."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아니 랍비 예수가 삭개오의 집에? 어찌 그럴 수가 있다는 말인가!” 하는 사람들이 비방하는 소리는 들은 척도 하시지 않고 말입니다. 이 음성을 들은 삭개오의 가슴은 터질 것만 같았습니다. 미끄러지듯이 뽕나무에서 내려온 삭개오는 예수님 앞에 엎드렸을 것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렇게 밖에 그의 심정을 표시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 삭개오를 일으켜 세우시는 예수님의 부드러운 손길에 감격한 그는 춤을 추듯이 그와 그의 제자들을 자기 집으로 인도하여 잔치를 벌였습니다. 그와 그의 제자들이 준비된 음식을 드는 것을 본 삭개오의 심정에는 만감이 차 넘쳤을 것입니다.
해가 뜨나 해가 지나 외로운 심정으로 혼자 식탁을 맞이했었는데, 이런 고마운 분들이 찾아 와서 나의 식탁에 참여해 주시다니 정말 꿈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감격에 찬 그는 일어서서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습니다. "선생님. 내가 가진 것의 반을 가난한 사람에게 주겠습니다. 남을 속인 것이 있으면 4 배나 갚겠습니다. 선생님이 나의 집에 찾아와 주시니 나에게는 그 이상 바랄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한 마디 말씀도 하시지 않았는데, 삭개오는 완전히 삶의 방향을 바꾼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예수님은 정좌해 앉으시더니 조용히 입을 열어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이 집에 구원이 이르렀다.”라고 말입니다.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장면인 것입니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가는 것 보다 힘들다고 했었는데 말입니다. 어떻게 이런 기적이 가능한가요? 그는 벌써부터 재물이 그에게 삶의 보람을 줄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부족한 그를 껴안는 참된 사랑을 갈구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간절한 그의 심정을 아신 예수님이 그를 찾아와서 한없는 사랑으로 그를 껴안아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 사랑에 감격한 그는 이 세상의 부귀영화가 헌 신짝처럼 보였던 것입니다.
만일 마가복음서의 부자 청년이 부귀영화가 그에게 삶의 보람을 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 가진 것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예수님의 뒤를 따랐더라면 간 곳마다 이룩되는 하나님나라의 잔치를 맛보았을 텐데, 그의 집에 구원이 임했을 터인데 말입니다.
우리는 주일 마다 죄의 고백을 합니다. 그러나 부귀영화가 우리에게 구원을 줄 수 없는 것을 깨닫고 참된 구원의 길을 예수님께 물었던 적이 있습니까? 하늘에서 오는 참된 사랑을 맛보고 가던 길에서 돌아섰던 적이 있습니까? 나눔과 용서의 삶을 살아 하나님 나라의 잔치를 맛본 적은 있습니까? 그렇게 해서 “너의 집에 구원이 이르렀다”는 예수님의 음성을 듣기는 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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