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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막9:42-5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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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정용섭 목사 |
참고 : | 2012.9.30 주일 http://dabia.net/xe/613602 |
정용섭 목사
제자 공동체의 위기
마가복음 9:42-50, 창조절 다섯째 주일, 2012년 9월30일
오늘의 제3독서인 막 9:42-50절에는 자극적인 단어들이 많이 나옵니다. 가장 자극적인 단어는 ‘지옥’입니다. 그 단어가 43절, 45절, 47절에 각각 나옵니다. 세 구절의 문장 형식은 비슷합니다. 43절은 손이 죄를 범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손이 죄를 범하면 손을 찍어버리라고 합니다. 손이 없는 장애인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손이 멀쩡한 상태로 지옥에 들어가는 것보다 낫다는 것입니다. 45절은 발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죄를 범하는 발을 찍어버리는 게 좋습니다. 두 발을 지닌 채 지옥에 들어가는 것보다는 장애인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낫기 때문입니다. 47절에서는 눈이 죄를 범하면 빼어버리라고 합니다. 두 눈을 지닌 채 지옥에 들어가는 것보다는 시각 장애인으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낫기 때문입니다.
지옥
지옥이 무엇일까요? 어디일까요? 많은 사람들이 지옥을 죽은 다음에 심판을 받은 사람들이 가게 될 곳으로 여깁니다. 성경에 그렇게 묘사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 따르면 지옥은 ‘꺼지지 않는 불’(막 9:43)이고, 구더기도 죽지 않는 곳(막 9:48)입니다. 상상해보십시오. 죽은 뒤에 불구덩이나 구더기 더미에서 영원히 살아야한다면 끔찍한 일입니다.
고대인들이 지옥을 그렇게 본 것은 이상한 게 아닙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지옥 개념을 좀더 정확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본문이 말하는 지옥이라는 단어는 헬라어 성경에 나오는 게헨나를 번역한 것입니다. 마틴 루터도 게헨나를 Holle(지옥)라고 번역했습니다. 지옥으로 번역된 게헨나는 원래 예루살렘 성벽 남쪽의 골짜기를 가리킵니다(수 15:8, 18:16). 아하스와 므낫세 왕 시대에 사람들은 그곳에서 몰록 신에게 자녀들을 희생제물로 바치고 딸들을 ‘불속으로 집어넣었다.’(왕하 23:10)고 합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곳을 저주했습니다(렘 7:32). 묵시적인 유대교에서는 마지막 때 심판이 ‘저주 받은 골짜기’(에티오피아 에녹서 27:1)에서 행해지고 지옥의 불이 타오를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어떤 분들은 이런 지옥 표상을 사실적인 것으로 주장합니다. 그렇게 설교하는 설교자들도 제법 있습니다. 지옥 불에 영원히 고통당하고, 구더기에 파묻혀 지내지 않으려면 예수 잘 믿어야 한다고 위협적으로 말합니다. 청중들은 그런 설교에 두려움을 느낍니다. 죽음과 심판에 대해서 냉소적으로 생각하는 것도 문제지만 지옥에 대한 공포심에 빠지는 것도 잘못입니다. 이런 공포심은 마치 아버지께 잘못을 하면 밤중에 쫓겨나서 집밖에서 벌벌 떠는 어린아이의 심리와 비슷합니다. 이런 지옥 표상은 성서적인 것이 아니라 심리적인 것입니다. 보십시오. 죽은 사람은 불과 구더기로 고통당하지 않습니다. 우리 머리카락을 잘라서 불에 태워보십시오. 뜨겁습니까? 우리가 죽으면 아무리 잘 보존시킨다고 해도 우리 몸을 박테리아가 먹고 맙니다. 시체가 썩는 현상은 바로 그것을 가리킵니다. 더 근본적인 것은 다음이 사실입니다. 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어떤 한 사람의 운명을 영원한 불과 구더기에 몰아넣는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지옥이 없다는 말이냐, 하고 이상하게 생각하시겠지요. 그런 말씀이 아닙니다. 지옥은 어떤 궁극적인 상태를 가리키는 메타포입니다. 하나님 없는 상태가 그것입니다. 아무리 화려한 삶의 조건을 갖추었다고 해도 하나님이 없으면 바로 그곳이 지옥입니다. 그래서 루터는 예수님이 지옥에 계시다면 자신은 지옥을 선택하겠다고 말했습니다.
유혹 예수님은 왜 지옥에 대한 말씀을 하신 걸까요? 이렇게 자극적인 표현을 할 수밖에 없는 어떤 사정이 있었을까요? 본문의 중심 주제는 유혹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유혹은 사람으로 죄와 불행에 빠지게 하는 일을 가리킵니다. 예컨대 에덴동산 설화에 나오는 뱀과 이브 이야기가 그것입니다. 뱀은 이브로 하여금 선악과를 따먹게 유혹합니다. 그 결과로 인류 조상인 이브와 아담은 에덴동산에서 쫓겨났습니다. 그리고 고통과 싸움과 불행이 있는 이 세상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유혹의 출발은 단순했지만 그 결과는 끔찍했습니다. 헬라신화에 나오는 판도라 이야기도 비슷합니다. 판도라는 제우스의 명령을 어기고 상자의 뚜껑을 엽니다. 상자 안에 들어있던 불행들이 밖으로 나왔습니다. 호기심이 끔찍한 결과를 빚었습니다. 두 사건 모두 유혹입니다. 이브는 뱀의 유혹을 받았다면, 판도라는 자기 내부의 호기심으로부터 유혹을 받았습니다. 이 유혹이 개인과 공동체를 파괴합니다. 오늘 본문에도 두 가지 유혹이 나옵니다. 하나는 다른 사람을 실족하게 하는 유혹입니다. 42절 말씀을 보십시오. 이렇습니다. “나를 믿는 이 작은 자들 중에 하나라도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매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나으리라.” 사람들이 벌벌 떨만한 큰 잘못이 아니라 사소한 사람의 영혼에 상처를 내는 잘못이라 하더라도 그 책임은 끔찍하다는 뜻입니다. 이런 표현은 물론 과장법입니다. 만약 이 말씀을 우리에게 그대로 적용시킨다면 수백 번 물에 빠져죽었을 겁니다. 자신도 알게 모르게 다른 사람들을 실족하게 하는 일들이 많습니다. 다른 하나는 자기 스스로를 죄에 빠지게 하는 유혹입니다. 앞서 지옥과 연관해서 말씀드린 대로 손과 발과 눈이 죄를 짓게 하는 것에 대하나 이야기입니다. 자기를 유혹하는 것은 자기를 실족하게 할 뿐만 아니라 결국 판도라의 상자 이야기처럼 다른 사람들의 운명까지 불행에 빠지게 합니다. 주기도에는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해달라는 기도입니다. 유혹, 시험, 실족에서 벗어나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그리고 그것이 우리의 일상에 얼마나 깊이 개입되어 있는지를 이 기도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잘 알고 있는 대로 이 세상은 아예 그런 방식으로 작동됩니다. 다른 이들이 실패해야 자기가 승리할 수 있다는 경쟁논리와 구조가 이 세상을 끌어가는 에너지입니다. 이런 구조에서는 아무도 유혹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습니다. 세상만이 아니라 교회도 역시 그렇습니다. 여러 종류의 유혹이 있습니다. 선교라는 이름으로, 하나님의 일이라는 명분으로 그런 일이 벌어집니다. 신자들의 약점을 이용해서 그들의 영혼을 오류에 떨어뜨립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지옥에 대한 공포심을 유발하는 것은 신자들을 실족하게 하는 일입니다. 교회 안의 소모임에서도 유혹이 일어납니다.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에게 모욕을 주기도 하고, 더 심할 경우에는 고립시킵니다. 오해는 마십시오. 교회가 늘 그렇다거나, 모든 신자들이 다 그렇다는 게 아닙니다. 모두에게 그럴 가능성이 있다는 뜻입니다. 실제로 행동이 그렇게 나타나는 사람이 있고, 자기를 절제하면서 행동으로까지 나타나지 않는 사람들이 있지만 가능성은 모두에게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라는 기도를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기도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지를 아는 분들은 알고 있을 겁니다. 평화 유혹이나 시험, 즉 실족하게 하는 일의 위험성은 단지 개인의 삶을 파괴한다는 사실만이 아니라 더 근본적으로는 공동체의 평화를 파괴한다는 데에 있습니다. 아주 사소한 유혹으로도 공동체의 평화는 파괴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의 핵심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 공동체도 이런 위험성에서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오늘 본문 마지막 절인 50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화목하라는 말은 평화하라는 뜻입다. 지옥 운운 하다가 갑자기 평화를 이루라는 말씀을 하신 것이 이상해보입니다. 이상한 게 아닙니다. 공동체의 평화가 깨뜨리는 근원이 바로 유혹이며, 실족입니다. 공동체의 평화를 이루라는 말이 오해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교회에서는 이의를 말하면 안 되고, 무조건 순종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일반적으로 교회에서는 다른 의견이 용납되지 않습니다. 이런 것은 강요된 평화입니다. 그것은 획일성이자 독단이지 참된 평화가 아닙니다. 그런 방식으로 작동되는 공동체는 영적으로 죽은 교회입니다. 신자들끼리 생각이 다르고, 또 때로 충돌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초기 기독교에서도 그런 충돌은 많았습니다. 지난 기독교 역사에서도 논쟁은 많았습니다. 진리는 이런 논쟁과 충돌을 통해서 새로운 길을 엽니다. 예를 들어, 교부들이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에 대해서, 그리고 삼위일체에 대해서 치열하게 싸웠기 때문에 기독교 진리가 지금까지 살아날 수 있었습니다. 주님의 말씀대로 우리는 제자 공동체로서 평화를 이룰 수 있을까요? 그게 쉽지 않습니다. 쉽다면 예수님께서 그런 말씀을 하실 까닭도 없습니다. 개인적인 차원에서 보더라도 마음의 평화를 누리기 힘든 것과 같습니다. 스스로 실족하면서 평화를 잃어버립니다. 그래서 본문은 평화를 이루라는 말씀을 소금과 연결해서 설명합니다. 50절 말씀을 다 읽어보겠습니다.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설로 화목하라.” 소금에 대한 이야기는 마태복음 5:13절에도 나옵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소금의 본질은 짠 맛입니다. 짠 맛을 잃으면 소금이 아닙니다. 쓸모가 없습니다. 제자공동체인 교회는 신자들이 제자로서의 본질을 확보해야만 평화를 이룰 수 있습니다. 그것이 없으면 아무리 노력해도 평화를 이룰 수 없습니다. 여기서 제자의 본질은 무엇일까요? 본문이 그것을 직접적으로 설명하지는 않습니다만 전체 문맥을 통해서 그 대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제자의 본질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가리킵니다. 그 외의 것들은 다 이 본질로부터 나옵니다. 오늘 본문이 어떤 배경에서 나왔는지를 보십시오. 예루살렘에 가까이 오시면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의 운명에 대해서 말씀하기 시작하셨습니다. 그 운명은 예루살렘에 들어가서 체포당하고 죽임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것에 대한 처음 언급은 막 8:31절에서, 두 번째 언급은 막 9:31절에서,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언급은 막 10:32절에서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언급은 제자들을 당황스럽게 했습니다. 첫 번 언급 뒤에는 베드로가 항변했고, 두 번째 언급 뒤에는 제자들이 무슨 말인지 깨닫지 못하고 두려워했고, 세 번째 언급 뒤에서는 예수님이 영광을 받으신 후에 오른 편과 왼편에 앉게 해 달라는 야고보와 요한의 요구로 인해서 제자들 사이에 다툼이 벌어졌습니다. 오늘 본문은 두 번째와 세 번째 언급 사이에 나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운명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는 뜻입니다. 이런 상태에서는 예수님과의 관계가 바로 설 수 없습니다. 예수의 운명과 어떤 관계인지를 중심에 두지 못할 때 공동체는 유혹에 빠지고 결국 평화는 깨질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제자 공동체는 늘 위기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실족하게 하는 일들이 일어납니다. 카리스마가 강한 지도자에 의해서 겉으로는 교회의 평화가 일시적으로 유지될지 몰라도 파도처럼 다시 닥칩니다. 그런 일은 예수님 당시나 초기 기독교 시대만이 아니라 지난 2천년 기독교 역사와 지금도 일어납니다. 이런 위기를 넘어서는 비법은 따로 없습니다. 소금의 짠 맛처럼 제자의 본질적인 맛을 확보하는 게 최선입니다. 그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의 운명에 영적 관심을 두는 신앙태도입니다. 그럴 때 교회 공동체는 물론이고 여러분 개인의 영혼에도 참된 평화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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