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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중인가, 제자인가?(The Multitudes or the Disciples)
마가복음 김영봉 목사............... 조회 수 2649 추천 수 0 2013.06.21 21:56:53성경본문 : | 막8:27-3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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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영봉 목사 |
참고 : | 와싱톤한인교회 http://www.kumcgw.org |
2012년 9월 9일 주일 설교
와싱톤한인교회 김영봉 목사
군중인가, 제자인가?(The Multitudes or the Disciples)
마가복음 8:27-34
1.
저는 지난 한 주간 동안 목회자 학교(School for Pastoral Leadership)를 인도했습니다. 연합감리교회 한인 총회(National Association of Korean United Methodists)에서 주관하는 목회자 재교육 프로그램입니다. 주로 작고 약한 교회에서 목회하는 젊은 목회자들을 초청하여, 선배 목회자들이 멘토가 되어, 함께 먹고 마시면서 목회의 애환을 나누고 함께 길을 찾는 과정입니다. 저에게 학교장의 책임이 맡겨져 벌써 2년째 이 일을 섬기고 있습니다. 결코 쉽지 않은 일이지만, 마치고 나면 ‘참, 귀한 일을 하고 있다!’는 감동이 마음에 차오릅니다.
이렇게 교회 바깥일을 섬기다 보면, 교회 내적인 일에는 신경을 쓰기 어렵습니다. 지난 주간에도 임종을 위해 병원을 한 번 찾은 것 외에는 꼬박 목회자 학교 일에만 마음을 쏟았습니다. 저는 교회 일에만 마음을 쏟고 싶습니다. 그렇게 해도 다 챙기지 못하는 것이 교회일입니다만, 그렇게 하면 저에게도 편하고 좋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교회의 위상으로 인해 담임목사인 제가 감당해야만 하는 일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습니다. 저 좋자고 그 책임을 모두 외면할 수가 없습니다.
제가 교회 바깥일을 섬기는 것을 우리 교회가 감당해야 할 ‘큰 목회’라고 여기시고 여러분의 마음과 기도에 품어 주시기 바랍니다. 실상, ‘교회 바깥일’이라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좁게 보면 ‘교회 바깥일’이지만, 넓게 보면 모든 것이 ‘우리 교회일’입니다. 목회자 학교장의 책임을 벗기까지 매 년 두 주간을 이 일에 내어 주어야 하고, 또한 교파를 초월하여 한국과 미국에서 열리는 ‘목회자 멘토링 컨퍼런스’를 위해 또 두 주간을 내어 주어야 합니다. 돈 생기는 일도 아니고, 몸과 마음을 피곤하게 하는 일입니다만, 하나님께서 저에게 옷을 입혀 주시니, 그 옷에 맞는 역할을 감당해야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교우들께서도 저를 통해 이루시는 큰 목회로 아시고 적극적으로 끌어안아 주시기 바랍니다.
이번 목회자 학교를 위해 기도로써 혹은 물질로써 이 거룩한 일에 참여하신 모든 분들에게 마음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앞으로도 ‘목회자 학교’와 ‘목회자 멘토링 컨퍼런스’를 기억하시고, 더 많은 분들을 참여해 주시기 바랍니다. 교회의 변화를 위해 가장 확실한 투자는 목회자들을 온전히 세우는 일입니다. 저 자신도 온전하지 않은데 이런 일에 책임을 맡는 것이 참 송구스럽습니다만, 참여하고 보면 저도 배우는 바가 많습니다. 다시 한 번, 교우 여러분의 이해와 기도와 성원을 기대합니다.
2.
예수님의 일생을 크게 둘로 나눕니다.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신 때부터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때까지를 가리켜 ‘공생애’(public life)라고 부르고, 그 이전까지의 30여 년을 가리켜 ‘사생애’(private life)라고 부릅니다. 그분의 공생애는 또 두 기간으로 나뉩니다. 공생애의 전반부는 주로 갈릴리에서 활동하시면서 이적(miracles)과 기사(wonders)를 통해 사람들을 모으고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공생애의 후반부는 예루살렘에서 복음을 전하시다가 유대교 지도자들과 로마 권력자들에게 죽임을 당하십니다.
교회력(lectionary)에 따라 읽은 오늘의 말씀은 바로 그 전환점에 일어난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갈릴리에서 예수님은 많은 무리를 이끌고 다니셨습니다. 그분이 일으킨 이적과 기사 때문입니다. 어느 시대나 마찬가지입니다. 이적과 기사가 있는 곳에는 군중이 모입니다. 얼마 전에도 이 지역에 치유 사역자로 유명한 분이 다녀가셨습니다. 뉴스를 보니, 하루 저녁에 무려 1,600명이 모였다고 합니다. 요즈음 이민 교회에서는 제 아무리 대단한 부흥사가 와도 사람들이 모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모였다는 것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이적과 기사가 있는 곳에는 사람들이 모여들게 되어 있습니다.
갈릴리에서 활동하시는 동안 예수님은 많은 병자를 치유하시고 귀신 들린 사람을 온전하게 해 주셨습니다. 그로 인해 그분이 다니는 곳에는 늘 사람들로 북적댔습니다. 당시에 병원의 수준이 대단하지 못했고, 또한 갈릴리의 주민들은 대부분 병원 근처에도 갈 수 없는 사람들이었기에, 예수님은 할 수 있는 대로 그들을 치유해 주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것에 만족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당신에게 모인 무리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이적과 기사는 마치 그들을 끌어 모으려는 수단과 같았습니다. 그분의 관심은 하나님 나라에 대해 가르치는 것이었습니다. 이적과 기사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다는 ‘보이는 표시’라고 하셨습니다. 병 고침을 받는 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하나님에게 눈 뜨고 믿으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중에 엄연히 활동하고 계심을 깨닫고 회개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 나라를 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나 오직 육신과 물질만을 알고 살던 사람들로 하여금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에 눈 뜨게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에게 와서 치유 받은 사람들은 한 동안 그분을 따라 다녔습니다. 하지만 그분 곁에 오래 머문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았습니다. 때론, 열 두 제자만 남겨두고 모두 등을 돌리고 떠나간 적도 있었습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 나라가 도무지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그랬기에 하나님 나라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이 이해도 되지 않았고 흥미의 대상도 아니었습니다. 그들 대부분의 관심은 오직 좀 더 신기한 이적과 기사를 보는 것에 있었습니다.
갈릴리에서의 그분의 유명세가 점점 커져 갈 무렵, 예수님은 열 두 제자를 데리고 빌립보 지방에 있는 가이사랴에 가십니다. 그곳은 예수님에 관한 소문이 미치지 않은 곳이었습니다. 앞뒤 정황을 볼 때, 예수님은 군중들로부터 벗어나 조용한 시간을 가지면서 자신의 갈릴리 사역을 돌아보고 앞으로 갈 길을 점검하려는 목적으로 그곳에 가셨습니다. 말하자면, 제자들과 함께 수양회를 떠나신 것입니다.
3.
‘가이사랴 수양회’는 예수님의 공생애에 있어서 아주 중대한 전환점입니다. 그 전환점은 중도에 노선을 변경함으로 생긴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예수님의 마음에 있던 계획이었을 것입니다. 그분은 먼저 제자들에게 묻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27절)
예수님은 사람의 심리에 대해서도 잘 알고 계셨던 것 같습니다. 정작 그분의 관심은 그 다음 질문에 있었습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29절) 이 질문에서 보듯, 예수님은 제자들이 당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알아보려 하십니다. 그런데 처음부터 그렇게 물으면 제자들이 선뜻 대답하지 않을 가능성이 컸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선생이 제자에게 “너희는 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 내가 어떤 사람인 것 같으냐?”라고 물을 때, 제자로서 선뜻 나서기가 쉽겠습니까? 그래서 먼저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더냐?”고 물으십니다. 다른 사람이 하는 말을 전하는 것은 쉬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제자들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자신들이 들은 이야기를 쏟아 놓습니다.
한참을 듣고 있던 예수님은 본심을 드러내십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오늘 본문에는 기록이 없지만, 추측컨대, 이 질문은 순간 모두를 얼어붙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는 것은 쉽지만, 정작 자신의 생각을 드러내는 것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에 대해 생각이 정리되지 않았을 수도 있고, 정리되어 있다 해도 그것이 맞는지 어떤지 확신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제자들은 입을 다물고 서로 눈치만 보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 침묵을 깬 사람이 베드로입니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대로 보자면, 베드로는 생각보다 행동이 앞서는 사람입니다. 옳든 그르든 말하고 보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질문으로 인해 좌중을 압도하고 있던 무거운 침묵을 깨는 것은 베드로 같은 사람이 아니면 할 수 없습니다. 성질 급한 사람도 때로 쓸모가 있는 법입니다. 베드로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선생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29절)
직역하자면, “당신은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해야 합니다. 우리말의 어법 상 손윗사람을 ‘당신’이라고 부를 수 없기 때문에 ‘선생님은’이라고 의역한 것입니다. ‘그리스도’라는 말은 히브리어 ‘메시야’를 가리키는 헬라말입니다. 구약성경은 하나님께서 마지막 날에 한 사람에게 기름을 부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보낼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습니다. ‘메시야’라는 말은 ‘기름부음을 받은 자’(the anointed)라는 뜻입니다.
베드로는 다른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다른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머지않아 메시야가 와서 로마의 압제 하에 있는 유대인들을 해방시키고 이스라엘을 회복시킬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메시야가 위대한 이스라엘을 회복하면 이 땅의 모든 백성들이 이스라엘로 모여들어 세상 모든 나라들이 결국 거룩한 한 나라가 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베드로는 그 동안 가까이에서 예수님을 지켜 본 결과, “이분이 바로 오기로 되어 있는 메시야다!”라고 결론을 지었습니다. 아마도 다른 제자들도 같은 생각이었을 것입니다.
이 대답에 대해 예수님은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30절의 기록은 읽는 사람들로 하여금 큰 의문에 빠지게 만듭니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엄중히 경고하시기를, 자기에 관하여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하셨다. (30절)
마태복음에 의하면, “시몬 바요나야, 너는 복이 있다. 너에게 이것을 알려 주신 분은, 사람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다”(마 16:17)라고 칭찬하십니다. 베드로는 제대로 본 것입니다. 예수님은 성부 하나님께서 마지막 날에 보내기로 예정되어 있는 그 메시야 곧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런데 곧이어 예수님은, 이 사실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엄중히 경고하십니다. 이건 또 무슨 반전이란 말입니까?
예수님은 베드로의 고백을 절반만 받아들이신 것입니다. 베드로는 당신이 그리스도라는 사실은 알았으나, 그 그리스도가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예수님과 전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베드로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유대인들이 그랬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오실 것이라고 믿었지만, 그 그리스도께서 어떤 일을 하실 것인지에 대해서는 예수님과 전혀 다른 믿음과 기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로마 정부로부터 유대인들을 해방시키고 그 어느 나라도 넘볼 수 없는 강성대국 이스라엘을 회복시키는 것이 그리스도가 하실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그들 자신이 바라는 일이었지, 하나님께서 하시려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성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시려는 일은 그것과 전혀 다른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아무에게도 당신이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알리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4.
그런 다음, 예수님은 깜짝 놀랄 말씀을 하십니다. 당신 자신의 미래에 대해 처음으로 입을 여십니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인자가 반드시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고 나서, 사흘 후에 살아나야 한다는 것을 그들에게 가르치기 시작하셨다.(31절)
원문을 보면, 뭔가 새로운 것이 시작되고 있음을 분명히 느낄 수 있습니다. 원문의 31절 첫 머리에 "그리고 그분은 시작하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무엇을 시작하셨습니까? 그리스도이신 당신께서 앞으로 많은 고난을 받을 것이며 마침내 죽임을 당할 것이며 사흘 후에 살아날 것이라는 사실을 가르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것은 중대한 전환입니다. ‘가이사랴 수양회’ 이전까지 예수님은 갈릴리의 스타였습니다. 그분에게 불가능한 것은 없어 보였습니다. 심지어 죽은 사람까지 살려내신 분이니, 그분에게 못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런 능력이라면 유대인들을 규합하여 로마 군인들을 이스라엘 땅에서 몰아내기에 충분하다 싶었습니다. 그 누구도 예수님에게 대적할 수 없어 보였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분을 메시야 즉 그리스도로 믿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무슨 말입니까? 많은 고난을 받고 마침내 죽임을 당할 것이라니요! 도대체 납득할 수 없는 말씀을 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 때, 들고 일어선 사람이 베드로입니다. 역시 베드로답습니다. 32절은 베드로의 태도를 이렇게 묘사합니다.
예수께서 드러내 놓고 이 말씀을 하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바싹 잡아당기고, 그에게 항의하였다.
여기, ‘항의하였다’라고 번역한 단어는 ‘책망하였다’라고 번역해야 옳습니다. ‘바싹 잡아당기고’라는 표현은 베드로가 예수님의 말씀에 얼마나 저항했는지를 느끼게 해 줍니다. "왜, 다 된 밥에 코를 빠뜨리려 하십니까?"라는 뜻입니다. “이대로 가면 메시야의 왕국을 쉽게 세울 수 있는데, 고난을 받는다는 말은 무슨 뜻이고, 죽는다는 말은 무슨 말입니까?”라면서, 절대 그런 생각을 하지 말라고, 선생을 꾸짖는 것입니다. 베드로만 그런 생각을 한 것이 아닙니다. 다른 제자들과 같은 생각,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돌아서서, 제자들을 보시고, 베드로를 꾸짖어” 말씀하십니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33절)
당신이 가장 사랑하는 제자에게 ‘사탄’이라니요! 이 말에 베드로가 얼마나 상처를 받았겠습니까? 하지만 예수님은 이 엄중한 순간을 그냥 흘려보낼 수 없다고 생각하셨습니다. 극약처방이 필요한 순간이라고 느꼈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사람들에게 떠밀려 사람들이 보고 싶은 일을 해 주는 메시야가 될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께서 보내신 목적을 이루는 메시야가 될 것인가의 갈림길에 서 계셨던 것입니다. 당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이루느냐 수포로 돌아가게 하느냐의 갈림길에 서 있는데, 베드로가 길을 막아 선 것입니다. 그랬기에 이렇게 단호하게 대처하신 것입니다.
그런 다음, 예수님은 제자들과 무리들을 함께 불러 놓고 말씀하십니다.
나를 따라오려고 하는 사람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 오너라.(34절)
‘가이사랴 수양회’에서 사역의 노선을 바꾸신 예수님은 제자들과 무리들에게도 노선을 바꾸도록 요청하십니다. 당신이 ‘갈릴리의 스타’가 되기를 사양하고 예루살렘에 들어가 십자가를 지려는 것처럼, 그들도 이적과 기사를 보기 위해 몰려다니는 군중이 되기를 멈추고 제자가 되도록 전환하라고 요청하십니다. “나를 따라오려고 하는 사람은...”이라는 말은 달리 번역하면 “나의 제자가 되려는 사람은...”이라는 뜻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우리가 추종하는 그것에 의해 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스타를 따라 다니면, 우리의 인생은 구경꾼이 되어 버립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스타가 되기를 원치도 않았고, 당신을 따라 다니는 사람들을 군중으로 만들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분은 스타가 아니라 고난의 종으로 십자가의 길을 걸어 세상을 구원하려 하십니다. 그렇다면, 이제 그분에게 필요한 사람들은 자신을 에워싸고 칭송하는 군중이 아니라, 자신의 뒤를 따라 걸으면서 세상의 구원을 위해 일할 제자들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가이사랴 수양회'에 모인 사람들에게 도전하십니다. 자신을 진정으로 주님으로 여긴다면, 그들도 자신처럼 노선을 수정해야 한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계십니다.
5.
군중은 자신의 필요를 위해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입니다. 물론, 피조물인 인간으로서 하나님이 필요하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 자신의 필요를 위해 하나님을 찾고,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 앞에 무릎을 꿇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부 하나님을 참되게 만나고 성령의 감화를 받으면 그 자리에 머물러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자신을 드리게 됩니다. 이같은 믿음의 도약을 한 사람들을 가리켜 '제자'라고 부릅니다. 자기 자신의 삶의 주인이기를 사양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하고,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그분의 뒤를 따라 가는 것입니다.
불행하게도 오늘날의 교회들은 군중을 모으는 일에 정신이 팔려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교회로 모이는 사람들도 군중의 상태에 머물러 있기를 원합니다. 마치, 갈릴리에서 이적과 기사를 보기 위해 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 곁에 몰려 들었던 것처럼,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뭔가 자신에게 유익한 것을 찾아 교회를 전전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주일마다 수 많은 사람들이 교회로 모이지만, 구경이나 하고 떡이나 얻어 먹으려는 사람들이 대다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교회들이 군중을 모으는 일에 부심하고 있습니다. 교회로 모인 사람들이 어떻게 살고 있느냐에 대해서는 전혀 묻지 않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교회로 모이느냐에만 관심을 둡니다. 군중의 규모가 클수록 '부흥했다'고 혹은 '성공했다'고 말합니다. 목회자들은 그러한 부흥과 성공을 이루기 위해 몸부림칩니다. 그렇게 몸부침치고도 이루지 못하면 패배감에 빠지고, 어느 정도 이루었다는 사람들은 '이건 아닌데!'라는 공허감의 쓴맛을 다시면서도 어쩌지 못하고 밀려갑니다.
사정이 이렇게 되므로 인해 발생한 문제가 여럿 있습니다. 그 중 가장 심각한 문제가 설교에 목 매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신앙 생활에 있어서 설교의 위치가 비정상적일정도로 높아졌습니다. 그 바람에 목사들과 교인들이 모두 설교에 목 매고 살게 되었습니다. 목사는 할 수 있는대로 많은 군중을 끌어 모으기 위해 노력하고, 교인들은 그렇게 사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탁월한 설교자에게 구름떼 같이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고, 그 설교자에게 문제가 생기면 그 군중들이 순식간에 흩어져 버립니다. 교회가 '믿음의 공동체'가 아니라 '게릴라 콘서트'와 같이 변질되어 버렸습니다. 목사는 교인들과 함께 영적 여정을 걷는 사람이 아니라, 일주일에 한 번 나타나서 멋드러진 설교 한 번 외치고 사라지는 스타가 되어 버렸습니다.
설교에 목 매고 살다 보니, 교인들의 신앙은 철저히 의존적인 것이 되어 버렸습니다. 원래 기독교 신앙은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보듯, 예수께서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당신의 뒤를 따르는 제자들을 원하셨습니다. 그런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십자가를 예수님의 어깨 위에 얹어놓고 자신도 그 위에 올라타고 가려 하는지 모릅니다. 자기 스스로 하나님 앞에 서고 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생명수를 길어 올릴 줄 모른채, 좋은 설교를 찾아 우왕좌왕하게 만들었습니다. 오늘날 거대 교회가 왜 생겨났습니까? 철저히 설교자에게 의존하는, 설교에 목 매고 사는 교인들이 많아진 것이 그 원인 중 하나입니다.
이번 목회자 학교의 주제가 '설교'였습니다. 일 주일 동안, 어떻게 하면 좀 더 진실하고 신실한 설교자가 될 수 있을까를 두고 고민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저는 이 고민을 후배 목사님들과 나누었습니다. 오늘날 설교자의 고민은 두 가지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1) 어떻게 신실한 설교자가 될 수 있는가를 고민하는 한 편, 2) 설교에 목 매게 하는 교회의 흐름을 바꾸고 설교에 목 매고 사는 교인들의 체질을 바꾸는 일로 인해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설교는 중요합니다. 설교 하나만으로도 큰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지난 주 금요일 저녁, 지친 몸을 이끌고 고 홍형기 성도 고별 예배를 위해 교회에 왔는데, 제 앞으로 온 편지가 하나 있었습니다. 기러기 엄마로서 이곳에서 몇 년 머무는 동안에 우리 교회를 나오게 되었고 작년에 세례를 받으신 교우의 편지였습니다. 하지만 여러 가지 생활의 문제로 인해 예배 출석이 매우 불규칙했습니다. 한 동안 안 보인다 했더니, 미국 생활을 정리하고 귀국하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 편지는 공항에서 쓴 것입니다. 그 편지를 소개해 드립니다.
비행기 시간을 앞두고 몇 자 두서 없이 목사님에게 안부 전합니다. 저는 와싱톤한인교회에서 세례를 받고 하나님을 알게 된 OOO이라고 합니다. 속회 활동도 안 하였고, 예배에는 양 손가락 꼽을 정도로 참석했지만, 저는 감히 제가 하나님을 믿고, 와싱톤한인교회를 알게 된 것이 지난 6년간의 미국 생활에 가장 큰 보람이었다고 말하겠습니다. 목사님의 설교 말씀은 인터넷을 통해서 그리고 저서를 통해서 제가 한국에 있는 동안에도 늘 가까이 하겠습니다. 목사님과 교회를 알게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목사님의 건강과 교회의 영적 성장을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감사드립니다. 목사님, 교회 그리고 우리 하나님을 몰랐다면 저의 미국 생활은 참담하였을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제 자랑으로 받지 말아 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이 편지의 마지막 문장으로 인해 마음이 찡했습니다. "목사님, 교회 그리고 우리 하나님을 몰랐다면 저의 미국 생활은 참담하였을 것입니다." 그 자매님은 오직 설교에만 목 매고 살았지만, 참담할 수 있었던 미국 생활을 버텨낼 수 있었고, '우리 하나님'이라고 말할 정도로 하나님을 친밀하게 알게 되었습니다. 이 한 문장으로 인해 그동안의 모든 피로가 말끔히 씻기는 것 같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설교는 인간의 언어 중에 가장 강력한 언어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담고 있으며, 성령께서 그 말씀을 사용하시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설교 하나만으로는 한 사람으로 하여금 제자가 되도록 이끌지 못합니다. 탁월한 설교는 예수님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할 수 있습니다. 또한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이게 할 수 있습니다. 앞에서 소개한 자매처럼 하나님을 친밀하게 알고 '우리 하나님'이라고 고백할 수 있게 만듭니다. 하지만 그렇게 회개하고 복음을 받아들인 다음,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매일 예수 그리스도의 뒤를 따라 제자로 살아가게 만드는 것은 설교 하나만으로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최근에 나온 <아가페 칼럼>을 읽으신 분들은 제 형수님의 이야기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담임목사가 바뀌면서 영적으로 점점 약해져가는 자신을 어찌할까 돌아보다가, 문득 "아, 내가 설교에 목 매고 살았구나!"라는 깨달음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설교 외에도 영적 양식을 얻을 수 있는 통로가 많은데, 그것은 모두 외면하고 설교에만 매달려 있는 자신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배 시간에 설교에만 목 매지 않고 예배의 모든 순서를 통해 은혜 받으려 노력했고, 속회 활동에 더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며, 주중에 성경공부에도 참석했습니다. 그랬더니 영적으로 회복되더라는 말입니다.
저는 연구 휴가 기간 동안에 이 이야기를 마음에 두고 묵상하면서, 새로운 안식년 싸이클을 시작하면서 무엇에 역점을 두고 목회할지 깊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만일 제가 설교에 목 매고 목회를 하고 교인들로 하여금 설교에 목 매고 살게 한다면, 저는 제자가 아니라 군중을 모으는 목회를 하는 것입니다. 저의 상황이 저로 하여금 설교 이외에 다른 사역에 손을 쓸 수 없게 만들고 있지만, 부목사님들과 함께 설교만이 아니라 영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다양한 도구들을 교우들에게 제공하는 일에 더욱 노력해야 하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또한 사랑하는 성도들께서 군중의 상태에 머물러 있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로 변화되도록 끊임없이 일깨우고 호소해야 하겠다는 다짐도 했습니다. 저의 목회의 초점이 제자 만드는 일에 집중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다짐했습니다.
6.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군중입니까? 아니면 제자입니까? 혹시, 제가 군중을 모으는 목회를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반성하고 앞으로는 제자를 기르는 목회를 해야 하겠다고 반성한 것처럼, 여러분에게도, 그 동안 제자가 아니라 군중의 상태에 머물러 있었다는 반성이 마음에 느껴지십니까? 그렇다면, 오늘의 말씀을 통해 들리는 주님의 음성에 귀 기우리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음성에 응답하시기 바랍니다. "그렇습니다, 주님. 제가 그동안 군중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저를 도와 주옵소서. 주님의 제자가 되겠습니다."
앞으로 저는 몇 주일 동안 제자로 발돋움하는 것에 대해 안내할 것입니다. 군중의 상태에 머물러 있고 싶은 사람들에게는 부담될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것이 우리 모두를 살리는 일이며, 우리 교회를 진정한 주님의 몸으로 변화시키는 일이고, 복음의 능력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길이 됩니다. 나 자신과 교회와 온 세상의 구원을 위해 내가 할 일은 제자로 받돋움하는 일입니다. 그 일을 위해 오늘은 우선 그 거룩한 열망을 마음에 품는 것을 만족하시기 바랍니다. 모든 것은 마음에서 시작합니다.
여러분 중에는 "주님, 저는 충분하지는 않아도 제자로 살려고 힘썼습니다. 제 마음 아시지요?"라고 기도하실 분들도 계십니다. 참, 잘 하셨습니다. 지금 상태에 만족하지 마시고 계속하여 자라가시기 바랍니다. 빌립보서에서 바울 사도가 말한 대로, 어느 상태에 이르렀든지 우리는 늘 '나는 아직 출발점에 있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능력에 힘입어 머리를 앞으로 내밀고 더욱 힘껏 나아가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참된 행복을 맛보게 될 것이며,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우리 교회를 사용하여 이 세상을 더욱 복되게 하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 제자 되십시다. 우리 와싱톤한인교회가 군중의 모임이 아니라 제자들로 가득 찬 교회가 되게 하십시다. 이 세상 구석 구석에 들어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가십시다. 그것이 주님께서 이 세상을 구원하는 방법입니다. 이렇게 사는 것이 가장 복되게 사는 방법입니다. 아멘!
주님,
주님께서는 오늘 저희를 부르십니다.
군중의 무리에서 나오라고 하십니다.
이적과 기사를 찾아다니는 우리를 부르십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라 하십니다.
오, 주님,
저희를 사로잡아 주소서.
자아의 감옥에서 해방시켜 주시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
저희 삶을 드리게 하소서.
십자가의 길을
매일 걷게 하소서.
아멘.
<속회자료> 2012년 9월 16일 주일 설교
"군중인가, 제자인가?"(The Multitudes Or the Disciples?)
1. 찬송을 부르며 시작합니다. 514장
2. 한 사람이 대표로 기도합니다.
3. 마가복음 8장 27절부터 38절까지 교독하여 읽습니다. 말씀 중에 나의 마음에 와 닿는 말씀이 무엇인지 찾아봅니다. (10분)
4. 말씀의 나눔 (한 질문에 대해 15분 정도를 할애하십시오. 전체 나눔 시간이 90분을 넘지 않게 하십시오.)
1) 오늘의 말씀을 통해 깨달은 것이 있다면 하나만 말해 보십시오.
2) '군중 신자'와 '제자 신자'는 어떻게 다릅니까? 구체적으로 예를 들어 설명해 보십시오.
3) 당신은 군중에 속합니까? 아니면 제자에 속합니까? 왜 그렇게 생각합니까?
4) 제자로 발돋움하기 위해 당신에게는 무엇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까?
5. 기도
1) 제자로 자라도록 기도하십시오.
2) 오늘의 교회가 군중을 모으는 일이 아니라 제자 만드는 일에 열심을 내도록 기도하십시오.
6. 중보기도
돌아가면서 기도 제목을 나누십시오. 각자 다른 사람의 기도 제목을 적어 두고 매일 한 번씩 그 사람을 위해 기도하십시오.
7. 찬송을 부르며 헌금을 드립니다. 519장
8. 주기도문으로 예배를 마칩니다.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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