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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막1: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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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경형 목사 |
참고 : | 궁극교회 주일예배 |
1장 1절-3절: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이라 선지자 이사야의 글에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저가 네 길을 예비하리라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기록된 것과 같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이라: 자기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복음의 시작인데, 복음의 사람으로 살려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과 사상을 만나고 이렇게 돼야 복음의 사람이라.
예수 믿으면서 그냥 교회 다니는 이건 안 된다. 학생이 학교에 다니면 아는 것으로 배워 와야 한다. 그런 것처럼 교회에 가면 시간 땜이나 하고 예배순서나 지키는 게 아니라 성경의 한 이치라도 깨달아야 하는 것이다.
사람이 한 이치라도 비른 것을 깨달았으면 그는 인격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사람이다. 한 이치 두 이치 많은 이치를 깨달아 갈수록 그 사람은 이치의 사람이 된다. 이치의 사람이 되면 사람이 지식이 있고 지혜가 있고 총명하고 도덕성이 고상해지고, 이 사람이 사람 중에 사람이라.
교회에 다니면서, 예수님을 믿으면서 말씀의 깨달음에서 바로 되어 들어가면 그 사람은 예수 믿는 사람 중에 사람이다. ‘돈 많이 가지고 부자로 산다’ 그게 아니고 신앙적 차원이 아주 높은 사람이다. 복된 사람이다. 사람이 복이 있다.
세상 사람들은 돈이 많은 사람을 보고 ‘와, 복 많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성경은 사람이 바로 만들어진 것을 보고 ‘와, 저 사람 참 복이 있다. 복된 사람이다’ 그러신다. 그러니 그 사람 뒤에 무엇인들 안 따르겠느냐? 복 있는 사람 뒤에는 복이 따르는 법이다. 사람이 못 돼 놓으면 미움이 따른다.
쉽게 일반 이치적으로 볼 때에 사회적으로나 국가적으로 의를 행하고 선행을 많이 하면 그 사람 뒤에는 몽둥이가 따르느냐, 상이 따르느냐? 상이 따른다. 그러나 남을 해치고 도둑질이나 하고 못된 짓을 하면 그 사람 뒤에는 뭐가 따르느냐? 항상 몽둥이가 따르고, 항상 경찰이 따르고, 감옥이 늘 따른다.
예수님을 믿되 복음의 사람으로 바로 깨닫고 바로 믿는 건 성경의 이치를 깨닫는 것이다. 말씀 속의 이치를 많이 깨달으면 일반이치도 많이 깨닫는다. 깨달아서 이용하고 활용하고 응용하니 그만큼 기쁘고 행복하고, 다른 사람에게도 이치의 사람으로 차원적으로 높여주니 그 사람이, 그 사회가, 그 가정이 얼마나 복된 사람으로 가득할까?
사람이 복되게 되면 심령천국이 이뤄진다. 가정이 말씀으로 복된 가정이 되면 그 가정이 가정천국이 된다. 사회적으로 아무리 높고 낮은 큰 세파와 환난 풍파가 몰려와도 그런 사람은 넘어지지를 않는다. 사건의 바람이 불어도 사람이 정신적으로 그 중심이 넘어지지를 않는다. 참 복된 사람이다. 하나님이 그런 사람을 찾고 있고, 아무리 세상이 각박하고 타락된 세상이라도 모든 사람이, 그리고 온 만물이 그런 사람을 찾고 있다.
사람들은 어두울수록 뭘 찾느냐? 빛을 찾는다. 죄악세상이 될수록 빛을 찾는다. 정치계가 어두울수록 ‘참 진짜 인물이 없을까’ 하고 찾는다. 그게 인격의 세계라. 식당도 보면 음식의 맛이 각 식당이 다 그게 그거다. 그러니까 ‘맛있는 집이 어디 있느냐’ 하고 찾는다. 가짜가 많을수록 ‘어디 물건이 진짜냐? 어느 집이 진짜냐’ 하고 찾게 된다. 그게 인격의 세계다. ‘다 도둑놈처럼 사니 나도 그렇게 살아야지’ 하는 건 인격의 사람이 아니다.
본문에 보니 ‘복음이 시작이라’ 하고서 ‘선지자 이사야 글에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라고 했다. 선지자 이사야의 입으로 통해서 내가(주 하나님이) 내(주 하나님) 사자를 누구 앞에 보낸다? 우리 모두 자기 앞으로 보낸다. 하나님의 사자를, 하나님의 옳고 신실한 종을 네 앞에 보내겠다.
그리고 ‘그 사자가 너의 길을 예비해 주겠다’고 했다. 사람이 사는 길, 인생의 길, 삶의 길, 정신 사상, 사람이 바로 서는 길을 예비해 주겠다. 아무리 죄악세상이라도, 죄의 밤이 깊고 환난 풍파가 일어도 사람이 넘어지지 않는 사람 되도록 해 주겠다. 자기 인생길이 출생해서 죽음의 선을 넘어가기까지 네가 죄악세상에 넘어지지 않고 구렁텅이에 빠지지 않고 유혹 미혹을 당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너를 만드신 창조의 목적대로 갈 수 있도록 너를 지도 인도하는 그런 종을 보내겠다.
하나님이 인간 자기를 만들었다. 구약시대든 신약시대든 하나님이 인간을 만들었다. 하나님께서 인간 너를 만들 때 그 방편이 부정모혈로 통해서 만들었다. 부정모혈로 통해서 인간이 생산되게 하는 이치가 또 있다. 그건 뭐냐? 혈통을 통한 그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부모로 통해서 자녀에게 내려가고, 또 가정의 자녀로 통해서 그 자녀가 또 받고, 이렇게 예수님께서 오실 때까지 복된 가정 복된 사람의 그 계대로 만들어 주려고 부정모혈로 인간 너를 태어나게 했다.
과거적으로 우리 부모들은 예수를 안 믿어서 이걸 몰랐다. 그러나 어찌 됐건 지금 나는 성경을 가지고 예수 믿는 부모가 됐고 이제는 확실히 알았으니 마:에 예수님의 족보가 있듯이 우리 가정은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우리의 족보도 영적 면에서 하나님의 진리생명계대가 내려가는 그 족보가 되어야 한다.
‘나의 혈통적 조상은 누구냐?’ 안 믿는 사람들은 이걸 잘 찾는다. 우리는 예수를 믿기 때문에 예수님의 족보에 들어가는 것이다. 아브라함의 신앙 믿음의 생명계대로 들어가는 것이다.
기독자들은 예수 믿으면서 현재적으로도 자기가 가난하던 부자던 가정에서 이웃에서 옳은 것을 심고, 물질은 사람을 위해서 써야 한다. 물질을 자기 집에 묻어놓고 쌓아놓고 자기 노후대책 세우는 그게 아니다.
세상적으로 따라가는 사람들은 세상의 어떤 계산을 하고 그렇게 하는 거겠지만 예를 들면 요즘에 아이를 낳자마자 적금은 든다. 그러면 그 아이가 나이가 들면 돈이 거저 나온단다. 그러면 그 때까지 살아봐라. 하나님이 쳐버리면 끝나는 거다.
우리 자녀들의 앞길은 하나님께 맡겨라. 말씀대로 키워라. 그게 하나님 앞에 바쳐지는 거다. 말씀대로 자라고 말씀대로 키우는 게 하나님 앞에 바로 돼 들어가는 거다.
너의 길을 예비하리라: 예비해주는 사람이 어디서 외치고 있느냐? 광야에서 외치고 있다. 광야가 어떤 곳이냐? 광야는 사람이 살 곳이 아니다. 짐승들이 우글거리고 독사가 우글거리는 곳이다.
이 세상은 영원히 살지를 못한다. 그래서 광야 같은 세상이라고 한다. 광야는 하나님만 의지하고 사는 곳. 하나님만 의지하고 사는 자는 광야에서 사는 자다. 서울 도시 안에서 살아도 그 사람은 광야에서 사는 사람이다. 산중에서 살아도 세상을 의지하고 있으면 그 사람은 그 중심사상이 도시 안에 있는 거다. 이는 애굽 안에서 사는 것이다. 소원 목적성이 애굽 안에서 살면, ‘세상에서 건설하고 먹고 마시고 시집장가 가고 누리고 살자. 세상이 전부다’ 하는 것은 애굽정신이다. 지금도 그렇게 살고 있다면 너는 애굽사람이다. 비유적으로 그런 것이다.
예수를 믿어도 세상을 소원 목적하며 믿고 있으면 너는 애굽사람이다. 너는 속사람이 하나님의 약속의 땅으로, 참 사람 되는 그 쪽으로 아직 탈출을 못했구나.
예수를 믿어도 늘 ‘세상에서 어찌 살꼬’ 하며 하나님께 ‘이것 좀, 내 사정 좀 봐 주십시오’ 하고, 맨날 새벽기도 하고 철야기도를 해도 그건 우리에겐 아무 필요가 없다.
평소에 정상적인 생활을 하면서 정신이 바로 들어가서 사람이 바로 깨닫고 세상에서 살면 세상은 참 살만한 세상이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성품으로 이뤄갈 수 있는 세상이 자기 앞에 상의 밥처럼 펼쳐져 있다. 만나고 겪고 깨닫고 이용하고 활용하고 사용하고 그런 의미에서, 이룰구원의 훈련장소라는 의미에서 이 세상은 참 살만한 곳이다. ‘부자가 돼서 살만한 곳이다’ 그게 아니고 신앙 믿음 실력을 길러갈 수 있는 훈련장소로서의 참 재미있는 곳이다. 군대에서 유격훈련 받을 때 높고 낮고 기고 연막탄 터뜨리고 위에서 뛰어내리고 한다. 그런데 힘이 없으면 아무 것도 못한다. 맨날 기합 받고 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서 영적 면에서 기운을 얻고 생명을 얻고 양식을 먹고 이 세상을 살아간다면 힘이 있다. 이렇게 되면 성경에도 있다. ‘어떤 사건이던 와라. 죽음아 와라. 네가 쏘는 게 뭐냐? 사망아 와라. 네가 쏘는 게 뭐냐?’ 그만큼 믿음실력이 있다는 것이다.
훈련받을 때 힘이 없으면 훈련을 못 받는다. 힘이 있으면 그 훈련이 아무 것도 아니다. 사실은 훈련은 재미있는 거다. 예수 믿는 것도 바르게만 깨닫고 세상을 산다며 이 세상은 재미있는 세상이다. 다른 사람은 울고 짜고 하지만 바로만 믿고 믿음 바로 가진 사람은 그렇게 살지를 않는다. 사는 것도 지혜가 나오고 일하는 것에서도 지혜가 나오고 한다. 자꾸 큰돈 벌려고 머리를 쓰니까 피곤하고 괴로운 거다. 그러면 또 돈 따라가야 한다.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이 소리를 들으려면 어디로 나가야 하느냐? 광야로 나가야 한다. 하나님을 바로 믿는 소리를 들으려면 광야로 나가야 한다. 광야로 나가려니 세상을 등져야 한다. 세상을 소원 목적하는 것을 등져야 한다. 그러면 세상을 등진다고 해서 못 먹고 못 사느냐? 속에서 그걸 바로 잡아야 한다.
영적 정신적 세계에서 예수 믿는 이치를 바로 못 깨달으면 자꾸 눈에 보이는 활동 격식을 차리고 사람이 거기 매이게 된다. 광야로 나가서 하나님께서 보내신 종을 찾아야 자기의 길을 바로 찾게 된다. 인생 사는 길을 바로 찾게 된다.
하나님의 사자를 통한 하나님의 뜻은 나를 광야로 끄집어내야 하나님의 보호, 진리의 보호, 성령의 보호를 받고 광야에서 시련과 연단을 받으면서 참 사람이 되는 영능의 실력자가 되고, 그 다음에 존귀 영광자가 되게 하는 거다. 이게 성경이다.
미련한 너를 왜 예수 믿게 하느냐? 지혜로운 자로 만들어 주려고. 꼬리가 되지 않고 머리가 되게 만들려고. 이런 자는 가진 지식이 머리요, 지혜가 머리요, 도덕성을 가진 면에서 머리다. 앞서 나가고 존귀한 자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올린다. 올리는 방편이 사건을 통해 올려주시기도 한다. 하나님께서 올리는 그 사람을 사람이 끄집어 내렸다가는 끄집어 내리는 그 사람은 큰일 난다.
등불에 불을 당기면 사람들이 그 등불을 올리느냐, 이불에 파묻느냐? 올린다. 왜 올리느냐? 올려야 구별되고 분별이 된다. 불이 꺼지면 아무 것도 못한다. 불이 밝을수록 사람이 쾌활하다. 기쁘고 즐겁다. 눈이 밝을수록 사람의 마음이 기쁘고 즐겁다. 날씨가 좋으면 사람의 마음이 기쁘고 쾌활하다.
자기가 존귀 영광자가 되는 것과, 하나님께서 올려주시는 존귀 영광자 중에 하나님이 어떤 사람을 올려줄까?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올려줄까? 화투 치고 술 잘 먹는 사람? 돈만 자꾸 따라다니며 찾는 사람? 돈 찾는 사람이 예수 믿으면 예수 팔아먹는 사람이 된다. 예수 파는 자는 진리 팔고 옳은 것 팔고 인간 팔고 스승 판다. 부모보다 돈을 좋아하는 자는 부모 자식 팔아먹는다. 남의 아이도 훔쳐다 팔아먹는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된다.
본문에서 왜 자기를 광야로 끄집어내느냐? 자기를 광야로 끄집어내면 꼭 그 자리에서 사람이 죽을 것 같다. 망할 것 같다. 그러나 그게 아니다. 이게 이해가 안 되면 역사적으로 보는 오늘날 저 중동의 이스라엘을 봐라. 그래도 못 믿겠느냐? 왜 역사적으로 그 이스라엘을 조금 남겨놓은 줄 아느냐? 남겨놓은 것은 우리로 깨닫게 하려고. ‘이래도 모르겠느냐’ 하는 것이다. 꼭 눈으로 봐야 알겠느냐 그 말이다.
세상 안에서 잔치를 벌여놓고 풍악을 울리고 무녀가 춤추고 하는 곳으로 나를 불러들인다면 자기의 신앙이 어찌 되겠느냐? 신앙 믿음은 죽고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진노의 형벌과 심판이 있게 된다. 그러니까 전부는 사망이요 멸망이 된다.
그러면 내가 어떻게 살던 하나님께서 가만 두지 왜 형벌을 주고 진노를 하느냐? 자식이 공부를 못하든지 무슨 일을 하든지 내버려두지 왜 부모가 간섭을 할까? 훌륭한 사람이 되라는 거다. 타락된 인간세상이지만 부모가 그런 마음을 갖는데 하물며 인간 자기를 만드신 하나님께서 어떤 목적으로 너를 인간으로 만들었느냐? 왜 인간으로 만들었느냐? 만들어서 왜 고통 많고 한 많은 이 세상에 나를 버려둔 것 같으냐? 나를 영원히 존귀 영광자 만들어 주려고.
‘죽어서 천당 간다’ 그렇게만 보지 말라. 지옥 천국 가는 건 주님이 책임지고 있으니 내가 걱정할 게 아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란다면 이제는 사람다운 사람, 참 사람, 지식 면에서 지혜 면에서 하나님의 지식에서 나오는 지혜성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일반세상에서 말하는 지혜성은 아무리 가봐야 100년밖에 못 간다. 끽 가봐야 자기 살아생전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지혜는 영원무궁이다. 영원을 내다보는 하나님의 지혜다. 그리고 그 지혜는 과거 현재 미래적으로 변하지 않는다. 그 지식도 변하지 않는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의 인도로 애굽을 탈출하여 약속의 땅을 향해서 떠나는 것이 하나님 인도더라. 죄악권 사망권 안에서 살던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의 사자의 인도로 광야로 나가는 것이, 광야에서 말씀의 인도를 받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다.
다시 교훈적으로 말하면 현재 자기 속에 세상이 잔뜩 들어있는 이건 짐이다. 자기가 생각하고 있는 모든 것이 물건이고, 세상 눈에 보이는 거고, 큰 거고, 먹는 거고, 입는 거고, 자동차요 집이다. 이런 건 다 물건이요 물질이다. 그것이 머릿속에 마음속에 가득 들어있으면 사람이 무거워진다. 골치 아픈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와서 나를 지혜자로 만들 때는 몸 밖에 있는 그런 것은 몸 밖에 두게 된다. 왜 그걸 가지고 와서 자기 몸에 집어넣겠느냐? 무겁게 왜 그걸 자기 몸에 넣겠느냐? 그리고 하나님의 진리지혜 지식이 들어와서 몸 밖에 있는 것을 이용 활용하게 된다. 이러면 사람의 마음이 즐겁고 머리가 가볍고 기쁘다.
이치적으로 생각을 하라. 예수 바로 믿는 건 이치를 깨닫는 거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길 나에게 오는 자는 짐이 가벼워진다고 했다. 그러니까 세상 염려 걱정 그게 물질이요 사건이요 일이니 그건 예수님 앞에 내려놔라. 내려놓으라는 것은 네가 걱정 근심한다고 해서 그게 이루어지고 안 이루어지고 그게 아니고 사람이 먼저 지혜지식의 사람이 되라는 것이다.
세상 것으로 소원 목적이 들어있으면 이치적으로 말하면 그 사람은 물구나무를 선 사람과 같다. 물구나무를 서면 지구를 자기 머리에 이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정상적인 사람은 발이 땅을 밟는 것이다. 그래야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한다. 이게 이치다. 이치적으로 생각을 하라.
예수 믿는 사람이 세상 것으로 소원 목적한다면 그 사람은 물구나무를 선 것과 같으니 그 사람이 얼마나 가겠느냐? 이건 사람 사는 이치가 아니다. 힘들다. 고통스럽게 사는 거다. 예수님께서 오심은 그걸 이치적으로 바로 만드는 것이다.
우리가 사는 순서는 첫째는 하나님이고 그 다음이 인간이다. 그리고 인간 다음에는 세상 물질 일 사건이다. 존귀적 순서가 하나님 다음에 인간 나다. 하나님과 인간 나 사이에 아무 것도 끼우지 말라. 예수 믿는 자가 그 사이에 세상을 끼워놓고 왜 자꾸 이뤄달라는 것이냐? 이건 벌써 그 기도가 틀린 것이다. 마귀는 자꾸 그렇게 하라고 가르쳐 준다. 거짓 종들은 자꾸 그런 기도를 하라고 시킨다.
광야에서 말씀의 인도를 받는 것이 복음이다. 복음은 뭐냐? 단순히 죽어서 천국 간다만 아니라 복음은 너를 영능의 실력자로 만들어서 당당하게 천국에 들어가게 한다. 나를 실력자로 만들어서 천국에 들어가게 한다. 이 복음의 실력자는 이 세상에서도 자기의 판도가 그만큼 넓어진다.
이방 불신세상은 대포나 총칼을 가지고 사람을 죽이면서 정복을 하지만 복음의 정복은 마음의 가운데로 정복이 들어가는데, 진리와 아가페 사랑으로 살리는 것으로 정복이 들어간다. 이게 복음이요 이게 전도다. 이게 믿음이다. 이게 믿음의 사람의 실력이다. 사람을 살리면서, 죽은 마음을 살리면서 정복이 들어간다. 그러니까 이 정복은 현재 세상의 민족과 국경을 초월하는 것이다.
복음대로만 받아들이는 나라, 복음대로만 받아들이는 가정, 복음대로만 받아들이는 사람은 정말 하나님 앞에 존귀 영광자다. 멋있는 사람이다. 물질계가 신령계가 바로 그 사람을 높이 올려준다. 예수 믿는 멋을 알아라. (계속)
김경형목사님이 15년 이상 진행해온 신학 및 성경연구 정례집회에 참석하실 분은 031-207-5159, 또는 010-8886-5159 김경형목사님께 문의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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