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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막10:39-4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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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호경 교수 |
참고 : | http://www.saegilchurch.or.kr/133749 |
무익한 사랑 (마가복음 10:39-40)
2013년 3월 24일 주일예배
김호경 교수 (서울장신대학교 신약학)
우리는 지금 사순절이라는 절기를 지나고 있습니다. 사순절은 십자가에 돌아가시기까지 예수님의 고난을 기억하며 그 의미를 돌아보는 기간입니다. 이는 결국 예수님의 죽음을 돌아보는 기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죽음을 향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제자도 죽음을 향해 가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러나 성경을 읽다보면, 종종 그런 생각이 듭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정말 죽음으로 향하는 예수님의 길을 잘 이해했을까? 하는 생각 말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그런 것 같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죽음에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제자들의 태도는 사순절을 보내는 우리에게 반면교사역할을 합니다. 저렇게 하면 안 되겠다는 것이지요.
마가복음 8장 27절 이하에서 보면,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고 묻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무엇이라고 합니까? 31절에서 예수님이 죽을 것을 예고합니다. 그러니 베드로가 무엇이라고 합니까? 32절에서 베드로가 예수에게 항변했다고 합니다. 여기서 ‘항변했다’는 것은 33절에 나오는 ‘꾸짖다’와 같은 말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자신이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이라고 하니까 예수님을 야단칩니다. 예수님의 죽음 따위는 생각해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한다, 고 말합니다. 그리고 다시 9장 31절에서 예수님은 또 예루살렘에서의 죽음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니 이번에는 제자들이 어떻게 합니까? 제자들은 그것이 무슨 말씀인줄 깨닫지도 못하고, 무서워서 묻지도 못합니다. 그리고 가버나움에 도착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길에서 너희가 무엇 때문에 논쟁했느냐고 묻습니다. 예수님이 죽을 것이라는 소리를 듣고 예수님에게 묻지 못했지만, 자기들끼리는 무슨 이야기를 하면서 온 것입니다. 이들은 무슨 이야기를 했습니까? 서로 누가 크냐고 물었습니다. 어떠십니까? 예수님이 죽을 것이라고 하는데, 제자들의 관심은 누가 큰 지에 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죽음이 아니라, 예수님의 죽음 이후에 자신들의 권력에 관심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정말 예루살렘이 가까워졌습니다. 10장 32-34절에서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고난을 당할 것을 이야기합니다. 마지막 예고입니다. 그러니 제자들의 반응이 어떠합니까? 세베대의 두 아들이 나옵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주의 영광 중에 하나는 우편에, 하나은 좌편에 앉게 해달라고 말합니다. 제자들의 모습을 보십시오. 예수님이 죽는다고 말하지만, 제자들은 눈썹 하나도 까딱하지 않는 듯합니다. 예수님이야 죽든 말든, 산 사람은 살아야지 하는 듯합니다. 이런 제자들의 모습을 보면서, 낯설지 않습니다. 우리는 절기로서 사순절을 지나지만, 이 절기가 끝나면, 혹은 이러한 절기를 지나는 우리의 일상 속에서 예수님의 죽음이나 고난과 같은 것은 별로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우리가 관심을 가지는 무엇입니까? 복입니다. 우리는 예수님 믿고 고난당하려는 사람은 없습니다. 모두 다 예수님 믿고 복 받으려고 합니다. 예수님 믿고 복 받으려는 우리나, 예수님이 죽는다는데, 죽기는 왜 죽느냐고 야단치는 베드로나, 누가 크냐고 서로 싸우는 제자들이나, 이제 본격적으로 한 자리하자고 나온 요한과 야고보나 모두 다를 것이 없습니다.
제자라기보다는 참 염치없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에게서 무엇을 얻어내려고만 하고 예수님과 함께하려고는 하지 않는 자들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염치없는 자들에게 예수님은 제자가 되는 길을 알려줍니다. 10장 38절부터 잘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이 무엇이라고 하십니까?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 하는 도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 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마시는 잔, 예수님이 받는 세례는 예수님의 죽음, 고난을 듯합니다. 너희는 내 좌우편에 앉고 싶어 하는데, 그렇다면 너희가 나와 함께 고난을 받을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제자들이 뭐라고 합니까? 할 수 있습니다, 라고 합니다. 고난을 받을 수 있다, 예수님과 함께 죽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그들에게 답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본문 말씀입니다. 내가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내가 받는 세례를 받으려니와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내가 줄 것이 아니라 누구를 위하여 준비되었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너희가 나와 함께 고난을 맏을 수 있다니, 고난을 받아라, 그러나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하나님이 하실 일이다, 라는 말입니다. 이 말씀의 뜻은 무엇입니까? 고난을 받아라, 그러나 그것으로 인한 상이 어떨지는 모르겠다, 라는 말입니다.
어떻습니까? 놀랍지 않습니까? 여러분은 어떤 말씀을 듣고 싶어 합니까? 우리가 듣고 싶어 하는 복음은, 고난을 받아라, 받기만 하면 내 좌우편에 앉을 것이다, 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예수님은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나와 함께 고난을 받아라, 그러나 그 뒤는 나는 모른다.” 입니다. 이것은 무슨 뜻이겠습니까? 나와 함께 고난을 받아라, 그러나 그 뒤는 제발 계산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계산하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저는 여기서 복음의 진정한 의미를 봅니다. 믿음은 무엇인가 계산된 길을 걸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계산하지 않고,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헌신하는 것입니다. 그것뿐입니다. 내가 한 헌신의 결과가 나에게 유익을 주지 않더라도, 내가 사랑하기 때문에 하는 것, 그것이 믿음입니다. 예수님이 자기를 부인하고 제 십자가를 따르라고 했으니, 죽기까지 예수님을 따르는 것뿐입니다. 내가 그렇게 예수님을 따랐는데, 아무 것도 없다. 그래도 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의 손에 잡히는 것이 없다고 하더라도, 여러분에게 어떤 유익을 주지 않더라도, 그냥 믿는 것, 그리고 다른 것을 요구하지 않는 것 그것이 믿음입니다.
내가 믿었는데, 내가 헌신했는데, 이것을, 혹은 저것을 내놓으라고 하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 무엇입니까? 거래입니다. 거래는 어기서 합니까? 거래는 시장에서 하는 행위입니다. 교회는 하나님과 거래하는 장소가 압니다. 교회는 믿음을 보이는 장소입니다. 예수님이 먹는 잔을 먹고, 예수님이 받는 세례를 받겠다고 결단하는 곳입니다. 그 외에 다른 것은 하나님의 소관이니 아예 생각도 않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소관까지 내가 다 계산해서 감 놔라 대추 놔라 하니, 한국 교회에서 가장 없는 것이 무엇인줄 아십니까? 은혜입니다. 은혜는 선물입니다. 예기치 않은, 우리의 계산을 뛰어넘는 선물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속으로는 다 계산하고 있습니다. 이만큼 했으니... 알아서 해주시겠지. 그러니 말이 은혜지 은혜가 아닙니다. 우리는 은혜를 경험하기 힘듭니다. 그래서 일이 잘 안되면, 우리는 이렇게 한탄합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예수님은 죽기까지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였습니다. 그 뜻이 죽는 것이었기에 그냥 죽습니다. 그것뿐입니다. 살린 것은 하나님입니다. 부활이 놀라운 것은 그것이 누구에 의해서도, 예수님에 의해서도 계산되지 않은 하나님의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고난을 기억하는 이 사순절은 우리의 믿음을 다시 점검하게 합니다. 우리가 얼마나 약사 빠른 존재이며, 치밀한 계산쟁이인지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으로부터 믿음과 은혜가 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합니다. 그러므로 사순절 예수님의 고난을 생각하면서 우리는 무익한, 계산되지 않은 믿음으로 돌아갔으면 합니다. 내가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내가 받는 세례를 받으려니와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내가 줄 것이 아니라 누구를 위하여 준비되었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내가 할 것과 하나님의 할 것을 혼동하시지 마시기 바랍니다. 내게 유익이 없다고 하더라도, 내가 예수님을 믿는다면, 그를 위해서 고난받고 헌신하며, 그와 함께 죽는 것, 그것만이 믿음이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책이나 드라마를 보면 종종 이런 장면이 나옵니다. 집을 나간 아버지를 기다리며 어머니는 매번 돌아오지 않는 아버지의 밥주발을 챙깁니다. 때로 오랜 시간이 걸려 아버지가 돌아오기도 하지만, 아버지는 이미 세상을 떠난 지 오래 되었기도 합니다.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을 것입니다. 그럴 때 매 식사 때마다 상에 올라오는 아버지의 밥주발은 우리를 슬프게 합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돌아오지 않는다고 하여서 그 밥주발이 다 무익한 것이었냐, 저는 그렇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는 어떤 어머니의 아들을 알고 있습니다. 그 아들이 가장 속상하게 생각했던 어머니의 모습이 있습니다. 자신이 군대에 갔던 3년 동안 어머니가 한 번도 불을 때지 않은 골방에서 지내셨다는 것입니다. 아들은 3년 내내 그것이 불만이었습니다. 어머니의 고생은 무익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어머니가 골방에서 주무신다고 해서, 아들이 훈련을 덜 받는 것도 아니고 보초를 안 선 것도 아닙니다. 어머니만 생고생했을 뿐입니다. 아들은 화가 났지만, 그래서 늘 어머니의 골방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를 물었습니다. 그리고 가톨릭 신부가 된 그 아들은 자신의 삶이 하나님께 그런 모습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은 것이지만, 내가 너와 함께 한다는 의지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제 신앙도 그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돌아오지 않는 아버지를 기다리는 어머니의 따뜻한 밥주발이나 훈련받는 아들을 기다리는 어머니의 골방처럼, 그냥 내가 당신을 기억하고 있다는, 당신에게 힘을 주고 싶다는, 당신이 하는 일을 함께 하고 싶다는, 당신이 원하는 것을 하고 싶다는 그것을 담백하게 드러내는 것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냥 당신이 좋아서 그 일을, 그 일의 결과에 상관없이,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무모해보이고, 쓸모없이 보이는 그 일을 하고 싶습니다. 그것이 이미 나의 삶에게 큰 일을 이루어주신 하나님에 대한 유일한 응답이지 않을까, 합니다. 이미 더 이상 요구할 것도 없이 내 삶을 채워주셨기 때문입니다. 더 좋은 집이 있으면 좋겠지만, 더 좋은 직장이 있으면 좋겠지만, 더 많은 돈이 있으면 좋겠지만, 더 큰 명예가 있으면 좋겠지만, 저는 이미 구원이라는 당혹스러운 선물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아무 한 것도 없이 말입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은 실로 무익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거래할 수 있는 조건이 못되는 하잘 것 없는 것들입니다. 그것으로 하나님의 일이 엄청나게 바뀌지 않으며, 우리가 없으면 큰 일 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내가 따뜻한 밥주발이나 차가운 골방 같은 사랑을 부으면, 그 무익한 일을 기쁨으로 받아들입니다. 우리의 삶을 보고 하나님이 기뻐한다면, 그것으로 족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기뻐한다니, 그것 이상의 놀라움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그 기쁨이 나의 기쁨이 된다면, 다른 아무 것도 바라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우리의 시작인 부활입니다. 우리를 욕심과 죽음으로부터 하나님이 일으키셨기 때문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주님이 저희 안에서, 저희와 함께 일하실 수 있도록,
저희들의 삶을 주님 앞에 내놓습니다.
주님이 기뻐하는 그것을 기뻐하며,
주님이 원하는 그것을 소원할 수 있도록,
저희의 마음과 영혼이 주님을 향할 수 있도록,
저희 삶을 인도하여 주시기를 바라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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