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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눅7:17-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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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경형목사 |
참고 : | 궁극교회 주일예배 |
7장 17절-22절.
17절-20절: 예수께 대한 이 소문이 온 유대와 사방에 두루 퍼지니라 요한의 제자들이 이 모든 일을 그에게 고하니 요한이 그 제자 중 둘을 불러 주께 보내어 가로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하라 하매 저희가 예수께 나아가 가로되 세례요한이 우리를 보내어 당신께 말하기를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하더이다 하니.
그 분은 세례요한을 너무나 잘 아십니다. 왜냐하면 선재적 그리스도로 계실 때, 예수님이 성육신으로 오시기 전에 하늘나라에서 선재적 그리스도로 계실 때 세례요한을 당신이 보내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세례요한이 날 것을 성전 안에서 전 안에서 요한의 아버지에게 미리 얘기해줬지요. 그러니까 그 분은 너무나 세례요한을 잘 아신다 그 말이요.
세례요한의 사명은 먼저 와서 예수님을 소개하고 만나게 해주는 역할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오시면 ‘내가 말하던 분이 바로 이 분이다’ 하고 세례요한의 일은 이제 끝나는 겁니다. 사실은 세례요한도 요한의 제자들도 모두 다 예수님의 신실한 종들입니다. 알고 보면. 신실한 종들은 자기자랑을 아니하고 예수님을 자랑합니다. 지금 세례요한의 역할 속에서 이런 성질이 들어있는 것을 계시적으로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하나님의 진리본질인 예수님을 소개하는 겁니다. 예수님 자랑에는 영원 전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구원인 겁니다.
예수님을 자랑한다 그러면 ‘아이고 예수님, 훌륭한 분입니다. 예수님은 하늘나라에서 오셨습니다’ 그게 예수님 자랑보다도 이미 성경에서 계시적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은 예수님 자랑을 하시는구나. ‘아, 저 분이 예수님 자랑을 하시는구나.’ 그 내용의 맛은 영원 전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구원이라 그 말이요. 우리의 구원을 말하게 되면 ‘아, 이 분은 예수님을 자랑을 하고 있구나.’ 무슨 말인지 알아요? 말속의 말을 찾아야 된다. 말속에 말이 있다. 말속에 말이 있어.
예수님 자랑에는 영원 전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구원 즉 인간창조의 원인과 동기와 목적입니다. 인간창조의 원인 동기 목적의 내용이 들어있는 것은 누구 자랑이라? 예수님 자랑. 예수자랑은 구원. 예수는 구원이니까. 뭐가 구원이냐? 길이요 진리요 생명을 갖고 있으면 그건 구원이라. 예수님 속에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으로 원료뭉치가 들어있어. 그걸 가지면 구원이고 예수 믿는 거고 예수님의 성질이 나오게 돼있고 성격이 나오게 돼있고. 이해됩니까? 지금? 과일들이 모양새는 무슨 과일 무슨 과일 그렇지만 이게 맛을 못 내면 모양새는 과일인데 맛이 아니란 말이요. 그런 거와 같다.
요즘 어떻게 고구마 썩은 게 많지요? 요즘 고구마. 겉으로는 표시가 없어요. 정말 진짜 고구마요. 표시가 없는데 이게 쪼개보면 다르고, 더 확실한 것은 삶아가지고 보면 속이 이상하게. 고구마는 물론 썩으면 통째로 썩겠지만 바깥보다도 왜 가운데가 먼저 썩지요? 이상하지요? 그걸 봤어. 겉으로는 몰라요. 속을 보기 전에는. 감자 썩은 것은 어떻게 먹는 모양인데 고구마 썩은 것은 못 먹는단 말이요. 써서 못 먹어. 겉으로는 멀쩡한데. 그런 것처럼 예수 믿는다. 예수교인으로서 겉으로는 말짱한데 예수제자 교인처럼 보이는데 속이 팍 썩어버렸어. 그러면 내용면에서 이게 질이 아니란 말이요. 그런 것처럼 그 말이요.
예수자랑하고 싶으냐? 예수자랑을 하고 싶다면 인간창조의 원인 동기 목적을 말하면 그건 예수자랑이 되는 거요. 그럼 인간창조의 원인 동기 목적을 또 이치 있게 말하자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요, 이게 또 들어가 있어요.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가 없어. 예를 들면 부모자식을 말하게 되면 그 안에는 아들도 들어있고 딸도 들어있고 엄마도 아버지도 들어있고 형제들도 이게 자동적으로 내용이 딱 되듯이. 그걸 알아야 된다.
오늘날 이게 내용면에서 질이 구원이 아니면 그건 세상이 돼버려. 예수자랑이 안 돼버려요. ‘저 사람 참 공부 잘한다. 저 학생 공부 참 잘한다’ 말만 그럴게 아니라 공부 잘하는지, 안 하는지 그 사람 학생 속에 들어있는 것이 시험 칠 때에 실질적으로 나온단 말이요. 안에 들어있는 내용이 나온다 그 말이요. 그게 이제 잘 하는지, 못하는지 알지. 그런 것처럼. 거미 뱃속에는 뭐가 들어있어요? 거미줄. 거미줄이 안 나오면 이게 어떻게 거미요? 안에서 내용이 나와야지. 자꾸. 저는 실속적인 것을 영양적인 것을 말씀드리는 거요. 안의 내용.
모르는 사람을 만나서 ‘아이고, 예수 믿으십시오.’ 그것도 물론 지나가는 말로. 말 자체는 ‘예수 믿으십시오.’ 그런데 앉아서 말하는 것이 ‘예수 믿으면 부자 되고요 뭐 어쩌고요 병도 낫고요.’ 그게 예수 증거입니까? 앉아서 ‘예수 믿으십시오’ 그 말 자체는 안 했어. 그러나 ‘사람은 이렇게 사는 거고 어디서부터 왔고 사는 동안에 무엇을 해야 되고 죽어서 어디로 갑니다.’ 이게 예수증거란 말이요. 예수님이 오셔서 그걸 다 증거하고 갔으니까.
그럼 예수님이 하늘나라에 오셔서 어느 고을을 그냥 길로 가면서 ‘내가 예수다.’ 저기 가서도 ‘내가 예수다’ 그럼 그게 예수증거요? 말이 안 되지. ‘뭐가 예수 증거냐’ 할 때는 예수님 안에 든 것을 내용적으로 다 낸단 말이요. 그게 바로 예수라는 증거라. 그게 바로 구원이라는 증거라. 이게. 이해가십니까?
사람도 자기 자식 이름을 요셉이라고 지어놓고 이름만 생각하는 모양인데 아니요. 내용이 요셉의 정신 정신이 나와야 그게 요셉이란 말이요. 질적으로 요셉이란 말이요. 이름은 다르더라도. 근데 요셉이라 덩그렇게 이름을 지어놓고 안에 요셉이 아니라 무슨 마귀새끼가 들어앉아있는데 이게 어떻게 요셉이요? 이게? 진짜 요셉이 나오면 때려죽이려고 그럴 거야. 안 그렇겠어요? 세상에 남의 이름을 도용해가지고. 세상에 남의 이름 도용하면 법에 걸리지요? 상표 같은 거 도용하면 걸리잖아요.
세상은 껍데기만 갖고 이러쿵저러쿵 해요. 예, 우리교회서는 내용입니다. 자기 속에 뭐가 들었는지? 참 하나님의 본질에 대한 신앙을 모르거나 하면 이는 종들을 찾아가서 배우고 깨달아서 천국복음인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지으신 원인 동기 목적을 바로 가르치고, 그게 천국복음이요. 하나님의 온전을 닮아야 하는 거다. 그게 교인이고 그게 성도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이고 신의 사람이고 신의 아들이고 그게 예수님이 제자고. 예수 믿는다면서 예수님을 닮지 못했다면 어디다 쓸 거요? 거짓말쟁이지. 이게.
다니면서 전도도 안 하면서 누구한테 말해도 ‘나는 전도사요.’ 언제 전도했어요? 전도사가 뭐요? 전도를 해야 전도사지. 안 그래요? 우리교회도 전도 잘하는 사람 있으면 전도사로 세울 거요. 명칭 호칭은 전도사라 그래놓고 전도 하나도 못하고 이게 뭐요? 그게 어떻게 전도사요? 그게. ‘선생이다. 나는 선생이다.’ 하나도 가르치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게 선생이요? 이게 가짜 아니냐? 오늘날 교회 이게 큰 폐단이요. 이거. 하나님의 성호를 예, ‘전도사 목사 장로’ 하는 이거 전부 다, ‘집사’ 하는 거 하나님 앞에서 성호에요. 이게. 이름을 가졌으면 직분을 가졌으면 직분에 합당한 사람으로 만들어져야지 그냥 불러주는 거.
저는 늘 얘기합니다만 목사님들 많이 계시는 곳에서 나는 여자목사님들 참 못마땅해서 죽겠다. 이상하게 보면 속에서 마땅성이 성질이 속에서 꽉 올라와버려요. 여자목사님들에게 ‘아무개 목사님’ 나는 이게 자꾸 부를 수도 없고 안 부를 수도 없고 왜 이렇게 사람을 답답하게 만드느냐 그 말이요. 이게 복장 터질 노릇이다. 이게.
언제 성경에 뭐 여자목사가 있었나요? 일은 남자들이 주로 하고, 또 남자들이 일을 해야 돼. 여자는 상당히 뭐가 자신 몸에 대해서도 걸리는 것이 참 많아요. 근데 이거 뭐 정말 세상 끝이 다 됐어. 그래서 이거 가만 보면 요한계시록에도 보면 여자가 짐승 타도 앉은 것, 여자가 물 타고 앉은 것, 여자가 산 타고 앉은 것. 딱 맞다. 어떻게 그렇게 고집도 세고 속도 좁아 터졌고 돈 그저 좋아하고. 딱 맞다. 딱 맞는 거다. 이게 물론 크게 말하면 교회요 교회가 그런 사람들이지 딱 맞구나. 본능적인 죄적인 것으로 나가는 이거는 전혀 안 고치려고 무슨 소리하면 금방 얼굴에 표시가 나요. 금방 이게 먹구름이 확 끼었어요. 눈은 작아도 그런 거 잘 봐요. 참 이거 정말 요한계시록에 문자적으로 봐도 그렇구나. 그리고 이제 또 ‘얼마나 남자목사님들이 못 가르쳤으면 이럴까?’ 또 그런 게 나오지. 한 가정에서 아버지 남자로서 이게 안 되면 여자가 천상 바지 입고 남자행세를 하듯이 그런 거와 같아요. 참 이거 본질에 대한 신앙을 모르면 모른다고 해야지.
다른 복음 즉 세상복음이나 이방우상적인 고행이나 신비적인 체험을 가르치고 주장한다고 하는 것은 이것은 하나님의 종이 아닙니다. 이건 마귀의 종이요. 예수님과 이게 대적적인 일을 하는 거짓된 종으로서 이게 심판을 받게 돼있어요. 천국복음이 아닌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는 사단 마귀가 보낸 종입니다.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이방세상 사람들에게 이 말을 묻는다면 ‘예수님 당신 앞에 미리 보내서 당신의 일을 하다가 옥에 갇혔는데 능력 많으신 예수가 당연히 세례요한을 구해내야지요’ 그렇게 말을 한단 말이요. 틀림이 없단 말이요. 그러면 기독교인들에게 또 묻는다면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이 말을 기독교인들에게 묻는다면 대답은 역시 같구나.
만일 지금 우리에게 그 말을 묻는다면 모르긴 해도 같은 대답이 많이 나올 것 같다. 왜? 당신 일을 하다가 감옥 속에 갇혔으니까 그 누가 구해줘야 돼요? 예수님이 구해줘야지. 당연한 거 아니요? 공장에서 일을 하다가 다쳤다. 이거 누가 데려다가 치료해줘야 돼요? 그 공장을 맡고 있는 사장이라든지. 그렇지요? 그런 것처럼 그 말이요. 여기서도 그렇게 말하게 될 것 같다. 내 생각이요.
그러면 우리교인들 생각은 어때요? 세례요한이 감옥 속에 갇혔습니다. 예수님의 일을 하다가 갇혔어요.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제자들을 보내서 물었어요. 예, 그럼 예수님의 대답은 어떻게 나와야 돼요? ‘그래, 내가 가서 구해주지. 나쁜 놈들, 좋은 일하는데 왜 세례요한을 가둬버렸어’ 하고 이렇게 나와야 되는 것 아니냐 그 말이요. 일반적으로 그 말이요. 맞잖아요? 대답이 없어? 안다 그 말이지? 허허허.
예수님께서 세례요한이 보낸 제자들에게 대답을 해주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하시는 일 곧 당신의 일을 보여줬습니다. 그렇지요? 대답을 하기 전에 21절에 당신이 하는 일을 직접 보여줬다 그 말이요. 이해가 돼요? 점심을 안 드셨나. 청년들 특송.
21절: 마침 그 시에 예수께서 질병과 고통과 및 악귀 들린 자를 많이 고치시며 또 많은 소경을 보게 하신지라.
세례요한이 보낸 제자들에게 대답을 해주시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하시는 일 곧 당신의 일을 보여주었습니다. 눈으로. 이 질병 고통 악귀 들린 자 소경 등 신체적으로 어느 부위이든 병으로 온 것이지요? 신체적으로 어느 부위이든 병으로 온 거. 고통은 느낌적으로 감각적으로 아프거나 시달림을 받는 겁니다. 감각적으로 아프거나 시달림을 받는 거. 고통이지요? 악귀 들린 자 이건 정신적으로 오는 겁니다. 정신적으로 오는 거. 많이 작용을 한다 그 말이요. 소경은 시각적으로 오는 것. 사람마다 다 앓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온전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는 것이지요? 육신의 눈으로 보면 소경은 아니지요. 보고 ‘저건 뭐다. 뭐다.’ 육신의 눈마저 흐릿하면 분별을 못하지요? 그럼 눈 수술을 받는다든지 그런 게 있지요.
이 성경 영적으로 보았을 때에 육신의 눈은 밝은데 성경은 읽는데 영의 눈이 어두워서 성경 속의 하나님의 뜻을 분별을 못하는 것은 이게 영적 소경이거든요? 예수님께서 우리의 영인성장을 위해서 왔습니까, 영은 필요가 없고 우리 육신을 위해서 왔습니까? 영인성장. 그래서 우리가 성경을 볼 때에 영인성장 면을 보고 들어가야 된단 말이요. 깔고 들어가야 된단 말이요. 영인성장 면에. 그냥 육신으로만 볼 것 같으면 성경이 무슨 하나님의 말씀이 될 수 있나요? 안 돼요. 그리고 하나님의 온전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정신 마음 그게 다 하나님의 뜻에 속한 거요. 그거 안 볼 바에야 그럼 성경이 제대로 맞아 들어가요? 안 맞아 들어가요. 육신에다가 죄가 갖다 붙인다면 안 맞아 들어가요.
근데 오늘날 많은 교인들이 이 육신에다가 그냥 붙여버린단 말이요. 그러니까 하나님 보시기에 영인성장 면에 영적 상태 이거는 참말로 바보야. 멍텅구리야. 이게 마귀새끼들이요. 죄다. 하나도 쓸모없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들어놓은 가치가 없단 말이요. 이제. 그러니까 불로 싸질러버리는 거야. 이건 쓰레기니까 쓸모가 있어야지.
오늘날 자기에게 뭐 딴 것도 많이 있겠습니다만 가만히 생각해봐요. 자기에게 부족성이 없나? 자라지 않은 것은 없나? 알지 못하고 헛똑똑이는 없나? 안다싱이나 없나? 안다싱이 뭐요? 뭐든지 안다는 게 안다싱이요. 이거. 우리교회서는 신종용어가 많아요. 듣다보면 ‘저게 무슨 소리인가’ 하지. 특히 예수 믿는 사람들 중에 특히 목사님들 중에는 ‘그래도’ 하는 그래도 병이 있습니다. 이름도 없는 병이 참 많아요. 내가 한 가지씩 지어줄 테니까.
단순히 육신의 병만 생각하면 안 됩니다. 우리 모두 자기에게 필요한 영인성장 면에서 영적 계시가 들어있다는 말씀이요. 육신만 생각하게 되면 눈에 보이는 쪽 세상 쪽 일 쪽 사건 쪽으로만 향한 그런 생각을 갖게 되는데, 그 면으로만 해석하게 되면 성경은 해석이 안 돼. 다 틀려버려. 안 돼요. 안 돼. 오늘날 세상 쪽으로 흐르는 교회가 성경해석인줄 압니까? 그건 아니에요. 저기 뭐야? 보면 체육관인가 운동장 빌려가지고 잘하는 분들 있데요. 신문에 나온 거 가만 봐요. 이건 아니다. 이치가 틀렸다. 그러니 그것도 못 알아듣고 쏠리고 있으니 이거 어쩌면 좋을까? 캄캄하다.
육적으로도 안 맞고 세상적으로도 안 맞고 영적으로도 안 맞고 이치도 안 맞고, 이것도 안 맞고 저것도 안 맞고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도 맞지를 않고 하나님의 말씀인 성령의 감동으로 쓰인 이 하나님의 말씀도 다 틀리게 되고. 그러니까 하나도 안 맞아요. 하나도 안 맞으면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외쳐 되니 이게 누구의 짓이겠냐? 이게 마귀의 짓이 되는 거다. 이거.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그러면서 교인들의 머리통을 휘저어 버렸으니 얼마나 어지럽냐? 그런 짓을 하는 거다. 그런 짓을. 그런데 영적 기준으로 하나님의 본질적 입장에서 영적 기준으로 보면 하나도 틀린 것이 없고 다 들어맞습니다. 다 들어맞아. 안 맞는 게 없다. 다 들어맞아.
22절: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가서 보고 들은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소경이 보며’: 이 육신의 소경은 모든 세상 우주만물을 볼 수가 없습니다. 그렇지요? 눈앞에 있다는 건 뭐요? 눈에 보이는 건 깜깜한 거만 보이는 거요. 사실 날 때부터 이게 소경이란다면 태어날 때부터 소경이란다면 밝은 걸 알겠습니까? 무엇을 말한들 알겠습니까? 그냥 깜깜한 거요. 사람을 말해도 깜깜, 나무를 말해도 깜깜, 세상 돌아가는 걸 말해도 깜깜. 깜깜 무소식이요. 그냥 깜깜한 거밖에 없다. 캄캄한 사람보고 낮인데 ‘날씨 참 좋다. 밝다’ 그러면 그 사람이 알까요? 알겠느냐고요? 이게 상상을 못하는 거요. 안 되는 거요. 또 눈앞에 무슨 존재가 있다는 것을 느끼겠는데 그러나 볼 수가 없구나. 고저와 장광과 색상과 형태도 알 수가 없습니다. 만져본다고 해도 어림 잡이지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 낮과 밤은 모두 깜깜이요, 자기 주관적으로 판단하고 말할 뿐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말을 해도 알지 못하고 말한다 그 말이요. 알지 못하고. 맞잖아요? 알지 못하고 말을 한다.
영적 소경을 우리가 또 생각해 봅니다. 영원 전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기의 구원을 두고 세상 모든 만물과 만사를 진행시키고 있는데 인간 자기를 위해서 그렇게 세상을 잡아 돌리고 있는데 그 목적도 모르고 만사가 역사가 왜 진행이 되는지 그것도 모르고 하나님도 모르고 마치 이성 없는 동물처럼 사는 자기다. 눈앞에 코앞에 있는 그것만 보고 배고프면 밥 먹고 그저. 그 참 영적 차원을 놓고 가만 생각하면 현재적 자기가 얼마나 답답할까? 그거 못 느끼겠어요? 그냥 배만 부르면 된 거지요? 배부르고 집에 가서 텔레비전보고 그저 텔레비전에 남 하는 거나 보고 웃고 그저 밤 되면 자고. 뭐 그런 거지요? 그런 차원의 인생 이게 얼마나 답답할까?
예수로 말미암아 소경이 눈을 떠서 볼 수 있게 되면 이제는 끌려 다니지 않고, 소경은 끌려 다니는 겁니다. 그 소경 가만히 생각해봐요. 소경도 사람인데 도대체 오죽 못났으면 이 죽은 막대기가 인도를 하는구나. 맞잖아요? 죽은 막대기가 그 소경을 인도하는구나. 그래서 소경은 막대기를 놓치면 안 되지요? 맞잖아요? 그 참 소경이 아닌 사람은 그냥 막대기 같은 거 지팡이 같은 거 들고 다닌다면 그것도 귀찮아요. 근데 소경은 귀찮아도 꼭 들고 다녀야 돼. 막대기가 아니라면 하다못해 개를 불러가지고 ‘내 길 인도해다오’ 그래야 된단 말이요. 그러니 개는 소경을 인도하느라고 얼마나 또 힘이 들까?
한 번 생각해봐요. 개는 쓰레기통 뒤지고 동네마다 뛰어놀기를 잘하고 그런데 소경에게 붙들려가지고 이게 얼마나 생고생이냐? 이게. 그러니까 개는 개처럼 못 사는 거지. 개는 개처럼 살아야 개거든? 근데 소경을 인도하니 그래도 참 개가 희생이 되니 참 좋은 개로구나. 그럽니까? 개가 사람을 인도해주니 좋은 개로구나. 그렇습니까? 그 참 뭔가 씁쓰름하다. 사람을 인도해줘도 개가 뭐 사람의 호적에 올려주기나 할까? 늙고 병들면 탕으로 들어가야지 뭐. 참 그거 사람이 모르면 만물이 고통을 겪어요. 인간 자기 때문에. 인간 자기가 머리를 잘못 쓰다가 손으로 칼 가지고 뭘 하다가 배어버린단 말이요. 그럼 손이 얼마나 고통을 당해요. 눈이 좀 잘 보고 머리는 생각을 잘해서 이래야 되겠는데.
이제는 눈이 밝으니 끌려 다니지 않고 모든 면에 분별이 되니 구별이 되니 속지 않을 것이고. 제가 말씀드렸나? 서울 처음 올라와서 길을 물으니까 예, 한 사람은 ‘저리로 가라’ 그러고 한 사람은 저리로 반대로 가르치니 한참 가다보니 이거 어떻게 된 거냐? 길 모르면 속게 돼있어요. 속게 돼있어요. 그래서 처음 서울에 와서 어떤 사람들에게 묻는 게 제일 좋아요? 경찰관이나 아니면 제일 집 찾을 때 제일 좋은 것은 우체부 배달원. 그 때만 하더라도. 주소 들고 찾으려면 서울도 번지수가 분명히 여기 번지수인데 딴 데 가서 있어. 그 있어요. 그 희한해요. 학생들에게 좀 잘 묻기도 하고 청년들에게나 물으면 이게 딴 데로 가르쳐주고 장난친다고요. 얼마나 고생하는지 몰라. 꼭 알아야 돼요. 어린 학생들, 절대로 고등학생이나 대학생이나 그런 청년들에게 묻지 말아요. 잘못하면 큰일 나. 지서를 찾아가든지 순경 찾아서 묻든지.
영원 전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기의 구원을 알게 되니 하나님을 바로 알고 하나님을 섬길 수가 있는 겁니다. 눈이 밝아야 섬길 수가 있어. 구별되고.
‘앉은뱅이가 걸으며’: 앉은뱅이는 땅에 붙은 사람이지요? 걸어 다니는 기능이 안 됩니다. 걸어 다니는 기능이 안 돼. 땅에 항상 앉아 있습니다. 그러니까 누군가가 옮겨줘야 하지요. 맞지요? 활동하는 건설은 안 됩니다. 이렇게 저렇게 돌아다니면서 이게 건설은 할 수가 없어. 생활은 해야 되겠고 그래서 먹고 마셔야 되니까 구걸하는 수밖에 없다. 앉은뱅이는 구걸하는 수밖에 없다. 허기야 소경도 구걸하더라고. 소경이 할 수 있는 일은 뭘까? 가만 생각하면 있을 것 같아요. 그러니까 눈은 소경이 됐지만 딴 것은 다 움직인다면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 면으로 뭐든지. 손이 없는 사람은 발을 가지고 손 노릇. 발을 가지고 칫솔 끼워서 이빨 닦고. 그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해야 될까?
이 육적 앉은뱅이는 구걸하는 수밖에 없다. 그렇겠구나. 영적 앉은뱅이는 소원과 목적이 땅에 붙어있습니다. 영적 앉은뱅이가 소원 목적이 땅에 붙어 있다. 소원 목적이 땅에 붙어 있는 사람 많지요? 예수 믿는 사람 중에 세상 속화된 교인들은 다 땅에 붙어있어. 안 믿는 사람은 아예 땅에 이건 엎드려 붙어있는 거고. 세상 땅의 것에다가 소원 목적을 두고 산다면 그는 영적 면에서 앉은뱅이입니다. 그러니까 진정한 의미에서 자유가 없습니다. 그럼 환경의 소산으로 살아요. 환경 따라서 울고 웃고 한다는 말이 되는 거지요. 이게 영적 앉은뱅이.
앉은뱅이가 고침을 받으면 하늘의 것으로 가치 있게 여기고 소원 목적하고 자유 하는 자로 환경을 지배하고 다스리고 하나님의 온전한 인격의 성품의 사람으로 영인성장을 잘하게 됩니다. 이게 자유자요. 영인성장을 잘하게 된다. 이방세상 사람들과 모든 것이 질적으로 다른 사고방식과 이해타산 평가 판단을 가지게 됩니다. 영적 앉은뱅이가 고침을 받으면 소원 목적이 천국으로 되고 천국으로 된 사람은 하나님의 온전을 이루어가는 영인성장이 잘되어 들어간다. 사람이 고상해지는 거지요. 이제 일반사람과 질이 확 다르게 성장이 되는 거지요. 말 얘기 들어보면 아, 그 사람의 가치판단 평가가 세상에 내려져있는지 천국에 내려져있는지 그 속의 내용이 다 나온단 말이요. ‘아, 이 사람은 앉은뱅이가 아니다.’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습니다. 완전히 낫는다 그 말이요. 성경은. 문둥이는 가면 갈수록 점점 그 피부골각 신경조직 감각성들이 없어지거나 변형이 되면서 사람이라고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만신창이가 돼버려요. 괴물이 돼버려요. 괴물. 무엇을 말함이냐? 영적으로 죄 아래 사망 아래 놓여진 인간 자체를 말하는 거요. 안 믿는 사람들을 영의 눈을 가지고 보면 그 안에 그 사람 안에 이해타산 사고방식이라든지 소원 목적이라든지 전부는 땅으로 다 들어가 있어요. 그럼 인격 면을 가만 보면 영의 눈을 가지고 영적 인격 면에는 사람 꼴이 아니다. 이건. 사람으로 볼 수가 없다 그 말이요. 맨 먹고 마시고 어떻게 하는 것. 짐승의 요소적인 그런 식으로 그냥 잔뜩 들어있단 말이요. 인격적인 어떤 그런 사람의 형태를 볼 수가 없어.
영의 눈으로 보는 거와 육의 눈으로 보는 거하고 달라요. 육신의 눈으로 볼 때는 아름답고 키도 늘씬하고 ‘와, 멋있다. 내 남편감이다. 내 신랑감이다. 내 아내감이다. S오빠 삼자’ 그래도 영의 눈을 가지고 보면 이게 사람이 아니다. 그게 보이는 거요. 인격 면이나 도덕성적인 면이나. 사람이 하나님 앞에 영인성장적인 면에서 사람의 형태를 알아볼 수가 없어요. 없다 그 말이요. 그게 없다. 만신창이다. 만신창이. 생각하고 소원 목적하고 오각의 오감성이 영적 면에서 이해타산이 되느냐? 하나도 없단 말이요. 하나도 없어. 그걸 알아야 된다.
그 일반적으로 일반차원에서 사람들이 대화를 하다가도 ‘아이고, 저 사람 생김새하고는 전혀 딴 판이구나. 아이고, 속이 팍 썩었구나’ 그런 말 간혹 하잖아요? 말하자면 인간형태 도덕성적인 면으로 이게 안 보인다 그 말이요.
이런 문둥병이 선악과 따먹기 전에 있었습니까? 없었지요? 인간에게 모든 질병과 고통 정신적인 병과 죽음은 선악과 먹은 후에 다 온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은 후에는 생명과를 먹는데, 먹는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온전의 성품을 향한 그 교훈을 받고 자기가 고쳐지는 것으로서 먹는다 그 말이요. 교훈을 받아먹는다. 고쳐진다. 이런 면이 들어있단 말이요. 정말 진리진실을 먹고 길이요 진리요 생명을 먹어 예수님처럼 살아나야 하는 거지요. 예수님을 믿어도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참 이치의 양식을 먹지 않는다면 딴 것을 먹는다면 온전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어지기란 참 어렵다. 참말로 어렵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그 교훈을 먹어라. 그래야 네가 살고 바른 사람 되고 뚜렷한 사람 된다.
귀머거리는 청각 면에 듣는 면에 망가진 거요. 귀머거리는. 왜 이렇게 인간에게 이런 잡병이 많을까? 그러니까 아무 소리도 못 듣고, 따라서 그 소리도 못 느끼는 거요. 귀머거리 옆에서 대포를 쏘면 대포소리가 들릴까요? 전혀 안 들리는 거다. 땅만 울리겠지요. 공기의 어떤 그건 느끼겠지요. 느낌으로. 그러면 대포는 옆에서 쐈는데 땅만 이렇게 뭔가가 울리는 거 같아서 ‘지진이 나려고 그러나?’ 아마 그럴 거라고요. 그 참. 꽃 같은 자기의 아이의 노랫소리도 들을 수 없고 사랑하는 아내의 목소리도 들을 수가 없고 그 어느 누구의 소리도 들을 수도 없고 아무 소리도 들을 수가 없다.
영적 면에서의 귀머거리는 신령천국에 관한 하나님의 소리는 전혀 못 알아듣고 의식도 못합니다. 신령천국의 영원한 행복과 기쁨도 알아들을 수도 없고 영모의 미모성도 모를 것이고 왕 노릇한다고 하는 것도 모를 거라고. 생명강가에 생명나무의 열매가 열린다는 것도 모르고 모르니 그 맛도 어떻게 알겠느냐? 자기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인간으로 사람으로 지은 창조의 원인 동기 목적도 모르는데 무슨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들을 수 있겠느냐?
그런데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이 예수님이 당신 앞에 와서 낫고자 하는 자를 다 고쳐주었습니다. 성경에 보니 고쳐주시더라. 그러나 성경을 안다는 이 바리새교인들은 예수님의 참 실상을 알지도 못하면서 세상과 육에 속한 종교적인 사상을 가지고 자기들은 건강하고 완전한 자처럼 여기고 고치려고 하지도 않았고, 예수님을 알아보고 믿으라는 그 성경을 가지고도 예수님을 못 알아보고 그 성경가지고 예수님을 죽였던 것이지요. 그들은 성경을 가지고도 결국 하나님의 음성을 못 듣고, 성경을 가지고도 하나님의 음성을 못 들었어. 영적 면에서 보는 모든 정신 사상 종교적인 잡병을, 정신면에 또 종교적인 면에 잡병. 병도 하도 많으니까 잡병을 하나도 고침 받지 못하고 형벌을 받아 죽었어요.
교회의 신앙을 하나의 기독교 종교적인 타종교와 같은 그런 사고방식을 가지고 본 것이면 죽도록 충성봉사하고도 형벌은 형벌대로 심판은 심판대로 받고 멸망을 당하는 꼴이 되는 겁니다. 오늘날 그런 차원의 신앙이 만연해있다. 못 고쳐서 그래요. 못 만나서 그래요. 육신만 자꾸 생각을 하고 육신 쪽으로만 자꾸 치달아. 그러니까 어떤 이성적 정신적으로 어떻게 공을 들이고 도를 통한다고 하는 그런 사람들이 별의 별 짓을 다 하는 거요. 참 그러니 사람 꼴이 뭐가 돼. 나머지는 또 다음에 합시다. (계속)
궁극교회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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