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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누가복음 궁극이............... 조회 수 430 추천 수 0 2021.02.17 09:27:25성경본문 : | 눅9:22-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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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경형목사 |
참고 : | 궁극교회 주일예배 |
9장 22절-24절: 가라사대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하리라 하시고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거짓 종 거짓 신앙자들은 육적 가견적 비진리적인 것을 신앙한다. 육적 가견적 비진리적이라는 것은 한 마디로 하면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을 구하고, 가르치기를 세상의 물질 소유적인 면을 많이 가져야 신앙이 있다고 하는 걸 다 의미하는 거다. 그런 신앙들이 아무리 옳은 얘기를 해도 하나님의 진리본질의 생명을 자기가 죽이는 셈이 된다. 그래서 육적 세상적으로 소원 목적을 하고 예수 믿는 사람들은 모두 신앙은 없다.
힘을 쓴다고 신앙이냐? 아니다. 신앙이란 하나님의 기준에 맞추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들은 하나님의 기준에 맞춰진 신앙의 질이 아니다. 신앙이 없다. 천국에 못 간다는 말이 아니라 옳은 신앙이 아니다. 또 그런 식으로 믿는 사람들은 성경을 한 절도 못 깨닫는다. 깨달아도 전부는 물질에 세상에 소원 목적이 갖다 붙어있지 하나님의 뜻은 없다.
이런 것을 이미 경험한 사람들은 정신을 바싹 차려라. 언제 깨닫고 영능의 실력적으로 나갈 것이냐? ‘목회 한다. 안 한다’ 그게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 언제 바로 설 거냐? 바로 서지 못하면 얻어맞는 사건이 오게 된다. 사건이 와도 실력이 있으면 그 사건이 자기의 실력을 키워주는 사건이 되지만 실력이 없으면 자기에게는 얻어맞는 사건이 된다. 이러면 자기에게 온 성령님의 역사성을 죽이는 셈이 된다. 이것을 알게 해 주시려고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의 죽음과 그 고난 그 때 그 사건을 잡고 오신 것이다. 누구에게? 우리에게 오신다.
구원의 예수님을 이방인들이 팔고 죽인 것이 아니라 예수 믿는 사람이 팔았다. 그 때 당시로는 가룟유다가 판 셈이다. 그러면 가룟유다처럼 예수를 파는 자가 오늘날 한 두 사람이냐? 돈 때문에 세상을 가르치고 ‘세상 축복 축복’ 하는 것은 교회 안의 가룟유다이다.
성경을 가진 유대종교의 최고의 직분과 최고의 신분자들이 예수님을 죽였고,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선택된 제자가 사도가 예수님을 받고 넘겨주었다. 그러니까 팔 자는 항상 가깝게 있다. 멀리 있는 사람이 파는 게 아니다.
대제사장들은 나이가 많은 자들이고 공회원들이다. 그 사람들 속에 들어있는 성질들이 증명을 한다. 이들이 무슨 권위를 가지고 하나님의 그리스도를 죽였느냐? ‘나는 장로요’ 하는 그 사람이 죽였고, ‘나는 공회원인데, 나는 결정권이 있는데’ 하는 사람들이 죽였다. 그 역사를 보면 장로가 아니라면 어떻게 예수님을 죽일 수 있었겠느냐?
대제사장은 성전의 성소와 지성소에서 하나님 앞에 백성을 위한 중보의 제사를 드리는 자이다. 이들이 무슨 권위를 가지고 하나님의 그리스도를 죽였느냐? ‘나는 대제사장인데, 나는 하나님 앞에 날마다 제사를 드리는 사람인데 예수 네가 누구냐?’ 하는 권위성을 가지고 죽인다.
서기관들은 율법학자요 성경을 가르치는 교사들이다. 이들이 무슨 권위를 가지고 하나님의 그리스도를 죽였느냐? ‘예수 네가 나만큼 성경을 아느냐?’ 하는 권위성을 가지고 예수님을 죽였다.
역시 마지막 시대인 오늘날도 직분적 또는 전문적 직위적 권위성을 가지고 하나님의 온전을 위한 진리이치를 무시하는 것은 예수 당시의 하나님의 그리스도를 무시하고 죽이는 그들과 똑같은 성질이 들어있다. 자기 속의 자기 주관적인 신앙의 질을 모른 채 예수이름으로 무엇을 크게 만들어 놓으면 신앙 믿음이 좋다고 하는 그것을 가지고 죽인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많이 있다.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하리라.’ 만일 예수를 팔고 죽이는 그들이 예수님이 죽음에서 삼일 만에 살아난다는 것을 안다면 예수님을 죽이려 들까? 죽이니 또 살아난다면 누구의 죄가 더 드러나겠느냐? 죽인 자들의 죄가 더 드러난다.
사람이 죽은 후에 삼일 만에 살아나는 일이 역사적으로 쉬운 일이냐? 그런데 예수님이 살아나셨다고 하니까 이게 그만 하나의 풍습처럼 돼서 그렇게 굳어져 버려서 사람이 죽으면 삼일장을 치른다. 예수님처럼 슬그머니 삼일 안에 살아날까봐서 삼일장을 친다.
그들은 예수님을 죽인 후에 ‘아, 말씀대로 됐구나’ 하고 그 결과를 안다. 그러면 그 결과를 보고서도 예수님을 죽일까? 죽인다. 왜냐? 그들에게는 죽일 수밖에 없는 지식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우리도 예수님께서 살아난 걸 안다. 그 결과를 우리는 안다. 그 결과를 믿는 우리 입장에서 그래도 예수님을 죽일까? 안 죽인다? 그런데 영의 눈으로 보면 죽이고 있다.
영의 눈을 가지고 보는 것은 육신의 생각으로는 생각을 못하는 거다. 육신의 생각을 가지고는 못하기 때문에, 일반생각으로는 못하기 때문에 영의 생각이라고 하는 것이다. 영적인 세계는 일반철학의 고차원적인 지식을 가지고도 안 된다. 세계와 질이 다르기 때문에 그렇다.
예수님이 살아났다고 하니까 악한 자들은 ‘그래? 우리가 또 한 번 죽일 테니 또 살아나나 보자’ 하고 또 죽일 것이다. 그건 왜 그러냐? 어차피 죽이고 싶은 마음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살아난다고 해도 안 믿고, 살아나도 안 믿는 거다. 그러면 제자들은 믿어졌을까? 믿는다고 해도 먼저 죽는 것을 생각한다면 살아나는 것은 생각지 못하고 무서움이 먼저 앞서게 된다.
지금 우리의 신앙정도를 가지고 그 때로 가서 제자들 사이에 서서 본다면, 현재 자기가 이 믿음을 가지고 거기에 간다면 그게 믿어질까? 현재 자기적 신앙을 가지고 그 자리에 가서 본다면 예수님께서 살아난다는 게 믿어질까? 예수님께서 고난을 받고 죽었다가 부활 승천을 하셨는데도 그 자리에서 자기가 진정 본질의 신앙을 가지고 있겠느냐? 무슨 말이냐? 죽었다가 부활 승천할 수밖에 없는 죽지 않는 그 신앙의 질을 자기가 가지고 있느냐? 자기를 가만히 심사해 봐라.
기독교 신앙이란 예수님이 전한 천국복음과 성령님의 역사가, 하나님의 신이 역사한다는 게 기독교 신앙인데 오늘날 믿는 자기가 과연 하나님의 본질에 적중한 신앙을 가지고 있는지? 그냥 교회에 왔다 갔다 하면 성령님의 역사는 없다. 그 때 그 성령님이 지금도 역사를 하시는데 자기가 어느 신앙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역사하고 안 하고 한다. 그것은 자기가 ‘영원한 존귀 영광자가 되느냐, 실패자가 되느냐’가 들어있다.
육의 신앙을 가지고 믿으면 예수를 믿어도 하루하루 죽어간다. 실력적으로 죽어간다. 안 자라난다. 육신도 죽어가고 있는 거고. 그러나 하나님의 본질에 들어서서 질적으로 그런 신앙을 가졌다면 육신은 어차피 시간 따라 늙어지고 쭈그러지고 죽는 거지만 속에서 새사람이 살아난다. 이게 귀하다. 자기 속에 새사람이 주격이 돼서 이 세상을 주격적으로 살아가야지 옛사람이 주격이 돼서 백 날 예수 믿어봐야 한심한 거다.
‘완전히 죽고 무덤에 들어가서 삼일에 살아나야 하리라.’ 일반 인간들 중에, 산에 가서 도통한 사람들 중에 자기가 죽기 전에 이런 말을 한 사람이 있느냐? 혹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은 있는지? ‘죽어서 저승에서 만나자’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이 있느냐? 그러면 우리는 어디서 만나느냐? 천국에서? 현재 이 신앙 같으면 어떻게 천국에서 만나질까? 천국은 어떤 식으로 살까? 물론 실력을 의미하는 거기도 하지만 ‘열 고을 스무 고을을 차지하라’는 것을 보면 자기 신앙의 수준이 산 위에서 살고 있는 건지, 중간에서 살고 있는 건지, 산 아래서 살고 있는 건지? 산 아래 고을에서 살고 있는 것과 같은 신앙의 수준이라면 어떻게 만나질까? 지옥 간다는 것이 아니라 못 만나진다.
세상에서 신앙 믿음이 안 통하느니만큼 천국에 가서도 그만큼 안 통할 것이다. 표현이 그렇다. 천국에서 안 통할 게 어디 있느냐마는 말하자면 이 세상에서 어린아이가 아는 것과 청년이 아는 것과 노인이 아는 것이 다 차이가 있다. 낮은 차원은 높은 차원과는 서로 안 통한다.
젊은 사람들이 자기 생각이 옳다는 게 다 있다. 그러나 조금만 지나봐라. 그게 다가 아니다. 조금만 지나면 또 달라진다. ‘그런 게 있구나’ 하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면 나이가 든 분들은 자기가 가진 것이 절대냐? 아니다. 절대자는 또 있다. 그렇다면 참고적으로 듣고 지혜를 얻어서 자라는 수밖에 없는 건데, 사람이란 강압적으로는 안 된다. 그러나 네가 그런 수준의 생각밖에 안 되느냐? 그러면 얼마 안 있어서 사건이 올 텐데 그 때를 노려라. ‘그 때는 네가 어떻게 하는지 한 번 보자’ 그런 게 있는 거다. 그리고 안다고 하는 우리도 그런 것이 올 것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고 자기를 살펴야 한다. 그게 지혜로운 것이다. 한 번 실수, 두 번 실수, 실수가 많을수록 사람이 자꾸 부끄러워진다. 얼굴을 못 들게 된다.
지옥에서 만나자고 하는 사람은 없다. 천국에서 만나자고 하는 사람은 있다. 저승에 가서 만나자고 하는 사람도 간혹 있다. 예수 믿는 사람이 지옥에서 만나자고 하는 사람은 없다.
예수님은 십자가상에서 우리를 위해서 당신의 피를 다 쏟아놓고, 피를 쏟는다는 것은 생명이 자지러질 때까지. 금방 팍 죽는 게 아니라 ‘서서히’ 라고 하는 그 느낌을 생각해 봐라. 옆구리도 창으로 찔러서 물과 피도 쏟아지고. 몸속에서 돌아다닐 피도 없다. 그리고 죽은 예수님의 시체도 미라처럼 둘둘 감아버렸다. 무덤은 큰 돌로 막았다. 그렇게 했는데도 살아나리라?
예수님께서 자기를 죽인 자들이 당신의 시체를 그렇게 할 것을 모를까? 당신을 어떻게 묶을 것이며, 어느 무덤에 넣을 것을 모르겠느냐? 다 아신다. 사람이 죽어서 붕대 같은 걸로 머리로부터 온 몸을 미라처럼 죄다 감아놓는데 그 상태로 혹 살아난다고 해도 그걸 어떻게 풀겠느냐? 그리고 돌무덤 속에 시체를 넣으면 장정이 큰 돌을 밀어서 그 굴 입구를 막는데 살아난다고 해도 그걸 어떻게 밀고 나올까? 예수님이 그걸 모르고 당신이 살아난다고 하신 것일까? 살아났더라도 우리 인간생각으로 말을 한다면 그걸 누가 풀어주며, 누가 돌을 굴려주느냐? 인간생각으로는 그렇다.
그리고 당신만 살아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까지 몇 명을 살려낸 것도 보여주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까지 다 보여줬는데 예수님을 믿는 기독자들 중에 그 부활된 본질의 신앙을 갖는 자들이 몇 명이나 있을까? 이 질적인 신앙을 가진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자기가 죽은 신앙을 가졌는지, 산 신앙을 가졌는지 생각을 해 봐라. 우리 입장에서는 신앙의 질을 중요시 여긴다.
우리가 예수님을 목회 식으로 본다면 30년을 준비하시고 3년을 목회를 하고 가셨다. 그래서 제자들을 3년을 보고 듣고 만지고 훈련 연단을 시켜서 내보내실 때는 성령의 감화 감동의 진리의 사람으로 만들어서 내보냈다. 그런데 오늘날은 이것저것도 아닌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을 예수의 종이 되겠다고만 하면 막 시켜준다. 그런 수작들이 예수님께서 하신 것과 같은 건지, 마귀가 그런 수작을 부리는 것 같은 건지?
하나님의 그리스도 즉, 메시아가 하시는 일의 본질을 모르면 그 일을 하는 존재를 죽이게 된다. 신앙의 본질을 모르면 사람을 죽이게 된다. 존재만 죽이면 그 일을 못하게 될 것이라는 생각이 마귀의 생각대로 된 당시의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생각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그리스도는 죽지 않는다. 죽이면 죽은 거냐? 아니다. 한 술 더 떠서 죽지 않을 자로 살아난다. 죽이면 인간 너 보기에 죽은 것 같으냐? 아니다. 영원히 죽지 않는 자로 또 살아난다. 이게 신앙의 세계다.
영원히 죽지 않는 분으로 살아계셔서 하는 일은 우리에게도 영원히 죽지 않는 하나님의 성품을 우리 안에 실상화를 시킨다. 주님처럼 닮아지게 한다. 우리는 그런 분을 믿고 그런 신앙을 가지는 거다.
23절: 십자가를 지고 죽을 각오를 하고 따라오라는 이 말씀이 일반적으로 좋게 들리느냐, 걱정스럽게 들리느냐? 죽을 각오를 하고 따라오란다. 기독교 교인들에게는 이 말씀이 지금 자기를 죽이는 말씀으로 들리느냐, 살리는 말씀으로 들리느냐?
24절: 이 말씀은 어떻게 들리느냐? 앞 절은 기분 나쁘게 들리고, 24절은 걱정스럽고 고민스럽게 들리느냐? 왜 그러냐?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는다’ 했고, ‘나를 인해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한다’고 했으니까 중간에 서서 따지게 된다.
우리를 영원히 존귀와 능력의 영광자로 만들어 주려고 23절의 말씀이 꼭 필요한 것이다. 이게 믿어지느냐? 서로 자기를 위해 자기가 살려고 하고 있는데 이게 말이 되느냐? 살아계셔서 지금도 역사하고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는 자들은 이 말씀을 보면서 자기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 가치판단을 잘 내려야 하고 각오와 결심을 단단히 가져야 한다. 모든 인간은 자기가 어떻게 살았던 그 결과는 자기가 거둬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분문의 말씀의 뜻을 잘못 알고 예수를 믿는다면 아무리 충성봉사를 하면서 목숨을 내어주기까지 사명감으로 살았다고 해도 그 효력이 없다는 말이다.
역사적으로 모세에게 준 모세오경을 보면 은밀계시적으로 메시아이신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게 되는 것인데 그들은 그토록 예언된 메시아를 기다리면서 율법대로 한다고 열심히 글자대로 믿어왔는데 막상 메시아가 오시니까 그 예수를 정죄하고 죽이고 말았다. 예수님을 죽인 그들은 역사적 심판을 받고 역사 속에서 사라졌다. 성경을 가지고 충성봉사를 열심히 하면서 예수 죽이고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사라졌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그들은 성경을 성문계시 문자로만 보고 문자를 지키는 신앙생활을 했다. 문자대로만 했으니 의인이라고 알았다. 문자대로 안 한 사람은 죄인이고 자기들은 성경 문자대로 했으니 의인이라고 생각을 했다.
예수님이 구약의 성경 문자대로 한 것이 얼마나 있느냐? 없다. 그런데 문자 속에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은밀한 뜻은 100% 다 지키셨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문자대로 안 하니까 율법사 바리새인 제사장들은 문자를 가지고 예수님을 정죄를 하는 거다. 예수님이 ‘아브라함이 나기 전에 내가 먼저 있었다’ 하니까 유대 종교 지도자들 입장에서 보면 말이 안 된다. 우리는 성육신으로 오시기 전에 선재적 그리스도로 계신 것을 믿는데 그들은 예수님이 성육신만 한 하나의 유명한 인간으로 보았고, 더군다나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자기 아버지라고 하니까 유대인들은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말을 하는 것도 벌벌 떠는데 새파란 젊은 사람이 감히 ‘아브라함보다도 내가 먼저 있었다. 아브라함이 내가 태어난 것을 보고 굉장히 기뻐했다’고 하니 얼마나 황당하게 들리겠느냐? 완전히 미친 사람으로 보인다.
그들은 성경을 성문적으로만 보고 문자를 지키는 생활, 문자대로만 하면 의인이요 안 하면 죄인으로 봤다. 그들은 성문계시 속에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으로 만들어지라는 은밀계시를 몰랐다. 죄에서 해방시키는 하나님의 그리스도 즉, 메시아를 모르고 성경 문자를 가지고 예수님을 죽였다. 부활 승천이 무슨 의미인지 모르더라.
오늘날도 이 마지막 시대의 교회가 성경 66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되는 뜻을 모르고 예수님을 죽인 그 때 그들처럼 완전히 외식으로 흐르고 있다. 그러니까 부활 승천의 의미의 신앙도 모른다. 이룰구원이라는 것은 죽지 않는 부활의 생명이 들어있다. 그 생명이 아니면 소용이 없다.
이들은 영적으로 보면 기독교라는 한 이름이지만 그러나 그 중심사상은 하나님의 본질적인 진리 신앙사상과 하나님의 뜻에 단일이 아니고 신앙이라고 하는 그 정신 사상의 옷이 다른 것이다. 그러니까 ‘복 복’ 하는 옷을 입고 있고, 신비주의의 옷을 입고 있고, 이 세상 사회주의의 옷을 입고 있다. 예수 믿고 신앙하면서 그 옷이 다르구나. 오늘날 거짓된 교회에 이런 게 많이 있다. 옷이 다르다.
‘아무든지 예수 당신의 뒤를 따라 오려거든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를 부정해야 하고, 날마다 자기 죽을 십자가를 짊어지고, 날마다 좇아라.’ 이 말이 무슨 말이냐? 날마다 옛사람 자기, 세상적인 자기의 성격 성질, 세상 소원 목적으로 예수 믿고 있는 그걸 계속적으로 죽여라. 그걸 그대로 갖고 예수 믿고 있으면 스스로 얼굴이 똥칠이 된다. 다른 교회에서는 그런 식으로 사니까 그런 사람을 띄워주고 알아주지만 우리교회는 그런 사람을 안 알아준다.
‘날마다 자기 죽을 십자가 짊어지고 날마다 나를 좇아라.’ 자기를 분석하고 자기를 단속을 잘 하고 하나님의 뜻에 자기의 언행심사가 맞는지 틀렸는지 늘 심사하면서. 이렇게 예수 믿으려니까 숨이 가프냐? 세상적으로 사는 사람은 숨을 한 번씩만 천천히 내어 쉬고 들이키지만 진리를 따르는 사람은 그 사람들이 한 번 할 때 두 세 번 해야 하느냐? 똑같다.
그런데 우리의 이 정신을 가지고 세상에서 사는 것과, 안 믿는 사람들의 그 정신을 가지고 세상에서 사는 것과 어느 것이 더 고통스럽느냐? 예수 믿는 정신을 가지고 세상에서 사는 게 더 고통스러우냐, 안 믿는 정신을 가지고 세상에서 사는 게 더 고통스러우냐?
세상적으로 정신을 가지면 세상은 짐이다. 처음에는 기분이 좋고 가벼운 것 같으나 세상은 이용물인데 이것을 하나님처럼 생각을 하면 머리는 갈수록 자꾸 무거워진다. 어쨌든 머리에 이던 등에 짊어지던 손에 들던 짐이라는 것은 아무리 가벼워도 가다가 보면 점점 무거워지는 게 짐이다. 그런데 예수님의 짐은 무거운 것처럼 느껴지지만 갈수록 가벼워지고 힘이 난다.
세상적으로 믿는 교회는 충성봉사로 짐이 들어가지만 우리교회의 짐은 부지런히 배우고 듣고 깨달아서 말씀과 같은 사람이 되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처음에 들어야 하고 교회에 나와야 하고 긴긴 시간을 앉아서 들어야 하니 짐이 된다. 그러나 아니다. 깨달아 갈수록 점점 가벼워진다.
이런 면으로 보면 예수님은 100% 하나님의 것으로 다 바꿔놓으니 얼마나 가벼운지 그걸 부활 승천으로 증명을 한다. 하늘로 휙 가버린다. 세상 일반적인 공기도 무거우면 밑으로 가라안고 가벼우면 위로 올라간다.
아무든지 예수 당신을 따라오려거든 ‘날마다 자기 죽을 십자가를 짊어지고 날마다 나를 쫓아라’ 하고 말씀하신 그 분을 알고 따르느냐, 모르고 따르느냐? 날마다 자기 부인도 안 하고 십자가도 안 지고 따르느냐? 그건 따르는 게 아니다. 네 욕심이다. 그러면 예수님을 하루 따르다가 내가 싫으면 버려도 되는 것이냐? 수십 년을 믿다가 내가 세상 살기 힘들면 버려도 되는 것이냐?
‘나를 따라오라’ 하신 이 분은 영원 전서부터 계신 분이요,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우주만물을 만드신 분이요, 그 분의 모양과 형상을 따라 인간 나를 만드신 분이요, 나그네로 세상을 거치게 하면서 인류의 역사를 진행시키면서 크고 작은 사건 환경을 통해서 우리로 하여금 신령천국에서 마음껏 누릴 영능의 실력을 닦게 하는 분이요, 존귀영광 중에 당신처럼 만들어 주시는 분이다. 이런 분을 누구든지 따를 수 있도록 허락해 주셨다. 이 분을 믿고 따르는데 누구라도 막으면 절대로 안 된다.
혈루증 여자가 소경이 앉은뱅이가 모두 고침을 받고 그들이 예수님을 알아보았는데 바리새교인들과 대제사장 율법사 서기관들이 예수님께 가지 말라고 그들을 막을 수 있겠느냐? 예수로부터 고침을 받은 자들을 막을 수 있겠느냐? 무슨 권한으로 막느냐? 막았다가는 큰일 난다. 예수님을 질적으로 적중적으로 바로 알고 따른다면 그런 사람을 막지도 말고, 막고 부정하면 인간 네가 다친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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