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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씀할쌔

누가복음 궁극이............... 조회 수 838 추천 수 0 2021.03.24 09:1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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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눅9:28-31 
설교자 : 김경형목사 
참고 : 궁극교회 주일예배 

928-31: 이 말씀을 하신 후 팔일쯤 되어 예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시고 기도하시러 산에 올라가사 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나더라 문득 두 사람이 예수와 함께 말하니 이는 모세와 엘리야라 영광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씀할쌔.

 

28-30: 모세는 어느 때 사람이냐? 주전 1450년경 구약 애굽 강국 때의 사람이다.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애굽에서 400년을 살 때 후반기의 사람이다. 애굽에서 총리를 한 요셉도 죽고 400년 지났으니 그 동안에 왕이 몇 번이나 바뀌었을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인도하실 때 이 모세를 붙잡고 쓰셨다.

 

엘리야는 어느 때 사람이냐? 주님 전 850년경의 사람이다. 그러니까 모세와 엘리야는 약 600년의 차이가 난다. 엘리야는 북조 이스라엘 악한 아합 왕 때의 선지자다. 이 두 사람은 얼굴을 서로 모른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느 때 사람이냐? 로마강국이 유대나라를 속국으로 만들었을 때다. 그러니까 엘리야 선지자와 예수님과의 차이는 약 800년의 차이가 있다.

 

그러니까 인간적으로 보면 이 세 사람은 모두 처음 보는 사람이다. 모세는 나이가 많고 눈썹도 하얗고 수염도 하얗고 머리도 하얀 할아버지이고, 엘리야 선지자는 약대털옷에 대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30대의 새파란 젊은이로 모두 처음 보는 사람이다.

 

처음 보는 세 사람이 변화산상에 모여서 서로 통성명을 했을까? ‘나는 구약 때 아무 시대의 모세입니다.’ ‘나는 구약 어느 왕 때 고초를 겪은 엘리야입니다.’ 또 예수님은? 아니면 모두 처음 보는 사이인지라 셋이 만나서 서로 멀뚱멀뚱 하고 있었을까? 척 보자마자 영적인 면으로 그 인격과 성품이 어떻다고 하는 것을 모두 익히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누가 모세와 엘리야를 보낸 것이냐? 예수 그리스도께서 도성인신 해서 오시기 전에 신령천국에서 선재적 그리스도로 계실 때 이 모세와 엘리야를 보냈다. 알고 보면 주님이 보낸 것이다. 이 깨달음이 별 것 아닌 것 같아도 이런 것을 모르면 주님의 주권성을 모르게 된다. 모세를 누가 잡고 쓰셨는지? 엘리야를 누가 잡고 쓰셨는지? 누구의 보냄인지? 이걸 모르는 자들이 많다. 물론 말인즉 하나님이 보냈다고 하겠으나 구체적으로 속속들이 모르면 그만큼 모른다. 신앙의 맛을 모른다.

 

새파란 주님이 모세를 척 보자마자 모세가 한 일을 다 알고 계실까? 모세의 어릴 적, 또 청년 때, 미디안에 도망간 일, 호렙산에서 하나님을 만나서 바로에게 보냄을 받고 열 가지 재앙을 행하고, 홍해를 가르고, 40일 금식 후 십계명 돌판도 받고, 광야생활 40년 동안의 활동을 예수님이 다 아신다. 또 엘리야 선지자는 아합 왕과 이세벨과 싸우고, 36개월 흉년을 예언하고, 갈멜산에서 벼락불이 떨어지는 사건도 예수님이 다 아신다.

 

예수 그리스도는 당신의 백성을 죄에서 해방시키기 위해 밤낮 40일 금식기도 후 마귀의 시험을 다 이기고, 33년 동안을 죄 없이 사셨고, 고난 받고 죽고 부활 승천하셨다. 이런 냄새, 이런 성질, 이런 성격, 이런 요소들이 모세와 엘리야의 그 역사 속에 들어있다.

 

구약성경의 다윗의 기도에 지나가는 사람들이 자기를 조롱한다고 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매달렸을 때 예수님을 조롱을 했다. 이처럼 선지사도들의 신앙의 행적을 보면 그 기도의 내용 면에, 그 활동의 내용 면에 주님의 정신과 일치되는 것을 볼 수가 있다. 일치가 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런 사람을 잡고 역사하는 것이고, 또한 우리 역시도 하나님의 진리본질 즉,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이치에 자기의 신앙이 들어갔을 때에 자기도 이 성경에서 주인공으로 역사가 되어가는 것임을 믿어야 한다.

 

성경과 전혀 동떨어진 짓을 하면서 성령을 받았다? 천만에. 그건 악령이다. 잡신 들리고 귀신 들리고 악령 짓을 하는 거다. 성령이라면 성경을 알아야 한다. 성령을 받았느냐? 이룰구원 차원에서 성화가 되어나가야 한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 성령을 받았다고 하는 자가 세상을 소원 목적하고 기도하고, 세상을 이루라고 하며 마귀가 하는 말을 그대로 하고 있으니 그게 어떻게 성령을 받은 거냐? 그건 악령이다.

 

자기가 옳은 것을 듣거들랑 마음속에서 정답을 내려라. 하나님의 말씀은 듣고 흘려버리는 게 아니다. 그래서 어제 잘못된 것을 오늘 바로 잡고, 일 년 전에 잘못된 걸 깨달았으면 오늘 바로 잡고 해야 한다. 이게 성도요 예수 믿는 사람이다. 하나님께서 불꽃같은 눈으로 통촉한다는 말씀이 무슨 뜻인지 알아야 한다.

 

알고 보면 그리스도가 예수로 오시기 전에 영원 전부터 선재적 그리스도로 계셨고, 모세와 엘리야는 영원 전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 얻을 당신의 백성을 위해 보내심을 받은 모세와 엘리야였다.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모세는 동족의 구원을 위해 목숨을 걸고 바로에게 나아갔고, 엘리야도 역시 목숨을 걸고 아합 왕에게 나갔다.

 

두 사람 다 장차 오실 예수님께서 영적 이스라엘을 위해 하실 일을 계시적으로 미리 보여주신 것이다.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과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해 보냄을 받는 일에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고 이 일을 위해 자기들의 목숨을 초개같이 여겼다.

 

만일 모세가 이 세상에서 어떻게 먹고 살까?’ 하며 바로 왕에게 슬며시 붙었거나, 엘리야가 먹고 살기 위해서 아합 왕에게 붙었거나 했다면 예수님을 만났을 때 얼마나 부끄럽고 미안할까? 그렇다면 만나지지도 않는다. 영광중에 나타날 수도 없거니와 예수님의 앞에 나타나지지도 못한다.

 

우리는 이분들처럼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로 성령의 영감의 감화가 왔을 때 순종의 생활로 살아야지 불순종해서 마음에서부터 옳은 것을 없애고 짓밟아 버려서 장차 주님 앞에 설 때 부끄럽고 면목 없고 수치스런 사람이 되면 안 된다. 말씀이 자기에게 왔을 때 자기 마음속에서 그 말씀을 짓밟아 버리는 것이 불순종의 시초다.

 

자기가 신앙이 있는지 없는지를 스스로 판단해 볼 때 자기 마음이 주로 어느 쪽으로 가서 놀고 있느냐? 자기 마음은 자기가 좋아하는 쪽으로, 사랑하는 쪽으로 가서 늘 놀고 있는 거다. 예수를 열심히 믿어도 사역중심인지, 사람 깨달음 중심인지 그것도 알아야 한다. 바로 믿고자 하는 사람은 나침반이 자꾸 북극 쪽으로 맞춰 나가듯이 하나님 쪽으로 자꾸 맞춘다. 그렇게 할 때 세상 걱정 근심은 물러간다. 사람은 동시적으로 두 가지 생각은 못한다.

 

기도할 때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을 것을 찾느냐, 안간 앞에 부끄럽지 않을 것을 찾느냐? 영능의 실력과 영모의 미모성에 못난 것을 부끄럽게 여기느냐, 세상학문이 달려서 그걸 부끄럽게 여기느냐? 얼굴이 못 생겨서 부끄럽느냐? 신체가 불구라서 부끄럽느냐? 돈 없고 가난해서 부끄럽느냐? 무엇 때문에 부끄럽느냐? 누구 때문에 부끄러움을 당하느냐? 누구 때문에 고난을 당하느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기가 누구 앞에서 부끄러움을 당하느냐하는 그걸 알아야 회개가 되던 말든 하게 된다. 이런 것을 알지 못한 채, 의식을 못한 채 기도는 왜 하느냐? 그 기도를 들어주겠느냐? 담력이 커지라고 기도하느냐? 목이 쉬도록 기도를 하고 쇳소리가 나도록 기도를 해야 신령하게 보이는 거냐? 그건 무당 점쟁이다. 사람의 눈으로 보여지는 외모 외형적 눈으로 보이는 면에서 자기의 능력성이나 신령성을 나타내려고 자기를 자꾸 꾸며 들어가는 것은 마귀의 수법들이다.

 

병 고치는 능력을 달라고 기도하느냐? 사람이 안 돼 먹었는데, 영적인 면에서 자기도 바로 못 세우는데 누굴 고치겠다는 것이냐? 자기 눈에 들보가 막혀 있는데 남의 행동 한 두 가지 잘못한 걸 가지고 물고 늘어지느냐? 자기는 하나님도 못 보는 주제에 예배당을 짓게 해 달라고 기도하느냐? 교인 많이 보내달라고 기도하느냐?

 

변화산상에 모인 이 세 분이, 또 주님이 기도했는데 뭐라고 기도를 했느냐? 자기는 기도를 왜 하느냐? 자기의 변화성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냐? 뭘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냐? 세상 것을 이뤄달라고? 이건 마귀의 종들이다.

 

:에서 마귀가 예수님에게 크게 세 가지로 시험을 주어 넘기려고 했는데, 그 세 가지 속에는 창세 이후 마지막 세상까지 모든 인간이 겪을 각종 시험이 그 안에 다 들어있다. 이 세 가지 시험을 이치적으로 정신적 물질적 세상적으로 파헤치면 오늘날 거짓된 교회들이 다 드러난다. 그런데 그걸 그렇게 모르고 안 하고 안 하려고 한다.

 

예수님은 먼저 그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고 했는데 하나님의 옳은 것은 구하지 않고, 지식적면에서도 옳은 것, 지혜적인 면에서도 옳은 것, 도덕성적인 면에서도 옳은 것, 모든 면에서 옳은 것, 옳은 것 중에도 옳은 것을 자꾸 찾아야 할 텐데 하나님 앞에 바로 고쳐지는 그것은 안 하고 세상을 자꾸 구하고 들어가고 찾는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하면 자기가 굶어 죽을 것 같고, 못 살 것 같고 하는 건 자기 생각이다. 마귀를 따라다니면 누구의 심부름을 하겠느냐?

 

영광중에 나타나신 예수님과 모세와 엘리야가 백성들에게 그런 기도를 가르쳤느냐? 오늘날 각 교회의 목사님들이 세상 것을 구하고 있다면 예수님과 전혀 상관이 없다. 예배당 간판을 붙이면 그게 교회냐? 그건 나무다. 십자가를 붙이면 그게 교회냐? 그건 일종이 네온사인에 불과한 거다.

 

교회가 뭐냐? 영이 중생된 성도들 무리, 회중, 회집이 교회다. 모든 인격 면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실상적으로 닮아가야 할 이것이 교회인 바로 자기다. 이런 우리가 영광으로 나타날 수 있는 기도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구원이치를 붙잡고 우리의 인격과 성품을 고차원적으로 올려달라고 하는 거다. 이렇게 올라가야 변화가 되는 거다.

 

예수를 믿는다면, 교회에 나간다면, 하나님의 백성이 됐으면 천국에서도 효력성을 지닐 수 있는 속사람이, 영인성장이 예수 그리스도의 분량에 이르기까지 실상적으로 장성하라. 그런데 오늘날 교회가, 믿는 자기가 속사람의 장성이 있느냐? 성장이 있느냐? 세상을 좋아하던 취미나 소원 목적이 바뀌었느냐? 교회의 사역자를 따라다니면서 헌금 내고 예배당 짓는 게 충성이냐? 진리를 잡고 목숨을 내놓고 가는 게 충성이다.

 

변화산상으로 올라가는 주님의 언행심사에서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은 변화되는 기도가 무엇인지를 알려준다. 성품이 변화가 돼야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볼 수 있다고 하는 게 그 안에 들어있다. 예수정신 사상적으로 우리 인격화가 되면 그게 나온다.

 

31: 두 사람은 환난 핍박 중에라도 주를 배반하거나 부인하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을 받을 수 있는 일을 했고, 그렇게 살았고, 그렇게 일생을 마쳤다. 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신앙의 삶은 승리요 자랑이요 영광이다.

 

일반사람들은 예수님이란 분이 일반적으로 좋은 일을 하다가 젊은 청춘으로 죽었다고 알고 있고, 세상 속화된 기독자들도 예수님께서 천국복음을 전하시면서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불쌍한 병자를 고치셨다고 보는 자가 많다. 이들은 예수님께서 육신의 병자를 고친 것만 알고 있지 그 속에 영적인 면에서 무엇을 고쳐준 것은 모르고 있다. 생각을 안 하려고 한다.

 

일반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병자를 고치는 것을 육신을 고쳐준 것으로만 알고 있고, 기독자들도 교회사적으로 예수님께서 육신을 고쳐준 것으로만 알고 있다면 안 믿는 사람들이 성경을 보는 것과 속화된 기독자들이 성경을 보는 것과 뭐가 다르냐? 예수를 안 믿는 사람들이 성경을 보는 것과 속이 무엇이 다르냐? 똑같지 않느냐? 그게 예수 믿는 거냐? 속사람이 할례를 받지 못했는데 그게 예수를 믿는 거냐? 이런 사람은 세례 받고 교회에 나온다고 하지만 속은 세상 그대로 들어있는 거다. 하나님은 사람의 속 중심을 보신다고 했다.

 

신령천국 하늘로부터 오신 이 예수는 그리스도의 일을 하신다. 선재적 그리스도께서 육신으로 오셨으니 그 이름이 예수요, 예수는 구원의 일을 한다. 그 구원의 일은 성도들에게 성령님을 입힌다. 그게 그리스도의 성질이다. 그리스도는 기름부음을 받고 세운다.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성품으로 만들어 준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는 그리스도의 일을 한다 그 말이다. 이게 바로 구원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예수 그리스도라 할 때는 누구의 자식의 이름을 부르는 것처럼 그게 아니라 당신의 일이 바로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이다.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만들어 놓는다는 것이다. 그 일을 하는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다.

 

이걸 이렇게 모르니 일 년 믿어도 그 모양, 십 년을 믿어도 그 모양, 수십 년을 믿어도 그 모양, 안 믿는 사람들의 속과 똑같은 거다. 이게 하나님 앞에 재앙이다. 그러면서도 밥 먹고 안 굶고 사니까 축복으로 여기지만 먹고 사는 것으로만 말한다면 안 믿는 사람들도 안 굶고 산다. 짐승들도 안 굶고 산다.

 

이런 사고방식으로 목사가 되니 아무나 목사를 할 수 있는 거다. 감옥에 들어갔다 나와서 성경 몇 번 보고 신학교 들어가서 목사가 돼서 결국 뭘 할 거냐? 간증이나 하고. 그러니 교회가 어지럽고, 나쁘게 말하면 교회에서 얼마나 교인들의 등을 처먹느냐? 사기꾼이 교회 안에 다 들어와 있고, 도둑이 교회 안에 다 들어와 있고, 장사꾼이 교회 안에 다 들어와 있다.

 

이런 자들은 예수를 믿는다면 예수님의 기본구원은 입혀 놓았으니까 지옥은 안 간다고 할지라도 그러나 살아생전에 하나님의 성품을 입지 못하고 산 그것을 생각하면 가슴을 쥐어뜯어도 회개할 길이 없구나. 시간이 없구나.

 

신령천국 하늘로부터 오신 이 예수님은 그리스도의 일을 하신다. 각종 병자를 고쳐주시는 그 일 속에는 그리스도의 일이 들어있다. 세상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그냥 육신의 병 고침이 아니다. 그럼에도 기독자들이 예수님께서 각종 병자들 고치심을 일반병자를 고치는 것으로 생각하고 영적인 면에서 하나님의 온전성을 모른다면 예수님을 믿고 따름이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육신의 병은 어디서 나오느냐? 마음에서 나온다. 성경에 구절적으로도 있지 않느냐? 그렇다면 그 마음이 세상 쪽으로 붙었는지, 예수 쪽으로 붙었는지, 뭘 좋아하는지하는 거기에서 문제가 돼 나오는 거다. 간단히 말하면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먹으니 살인도 염려도 걱정도 고통도 근심도 질병도 다 나온다. 마음이 어디에 가서 붙었느냐? 선악과 쪽으로 마음이 가니 그렇게 나온다.

 

에덴동산은 장면적으로 보면 그게 교회다. 유형교회 안에는 생명과도 있고 선악과도 있다. ‘그 두 가지 중에 어느 기준으로 네가 먹을래?’ 하는 게 들어있다. 선악과는 사람의 눈으로 보이는 기준, 듣는 기준, 보는 기준, 먹는 기준, 생활 의식주에 관한 기준이다. 그런데 생명과는 순전히 하나님의 말씀이다.

 

생명과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니까 성경구절을 붙인다고 해서 다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다. 설교할 때 성경구절을 붙이려고 신학교에 갔느냐? 성경구절을 붙여 말을 하면서 어느 철학자가 이 말을 했네. 어느 철학자가 저 말을 했네.’ 참말로.... 성경의 이치를 모르고 뜻을 모르면 누구의 말을 끌어다가 누구의 얼굴에 먹칠을 하게 되는지를 알아야 한다.

 

예수 믿어 부자 됐네? 예수만 믿으면 세상부자가 되느냐? 예수를 안 믿어도 세상부자가 있느냐? 그러면 자랑할 게 뭐냐? ‘예수 믿어 부자가 됐네한다면 안 믿는 사람이 부자 된 것보다 훨씬 더 부자가 된다면 몰라도 안 믿는 사람과 비교하면 비교도 안 된다. 그러니 얼마나 어리석으냐? 그리고 예수 믿어서 부자가 됐다고 하면 누가 좋아하느냐? 예수님이냐, 마귀냐? 마귀다. 그 말 속에 들어있는 중심사상이 마귀가 좋아하는 쪽으로 붙은 말이다.

 

그러면 예수 믿으면 부자가 안 되느냐? 예수 잘 믿다 보니 가난해지고 순교한 것은 뭐라고 해석을 해야 하느냐? 해석하는 중심이 믿음의 중심을 못 잡으니 이 말을 했다 저 말을 했다 하게 된다. 이건 혼돈 혼란 혼잡이다. 이건 계:에 나오는 붉은 말, 청황색 말, 흑 말이다. 모르면 자기가 흑 말, 청황색 말, 붉은 말을 타고 앉아있는 거다. 오늘날 마지막 시대의 신앙이 참으로 심각하다.

 

본문으로 들어가서 세 사람이 영광중에 나타나서 예수님이 장차 예루살렘에서 별세할 것을 말한 이유가 뭘까? 우리가 성경을 볼 때는 왜 그 말씀을 했지?’ 하고 자꾸 찾아야 한다. 그것은 예수님의 예루살렘에서의 그 죽음이 하나님께 영광스런 죽음이라는 말이다.

 

사람이 땅의 일을 충성 되이 하면 땅에서 영광을 받는 것이고, 하늘의 일을 충성 되이 하면 하늘의 영광을 받는 것이다. 그러면 어디에서 죽는 것이 영광이냐? 왜 예루살렘에서 죽는 것이 영광이냐? 딴 데서 죽으면 안 되느냐? 예루살렘은 그 도성의 이름의 뜻이 하나님과의 평화의 도시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거기서 죽는다고 하는 것은 무슨 의미가 들어있는 거냐? 당신의 죽음으로서 당신의 백성을 하나님과 평화하게 만든다는 의미가 들어있다. 당신이 평생에 그 일을 해 나왔다.

 

예루살렘은 다윗 왕이 세웠다. 예루살렘에는 하나님과 화목케 되는 성전이 있고, 대제사장이 있고, 제사장도 있고, 성경을 가르치는 율법사도 있고, 서기관도 있다. 모두 여호와 하나님을 열심히 믿는다고는 했으나 이들은 외식적인 신앙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의사단일에 인격적으로 적중하지를 못해서 예수님을 죽이는 데까지 나갔다.

 

사두개인들은 주로 제사장들이 많다. 헤롯당은 헤롯 왕가의 무리들이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외식자들이다. 이 바리새인들은 성경율법을 고수하고, 예수 믿는 사람들을 죽이고 환난을 주고 핍박을 주었다. 바리새인들은 영도 부활도 천사도 다 믿는데 사두개인들은 그걸 안 믿는다.

 

그리고 사두개인은 유대인당의 하나의 당파요, 바리새인들은 유대인들의 하나의 종파다. 바리새인들은 율법 고수자들이다. 사도바울도 사울 적에 그 중에 하나였다. 그런데 예수를 죽이는 일에는 이 두 당파가 하나가 됐다. 자기들이 주동자가 될 때는 하나가 된다.

 

그런 것처럼 세상적으로 흐르는 기독교가 세상과 하나가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방 불신세계와 그리고 정치와 교세가 하나가 된다. 자기의 신앙을 잘 살펴보면 안다. 그리고 자기가 어느 말을 타고 있는 지도 안다. ‘자기 신앙사상이 어느 말을 타고 있구나하면 그 결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나오게 된다. 말씀 속에 있는 의사성을 부정하면, 뜻을 부정하면 나중에는 성경구절까지 부정하는 일이 나오게 된다. 그래서 예수님 앞에서 이 말도 못하고 저 말고 못하고 유구무언이 된다.

 

그들의 신앙이 육적 세상적 부패성적 신앙이었기 때문에, 육의 신앙 세상적인 신앙이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심판성이 자꾸 누적이 되어 갔는데, 주님은 당신의 백성을 위해 이 죄를 짊어지고 죽으신 것이다. 당신의 백성을 위해서라면 역사적 교회사적으로는 유대인들이고 이스라엘이지만 계시적으로는 창세 이후 마지막 그 날까지 영적 이스라엘을 위해서이다. 나를 위해 죽었다는 말이다.

 

이 죄를 짊어지고 죽으신 것이고, 당신의 백성들을 영원히 살리기 위해서 예수 당신이 또 부활 승천을 했다. 우리를 그렇게 만들어 주시려고. 또한 이렇게 하심으로서 하나님과의 적중성으로 참 신앙의 기초를 전 인격적으로 다시 놓았고, 하나님과 평화하여 하나님의 온전하심과 같이 성품의 온전함을 이루게 하셨다.

 

그러니까 율법 속에는 사람의 온전이 들어있는 것이니 주님께서 오셔서 이걸 가르쳐 주셨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글자 표면만 고집을 했다. 율법을 통해 하나님의 온전을 인격적으로 이뤄 가면 율법이 말하는 바 그 정신은 다 지켜지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이걸 몰랐다. 모르는 게 죄다. 그리고 이들은 자신들이 잘못 알고 있는 것을, 모르고 있는 것을 주님이 가르쳐 주시면 양심이 찔리면 무릎을 꿇어야 하는데 양심이 찔리면서도 씩씩 하며 돌아갔다.

 

이 온전함을 이루는 역사는 반드시 예루살렘에서 되어야 한다. 이 일은 영적인 면에서 성역인데 즉, 거룩한 역사인데, 거룩한 이 역사는 예루살렘 즉, ‘하나님과 평화라는 그 라인 안에서 이뤄지는 것이다. 신앙의 라인은 눈에 안 보인다. 천국의 성질과 땅의 성질의 선은 눈에 보이지 않으나 영적 감각성으로 그게 딱 딱 나오는 걸 우리는 직감할 수 있다.

 

주님의 이 죽음은 영원한 효력을 지닌 영광이다. 그래서 영광중에 예수의 죽음을 말하고 있는 거다. 이 말씀 한 마디 한 마디 속에 마다 역사가 함축이 돼 있다. 함축된 그 역사를 말하려니 영광중에 예수의 죽음을 말하고 있는 거다.

 

1:1천지를 창조하시니라는 이 말속에는 계:까지 그 안에 다 들어있다. 그냥 창세기에서 6일 동안 창조만 말하는 게 아니라 그 안에 성경이 다 들어있다. 그래서 계:에서 이 말씀에서 덧붙이는 자에게는 상이 있고 빼는 자에게는 벌이 있다고 한 것이다. 그러면 이 말씀이 신약만 말한 거냐, 창세 후 모든 사람들에게 말하는 것이냐? 모든 사람에게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성경에 분명히 말씀이 구절적으로도 들어있는데도 예언 방언을 하면서 하나님이 자기에게 직접 말해주고 보여준다고? 왜 성경을 부인하느냐?

 

성경에 우리의 구원에 필요한 모든 것을 완벽하게 주었다고 성경이 말을 하고 있으니 이 성경을 죽을 때까지 자기가 다 깨닫는다면 말하자면 그 사람은 하나님이 될 것 같다. 그런데 주는 것도 못 깨닫고 있으면서 뭘 더 계시를 받으려고 하느냐? 만일에 그렇다면 성경을 집어치워야 한다. 눈만 감으면 직통으로 받는다? 이건 근본 원리적으로 성경을 깨닫는 게 틀린 것이다. 정말 몹쓸 것들이다. 우리가 가는 길이 성경에서 적중성을 띄어야지 흔히 보듯이 가는 건지 오는 건지 해서는 안 된다.

 

예수 믿으면서 제 멋대로 사는 사람들은 우리처럼 믿는 사람들을 율법주의자라고 하지만, 그러면 자신들처럼 그렇게 믿는 것이 자유요 예수를 바로 믿는 거냐? 아니다. 예수님의 생애가 율법 속에 들어있는 정신을 말하고 있다. 예수를 믿으면서 율법이 필요가 없으면 왜 성경을 읽느냐? 구약시대의 하나님과 신약시대의 하나님이 다른 거냐?

 

영광중에 예수의 죽음을 말하고 있다. 예수님의 별세를 말하는 두 사람은 바로 왕을 이긴 모세요 아합 왕을 이긴 엘리야다. 모두 목숨을 걸고 이긴 사람이다. 우리는 고난 안에서 영광을 볼 줄 알아야 한다. 이 두 선지자도 그랬고 예수님도 그랬다. 모세는 미래의 말할 수 없는 영광을 믿었기 때문에 당신의 백성들이 고난을 받는 곳에서 같이 고난을 받았다.

 

이걸 일반적으로 말하면 애국심이다. 자기 민족과 백성을 사랑하는 애국심이다. 세상적으로 말하면 세상 지도자들 속에 그런 정신이 있느냐? 없다. 교회 안의 사명자도 세상적인 사명자가 있고, 종교 사업적으로 사명자가 있고, 깨달음으로 하나님 앞에 사람을 바로 세우려는 사명자가 있다. 우리는 생계적인 사업은 하면서도 최대한으로 말씀 안에서 자기를 잘 다듬어 가다가 어느 날 하나님이 부르시는 날에는 그 말씀에 수종을 들 줄 알아야 한다.

 

고난 안에서 영광을 볼 줄 알아야 한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이치를 모르고 고난을 받는 것과, 알면서 고난을 받는 것은 천지차이의 수입이 나온다. 목회를 해도 하나님의 온전에 대한 적중성을 알고 목회를 하는 것과, 모르고 하는 것은 영원한 영광과 형벌이 들어간다. 그래서 목회라고 하는 게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 정말 진리적중으로 목회를 하면 성공이고, 그러나 비진리적으로 아무리 많은 사람이 모였다고 해도 이건 형벌감이다. 하나님의 대 심판감이다.

 

우리교인들은 영광 쪽으로 나가는 그 중간에 어설프게 걸려 있느냐? 냅다 하나님의 온전을 향해 뛰어야 한다. 그냥 교회 다니고 생계유지나 하려고 하지를 말고. 생계유지 그것도 믿음생활이다. 세상생활이 아니라 믿음생활이다. 믿음생활을 하면서 성경을 많이 보고.

 

영광 안에서 또 고난도 각오해야 한다. 고난 안에서 영광을 볼 줄 알아야 하고, 영광 안에서 고난을 각오해야 한다. 모두 이겨내야 영광스런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말할 수 있다. 마귀의 시험에서 넘어진 자들은 예수님의 죽음과 승리를 말할 자격이 없다. 예수님을 부인한 자가 세상에 속한 일이 성공했다고 해서 하나님께 영광 받으시라고 찬송할 수 있는 거냐? 그건 안 된다. 목숨 때문에 말씀을 부인한 자가 어떻게 영광스런 그들을 만나볼 수 있겠느냐?

 

한 집안에 살아도 뜻이 안 통하면 남처럼 거리가 엄청나게 멀다. 의사성이 안 통하는 것은 남이다. 그러나 딴 데 살아도 의사성이 통하면 남이 아니다. 주님도 마찬가지다. 세 분도 마찬가지다. 그러면 오늘날 자기가 변화산상에 가서 예수님 모세와 엘리야의 뒤로 가서 나는 아무개올시다하면 그 분들이 알아줄까?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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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77 누가복음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눅6:45-47  김경형목사  2020-05-27 258
1176 누가복음 나무는 각각 그 열매로 아나니. 눅6:44  김경형목사  2020-05-20 358
1175 누가복음 말세의 신국관 눅17:20-21  강종수목사  2020-05-17 125
1174 누가복음 그 후에야 네가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리라. 눅6:41-44  김경형목사  2020-05-13 314
1173 누가복음 말세의 불신앙 눅18:7-8  강종수목사  2020-05-10 283
1172 누가복음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눅6:39-42  김경형목사  2020-05-06 296
1171 누가복음 너희의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눅6:37-38  김경형목사  2020-04-29 435
1170 누가복음 비판치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아니하리라(2). 눅6:34-37  김경형목사  2020-04-22 117
1169 누가복음 비판치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아니하리라(1). 눅6:34-37  김경형목사  2020-04-22 106
1168 누가복음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눅6:31-34  김경형목사  2020-04-15 932
1167 누가복음 부활 신앙의 참 모습 눅24;13-34  전원준목사  2020-04-11 717
1166 누가복음 너의 이 뺨을 치는 자에게 저 뺌도 둘러대며. 눅6:29-30  김경형목사  2020-04-08 231
1165 누가복음 말세의 불안 눅21:25-26  강종수목사  2020-04-05 212
1164 누가복음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눅6:27-28  김경형목사  2020-04-01 308
1163 누가복음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눅6:25-26  김경형목사  2020-03-26 374
1162 누가복음 화 있을 진저, 너희 부요한 자들이여. 눅6:22-25  김경형목사  2020-03-18 185
1161 누가복음 인자를 인하여 사람들이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버릴 때에는. 눅6:22-23  김경형목사  2020-03-11 173
1160 누가복음 예수께서 저희와 함께 내려오사 평지에 서시니. 눅6:13-18  김경형목사  2020-02-28 209
1159 누가복음 제자들을 부르사 그 중에서 열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셨으니 눅6:12-13  김경형목사  2020-02-19 174
1158 누가복음 돌 하나 돌 위에 남지 않는 날! 눅21:6-13  정용섭 목사  2020-02-16 453
1157 누가복음 누가 잃어버린 자인가? 눅19:1-10  정용섭 목사  2020-02-16 273
1156 누가복음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맟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고 눅6:12-13  김경형목사  2020-02-11 312
1155 누가복음 종말의 질병 눅21:11  강종수목사  2020-02-09 416
1154 누가복음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중에 어느 것이 옳으냐? 눅6:6-11  김경형목사  2020-02-05 227
1153 누가복음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느뇨?(2) 눅6:1-5  김경형목사  2020-01-28 109
1152 누가복음 다시 ‘마리아의 찬가’를 읽다 눅1:46-55  허태수 목사  2020-01-22 300
1151 누가복음 헨델의 메시아, 예수 탄생의 의미 눅1:46-55  허태수 목사  2020-01-22 259
1150 누가복음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2). 눅5:34-39  김경형목사  2020-01-22 203
1149 누가복음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1). 눅5:34-39  김경형목사  2020-01-22 167
1148 누가복음 가이사와 하나님 [1] 눅20:19-26  이정원 목사  2020-01-16 320
1147 누가복음 예수님의 권위 [1] 눅20:1-18  이정원 목사  2020-01-16 354
1146 누가복음 구원과 심판 눅19:41-48  이정원 목사  2020-01-16 309
1145 누가복음 메시아의 예루살렘 입성 눅19:28-40  이정원 목사  2020-01-16 289
1144 누가복음 므나 비유 눅19:11-27  이정원 목사  2020-01-16 325
1143 누가복음 구원과 변화 눅19:1-10  이정원 목사  2020-01-16 354
1142 누가복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눅18:31-43  이정원 목사  2020-01-16 663
1141 누가복음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나이다. 눅5:33  김경형목사  2020-01-15 167
1140 누가복음 하나님의 마음을 얻으라 눅10:25-28  이한규 목사  2020-01-13 611
1139 누가복음 갈급한 영혼 눅18:1-8  정용섭 목사  2020-01-08 320
1138 누가복음 믿음과 구원 눅17:11-19  정용섭 목사  2020-01-08 254
1137 누가복음 양자택일 눅16:1-13  정용섭 목사  2020-01-08 221
1136 누가복음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2) 눅5:31-32  김경형목사  2020-01-08 127
1135 누가복음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1) 눅5:31-32  김경형목사  2020-01-08 285
1134 누가복음 너희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2) 눅5:27-30  김경형목사  2020-01-01 157
1133 누가복음 너희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1) 눅5:27-30  김경형목사  2020-01-01 114
1132 누가복음 왜 마구간에서 태어나셨을까? 누가복음 2장 8절-14절  서한수 목사  2019-12-31 265
1131 누가복음 나를 쫓으라 하시니 모든 것을 버리고 좇으니라. 눅5:27-28  김경형목사  2019-12-27 222
1130 누가복음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알게 하리라. 눅5:21-26  김경형목사  2019-12-18 222
1129 누가복음 그들을 보시고 눅5;17-26  전원준목사  2019-12-14 229
1128 누가복음 병을 고치는 주의 능력이 예수와 함께 하더라. 눅5:17-20  김경형목사  2019-12-11 2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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