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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눅9:42-4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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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경형목사 |
참고 : | 궁극교회 주일예배 |
9장 42절-46절: 올 때에 귀신이 거꾸러뜨리고 심한 경련을 일으키게 하는지라 예수께서 더러운 귀신을 꾸짖으시고 아이를 낫게 하사 그 아비에게 도로 주시니 사람들이 다 하나님의 위엄을 놀라니라 저희가 다 그 행하시는 모든 일을 기이히 여길쌔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이 말을 너희 귀에 담아 두라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기우리라 하시되 저희가 이 말씀을 알지 못하였나니 이는 저희로 깨닫지 못하게 숨김이 되었음이라 또 저희는 이 말씀을 묻기도 두려워하더라 제자 중에서 누가 크냐 하는 변론이 일어나니.
42절: 부모가 자녀의 성격과 성질을 바로 잡지 못하면 그 자녀가 학교 선생에게 대들게 된다. 부모가 자식과 합세해서 선생에게 대드는 부모도 있다. 그런 것처럼 교회에서 육적으로 교육받고 자란 교인이나 그렇게 가르친 그 교회의 인도자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예수님에게 대적하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교훈에 대한 대적은 예수님에게 대적이다. 존재나 교훈으로 말하면 그건 예수님에게 대적하는 것이고, 구원으로 말하면 구원에게 대적이다. 구원을 멀리하는 것은 예수를 안 받는 것이다. 같이 들어있다 그 말이다. 의인의 옳은 말에 대적은 의인에게 대적이고. 의인은 옳은 말을 한다.
대적하는 상태의 정신을 발작으로 한 번 볼 필요가 있다. 예수님께서 더러운 귀신을 내어 쫓으시고 아이를 낫게 해서 그 아버지에게 안겨주었다. 예수님께서는 더러운 성격 성질을 가지고 있는 더러운 발작을 고치시는 분이요, 거룩하고 온전한 사람으로 만들어 주시기를 원하는 예수님이시다. 그냥 병을 고쳤다고만 보지 말고 하나님 앞에 발작을 하는, 다른 사람 앞에도 발작을 하는 것을 고치는 분이다.
우리가 인간을 보면 더러운 정신을 가지면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사람에게 막 덤벼드는데 그게 일종의 발작이다. 발작을 할 때 자기 혼자서만 발작을 한다고만 보면 안 된다. 그 사람이 어디를 간들 발작을 안 하겠느냐? 그러면 누가 그걸 보면 미쳤다고 할 것이다.
그러면 그런 게 어디서 나온 거냐? 사람이 다듬어지지 못하고 고쳐지지 못한 데셔 나온 것이다. 물론 첫째는 선악과 따먹으면 상황에 따라서 사건에 따라서 자동적으로 발작이 나오게 돼 있고, 우리의 이룰구원의 차원에서도 태어나면서 가지고 나온 이질적인 성격과 성질들이 잠재해 있다가 자기 기분에 안 맞으면 발작이 푹푹 튀어나오는 것을 경험할 것이다. 지나고 보면 ‘아차, 내가 왜 그랬지? 큰 실수를 했구나’ 하는 게 있다. 그래서 진리를 가지고 나의 과거를 생각하면 ‘아, 내가 너무 잘못했구나’ 하는 게 있다. 그것도 연령에 따라서 깨달음에 따라서 그렇게 나온다.
주님은 우리로 하여금 육적 세상적 옛사람 부패성적 마귀적인 성격과 성질을 고쳐서 하나님처럼 거룩케 되기를 원하는 분이시다. 이런 분으로부터 외독자 아들이 온전히 고침을 받고 그 아들을 아버지의 가슴에 안을 때 이 아버지는 아들의 교육에 대하여 과거처럼 또 그렇게 교육을 할 마음이 있었을까? 사건이야 한 행동 잠깐 잠깐이지만 그 사건이 우리에게 주시는 것은 ‘바른 교육이란 어떤 것인가?’ 하는 게 들어있는 사상이다.
사람은 자기의 육적인 더러운 성격과 더러운 성질이 귀신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사람이 귀신이 들리면 도덕성적인 면에서 악한 생각 나쁜 생각, 사람을 해를 끼치는 것, 억압 강압하는 그런 성질이나, 사람을 인격 면에서 성격과 성질을 더럽게 만든다거나, 또 사람을 인격 면에서 넘어지게 만든다거나, 생명권이 아닌 사망권 안에서 살게 하고, 상처를 내고, 사람을 더럽게 한다.
이런 것은 전부가 도덕적인 면에 속한 말이다. 관계성은 도덕성적으로 관계가 들어가 있는 것이다. 도덕성적인 관계란 상대성이 있는 거다. 사람을 상대하는 데는 도덕성이다. 그래서 사람을 상대할 때는 안 믿는 사람들은 방편이 일반 도덕성이다. 그러나 믿는 사람은 언제나 진리의 사상을 가지고 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건 신적인 도덕성이라고 한다. 그런데 사람과의 관계를 지으면서 진리로 공적인 관계를 한 게 아니라 공적인 모든 것을 무너뜨리면서 세상성적 인적인 관계성이 들어가 있는 모든 것은 신앙 믿음이 아니다. 아무리 말이 하나님의 말인 것 같을 지라도 그건 그렇지가 않다.
영적인 면을 무시하고 육적으로만 내세우며 사람을 가르치게 되면 이런 경우는 인본주의 교회에서 많이 보는 일인데, 세상적으로 흐르며 세상을 소원 목적하고 가르치며 그 면을 기도로 이루라고 하는 곳에서 이 영적인 면을 무시한다.
영적인 면은 무시하고 육적으로만 내세우고 사람을 가르치게 되면 그 사람의 인격과 성품은 하나님 앞에서 거룩성이 아닌 세상성인고로 이건 사람을 하나님 앞에서 더럽게 만드는 것이다. 일반 도덕성적 차원의 기준으로 보면 어린아이를 잡아다가 앵벌이를 시키고 껌팔이를 시키는 것은 사람을 더럽게 거지로 만드는 것처럼 교회에서 인도자가 세상을 가르치며 세상을 구하게 하는 것은 교인을 세상 앞에 제물로 놓는 것이고 앵벌이 식이다.
세상공부도 나이에 따라서 차원이 있듯이 교회의 신앙의 깨달음도 차원이 있다. 그래서 먼저 뛰는 사람이 있고 나중에 따라가는 사람이 있고 떨어지는 사람이 있다. 안 믿는다가 아니라 그 차원이 있는 거다.
그런데 이 아이가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을까? 언제부터인지 몰라도 부모가 이 아이가 어릴 때부터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육시키는 것을 무시하고 선악과 따먹은 타락된 기존지식으로 양육을 했으니 이 아이의 오각의 오감성은 육적 세상적으로만 나간 것이고, 성격과 성질도 다듬어지지 못하고, 외아들이라서 해 달라는 대로 다 해줬을 것이고, 하고 싶은 대로 그대로 두었을 것이니 일반 도덕성적으로도 문제가 되는 거다. 자기 마음대로 안 해 주면 소리를 지르고, 집을 뛰쳐나가고, 자기 몸을 자해하고.
이 아이의 부모가 예수님께 그냥 ‘주여’ 할 수도 있고 ‘예수여’ 할 수도 있는 건데 왜 ‘선생님’이라고 불렀을까? ‘선생님’ 하고 부른 거기에는 교육의 의미를 지닌 말이다. 거기에는 우리에게 주시는 가르침의 계시사상이 들어 있어서이다. 교육방법론 목적론이 들어있다. 그래서 성경을 보면 그것뿐만이 아니라 일반적으로 말이 안 되는 것도 있는데 이것은 계시가 들어있어서 그렇게 표현이 되는 것이다.
이 사건에서 신앙 면의 교육을 보면 자기 자녀이건 교회의 교육이건 간에 비진리적 세상 육적으로 가르침을 받았다면 이건 귀신들의 활동에 노출이 되어 있다. 이게 뭣과 같은가 하니 사람이 아무 것도 모르고 있다면 많은 사람 가운데 갈 수가 없는 거다. 그건 왜 그러냐? 사람이 일반적으로 양심을 가졌기 때문에 부끄러워서이다. 부끄럽다는 말은 옷을 벗은 것과 같다 그 말이다. 아무 것도 모르면 부끄럽고, 죄를 지으면 또 부끄럽다. 죄 지은 것이 탄로가 나지 않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음에서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운 것도 있다. 회고적 영감의 깨달음으로 ‘하나님 앞에서 잘못했구나’ 하는 게 있다.
귀신들의 활동에 노출이 되어 있는 상태는 무엇이든지 자기 마음에 안 들면 싸움이 일어나게 되고 진리생명의 말씀에 대적이 되는 마음을 품게 된다. 그래서 아홉 제자들이 예수님의 책망을 뼈아프게 귀담아 들어야 한다. 교인들 중에도 그렇고,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도 그렇고, 목사님들 중에도 그렇다.
43절: 하나님의 위엄이 무엇이냐? 창세 이후 세상 마지막 그 날까지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불가능한 것을 우리 인간에게 이루심을 말한다.
그런데 타락된 자들은 어떤 위엄을 보고 놀라느냐? 사람 많은 것을 보고 놀라고, 건물 큰 것을 보고 놀라고, 돈이 많은 것을 보고 놀한다. 그러나 참 옳은 사람이면 사람이 온전하게 고쳐진 것을 보고 놀라고, 그것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기뻐할 줄 안다. 이런 사람이 사람의 가치를 알아보는 사람이다. 그러니까 이 사람은 하나님께서 하신 역사를 그 사람 속에서 보는 것이다. 단순히 사람만 보면 안 된다. 그러면 실수를 할 수가 있다. 좋은 사람이건 나쁜 사람이건 일반적으로도 그 사람 속에서 하나님의 역사를 느낄 줄 알아야 한다.
43절-45절: 43절에 ‘저희가 다 그 행하시는 모든 일을 기이히 여길 새.’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모든 일이 어떤 일이기에 ‘저희가 다 그 행하시는 모든 일을 기이히 여길 새’ 그랬나?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모든 일들이 어떤 일이기에 기이히 여길까? 그것은 창세 이후로 세상이 있어옴으로부터 여태까지 없었던 일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신이 아니면 안 되는 일, 인간 능력 밖의 일, 만물의 법칙으로도 안 되는 일, 이론적으로도 안 되는 일, 인간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일. 참 기이하다.
주님의 일은 과거의 사람에게도 해당된 일이요, 현재의 사람에게도, 미래의 사람에게도 해당된 일이요, 빈부귀천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전체 인류에게 해당되는 일이다. 육에 속한 사람은 눈에 보이지 않는 무형적인 일은 잘 모르고 눈에 보이는 면만을 보고 놀라는 것이지만 영에 속한 사람들은 사람이 신의 성품으로 만들어지는 것을 보고 하나님의 그 위엄을 찬양을 한다.
번개치고 지진이 일어나고 하는 거 무섭다. 이건 자연으로 하나님의 위엄이 나타난 거고, 여기서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위엄이 나타난 거다. 하나님의 역사가 자기에게 나타나는 것. 그런데 하나님의 역사가 자기에게 부정적으로 나타나면 어떻게 되겠느냐? 죽으면 당장 죽는 거지만 사람이 입이고 귀고 발이고 목이고 온 몸이 꼬인 사람을 봤느냐? 보자마자 하나님이 위엄에 놀라고 신비스럽기도 하고 기이하기도 하다. 그런 것만 보지 말고 자기 속에 긍정적으로 하나님의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볼 수 있어야 한다.
44절: ‘이 말을 너희 귀에 담아두라.’ 무슨 말을 너희 귀에 담아두라는 것이냐?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기워진다는 것. 누가 마음대로 그렇게 할까? 예수님이 사람들의 손에 넘겨지면 누가 마음대로 하겠느냐? 사람들이 마음대로 한다. 예수님의 손에 쥐어지면 예수님이 마음대로 하겠으나.
이것은 말씀이 사건화 되어서 너희들의 눈으로 똑똑히 볼 것이라는 것이다. 물론 이 말씀은 역사적으로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을 말씀하심이고, 계시적 신앙 사상적으로 영의 눈으로 보면 또 다른 뜻이 들어있는데, 아이를 고치신 후에 이 말씀이 바로 나왔기 때문에 우리는 그 면과 연결을 지어서 봐야 한다.
그래서 ‘사람들의 손에 넘기운다’ 함은 사람의 주도권의 세력에, 사람들의 어떤 세력에 예수이름이 잡힌다는 말이다. 실은 예수 자체는 잡히지 않는다. 그런데 예수이름을 가지고 사람들이 마음대로 할 것이라는 것이다. 뭐하는데 마음대로 할 것 같으냐? 귀신을 내어 쫓고 병자를 고치는 세력에 예수님의 이름이 넘어간다. 그 주도권에 넘어간다. 그런다고 해서 예수님이 그들의 종이 되어서 그들의 소원 목적대로 해준다는 의미는 아니다.
역사적으로 예수님이 그들의 손에 못박혀졌어도 예수님이 소원적으로 그들에게 그렇게 해 준 것은 아니다. 사람들이 바라는 요구조건에 예수이름을 이용한다는 것이다. 아홉 제자들이 예수님이 안 계시는 틈에 병을 고친다고 했듯이. ‘세상 사는데 부자로 만들어 달라. 병도 고쳐달라. 종교적 부흥을 시켜달라’ 하며 예수이름을 이용한다는 것이다. 그런 소원 목적을 가진 교인들이 예수이름을 가지고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 것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2천 년 전의 십자가의 사건만 생각을 말고 그 사건을 영의 눈으로 보면 지금도 여전히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못박혀진다. 인간들의 종교적 세력이 그렇게 몰고 가는 역사를 볼 수가 있을 것이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도 처음에는 ‘나도 주님과 같이 죽겠다’ 하며 순교적 각오를 대단히 했는데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갈수록 여러 가지 상황적으로 자꾸 어려워지니 즉, 거짓된 종교는 자꾸 커지고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옳은 교훈은 활동 면으로나 재정 면으로나 자꾸 어려워지니 목숨 바쳐 충성봉사 하겠다던 그게 슬슬 다 떨어진다.
한 사건을 가지고 사상적으로 반드시 진행시켜 봐야 한다. 사상은 멈췄지만 멈춰있는 사상이 진행처럼 보이는 것은 신앙사상 면에서 진행이 되고 있어서이다. 왜냐하면 사람들 속에서 계속 작용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현실에 살고 있지만, 과학시대에 살고 있지만 옛날을 그리워하는 사상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 있다. 옛날사람이라도 미래적인 신식 사고방식을 가지고 사는 사람도 있다. 우리 모두가 자기가 태어난다면 어떤 시대의 사람과 생각이 잘 맞을까? 아무 데도 안 맞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속화된 교인들이 예수이름을 가지고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다. 이건 예수님이 사람들의 세력에 붙잡힌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천국의 말씀으로 사람을 죄에서 구원시켜 하늘의 도의 사람으로 성장시키심인데 세상 속화된 인도자들은 세상 불신자들이, 육의 사람들이 좋아하는 일만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세상 밑으로 들어가서 세상에게 충성봉사 한다는 이치가 되는 신앙 사상들이다.
그런데 45절에 보니 ‘저희는 이 말씀 알지 못했다’고 한다. 왜 알지 못했을까? 방금 말한 것 중에 십자가 사건이 보이고, 또 하나는 거짓된 교인들의 세력이 예수이름을 이용한다는 게 들어있다. 그런 것처럼 예수 믿는 사람이 자기에게 온 옳은 진리이치를 죽이면 자기의 구원을 죽이는 거다. 그러면 자기의 이룰구원은 없다. 그러면 하나님의 형벌을 당하게 된다. 이치는 똑같다. 똑같은 사상들이다.
저희는 이 말씀을 알지 못했다? 왜 알지를 못했을까? 그것은 사건이 미래적이기 때문이다. 현재가 과거가 되고 미래가 현재가 되기 전에는 잘 모른다. 우리 모두 거의가 그렇게 돼 있다. 또 깨닫지 못하게 숨어있다는 것이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예수님께서 세상 속화된 신앙 즉, 구복주의 신앙이라든지, 신비주의 신앙, 사회주의 신앙 등 그런 세상적인 외식주의 신앙 사상에는 그것이 덮여져 있다는 것이다. 종교적 행사 프로그램에 덮여져 있다.
왜 그럴까? 계시적으로 신앙 믿음의 원리는 정확하게 성도 마리아의 수태하는 과정으로 밝혀 놓았는데 이것을 모르는 자들은 그것을 하나의 역사적 지식으로밖에 모르는 것이다. 이들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진리이치이신 예수님을 따라 올라가서 주님과 선지자들과 의사단일로 통하는 변화되는 것은 모르고 단순히 산 아래 낮은 차원에서 병자 고치고 정신병 고치는 그 차원밖에 없다. 그러면 다 고쳐놓았느냐? 그렇지도 않다.
산 아래에는 아홉 제자가 있지만 이곳엔 예수님은 없다. 예수님이 없는 곳은 이룰구원은 없다. 사람이 바로 되는 구원은 없다. 그런 신앙 사상들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요’ 하는 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지 이미 오래 됐다. 역사적으로 그랬고, 오늘날도 그런 신앙자들은 자기에게 온 구원을 죽인다 그 말이다. 안 믿는 사람이 죽이는 게 아니라 믿는 사람들이 죽인다. 예수님 당시 때도 그랬다.
오늘날 교회들이 세상 육적으로 믿으면 거기엔 구원이 없다. 성장되고 참 사람으로 만들어지는 구원은 없다. 그러면 이런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성격이 바로 고쳐졌느냐, 성질이 바로 고쳐졌느냐? 그대로 있다. 우리 입장에서는 그걸 생각을 하면서도 그게 얼른얼른 고쳐지더냐? 그러니 이걸 모른다면 어떻게 고쳐지겠느냐?
‘또 저희는 이 말씀을 묻기도 두려워하더라.’ 이적을 행하신 이 분이 사람들의 손에 넘겨진다?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걸까? 알려고 하면 할수록 불안해지는 일이다. 우리는 시대와 장소를 초월한 예수님의 이 말씀을 잘 기억해 두었다가 사건이 오면 이룰구원에 수입을 잘 잡을 수 있게 영적 지혜를 가져야 한다.
이적을 행하신 이 분이 사람들의 손에 넘겨진다? 많은 세력들이 예수님의 능력만 똑 따서 이적을 행하려고 한다. 이건 예수님이 사람들의 손에 넘겨진 것이다. 사람이 전쟁이 나서 포로가 되는 것만 보지 말아라. 어떤 정신이 어떤 정신에게 포로가 되는 것, 사상이 포로가 되는 것. 이것도 넘겨진 것이다.
46절: 목사님들 중에 이런 게 많고, 교인들 중에도 이런 게 많고, 어디를 가도 이런 일이 다 있다. ‘누가 높으냐? 누가 수제자냐?’ 자기들끼리 야단법석이다.
예수님께서 당신이 사람의 손에 넘겨진다고 할 때 ‘어떤 사건을 염두에 두고 하시는 말씀인지?’ 하며 사람들에게 미혹이 되지 않도록 구별력을 가지고 믿음실력을 깨달음으로 잘 키울 생각은 하지 않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사건이 금방 눈앞에 나타날 텐데도 제자들은 ‘누가 크냐’ 그러고 있다.
그 때는 ‘누가 크냐’ 하는 거고, 지금으로 말하면 ‘목사가 나이가 많아 죽으면 누가 후임을 하지?’ 하는 것도 된다. 스승목사님이 계실 때도 그런 소리가 많이 나왔다. 어떻게 그런 생각들이 일어날까?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는 자들이 어찌 그런 생각들이 들어갈까? ‘누가 크냐’ 하는 말이 ‘누구의 키가 더 크냐?’ 하는 건 아닐 텐데.
‘누가 누구보다 더 오래 다녔으니 누구의 믿음이 더 크냐?’ 예배당에 오래 다닌다고 믿음이 큰 거냐? 짧은 세월이지만 적중적으로 바로 힘쓰고 애를 썼다면 오래 다닌 사람보다 믿음이 더 클 수도 있는 거다. ‘누가 누구보다 더 이름 있는 데를 나왔느냐? 어느 신학을 나왔느냐?’ 목사님들 세계에서 이런 게 많다. ‘누가 누구보다 더 많이 알고 있으니 믿음이 크다느니.’ 엄밀히 따지면 많이 안다고 믿음이 더 크냐? 그게 절대는 아니다. 그리고 자기가 많이 알지도 못하고 믿음도 없으면서 많이 아는 사람을 보고 ‘많이 안다고 믿음이 크냐?’ 하고 말하는 것도 문제다.
‘누가 누구보다 봉사를 더 많이 해서 믿음이 좋다느니’, ‘누가 누구보다 더 부자라서 믿음이 좋아서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다느니.’ 그러나 이건 사람 바로 된 것과는 다른 거다. ‘건물을 더 큰 것을 가졌으니 믿음이 있어서 축복을 받았다느니.’ ‘교인이 많고 헌금이 많으니 참 크다느니’, ‘조직이 크고 이름 있는 교단에서 나왔으니 믿음이 크다느니’, ‘직분을 가졌으니 신앙이 좋다느니’, ‘성경을 많이 아니까 믿음이 좋다느니.’ 이런 ‘누가 크냐’ 하는 변론성이 해 아래의 것이냐, 해 위의 것이냐? 해 아래의 것이다. 해 아래의 것은 아무리 크고 아름다워도 다 심판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진리도 알지 못하면서 ‘누가 큰 지 하나님 앞에 가서 봅시다’ 하는 것도 문제다. 사실 ‘영적인 면에서 누가 크냐’ 하는 것은 믿음이 없는 인간이 판단할 일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판단할 일이다. ‘믿음이 있고 없고’ 하는 정확한 판단은 예수님이 하시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손에 넘기운다고 하니까 ‘예수님이 없어지면 다음에 나다.’ ‘아니다, 나다.’ ‘연령적으로나 아는 면으로나 내가 크다’ 하는 변론을 하고 있다. 사실 이것도 예수님께서 더 잘 아신다.
스승목사님이 돌아가시니까 서로가 ‘내가 수제자다. 내가 더 크다’고 했다. 어떻게 그런 생각들이 나오는지 모르겠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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