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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눅10:4-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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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경형목사 |
참고 : | 궁극교회 주일예배 |
10장 4절-6절: 전대나 주머니나 신을 가지지 말며 길에서 아무에게도 문안하지 말며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말하되 이 집이 평안할찌어다 하라 만일 평안을 받을 사람이 거기 있으면 너희 빈 평안이 그에게 머물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4절: 둘씩 칠십 인을 내보내며 하시는 말씀이다.
‘전대나 주머니나 신을 가지지 말며.’ 전대는 돈주머니, 지갑이다. 전대가 없는 사람이 있느냐? 다 가지고 있다. 지금은 카드도 있다. 그런데 가지지 말라고 한다. 그러면 세상을 어떻게 사느냐? 전도를 하려면 가까운 데는 걸어갈 수 있으나 전철도 타야 하고, 버스도 타야 하고, 기차도 타야 하는데 돈이 없이 어떻게 가느냐? 일반적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다.
일반적인 사고방식으로 성경은 못 푼다. 왜냐? 성경은 인간의 말을 빌려다 표현적으로 그렇게 쓰시는 말씀이다. 그 말씀 속에 당신의 뜻이 들어있으니 그 뜻을 나타내 주려고 하니까 말도 안 되는 말 같은 것도 있는 것이다.
‘가지지 말라.’ 그러면 어떻게 사느냐? 예수님께서도 가룟유다에게 헌금 궤를 맡겼는데 무엇을 말씀하고자 이렇게 말씀함일까? 전대를 왜 가지고 있느냐? 돈을 넣으려고. 전대 안에 돈이 가득 들어있으면 어떤 마음이 생길까? 그리고 전대가 텅텅 비어있으면 또 어떤 마음이 생길까? 그러니까 이게 전대, 돈을 말하는 것 같으나 ‘가지라. 가지지’ 말라 할 때는 사람의 마음속의 움직임이 나오는 거다.
‘주머니를 갖지 말라’고 했는데 이건 여행배낭을 말하는 건데, 주머니를 가지고 다니면 어떤 마음이 생길까? 여행배낭은 일반적으로 집을 떠난 여행자가 쓸 물건들을 편리하게 넣고 다니는 거다. 그런데 이걸 말하고자 함이 아니라 받고자 하는 마음, 이 마음은 갖지 말라는 것이다.
사실 받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주는 대로 배낭 속에 넣으면 무겁고 힘만 든다. 그러니까 받고자 하는 마음이 문제라는 것이다. ‘가지지 말라’고 했는데 가지고 있으면 자기 속의 마음의 움직임이 복음과 다르게 나오게 된다는 면을 염두에 둔 말씀이다.
‘신을 가지지 말아라.’ 신이 없이 맨발로 다니기가 힘들다. 신을 신으면 자기 마음대로 갈 수가 있다. 그러니까 천국복음이란 것이 타락된 자기 주관성으로 전해지는 것이더냐? 그렇게 자기의 타락된 주관성으로 신은 것이 복음의 신발이냐? 타락된 세상은 신발을 신고 사는데 자기의 타락된 주관적인 신발이 많다.
신발을 신으면 자기 마음대로 가고자 하는 의욕이 있다. 주관성이 있다. 그러나 신발을 벗으면 발이 아프니까 자기 주관성대로 마음대로 갈 수가 없다. 그러니까 누구의 주관성대로 가라는 것이냐? 전도자가 복음의 신발을 신으라는 것은 복음이 지시하는 대로, 복음이 가자는 대로 가겠다는 정신을 가지라는 것이다. 인간 네 사고방식의 신발을 신지 말아라. 네 주관성대로 다니고자 하는 마음을 갖지 말아라 그 말이다. 네 주관성을 버려라. 복음은 네 주관성대로 되는 게 아니라는 말이다.
‘길에서 아무에게도 문안하지 말며.’ 아는 사람이 많으면 길을 가다가 문안인사가 많다. 잡고 말을 하다보면 가려는 목적지에 도착하기가 그만큼 더디다. 또 그 말을 다 듣다가 보면 그 일을 해주게 되고, 그 일을 해주다보면 가는 길을 못 가고 죽을 수도 있다. 또 길을 가다가 길 좌우편에 장사꾼이나 음식점이나 상점이 많으면 그것에 기웃거리다가 좋아 보이는 것에 마음이 끌리기 쉽다. 그러다 보면 가려는 길을 못 갈 수도 있다.
진리 길, 생명 길을 가다보면 종교적 유행이 아름답게 보이고 가치 있게 보여서 그만 그곳으로 들어가서 인사하기 쉽다. 이렇게 되면 진리본질을 다 잃어버리고, 신앙정조도 다 빼앗기고, 신앙사기 다 당하고, 인생을 헛 살고 헛 믿고 가게 된다.
사기 중에 신앙사기는 내가 당해도 아무도 그걸 모른다. 자기가 좋아서 하기 때문이다. 말릴 사람이 없다. 거짓된 비복음을 듣고 신앙사기 당하는 사람이 많다. 일반 세상에만 사기꾼이 있는 게 아니다.
신앙사기를 당하는 사람은 자기 속에 비진리가 들어있어서 비진리 인본주의적 사고방식이 오면 자기 속에 있는 것과 똑같기 때문에 그대로 당하게 된다. 그래서 신앙사기를 안 당하려면 진리본질을 명확히 알아야 한다. 좀 더 축소시켜 말을 하면 예수 믿는 사람은 자기 속에 영이 중생된 새사람 있고, 세상을 좋아하는 세상 쪽으로 가고자 하는 그런 소원 목적적으로 살고자 하는 옛사람 있다. 옛사람은 육의 생각을, 세상살이 염려걱정을 자꾸 하고, 새사람은 하나님의 일에 대해 자꾸 염려하고 걱정을 한다. 정 반대다.
예수님을 안 믿는 사람들은 영이 중생된 것은 없다. 이들은 선악과 따먹고 그 영은 죽었고 죄의 종으로 돼 있다. 그 속에 자기라고 하는 그 성질은 옛사람이다. ‘예수 잘 믿어야겠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하겠다’ 하는 생각은 없다. 만일 그 생각을 한다면 그 자기는 새사람이다.
안 믿는 사람은 잘 먹고 잘 살고 하는 세상에 속한 것으로 돼 있다. 그런데 예수를 믿으면서도 예수이름으로 세상에서 복 받아 잘 살아야 하겠다고 하는 것은 옛사람이다. 새사람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어떤 크고 작은 사건 상황을 만들어줘도 진리신앙의 정조를 잘 지키며 그 사건을 통과하면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잘 만들어져 나와야겠다’ 한다.
인본주의적 사고방식으로, 세상적으로 예수를 믿는 사람은 대부분 속에 옛사람이다. 그런 생각은 주님의 생각과는 정 반대다. 그렇게 믿어나가면 너는 헛 믿고 헛 살고 가게 된다. 그런 교회, 그런 목사가 한 두 사람이냐? 많다. 그런 식으로 믿으면 첫째는 네 속의 옛사람에게 너는 당했다. 네가 불타고 변질되고 썩고 진동되고 요동되고 하는 세상 것에 마음과 소원 목적이 가서 있으면서 예수를 믿고 있다면 그 정신은 옛사람의 정신이요, 그 속의 정신 사상은 참 네가 아니다.
성경은 자기 속의 사람구분을 잘 가르쳐 준다. 이방종교는 사람분별이 없다. 중심, 속, 성격 성분 성질이 분별되는 게 없다. 그저 ‘참자. 참자’이다. 그러나 우리는 참아야 할 것이 있고, 안 참아야 할 것이 있다.
예수 믿는 사람이 자기 속에서 늘 새사람이 기준이 돼야지 옛사람을 기준으로 살고 있으면 너는 신앙생활 종교생활을 해도 거짓적인 사람이다. 왼쪽에 있는 사람들이 충성봉사를 다 했는데도 예수님은 그들에게 ‘난 너희들을 모른다’고 했다. 이들은 성경대로 했으나 옛사람이다.
바리새 종교인들이나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당시에 세계적인 종교지도자들이다. 율법사들은 원문도 잘 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향해서 ‘독사의 자식들아. 마귀의 자식들아’ 라고 했다. 그런데 그들은 예수님을 향해서 ‘나사렛 이단이라’고 했다. 그러면 예수님이 그들을 향해서 ‘마귀의 지식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그랬는데 그게 욕이냐, 칭찬이냐? 일반적으로는 욕이다. 그런데 그들의 성격과 성질에 딱 맞는 욕이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말한 것은 그들의 껍데기를 보고 한 말이냐, 속 중심을 보고 한 말이냐? 속 중심. 그러니까 인간표현으로 말하자면 예수님은 새사람으로 말한 거냐, 옛사람으로 말한 거냐? 새사람이다. 예수님이 옛사람으로 보는 눈이라면 예수님은 그들과 합작이 된다.
그러면 그들이 예수님을 ‘나사렛 이단’이라고 했는데 그렇게 말한 그들의 중심 속에 있는 것은 새사람이냐, 옛사람이냐? 옛사람이다. 그래서 그들은 역사 속에 하나님의 심판으로 사라져 버렸다.
안 믿는 사람들은 껍데기를 기준하지만 예수님은 속 중심을 보고 말씀을 하신다. 그 속 중심, 당신 기준에서, 당신의 성품대로 바로 된 것은 칭찬이 들어가고, 질적으로 그게 아니면 예수님으로부터 저주가 들어가는 거다. 우리도 속 중심의 진리본질을 먼저 안 후에 그 다음에 그 사람의 마음속에 들어있는 것이 판단이 들어가는 거다. 그냥 행동 잘하고 못하고 그게 기준이 아니라. 그거는 상황에 따라서 하기도 하고 안 하기도 하는 거다. 그걸 기준으로 세우면 안 된다.
자기가 옛사람의 생각을 가지면 안 믿는 사람은 이걸 모른다. 예수를 믿기는 믿어도 세상적으로 믿는 사람도 모른다. 그러나 진리본질의 정확한 신앙을 가진 사람은 ‘그 속이 옛사람이다. 새사람이다’ 하고 예수님이 보시는 것처럼 보게 된다. 그래서 ‘예수는 그렇게 믿는 게 아니다. 예수는 이렇게 믿는 거다’ 하고 정확히 말해줄 수가 있다. 이걸 모르면 신앙사기 당한다.
지금 신앙사기 당하는 사람이 한 두 사람이 아니다. 교인들만 아니라 목사 자신도 자기의 옛사람에게 신앙사기 당해서 하나님 앞에 형벌 받을 사람이 한 두 사람이 아니다.
거짓 종은 신앙 사기꾼이다. 그러면 그들이 일부러 거짓말을 하고, 일부러 ‘돈 돈’ 한다는 말이냐? 그런 의미가 아니라 진실한 마음으로 사명감으로 한다고 해도, 돈 소리 하나도 안 해도 메시지 자체가 세상성을 띠고 목적이 세상성으로 들어가 있으면 그 교훈을 받게 되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성품으로 만들어지는 것은 하나도 없으니 결과적으로 교인들로부터 신앙사기를 치는 셈이 되는 것이다. 그런 곳에서는 신앙사기를 당하는 것이니 가지를 말아라. 이건 창녀에게 마음도 몸도 시간도 물질도 다 빼앗겨서 죽는 것과 같다.
길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사람은 길에서 문안인사 하다가 가려던 길도 다 못 가고 죽는다. 그러면 우리가 가는 길은 무슨 길이냐? 생명 길, 좁은 길, 진리 길이다. 왜 좁은 길이라고 하느냐? 성경은 하나님 당신의 의사대로 들어가 있다. 예수님이 ‘나를 따라 오너라’ 하는 말씀은 하나님의 의사대로 따라오라는 말이다. 그러나 넓은 길은 입으로만 ‘주여’ 하고, 그 다음에 모든 이해타산 사고방식은 세상 사람들이 하는 것과 똑같은 사고방식으로 교회에 다니고 그렇게 사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건 말씀의 길이 아니다.
생명 길, 좁은 길을 가면 거기에는 하나님의 생명의 사람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들어있다. 그러나 넓은 길로 가면 세상을 닮는 게 잔뜩 들어있다. 이러면 네 인격이 죽는다. 사람이 쓸모가 없다.
일반적으로도 세상에서 볼 때 술 담배 피우고 길에서 잠자고 하는 사람은 쓸모가 없다. 그러면 그 사람은 이미 정신도 몸도 망가져 있다. 그런 사람을 데려다 쓰는 사람은 별로 없다. 그런 것처럼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정신으로 들어가 있어야 하는데 세상정신으로 잔뜩 들어있으면 그런 사람들은 모이기만 하면 세상소리가 나오고, 그런 교회는 세상생각대로 하는 교회가 돼 버린다.
우리가 가는 길은 생명 길이요, 이방인들과 세상 속화된 교회가 가는 길은 넓은 길, 사망 길이다. 그러면 어느 길이 참 길이냐? 좁은 길이 참 길이다. 우리가 가는 길은 이것 하나밖에 없다. 그러면 넓은 길도 길이냐? 아니다. 그거는 길로 쳐주지를 말아야 한다. 우리가 구분을 지어서 말을 하자니 넓은 길이라고 하는 거지만 사실은 넓은 길은 우리가 갈 길이 아니다. 그거는 사람이 사는 길이 아니다. 신앙의 길이 아니다.
혹시 잘못 알아듣는 사람은 이 말이 행동에 대고 자꾸 행동규제를 하라는 말로 알 수가 있으나 아니다. 하나님 앞에 신앙의 질을 바로 가지라는 것이다. 그러면 방편적으로 사는 삶은 좁은 길로 가는 것이다. 세상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어지는 하나의 훈련장이다.
5절: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말하되 이 집이 평안할지어다 하라.’ 뜻이 같고 목적이 같아야 의사단일성을 이룰 수 있고, 의사단일성이 되어야 평안이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한 가족이 의사단일이 안 되면 같은 상에서 같이 밥 먹고 같이 잠자고 해도 그 집이 평안하겠느냐? 각자 주장이 나오는데 평안하겠느냐? 평안이 안 된다. 평안이 되려면 먼저 의사단일성이다. 이치를 어기면 안 된다.
예수 믿는 가정이 시끄러운 가정이 참 많다. 그런데 보통 보면 ‘하나님 아버지, 우리 가족이 다 예수 믿게 해 주시고, 평안하게 해 주시고, 복을 내려주옵소서. 우리 가정이 하나님께 영광이 될 테니 우리 가정 평안하게 만들어 주십시오’ 그런 기도를 많이 한다. 그런 신앙으로 남편이나 아내가 다 같이 예수를 믿으면 평안할 것 같으냐? 아니다. 단순히 그렇게 생각하지 말아라. 같이 예수를 믿어도 가는 길이 다르면 그런 원수가 없다. 평안하지를 못하다. 예수 믿는 그 속에는 영적 완력이 있는 거다.
일반적으로는 그렇게 좋은 친군데 ‘교회 나가자. 예수 믿자’ 하면 여기에는 눈에 안 보이는 암투가 막 싸우고 있다. 그러다 보면 자꾸 의사성이 틀어져서 헤어지게 된다. 가정이 그렇다면 하나님의 의사단일성을 이루어야 하겠는데, 그러려면 네 의사도 말고 내 의사도 말고 모든 가족이 제일 좋은 의사인 하나님의 의사에 맞춰야 한다. 하나님의 의사에 맞추게 하려면 방편이 있어야 하는데, 성경이 다 있으니까 성경을 놓고 성경을 읽고 그 다음에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면 다 하나가 된다. 진리는 하나고, 생명은 하나고, 아가페는 하나다. 그게 안 되면 모아지지를 않는다.
주일날 설교도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의사에 맞춰져야 먼저 각 사람의 마음에 평안이 깃들고, 그 다음에 그 교회에 평안이 깃든다. 그런데 우리 주님과 의사성이 비단일이 되면 여기는 대립이요 괴롭다. 그러면 누가 고통스러우냐? 자기만 고통스럽다. 의사단일성이 되어야 평안이 된다. 목적도 같고. 이치를 알아야 한다.
이치는 똑같은 건데, 한국 사람들이 나라를 위해 기도할 때 다 예수 믿게 해 달라고 기도를 하는데 우리는 좀 더 들어가서 하나님의 의사단일성이면 이거는 자동적으로 하나다. 하나님과 의사단일이 아니면 교단 간 교파 간에 어떤 일을 놓고 ‘같이 합시다’ 하고, 그 일을 해 놓으면 또 헤어진다. 그것이 교파초월을 해서 전도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사단일이 아니면 절대로 하나가 안 되는 법이다.
의사단일로 들어가지 않기 때문에 주님은 자꾸 헤친다. 주님은 쪼개는 역사를 한다. 성경에 있지 않느냐? 하나님의 뜻을 찾지 않고 무관하게 사니까 성경에 이스라엘이 남조와 북조로 갈라진다. 또 남조에서도 선지자들이 그렇게 말을 해도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를 않으니까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게 해서 거기서 또 나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사랑하는 종들인 다니엘 등의 선지자를 끄집어낸다.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분리를 시키고 있다. 예언 방언하는 사람들은 그 쪽으로 모이게 하고, 구국주의는 구국주의대로, 사회주의는 사회주의대로, 신비주의는 신비주의대로, 극기 극복주의는 그들대로 모으고 있다. 질이 같으니까 그렇게 잘 모이고 있는 거다. 주님께서 분리수거를 하시는구나. 교인들을 분리수거를 하려면 끼리끼리 모에게 하는 거다. 타작할 때는 단으로 묶는다. 단으로 묶는 것은 타작을 하려는 것이다.
이치를 알고 예수를 믿어야지 아무 데고 나가면 그게 예수 믿는 거냐? 아니다. 예수를 믿을 바에야 유익되게 자기가 하나님의 존영자로 만들어져야 한다. 이용만 당하고 충성봉사나 강조하고. 교회는 그런 게 아니다. 주님이 일을 못해서 자기를 부른 것 같으냐? 일을 못해서 자기를 목사로 시킨 것 같으냐? 너나 똑바로 만들어지라는 것이다. 형벌 받을 자로 살지를 말아라.
인간 자기 것으로가 아닌 순전히 하나님의 것으로 소원 목적이 되어야 하나님과의 의사단일성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한 단일성. 하나님의 의사단일성은 시간적으로 영원히 간다. 하나님 당신이 의사적으로 우리에게 영원히 가는 것, 영원히 존귀 영광자가 되는 것, 영원히 행복 되고 영원히 기쁘고 영원히 즐거운 그런 마음. 이게 바로 당신의 속성이요, 바로 당신의 성품이다. 쉽게 말해서 당신처럼 닮아지는 것. 하시하처를 막론하고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하나님 당신의 뜻은 ‘나처럼 되어라, 나처럼 온전자가 되어라’이다.
그런데 예수를 믿어도 선악과 따먹은 요소, 그런 버릇이 있어서 자꾸 옆으로 튕겨져 나간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바로 못 사는 것이다. 옆으로 튕겨져 나가고도 나간 줄도 모르고, 넘어져 있는데도 넘어진 것도 모르고. 하나님의 본질을 모르니 그렇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한 의사단일성 여기서 오는 게 평안이다. 자기의 어떤 물질적인 조건에서 평안이 오는 게 아니다. 물질로 인해서 평안을 얻었다면 물질적인 조건이 잘못되면 또 괴로움이 찾아오게 된다. 환경적 조건에서 온 평안은 환경적 조건에 의해서 평안이 안 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마찰과 충돌과 대립이 어떤 형식으로건 자기의 언행심사로 나타나게 된다. 하나님의 의사단일성으로 안 된 것만큼 어떤 상황에서 건 튀어나온다. 그래서 거짓말을 하게 된다. 그러나 그 거짓말은 숨길 수가 없다.
‘그 집에 들어가서 먼저 이 집이 평안할지어다’ 라고 하라는 말씀은 천국복음을 전할 때 그 천국복음을 받아들이는 집에 그렇게 하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복음을 영접하고 받아들이는 집에 ‘평안할지어다’ 하게 되는 거다. 말만 ‘평안할지어다’ 그게 아니라 하나님의 복음을 받아들이는 그 집이 ‘평안할지어다’ 하는 평안이 깃들게 되는 거다. 복음을 받아들여도 하나님의 의사단일도 모르고, 진리본질도 모르고, 하나님도 모르고, 세상이 어떤 세상인지도 모른다면 예수를 어떻게 믿겠느냐? 또 어떻게 가르칠 수가 있겠느냐? 또 어떻게 대화를 할 수가 있겠느냐? 천국복음을 안 받아들이면 하나님과의 평안이 안 된다.
하나님의 구원의 말씀을 안 받아들이는데 어떻게 대화가 되느냐? 안 되는 이유가 뭐냐? 나도 ‘예수 가라사대’, 저쪽에서도 ‘예수 가라사대’ 하는데 왜 대화가 안 되는 거냐? 예수 믿는 목적이 다르기 때문이다. 목적이 다르니 의사성도 다르다. 의사성은 목적과 같이 붙어있기 때문에 의사성이 다르다는 것은 개념도 서로가 다르다는 말이다. 그래서 아무리 성경구절을 써도 서로가 안 통한다. 여호와의 증인들과 통하더냐? 성경을 놓고 아무리 말을 해도 그들은 목적이 다르고 개념이 달라서 안 통한다.
‘장로교 성결교 감리고 순복음 구세군’ 하는데 성경을 놓고 말을 하면 왜 안 통하는 거냐? 오늘날 교회의 간판이 많은데, 교파가 많은데 이게 무슨 뜻이냐? 예수 믿는 교회는 원칙적으로 하나다. 예수는 하나다. 한 분 예수를 믿는데 왜 파벌이 많은 거냐? 한 예수를 놓고 보는 관점 달라서다. 그래서 성경을 보면 ‘예수님이 병자를 많이 고쳤으니 그 능력을 나에게 주십시오. 뭐 주십시오’ 하는 사람은 ‘우리는 이렇게 나갑니다’ 하는 것이니, 그런 사람들끼리 모이게 되고 곧, 그들의 파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온전이라고 하는 건 없어진다.
그 일을 열심히 많이 부지런히 하고 ‘영광 받으시옵소서’ 한다면 사람이 만들어지느냐? 안 만들어진다. 이건 죽었다 깨어나도 예수님의 사람으로 인격과 성품이 만들어지지를 못한다. 이런 사람들은 예수를 믿으면 맨날 부자 되고 병 낫는다는 그 말만 했지 영적 차원에서의 병은 모른다. 영적 차원에서 예수 믿는 질이 주님의 것과 맞는 건지, 틀린 건지 그건 전혀 모른다. 그러니까 이 사람들은 일을 죽도록 해서 하나님 앞에 면류관을 타자고 하지만 그런 면류관은 없다.
사람 만들어지는 일, 주님처럼 만들지는 일을 죽도록 했다면 그건 상이 간다. 그런데 ‘물질을 가지고 예배당을 몇 개 지었다’고 하면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느냐? 아니다. 영광을 받으려면 하늘로부터 유황불이 떨어질 때 그 집이 안 타야 한다. 그런데 안 타질 집이 있느냐? 안 타지는 것은 네 속에 하나님을 닮은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이다. 네 속의 신령한 것은 불에 안 탄다. 이건 물질과 상관이 없는 거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사람을 불속에 집어넣었는데 안 탄 사람도 있느냐?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 이들이 불속에서 누구와 같이 있었느냐? 주님이다. 그러면 이들이 우상을 섬겼는데 주님이 그들과 같이 있었느냐? 그들은 신앙을 위해 목숨을 건 거다. 이들이 ‘불에 타서 죽을지라도 우리는 절을 안 합니다. 세상이라는 우상 앞에 절을 안 합니다’ 하니까 느부갓네살 왕이 분이 나서 풀무 불을 일곱 배나 더 뜨겁게 해서 그들을 집어넣었다. 그런데 예수님이 거기에 같이 계셨다. 선재적 그리스도께서 그곳에 타나나셨다. 예수님이 육신의 몸을 입고 오기 전에 그리스도로서 그 가운데 나타나셨다. 불을 만드신 이가 불에게 집어 먹히겠느냐?
천국복음을 안 받아들이면 하나님과의 평안이 안 된다. 하나님의 구원의 말씀을 안 받아들이면 대화가 안 된다. 천국복음의 소원성이 아닌 관계는 물질성에 대한 의미만 깔려있는 것이니 그런 자들과 교회의 일을 의논하면 안 된다. 천국복음의 소원성이 아닌 관계는 물질성에 대한 관계만 있으니 그런 자들과는 교회에 대한 일을 의논할 대상이 안 된다. 의사적 대립이 있기 때문에 그건 안 되는 거다.
6절: 천국복음을 받으면 하나님과 의사단일성이 되니까 하늘의 축복을 받는 사람이요, 천국복음을 안 받는 사람은 하나님과 의사단일이 안 되니까 하나님의 저주와 재앙을 받는다는 말이니 참으로 두렵고 떨리는 말씀이다.
우리가 이 말씀을 보면서 내가 지금 천국복음을 전하고 받아들이고 영접하는 사람인지, 아니면 세상복음을 받아들이고 영접하는 사람이지 생각을 해야 한다. 그 앞에 뭐라고 나왔느냐? 천국복음을 받아들이면 거기에 평안이 깃들 것이고, 너희 마음과 가정에 평안이 깃들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되돌아온다. 그러면 거기에는 하나님의 저주요 재앙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현실적으로 주시는 말씀이다. 지나가는 말로 하는 말이 아니다. 그래서 두렵고 떨리는 말이다.
복을 받고 못 받고, 평안을 받고 못 받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예배 때 그게 딱 판명이 나는 것이다. 가인과 아벨이 에덴동산에서 쫓겨 나와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는데, 거기에서 저주와 축복이 판이 나버렸다. 제단을 쌓는 거기에서 판이 나버렸다. 지금으로 말하면 자기가 예배시간에 어떤 마음을 가지고 어떤 소원성을 품고 하는 거기에서 자기의 판이 다 나누어지는 것이다. 주일마다 무덤덤하게 올 때도 그렇게 왔고, 다음에도 또 그렇게 오면 그 사람이 어떻게 되겠느냐? 시간은 자꾸 지나고, 나이는 자꾸 들고, 하나님의 역사는 자꾸 자기에게 다가오는데 이게 어떻게 되겠느냐?
일반적으로 아침저녁 하루 세 끼 제 때 밥을 안 먹으면 금방 병이 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계속 그렇게 가면 점차적으로 쇠퇴해지고, 병이 들어오고, 병이 들어오면 힘을 못 쓰고, 돈이 들어가고, 노동도 못하고, 결국 자기는 죽는 거다. 교회에 가서 말씀을 먹는 것도 ‘다 교회가 그렇거니’가 아니라 분별이 들어가고, 구별이 들어가고, 자기 일생의 갈림길이 나누어지는 길이고, ‘하나님 앞에 저주냐, 평안이냐’가 들어가는 것이다. 일생동안 밥 먹고 살아온 그것만 생각을 하지 말고 예수 믿는 그날부터 오늘날까지 내 속에 무엇으로 가득 차 있느냐?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으로 가득 차 있다면 얼마나 복된 사람이냐?
내가 지금 천국복음을 받는 것이냐, 세상 축복 그것을 받는 것이냐? 이것을 분별하지 못하면 세상 것을 주장하는 거짓된 종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될 것을 받으면서도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하지 않겠느냐? 하나님의 저주를 받는 말인데도 ‘아멘 아멘’ 하고, 예수 믿어 부자 된다고 하니까 ‘아멘’ 하는 사람이 한 두 사람이냐? 그건 이방인들이 구하는 거다.
정말 천국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손해날 것이 없다. 왜? 내가 전하는 천국복음을 상대가 안 받으면 그 축복은 나에게 되돌아온다. 상대가 받으면 사람을 얻는 거고, 안 받으면 전한 복음이 나에게 되돌아오고. 그러니까 참 복음을 많이 전할수록 더 좋다. 안 받으면 참 복이 나에게 더 올 테니까.
그런데 참 천국복음이 아닌 세상 거짓된 복음, 맨날 ‘세상 복 복’ 하는 그것을 전한다면, 그리고 그게 좋아서 상대도 ‘아멘 아멘’ 하고 들어가면 저주가 들어가는 거고, 그렇게 하는 목사에게도 하나님의 심판이 들어간다. 이건 마귀의 말과 똑같은 거다. 그러니 어떻게 심판의 날에 그 책임을 다 질 것이냐?
거짓 종들은 자기가 져야 할 영적 책임은 못 느끼고 물질축복 세상축복으로만 치닫는다. 그러나 복음은 하나뿐이다. 천국복음뿐이다. 어디서 건 누가 전해도 천국복음이라면 하나다. 예수는 하나다. 그런데 예수를 말하면서 왜 예수님이 세상을 구하는 것처럼 가르치느냐? 예수님이 거지냐? 세상만물을 당신이 다 만들었는데? 오늘날 기독자들이 이치를 몰라서 도무지 못 깨닫는다. 세상축복을 강조하는 것은 복음이 아니고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다.
오늘날까지 자기가 무슨 복음을 받고 왔는지? 참 천국복음을 받고 있다면 양심의 소리를 듣고 자기의 언행심사에 무엇인가 변화가 있어야 한다. 회개를 하든지. 자기가 받은 것이 천국복음이 아니라면 자기는 멸망당할 곳에 그대로 앉아있는 것이다. 인정성 때문이냐? 아니면 물질성 때문이냐? 아니면 먹고 살 육신문제 때문이냐? 왜 그런 곳에 앉아 있느냐? 갈 곳이 없어서 그런 곳에 붙어 있느냐?
천국복음을 만났다면 하나님 앞에서 전 인격을 다해 믿음생활을 똑바로 해야 한다. 하나님 앞에서 바로 하고자 하는 마음도 없으면서 자기 집이 부자 되기를 바라고, 자기 자식이 잘 되기를 바란다면 이게 뭐냐? 이런 사람이 진리가 뭔지, 비진리가 뭔지를 알겠느냐? 참 옳은 것을 알았느냐? 받았느냐? 하나님 앞에 마음을 바로 쓰는 것부터 배워라. 이것부터 안 되면 그 다음엔 거짓말만 늘어놓게 된다. 복음을 이치적으로 못 깨닫는다는 건 그만큼 자기가 이치의 사람이 안됐다는 것이다. 이치를 알아야 바로 깨닫는 것이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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