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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골3: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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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정용섭 목사 |
참고 : | http://dabia.net/xe/929322 |
생명의 은폐와 탈은폐
골 3:1-4, 부활 주일, 2017년 4월16일
1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2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3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 4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기독교인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두 가지 요소를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하나는 실제의 삶이고, 다른 하나는 신앙의 내용입니다. 실제 삶은 기도, 예배, 헌금, 구제, 봉사, 교우 사이의 관계, 윤리적인 삶 등등입니다. 신앙의 내용은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성령, 칭의, 종말, 부활 등등입니다. 전자는 실천(practice)이고, 후자는 이론(theory)입니다. 실천과 이론은 서로 구별되기는 하지만 분리되지는 않습니다. 피아노를 배우려는 사람은 실제로 피아노라는 악기로 연습해야 하고, 또 피아노 음악의 이론도 공부해야 합니다. 기독교인들은 실천이라 할 교회생활은 비교적 잘 하지만 이론이라 할 신학공부는 게을리 합니다. 그러다보니 실제 삶에서도 문제가 많이 발생합니다. 경제철학 없이 졸지에 돈을 많이 번 졸부들의 경우와 같습니다.
사도 바울은 골로새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실천과 이론을 균형 있게 잘 짚었습니다. 골 3:1-4절은 신학이론입니다. 이 대목의 앞과 뒤에는 실천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골 2:16절 이하를 보십시오. 16절입니다.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초하루나 안식일을 이유로 누구든지 너희를 비판하지 못하게 하라.’ 골 3:5절 이하에서 바울은 기독교인의 윤리에 대해서 구체적인 지침을 제시했습니다. 음란, 부정, 사용, 악한 정욕, 탐심 등등입니다. 바울은 그 중간에 기독교 신앙의 신학적 이론을 배치했습니다. 그 이론이 부활절 설교에 적합한 내용입니다. 오늘 우리 함께 그 내용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여러분이 그걸 깨닫게 된다면 새로운 세계가 열릴 겁니다. 저도 역시 기대가 됩니다.
1절- 위의 것
우선 골 3:1절을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어떤 느낌으로 전달되는지 집중해서 들어보십시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이런 구절을 교회 밖의 사람들이 읽으면 ‘이게 뭐지?’ 하는 생각이 들 겁니다. 우선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다’는 말을 생각해보십시오. 이 말이 실제로 죽어서 무덤에 들어갔다가 다시 나왔다는 뜻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런 일은 일어날 수 없습니다. 불에 탄 나무의 재를 다시 거꾸로 나무로 환원시킬 수 없는 거와 같습니다. 위 구절에서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와 함께’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다는 말은 영적으로 그리스도와, 즉 부활의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가 된 사람은 새로운 생명의 세계로 들어간 사람이기 때문에 다시 살아났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다시 살아난 사람은 ‘위의 것을 찾아야합니다.’ 여기서 ‘위’는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아계신 곳입니다. 사도신경에도 역시 부활 승천의 예수 그리스도가 ‘아버지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시다고 말했습니다. 그곳을 가장 일반적인 성경 용어로 바꾸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로 시작되는 주기도가 가리키듯이 하늘입니다. 다시 살아난 사람은 새로운 생명의 세계로 들어간 사람이기 때문에 실제의 삶도 전혀 새롭게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곧 위의 것을 찾는 삶입니다. 어릴 때는 철이 없이 살다가 나이 들어 철이 들면 삶의 관점이 달라져야하는 것과 같습니다.
여기서 하늘은 어딥니까? 지금은 아무도 우주 공간의 어느 지역을 성경이 말하는 하늘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실제의 우주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 우편에 앉아있을 공간이 없습니다. 현대물리학이 그걸 용납하지 않습니다. 21세기를 살아가는 기독교인들은 현대 물리학에 거스르지 않으면서도 성경의 가르침에 타당한 방식으로 하늘을 설명해야 합니다.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습니다. 하늘은 우주 공간 어느 곳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생명 통치를 가리킵니다. 더 좁혀 말하면 생명의 깊이가 하늘입니다. 생명의 깊이가 때로는 어둡게, 때로는 환하게 경험됩니다. 궁극적으로 생명은 예수님의 부활에서 완성되었기 때문에 성경이 말하는 하늘은 곧 예수의 부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하늘은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일 수도 있고, 우리가 다 파악하지 못한 우주 저 끝일 수도 있습니다.
2절- 땅의 것
바울은 2절에서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위의 것과 땅의 것이 구분되었습니다. 위의 것을 찾는 사람은 당연히 땅의 것을 생각하지 않게 됩니다. 말은 쉽게 하지만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않는 게 억지로 되지 않습니다. 1절에서 위의 것을 찾으라고 하면서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이라는 단서를 달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새로운 생명을 얻은 사람이라면 당연히 그 이전에 찾던 것을 멀리 할 것입니다. ‘엄마 밥상’의 깊은 맛을 깨달은 사람이라면 더 이상 페스트후드를 찾지 않는 거와 비슷합니다.
땅의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는 말은 세상과 담을 쌓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일부 출가 수도승들에게만 가능한 삶의 방식을 모든 기독교인들에게 적용시킬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 자신도 저자거리에서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며 살았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신 분이시며 역사를 주관하신다는 사실을 믿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더욱 더 세상과 역사에 참여해야 합니다. 땅의 것은 위의 것과 반대됩니다. 즉 하늘의 생명을 파괴하는 세력을 가리킵니다.
땅의 것을 멀리하려면 생명을 파괴하는 세력이 무엇이며, 누구인지를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분별의 은사가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이것은 일종의 깨어있는 영성입니다. 분별의 은사가 부족하면 아무리 마음이 착해도 세상에서 부화뇌동할 수밖에 없습니다. 독재자들은 이런 민중들을 정치적으로 이용합니다. 교회에서도 비슷한 일들은 자주 일어납니다. 분별력이 떨어지는 신자들로 인해서 교회에서 불합리적인 일들이 벌어집니다.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는 말은 분별력을 전제로 하는 말입니다.
3절- 생명의 은폐성
3절에서 바울은 땅의 것을 생각하지 않고 위의 것을 생각해야 할 신학적 근거에 대해서 말합니다. 기독교 신앙의 가장 궁극적인 신비를 여기서 찾을 수 있습니다.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
바울은 여기서 과감하게 ‘너희는 죽었다’고 선언합니다. 1절에서는 ‘다시 살리심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순서 상 1절보다 3절이 먼저 일어난 사건입니다. 죽어야만 살아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엄밀하게 보면 기독교 신앙에서 죽음과 삶은 동시 사건입니다. 이게 어떻게 가능할까요? 바울은 아주 새로운 시각을 우리에게 제공합니다. 우리 생명은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다고 말입니다. 생명의 은폐성을 가리킵니다.
생명이 감추어졌다는 말은 생명이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에 직결됩니다. 세상 사람들은 잘 먹고 잘 사는 것을 생명으로 이해합니다. 자기가 자신의 생명을 완성할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반면에 기독교인들은 생명이 하나님의 것이라고 믿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이 우리 생명을 완성한다는 의미입니다. 우리의 생명은 앞으로 완성되어야 한다는 말은 생명이 여전히 비밀이라는 뜻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 생명이 하나님 안에 은폐되었다는 의미입니다. 부활절 설교 때마다 제가 드는 비유가 있습니다. 여기 씨가 있습니다. 씨를 칼로 잘라서 속을 파헤쳐보십시오. 거기에서 꽃을 찾을 수 있을까요? 찾을 수 없습니다. 씨에는 꽃이 숨어 있습니다. 지금 여기서 이렇게 시퍼렇게 살아 있는 우리는 생명이 무엇인지 아직 다 아는 게 아닙니다. ‘나는 누군가?’ 하는 질문에 딱 떨어지는 대답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우리의 생명이 하나님 안에 비밀로 감추어져 있다고 믿습니다. 이런 믿음이 없다면 오늘의 삶을 버텨낼 수 없습니다.
생각이 깊다고 자처하는 세상 사람들은 이러한 기독교 신앙을 냉소적으로 여길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 생명이 은폐되어 있다는 믿음은 허황된 것이라고 말입니다. 현재의 삶이 모든 것이니 여기서 가능한 즐겁게 사는 것이 최선이라고 그들은 생각합니다. 그렇게 사는 사람들을 저는 비판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건 그들의 선택입니다. 그것으로 만족한다면 그렇게 살아도 좋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휴머니즘에 입각해서 세상을 인간답게 만들려고 노력하면 옆에서 박수를 치고, 경우에 따라서는 연대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들의 인생관과 세계관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하나님 안에 우리의 생명이 은폐되어 있다는 성경의 가르침이 저의 세계관입니다. 그 가르침이 저에게 설득력이 있을 뿐만 아니라 그 가르침이 저를 실제로 자유롭게 하고 평화롭게 하고 삶의 기쁨을 누리게 하기 때문입니다.
4절- 생명의 탈은폐성
오늘 마지막 구절인 4절이야말로 저를 삶의 기쁨 충만 가운데로 이끄는 핵심 구절입니다.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3절은 생명이 감추어져 있다고 했고, 4절은 그 감추어진 생명이 나타난다고 했습니다. 3절은 생명의 은폐성이라고 한다면 4절은 생명의 탈(脫)은폐성입니다. 루터는 ‘나타난다’를 ‘계시된다’(offenbar werden)라고 번역했습니다. 앞에서 예로 든 씨앗을 다시 생각해보십시오. 씨앗은 환경 조건이 맞으면 싹을 틔우고 꽃을 피웁니다. 칙칙한 색깔과 모양의 씨앗에서 여러 색깔의 꽃이 나오리라는 걸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봄에 그런 현상을 자주 보았기 때문에 그러려니 하고 지나갑니다만 외계인이 처음 지구를 방문했다면 한반도의 봄에 나타나는 이 현상 앞에서 기절초풍을 할 겁니다. 없었던 것이, 즉 숨어 있었던 것이 밖으로 확연하게 드러나서 존재하게 된다는 것은 기적 중의 기적입니다.
숨어 있던 우리 생명이 나타난다거나 계시되는 게 무슨 말인지 좀더 구체적으로 알고 싶은 분들이 있을 겁니다. 우리가 더 건강해지고, 죽지 않고, 아무 걱정 없고, 만수무강 하게 된다는 말인가, 하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생명은 하나님이 고유한 방식으로 완성하실 미래 사건이기 때문에 우리가 그걸 구체화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하는 순간에 그것은 상대적인 것, 즉 땅의 것으로 떨어집니다. 저는 그것을 바울이 말하는 방식으로 설명하겠습니다. 바울은 두 가지 사실을 여기서 말합니다. 하나는 1절과 3절에서도 반복된 ‘그리스도와 함께’입니다. 그리스도는 부활하신 분이십니다. 이미 종말에 하나님께서 이루실 절대 생명으로 변화되신 분이십니다. 우리 생명의 탈은폐는 독단적으로가 아니라 그리스도와 함께 일어납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우리의 운명을 지배한다는 뜻입니다. 이게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다른 하나는 ‘영광 중에’입니다. 히브리어 카봇, 헬라어 독사가 가리키는 영광은 생명의 절정을 가리킵니다. 그 생명의 절정 순간이 바로 우리 생명이시며 부활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는 순간, 즉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던 우리 생명이 씨에서 꽃이 피듯이 전적으로 새롭게 드러나는 순간입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생명의 비밀이 환하게 드러나는 순간입니다. 저는 그 순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4.16 세월호 참사 3주기
지금까지 제가 앞에서 설명한 생명에 대한 골로새서의 관점이 현대인들에게 순순히 받아들여질 수 있을까요? 저는 이런 질문에 대해서 이 자리에서 더 이상 왈가왈부하지 않겠습니다. 어떤 하나의 충격적인 사건이 저로 하여금 골로새서의 관점을 더 확고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했다는 것만 말씀드리겠습니다.
3년 전 오늘인 2014년 4월16일 476명의 승객을 태우고 인천에서 제주도로 항해하던 여객선 세월호가 전남 진도군 조도면 부근 해상에서 침몰하여 실종 9명 포함 304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 배에는 수학여행을 가던 단원고 2학년 학생 324명이 타고 있었습니다. 그들 중에 246명이 사망하고 4명이 실종되었습니다. 전체 희생자 304명 중에 250명이 학생들이었으니 대다수가 학생들인 셈입니다. 인생의 봄날을 살아가던 17살 청소년들이 전형적인 봄날인 4월16일에 떼죽음 당한 대참사였습니다. 갑작스런 죽음이야 나이에 상관없이 누구에게나 처참한 사건이지만 청소년들의 죽음은 그 어떤 죽음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3년 전 그 당시의 느낌이 여전히 생생합니다. 세월호가 난파되었다는 속보를 들었습니다. 사고 지역이 육지에 가까운 연안이니 모두 구조될 거라고 당연히 생각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소식이 들렸고, 급기야 대다수 학생들이 배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는 소식이 들렸습니다. 믿을 수 없었습니다.
불가항력적인 재앙들은 비일비재합니다. 세월호 참사를 그런 것과 같은 것으로 볼 수 없습니다. 가만있으라는 말에 객실에 머물러 구조를 기다리던 학생들은 한 명도 예외 없이 다 희생당했습니다. 해경을 비롯한 구조대원들이 일부라도 구조했다면, 그리고 입에 담기 민망하지만 구조 과정에서 차라리 구조대원이 희생당했더라면 그 아이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조금이라도 덜하겠지요. 스스로 뛰쳐나온 이들 외에는 아무도 구조 받지 못했습니다. 이게 어디 정상적인 나라이겠습니까. 바닷물에 휩쓸려, 그리고 희박해져가는 산소와 싸우다가 아이들은 봄날 떨어지는 목련꽃처럼 속절없이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이런 대참사가 일어났을 때 세 가지가 필요합니다. 1) 대참사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소상하게 밝히고 책임자를 문책해야 합니다. 2) 앞으로 이런 일이 재발되지 않도록 대책을 강구해야합니다. 3) 그 무엇보다도 대참사로 인해서 극심한 상처를 받은 유가족들을 치유하는 것입니다. 제가 보기에 이중에 뭐 하나 제대로 된 일이 없습니다. 우리 모두 죄인입니다.
저는 세상을 창조한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세월호 참사로 죽은 이들을 비롯해서 수많은 어처구니없는 죽음이 그것으로 끝난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습니다. 아니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안에 지금 감추어져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의 때가 되면 그들은 생명의 절정으로 나타날 것이라고 믿습니다. 이런 믿음으로 살아가기에 저는 생명을 파괴하는 세력에 맞서 저항할 것이며, 파괴당한 이들과 연대할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에 처형당한 예수를 부활한 자로 믿는 목사로서 제가 2017년 부활절을 맞아 우리 교우들에게 드리는 신앙고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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