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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배자는 설 곳이 없다

히브리서 조용기 목사............... 조회 수 2020 추천 수 0 2009.07.15 22:4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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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히3:15~19 
설교자 : 조용기 목사 
참고 : 2005년 9월 11일 주일 2부 설교 

“성경에 일렀으되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노하심을 격동할 때와 같이 너희 마음을 강퍅케 하지 말라 하였으니 듣고 격노케 하던 자가 누구뇨 모세를 좇아 애굽에서 나온 모든 이가 아니냐 또 하나님이 사십년 동안에 누구에게 노하셨느뇨 범죄하여 그 시체가 광야에 엎드러진 자에게가 아니냐 또 하나님이 누구에게 맹세하사 그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느뇨 곧 순종치 아니하던 자에게가 아니냐 이로 보건대 저희가 믿지 아니하므로 능히 들어가지 못한 것이라”

<서론>
“패자는 설 곳이 없다”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어떤 독수리를 새끼가 날 수 있을 때가 되면 어미 등에 업혀 높이 올라가 공중에서 떨어뜨린다고 합니다. 열심히 살려고 발버둥을 치고 날아가는 새끼는 기르지만 노력도 않고 그대로 총알처럼 떨어지는 새끼는 죽게 내버려 둔다고 말합니다. 자연엔 강한 자가 되어야 살아남고 약한 자는 강한 자의 먹이가 될 뿐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의 생존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역사를 통해서 보면 언제나 강한 민족은 약한 민족을 지배하고 수탈해 왔습니다. 이 지구상에서는 패배자의 설 곳은 없다는 것을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본론>

1. 삶의 패배자

첫째로, 삶의 모든 면에서 패자의 설 곳은 없다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됩니다.
동물의 세계는 패배하면 죽습니다. TV에서 방영하는 아프리카의 동물의 세계를 보면 굉장히 마음이 조마조마합니다. 저는 동물세계를 좋아해서 TV에서 나오는 아프리카의 동물세계를 종종 바라봅니다. 그런데 그곳에 보면 사자나 표범, 가젤, 얼룩말, 누우 등이 나오는데 언제나 사자와 표범이 가젤이나 얼룩말이나 누우를 잡아먹습니다. 그 어린 가젤이 살겠다고 뛰어가는데 사자나 표범이 따라가면 저는 혼자 앉아서 “가젤 빨리 뛰어 빨리 뛰어··· 아이고 저 놈의 자식 왜 가젤을 잡아먹으려고 그러나? 뛰어!” 그래도 별 수 없이 결국에는 가젤이 사자에게 잡혀 목이 물려서 끌려가는 것을 보면 자연의 가혹함에 마음이 상합니다. 혹은 얼룩말이나 누우들이 강을 건너가는데 엘리게이터들이 다가옵니다. 그들이 열심히 강을 건너가려고 하는데 엘리게이터들이 확 달려들어서 목을 물거나 다리를 물고 흔들어서 잡아먹습니다. 그런데 물살이 세니까 빨리 헤엄을 못칩니다. 엘리게이터는 점점 잡아먹으러 오는데 마음이 답답하여 견딜 수 없어서 “빨리 뛰어! 빨리 뛰어! 헤엄을 쳐! 헤엄을 쳐! 오른쪽으로 피해! 왼쪽으로 피해!” 나 혼자 앉아서 아무리 지시를 해도 안 들어 줍니다. 결국 잡혀먹는 것을 보고 정말 마음이 아프기가 말로다 할 수가 없었습니다. 인간의 세계도 한가지입니다. 패배자는 설 곳이 없습니다. 삶의 대열에서 떨어져 나가 버림받거나 잊어버림을 당합니다. 마라톤 경기를 보면 선두그룹에 뛰어가는 사람만 TV가 집중적으로 찍습니다. 우리들도 관심은 선두그룹 속에서 뛰는 사람에게 관심이 있지요. 그러나 선두그룹에서 뛰다가 지쳐서 떨어져 나가면 우리의 관심사에서 떨어져 나가 버리고 곧장 잊어버립니다. 항상 선두그룹에서 뛰는 사람들만이 관심의 초점이 되는 것입니다. 인생도 한가지인 것입니다. 우리가 언제나 승리할 때에 모든 사람과 함께 뛰지 패배해서 뒤로 물러나면 잊어 버린바 되고 제외되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저 세상에 동정의 대상이 되고 불쌍히 여김의 대상이 되지 곧장 사람들에게 잊어버림을 당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뉴올리언스의 큰 수해를 보았습니다. 그곳에 집을 잃고 상처를 입은 사람들에 대해서 어느 정도까지는 동정을 하지만 얼마 있지 않으면 세상은 먹고 살기에 바쁘고 생존경쟁에 바쁘기 때문에 앞을 향해서 뛰어가고 뛰어가고 그들은 다 뒤로 처져 버리고 잊어버리고 사람들에게 제외되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인생은 삶의 대열에서 떨어져 나가거나 버림받아 버리면 곧장 잊어버림을 당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우리를 패배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인생 경주에서 승리자가 되어야 되고 선두그룹에 서서 함께 뛰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2. 패배는 마음에서 시작

둘째로, 오늘 우리가 패배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 생각해야 될 것은 패배가 어디서 시작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삶의 패배는 태어날 때부터 패배를 안고 태어나는 사람은 없습니다. 또 운명적으로 패배할 수 없게 태어나는 사람도 없습니다. 삶의 패배는 마음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생활환경이나 운명 때문에 패배하는 것은 아닙니다. 패배는 마음에서부터 출발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 끝 가데스바네아에 와서 12정탐꾼을 가나안땅에 보내었던 사건을 여러분은 잘 알고 있습니다. 40주 40야를 12명이 정탐하고 와서 10명은 굉장히 부정적인 보고를 했습니다. 그 보고를 들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땅을 치고 통곡을 하고 장관을 세워서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하나님과 모세를 대항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진노하셔서 열 사람을 그 자리에서 죽이시고 부정적인 사람, 모든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로 회진시켜 40년 동안 광야에서 방황하면서 다 죽게 만들었습니다. 오직 긍정적인 여호수아와 갈렙만이 그 후손을 데리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열 사람이나 열 사람의 말을 듣고 낭패와 실망을 당하고 패배한 사람들은 어디에서 낭패와 실망을 당했느냐. 그들의 마음에서부터 출발한 것입니다. 생각에서 이미 패배한 사람은 어느 곳에 가나 패배하고 마는 것입니다. 꿈을 잃어버리고 가나안땅을 사람이 못 살 땅이라 비난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정면으로 대립했던 열 사람과 그를 따르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미 마음에서 패배한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은 어느 곳에 가나 패배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 버리고 만 것입니다.
민수기 13장 31절로 32절에 보면 “그와 함께 올라갔던 사람들은 가로되 우리는 능히 올라가서 그 백성을 치지 못하리라 그들은 우리보다 강하니라 하고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그 탐지한 땅을 악평하여 가로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탐지한 땅은 그 거민을 삼키는 땅이요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라고 말한 것입니다.
이미 생각에 패배했습니다. “그 땅 백성은 강하고 우리가 보는 그 땅은 거민을 삼키는 황무지더라. 우리는 그곳에 가서 살 수 없다.” 그렇게 마음속에 생각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말했는데 그들은 거민을 삼키는 황무지라고 말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거짓말 했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는 것은 꿈인 것입니다. 꿈은 현실이 아닙니다. 그러나 꿈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꿈이 현실을 그렇게 변화시켜 가는 능력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꿈을 현실과 착각을 하면 안 됩니다. 현실이 아무리 험악해도 꿈이 있으면 꿈이 현실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젖과 꿀이 흐른다고 했으면 반드시 젖과 꿀이 흐르게 현실이 변화되어 갈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생각에서 이미 부정적이 되었기 때문에 패배는 생각에서부터 출발합니다. 마음, 생각 속에서 못한다. 안된다. 할 수 없다. 나는 실패자라고 생각하면 그 사람은 결단코 실패하고 마는 것입니다. 지킬만한 것보다 네 마음을 지켜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난다고 말했는데 마음에서부터 실패의 쓴물이 넘쳐나는데 결코 승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생각이 부정적이면 패배는 기정사실입니다. 뭐 두말할 것 없습니다. 사람의 말을 가만히 들어보고 이미 그 생각에 패배자의 생각이 있으면 그 사람은 절대로 실패하고 마는 것입니다.
시편 106편 24절로 26절에 “저희가 낙토를 멸시하며 그 말씀을 믿지 아니하고 저희 장막에서 원망하며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치 아니하였도다 이러므로 저가 맹세하시기를 저희로 광야에 엎더지게 하고”라고 말한 것입니다.
이미 생각이 부정적인 사람들은 벌써 죽은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광야에 내리 몰아쳐 다 그곳에서 죽게 만들고 만 것입니다.
사무엘 스마일이라는 심리학자는 ‘생각은 행동을 낳고 행동은 습관을 만들고 습관이 쌓이면 성품이 되고 성품은 그 사람의 운명을 결정한다.’고 했습니다. 운명은 벌써 생각에서부터 출발한다는 것입니다.
로만 빈센트 필박사는 ‘만일 우리의 머리에 패배감이 떠오르거든 그러한 생각에서 아예 몸을 피하라. 패배를 생각하면 실제에 있어서도 패배 당하기 때문에 오히려 패배는 있을 수 없다는 태도를 취해야만 한다.’고 말한 것입니다.
한 미국의 청년이 알프스 산을 오르다가 심한 갈증을 느꼈습니다. 그런데 준비해간 물은 이미 바닥이 나서 목이 말라 견딜 수가 없는데 마침 알프스 계곡 사이에 맑고 깨끗한 호수가 보였습니다. 그는 당장 내려가서 단숨에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습니다. 그래서 매우 물이 시원했고 갈증도 완전히 해소되었습니다. 돌아서는데 호수 앞에 경고판이 하나 있었는데 거기에 보니까 ‘POISON’이라는 말이 있거든요. POISON은 영어로는 ‘독’이라는 말인 것입니다. 그는 깜짝 놀랐습니다. 자기가 물을 마시고 돌아섰는데 그 호수 앞에 서있는 간판은 ‘POISON’이라고 써있습니다. ‘야~ 내가 독을 마셨구나.’ 그러자 갑자기 구토가 나오고 배가 뒤틀리고 머리가 띵하고 열이 나고 어지러워서 몸을 가눌 수가 없었습니다. 창백해진 얼굴로 그는 빨리 동리로 내려가서 병원을 찾아가서 의사에게 “내가 독 있는 물을 마셨으니 이제는 죽게 되었다. 살려달라.”고 했습니다. 의사가 “독이 있는 물이 어디 있습니까?” “바로 이 산 언덕 호수에 물인데 거기 간판에 독이 있는 물이라고 ‘POISON’이라고 써있다.”라고 하니까 의사가 배를 안고 웃었습니다. “당신은 미국 사람이니까 불란서 말을 모릅니다. 여기 불란서 말로 ‘POISON’은 ‘쁘아종’이라고 읽는데 그것은 ‘물고기’라는 말입니다. 물고기 잡지 말라 써놓은 것을 똑같은 단어인데 영어로는 ‘POISON’이라고 읽고, 불어로는 ‘쁘아종’이라고 읽습니다. 영어로는 ‘독’이라는 뜻이고 불어로는‘물고기’라는 말입니다. 그곳에 불란서 여행객들이 와서 물고기를 계속 잡으니까 물고기 잡지 말라고 써놓은 간판입니다. 당신은 독을 마신 것이 아닙니다.” 하니까 그 길로 얼굴이 정상으로 돌아오더니만 “배가 아픕니까?” 하니까 “아프지 않다”고 건강해지고 까딱없어졌습니다. 생각으로 죽었다가 생각으로 살아난 것입니다. 사람의 생각은 자기 육체에만 그런 영향력을 미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의 생각은 자기의 운명과 환경에도 절대적인 영향력을 미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일을 하든 우리의 생각이 부정적이면 그 생각대로 패배는 기정사실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부정적인 군인을 일선에 보내면 전쟁에 집니다. 부정적인 일꾼을 일터에 보내면 일을 성사키시지 못합니다. 할 수 없다는 사람이 어떻게 해내요. 자화상에서 이미 패배한 사람은 이 세상에서 승리할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들의 마음의 자화상에서 이미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에 패배자의 자화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가나안 땅의 대장부에 비해 자기들은 메뚜기라고 말했습니다. 말을 해도 그렇지 어떻게 가나안의 대장부에 비교하니까 자기들은 메뚜기들이라고 말합니까? 메뚜기가 들어가서 뭘합니까? 벌써 패배한 것입니다.
민수기 13장 32절로 33절에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그 탐지한 땅을 악평하여 가로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탐지한 땅은 그 거민을 삼키는 땅이요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거기서 또 네피림 후손 아낙 자손 대장부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의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
메뚜기 자화상을 가졌습니다. 여러분도 여러분 자신이 메뚜기라고 생각하면 아무것도 못합니다. 메뚜기가 뭘 합니까? 깡충깡충 뛰다가 밟혀 죽을 수밖에 없지요. 메뚜기 자화상. 그런데 오늘날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메뚜기 자화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과 한가지입니다. 아예 싸워 보기도 전에 나는 패배자라는 자화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는 못한다. 안된다. 할 수 없다. 돈이 없다. 능력이 없다. 실력이 없다. 학력이 없다. 나는 실패자라는 메뚜기 자화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패배는 기정사실이 되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부정적인 자화상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미국의 성형외과 의사이면서 심리학자인 맥스웰 말츠 박사의 말에 따르면 미국 인구 전체의 95%에 달하는 사람들이 열등감을 느끼고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는 못한다. 못났다는 열등의식, 메뚜기 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미국 가정상담사역의 권위자인 제임스 돕슨은 건강하고 남편과 아이들이 있고 경제적으로 안정되어 있는 가정주부들만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들이 가장 큰 고민이 낮은 자존감 즉 패배적인 자화상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불신자의 경우에는 80%가 신자중에서는 50%의 사람들이 자기는 패배자라는 자화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자존심을 잃어버리고 불행하고 즐거움이 없는 삶을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데이빗 시멘스라는 학자는 사탄이 인간을 무력화시키는 가장 좋은 무기는 열등감이라고 말했습니다. 나는 못한다. 못났다. 능력이 없다. 열등한 자화상을 가진 사람은 패배하기 때문에 마귀는 항상 사람들의 마음속에 열등한 자화상을 넣어 주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패배적인 자화상으로 인해 생기는 열등감은 자신을 파괴하고 삶을 실패로 이끄는 원동력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탄은 언제나 패배의식을 갖다 주기 위해서 패배하는 자화상을 갖다 주는 것입니다. 사람이 일단 자기가 못한다고 자화상이 들어가면 절대로 그 이상은 발전하지 못합니다. 안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실험실에서 선생님이 벼룩을 잡아와서 벼룩을 긴 유리관에 집어넣습니다. 넣자마자 툭 뛰어 나와 버리고 툭 뛰어 나와 버립니다. 벼룩이 얼마나 잘 뜁니까? 시험관속에 벼룩을 넣어 놓을수가 없어요. 넣어 놓으면 엄청나게 잘 뛰는 높이뛰기 선수인 벼룩이 뛰어서 나가버리는 것입니다. 아마 벼룩 못 본 사람도 있지요. 요사이 세대는 벼룩을 구경을 못했을 것입니다. 우리세대는 벼룩구경 많이 했어요. 방에 탁 튀는 것은 벼룩입니다. 그런데 그 플라스틱에 벼룩을 넣어 놓고 뚜껑을 덮어 놓으면 벼룩이 탁 뛰다가 머리에 탁 부딪히며 ‘아이고 골이야~ 아이고 이것 왜 이러느냐?’ 또 한번 탁 튀니까 또 골이 탁 부딪히니까 ‘아이고 골이야. 이 정신아~’ 세 번 뛰니까 또 골에 부딪히고 네 번 부딪히니까 또 머리에 부딪히니까 그만 벼룩이 마음속에 자화상을 가집니다. ‘너무 뛰면 골이 박살난다. 적당히 뛰어라.’ 딱 마음에 그러한 자화상이 벼룩 속에 만들어지면 그 다음에 벼룩은 플라스틱 뚜껑을 열어 놓아도 절대로 안 뛰어 나갑니다. 많이 뛰면 골 아프다. 적당히 뛰고 말자. 그래서 뚜껑을 열어 놓아도 안 뛰어 나가요. 적당히 뛰고 말아요. 부모들이 자식을 교육할 때 ‘너는 바보다. 너는 못한다. 너는 안 된다.’하면 딱 자기 자화상을 나는 못한다. 안된다. 실패자의 자화상을 가지기 때문에 더 이상 나가려고 하지 않아요. 애쓰고 힘쓰고 노력하려고 안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부정적인 자화상을 넣어 주면은 그 이상은 결코 나가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들이 메뚜기라는 자화상을 가지고 있으니까 메뚜기가 어떻게 네피림의 후손 아낙자손 대장부를 대항해서 싸웁니까? 싸우려고 생각도 하지 않고 들어가려고 생각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부정적인 자화상을 가져서는 결코 안 되는 것입니다. 자녀들을 교육할 때 부정적인 말로써 교육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패배자의 자화상을 가진 사람은 이미 침몰하는 배와 같습니다. 물에 가라앉아가는 배입니다. 건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패배자의 믿음을 가졌습니다. 그들은 하나님보다 환경을 믿었습니다. 환경을 보니까 안 된다고 그래요. 광야에서 그들은 하나님보다 환경을 믿었습니다. 환경을 보니까 안 된다고 그래요. 성은 하늘을 찌를 듯이 높고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네피림의 후손 아낙자손 대장부들을 우리가 보니까 안되겠더라. 그들이 말을 들어봐도 안되겠더라. 우리 느낌에도 안 될 것 같더라. 그들은 환경을 믿고 하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하나님보다 환경을 믿어서는 결코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우리 환경은 우리에게 제약을 많이 갖다 주는 것입니다. 환경을 통해서 우리 감각을 통해서 경험을 통해서 우리 이성을 통해서 모든 것을 판단하는 사람은 출발하기 전에도 패배자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성은 높고 그곳에 사는 사람은 대장부더라.
신명기 7장 21절에 “너는 그들을 두려워 말라 너희 하나님 여호와 곧 크고 두려운 하나님이 너희 중에 계심이니라”
그들 중에 계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지 아니하고 환경을 바라보았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은 믿음은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이란 뭡니까? 믿음이란 내 기분입니까? 아닙니다. 내 지식입니까? 아닙니다. 믿음이란 하나님을 믿는 것이 믿음인 것입니다. 천지와 만물을 지으시고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와 함께 계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믿음이지 하나님이 이외에 다른 것에 의존하는 것은 결코 믿음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런 말을 합니다. 믿을 기분이 안 생깁니다. 마음에 두려움이 꽉 들어차고 믿을 감정이 안 생깁니다. 뭘 느껴져야 믿지 아무 느낌도 없는데 어떻게 믿습니까? 그렇게 말합니다. 여러분 느낌이 믿음이 아닌 것입니다. 믿음은 우리 마음속의 선택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회당장 야이로를 보십시오. 예수님을 모시고 죽어가는 딸을 살리러 가는데 집 근처에 다왔습니다. 그런데 집안에서 통곡소리가 천지를 진동하고 종들이 뛰어 나와서 옷을 찢고 먼지를 휘날리면서 주인님 예수님을 더 괴롭힐 필요가 없습니다. 당신의 딸이 지금 죽었습니다. 그 말을 들을 때 회당장은 기분이 어떻겠습니까? 좌절하고 절망하며 무릎이 덜덜 떨리고 그 자리에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믿을 가능성이 없습니다. 기분이 다 사라졌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회당장의 귀에 대고 뭐라고 속삭였습니까? ‘두려워말고 믿기만 하라!’ 두려움을 선택하지 말고 믿음을 선택하라. 여기에서 보면 믿음은 감정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믿음은 감각이 아닙니다. 회당장 야이로는 믿을만한 감정도 없었고 감각도 없었습니다. 절망이 홍수처럼 휩쓸어 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그 자리에서 두려움을 선택하지 말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선택하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절대로 감정이 아닙니다. 믿을 생각이 안생기고 믿을 감정이 안 생겨도 상관없어요. 여러분이 마음속에 믿겠다고 선택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나는 믿겠다. 살든지 죽든지 흥하든지 망하든지 성하든지 쇠하든지 눈에는 아무 증거 안보이고 귀에는 아무 소리 안 들리고 손에는 잡히는 것 없어도 나는 하나님을 믿는 것을 선택하겠다. 나는 믿는다. 이것이 믿음인 것입니다. 이를 하나님이 귀하게 여기시고 이런 믿음을 보시고 네 믿음대로 될찌어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네 믿음대로 될찌어다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신명기 11장 25절에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말씀하신대로 너희 밟는 모든 땅 사람들로 너희를 두려워하고 무서워하게 하시리니 너희를 능히 당할 사람이 없으리라”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을 해주는데 왜 하나님 말씀을 저버리고 사람들을 바라보고 육신의 눈으로 본 것을 따라가는 것입니까?
민수기 14장 11절에도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 백성이 어느 때까지 나를 멸시하겠느냐 내가 그들 중에 모든 이적을 행한 것도 생각하지 아니하고 어느 때까지 나를 믿지 않겠느냐”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볼찌어다 세상 끝날까지 내가 항상 너희와 함께 하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지금 이 자리에 하나님은 와계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너희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너희 가운데 있겠다고 말씀한 것입니다. 이 하나님을 인정하고 믿지 아니하면 하나님을 무시하고 멸시하는 것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믿는 사람들은 언제나 믿음을 선택하고 환경을 선택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패배자의 말을 했습니다. 여러분 말이 우리를 묶고 사로잡습니다. 내 입에 말로 내가 묶였으며 내 입의 말로 내가 사로잡힘을 받았다고 말한 것입니다. 말이 하나님의 임재를 모셔오며 말이 하나님의 능력을 모셔오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를 보혈로 덮어 주시옵소서. 그러면 입술의 말이 보혈로 나를 덮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짐승을 잡아 피를 우슬초에 묻혀서 뿌렸지만 오늘날은 우리 피를 짐승에서 뽑을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영원히 피를 흘렸는데 그 피를 어떻게 우리가 우리 몸에 바르느냐. 말로써 바르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로써 내 몸을 덮어 주시옵소서. 그러면 그 말로써 예수님의 피를 덮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보혈로써 우리를 덮어 주시옵소서. 우리의 말로써 예수님의 보혈로 덮는 것입니다. 말이 위대한 하나님의 능력을 우리에게 접속시키는 것입니다. 죽고 사는 권세가 혀에 있으니 혀를 사용하는 자는 그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민수기 14장 1절로 3절에 보면 “온 회중이 소리를 높여 부르짖으며 밤새도록 백성이 곡하였더라 이스라엘 자손이 다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며 온 회중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더면 좋았을 것을 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망하게 하려 하는고 우리 처자가 사로잡히리니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
정말 망할 소리를 합니다. 얼마나 부정적인 말을 합니까? 파멸적인 말을 하는 것입니다. 이 말이 저들을 사로잡고 이 말이 저들을 붙잡은 것입니다. 죽고 사는 권세가 말에 있는데 말을 죽도록 하고 있는 것입니다. 패배의 말, 사망의 말, 좌절과 절망의 말을 하고 그곳에서 승리해 나올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가 들어가지 못한다. 우리 처자가 포로로 잡힌다. 그런 말을 하는데 어떻게 그들이 승리할 수 있겠습니까? 말이 씨가 된다는 우리 속담이 있지 않습니까?
잠언서 6장 2절에 “네 입의 말로 네가 얽혔으며 네 입의 말로 인하여 잡히게 되었느니라”고 말했습니다.
잠언서 17장 20절에 “마음이 사특한 자는 복을 얻지 못하고 혀가 패역한 자는 재앙에 빠지느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재앙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혀로써 말을 잘못하여 재앙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잠언서 18장 21절에 “죽고 사는 것이 혀의 권세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그 열매를 먹으리라”고 했습니다.
죽고 사는 권세가 혀에 있다. 어마어마한 하나님 말씀입니다. 죽고 싶으면 부정적인 말을 하십시오. 살고 싶으면 긍정적인 말을 하십시오. 실패하고 싶으면 못한다고 하십시오. 성공하고 싶으면 할 수 있다고 말을 하십시오. 성경에 말했습니다. 저 하늘이 무너지고 이 땅이 꺼져도 일점일획도 변치 않는 말씀이 죽고 사는 것이 혀의 권세에 달려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한국인들이 너무나 죽겠다는 말을 많이 사용해서 얼마나 많은 사망의 사건이 우리 한국에 일어났습니까? 추워 죽겠다. 더워 죽겠다. 배불러 죽겠다. 배고파 죽겠다. 좋아 죽겠다. 슬퍼 죽겠다. 전부 죽겠다고 했으므로 얼마나 많은 사망의 역사가 다가옵니까? 또 못해먹겠다는 소리도 많이 합니다. 보통 사람만 못해 먹겠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높은 사람도 못해 먹겠다고 자꾸 말합니다. 그것 큰일입니다. 보통일이 아닙니다. 왜, 입에서 나온 말이 씨가 되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운명을 얽어 매기 때문인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말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기울이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들어와 두로와 시돈지방에 갔을 때 수로보니게 여인이 뛰어와서 “주님이시여 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 들렸사오니 고쳐 주시옵소서.” 그때 예수님은 뭐라고 말했습니까? “지금은 이방인의 때가 아니다.”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을 찾으러 왔으니 십자가 이전에는 이방인의 때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내 자녀에게 줄 떡을 취하여 개에게는 줄 수가 없다. 이방인은 개다. 그럴 때 수로보니게 여인이 예수님께 꿇어 엎드려 “주여 옳소이다. 우리는 개입니다. 그러나 개들도 자녀들이 상밑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주님이 그 말을 듣자 “오~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가 이 말을 하였으므로 네 딸에게서 귀신이 나갔느니라!” 귀신이 들어오고 나가는 것도 그 어머니의 말에 달렸습니다. 개들도 상밑에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주워 먹는다는 그 말에 예수님이 감동하시고 네가 이 말을 했기 때문에 네 딸에게서 귀신이 나갔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의 비중이 얼마나 크다는 것을 여기 예수님께서 보여주고 계신 것입니다.

3. 왜 우리는 패배할 수 없는가?

셋째로, 왜 우리는 패배할 수가 없습니까?
베드로전서 2장 9절에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라고 했는데 이말 한마디만 우리가 깊이 묵상해봐도 우리는 결코 마음속에 패배하는 생각, 패배하는 꿈, 패배하는 믿음, 패배하는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패배는 마음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입니다. 패배가 조상때부터 시작하는 것도 아닙니다. 가정에서 시작하는 것도 아닙니다. 환경에서 시작하는 것도 아닙니다. 패배는 마음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기 때문에 패배를 중지시킬 수가 있고 고칠 수가 있고 패배를 성공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우리 마음의 생각을 바꾸고 꿈을 바꾸고 믿음을 바꾸고 말을 바꾸면 운명을 바꿀 수가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성경에는 우리 운명을 바꿀 수 있는 약속의 말씀이 주어져 있습니다. 하나님의 택하신 족속이라는 말은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좋아하시며 사랑하시는 대상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택하셨다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어마어마하게 기뻐하시고 좋아하시고 사랑하셔서 하나님의 것으로 택했다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1장 4절로 5절에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라고 말하신 것입니다.
여기에 보십시오. 우리를 사랑안에서 기쁘신 뜻대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아들들이 되게 택했다. 사랑하고 기뻐하시기 때문에 택하셨지 미워하고 안 좋아하는 사람을 택할 리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마음속에는 하나님이 함께 계신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엄청나게 사랑하시고 좋아하시고 우리를 기뻐하시기 때문에 우리와 같이 계신 것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가 패배의식을 가져야 되겠습니까? 하나님이 같이 계신데 왜 두려워하고 무서워 떨 리가 있겠습니까? 성경에는 왕같은 제사장이라고 말했습니다. 왕은 다스리지 않습니까? 성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왕노릇 하도록 만들었다고 말한 것입니다. 종노릇하도록 만들었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얼마나 하나님이 우리의 지위를 높여 주었습니까?
창세기 1장 26절에도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아담과 하와도 다스리는 자로 만들었지 종으로 만들지 않았지 않습니까? 오늘날 예수믿고 구원받은 사람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왕노릇하게 지음을 받은 것입니다. 죄를 다스리고 환경을 다스리고 질병을 다스리고 저주와 가난을 다스리고 죽음조차 극복하고 나갈 수 있게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누가복음 10장 19절에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었으니너희를 해할 자가 결단코 없으리라”다고 말씀하시니 다스리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나같이 못난 사람을 하나님이 어떻게 그렇게 만들겠는가’ 하나님의 손에 얹혀지면 하나님은 여러분을 왕 같은 사람으로 빚어내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스스로 왕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을 왕으로 빚어 내주신 것입니다.
이탈리아의 유명한 조각가였던 미켈란젤로가 하루는 대리석 조각이 버려진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 하인에게 “이 대리석을 내 조각실에 갖다 놓아라. 그 속에 갖혀 있는 천사를 내가 풀어 주겠다.” 그리고 그 대리석으로 아름다운 천사를 찍어 냈습니다. 버려진 대리석이 미켈란젤로의 손에 얹혀지니까 아름다운 천사의 형상으로 조각되어 나온 것입니다. 또 한번은 선배가 버린 대리석을 가지고 작품을 만들었는데 그것이 바로 저 유명한 다윗상인 것입니다. 대가의 손에 들어가 금이 가고 결이 거칠다는 이유로 오랫동안 버려졌던 돌이 아름다운 조각으로 변화될 수 있는 것입니다. 대가중에 대가요 위대한 조각가 중에 조각가인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손에 여러분이 얹혀지면 주님이 어떠한 사람도 아름다운 승리하는 왕으로 만들어 내놓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우리보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너는 왕이라고 말한 것 다스리는 자로 만들어 놓았는데 왜 패배자가 됩니까? 이것을 마음에 받아 들여서 나는 운명과 환경을 예수님과 더불어 왕노릇 한다고 다스린다고 받아들이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리고 제사장은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이 기업이 되시는 분이 제사장이요, 축복권이 있습니다. 보통사람은 보통 사람이지만 제사장은 특별히 하나님과 가깝고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인데 우리 예수믿는 사람을 다 제사장으로 만들었습니다. 구약에 보면 제사장에게는 기업을 주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땅을 나누어 주었는데 하나님이 제사장에게는 땅을 안주었습니다. 내가 기업이라고 말했었습니다. 하나님이 기업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를 왕 같은 제사장으로 삼았을 때 하나님과 특별이 가까이 계셔서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이 내가 너희 기업이 되겠다. 너희 무엇을 먹을까 입을까 마실까 어떻게 살까를 내가 책임져 주겠다. 내가 너희 기업이 되겠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중에 제사장은 기업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기업이 되셔서 하나님이 직접 먹고, 입고, 마시고, 사는 것을 돌보아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사장은 백성들을 축복하는 축복권이 있어서 복을 빌면 복이 내렸던 것입니다. 이러한 제사장으로 우리를 삼아 주신 것입니다.
신명기 18장 5절에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모든 지파 중에서 그를 택하여 내시고 그와 그의 자손으로 영영히 여호와의 이름으로 서서 섬기게 하셨음이니라”
이 제사장의 선택된 지위인 것입니다.
민수기 6장 27절에 “그들은 이같이 내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축복할찌니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
제사장이 축복하면 복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여러분 가족을 위해서 축복하면 가족에게 복을 내리고 이웃을 위해서 축복하면 이웃이 복을 내리고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축복하면 나라와 민족에 복이 내리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여러분을 왕으로 제사장으로 삼았기 때문에 하나님과 특별히 가까운 사람들이요, 하나님이 여러분의 기업이 되시고 축복권을 가진 사람들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우리가 거룩한 나라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세상나라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나라요, 하나님의 백성이요, 하나님의 땅입니다. 하나님이 다스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니까. 하나님이 왕이 되시고 주권자가 되시고 하나님이 지배하시고 다스리는 나라가 된 것입니다. 천국이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다 미니 천국입니다. 옆에 있는 분들에게 “당신은 미니 천국입니다.” 그렇게 말씀하십시오. 여러분이 하나님의 나라요, 하나님의 백성이요, 하나님이 여러분 가운데 성령으로 거하시고 여러분을 돌보시고 다스리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장 6절에 “그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 그렇게 말씀한 것입니다.
성경 출애굽기 19장 5절로 6절에 보면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할찌니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특별히 그의 소유된 백성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자기의 소유물을 돌보고 관심을 가지고 지키지 않습니까? 여러분이 자기 소유물을 얼마나 아낍니까? 집도 내 집은 내가 돌보고 수선하고 깨끗하게 만들잖아요. 내 논밭을 관심을 가지고 지키잖아요. 하나님의 소유물은 여러분이 바로 하나님의 소유물인 것입니다.
이사야 43장 1절에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여러분을 보고 주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는 내것이라. 하나님의 것이라고 하셨으니 하나님의 소유물이니 얼마나 놀랍습니까? 누가 과연 하나님의 소유물을 빼앗을 것인가. 예수께서 말씀하기를 너희를 내게 주신 이는 만유보다 크시매 나의 손에서 빼앗을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시편 121편 7절에 “여호와께서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케 하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리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지키심이 악한자가 만지지도 못한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이 생명의 값으로 우리를 사시고 장차 천국을 상속으로 주시고 후사로 세우셨으니 얼마나 돌보시겠습니까? 천국을 후사로 주실려고 하는 여러분이시니 하나님이 이 땅에서 돌보지 않고 어떻게 천국을 후사로 주실 수 있겠습니까?
디도서 3장 7절에 “우리로 저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후사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0장 28절에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결론>

삶의 성공도 실패도 마음에 있습니다. 지킬만한 것보다 네 마음을 지켜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난다고 말한 것입니다. 마음에서 패배를 받아들인 사람은 설 곳을 잃어버리고 맙니다. 이 땅에 나는 설 곳이 없다. 그것은 마음에 패배를 받아들인 사람이 설 곳이 없지 마음에 패배를 안 받아들인 사람에게는 얼마든지 설 곳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믿는 사람은 결코 마음에서 패배를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이기기 위해서 태어난 자들인 것입니다. 실패하고 패배하기 위해서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승리하기 위해서 성공하기 위해서 축복받기 위해서 천국 백성이 되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들인 것입니다. 생각을 바꿔야 됩니다. 자화상을 바꿔야 되는 것입니다. 믿음을 바꿔야 되는 것입니다. 말을 바꿔야 되는 것입니다. 패배를 내어 쫓아 버리고 실패를 내어 쫓아 버리고 마귀를 내어 쫓아 버리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뉴욕에 방탄조끼를 만드는 회사 이야기를 아주 감명 깊게 제가 들었습니다. 처음에 이 회사 사장은 조그마한 구멍가게를 경영하고 있었는데 한달에 권총강도 네 번을 당해서 있는 것을 다 털려 버렸습니다. 보통사람 같으면 권총 강도가 네 번이나 구멍가게를 털어갔으면 낙심해야 될 것인데 그는 주저앉아서 어떻게 하면 권총강도를 이기고 장사를 계속할까 연구를 하다가 권총강도가 총을 쏘아도 총알이 들어가지 않을 방탄조끼를 만들었습니다. 두툼한 방탄조끼를 만들어서 그 다음 그것을 입고 또 가게를 하니까 이웃 가게 사람들이 와서 “너 입고 있는 그것이 무엇이냐?” “이것은 권총을 쏴도 안들어 온다. 총을 쏴도 안 들어오는 조끼다.” 그러니까 옆에 있는 점원들이 너도 나도 없이 만들어 달라고 합니다. 왜? 권총강도가 많으니까요. 그래서 권총강도를 막기 위한 방탄조끼를 만들다 보니까 소문이 나서 미국 전국에서 주문이 들어옵니다. 구멍가게를 집어 치우고 권총강도를 막는 방탄조끼 회사를 만들었는데 얼마나 성공을 했던지 지금 세계에서 제일가는 방탄조끼 회사가 되고 구멍가게 운영하는 것보다 훨씬 큰 부자가 된 것입니다.
좌절하고 절망하고 안 된다고 주저앉았으면 그는 구멍가게도 닫아 버리고 거지가 되었을지 모르겠지만 낭패와 실망당할 때도 그것을 받아들이지 아니하고 오히려 그것을 기회로 삼아서 나갈 것을 궁리했기 때문에 화가 복이 되고 만 것입니다. 전화위복이 된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에 모든 낭패와 실망은 주님께서 같이 계시면 전화위복이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놀라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요셉이 또 말했지 않습니까? 형들은 나에게 악을 행했었으나 하나님은 그를 선으로 바꾸셨다. 악을 선으로 바꾸는 하나님이 같이 계신데 우리 마음속에 우리가 부정적인 생각을 받아 들여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후로 여러분의 성공도 실패도 마음에서 시작한다는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패배는 마음에서 성장하고 실패와 성공도 마음에서 출발하는 것이니 마음을 올바르게 교육시키고 바로잡으면 여러분은 승리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생각을 바로잡고 꿈을 바로잡고 믿음을 바로가지고 바른 승리의 긍정적인 말을 하기 시작하면 운명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 33절로 39절까지를 우리 다함께 소리내어 읽어 보십시다.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할렐루야! 그러므로 여러분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들입니다. 성공하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들입니다. 축복받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들인 것입니다. 이 위대한 하나님의 은총을 마음 문을 활짝 열고 입을 넓게 열고 받아들이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사랑이 많으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
네 입을 넓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고 하신 주님 능력과 권세가 한이 없으신 하나님께서 그 아들 예수님을 주시고 그 아들과 더불어 모든 것을 허락해 주셨사오니 이를 받아들여서 우리 생각이 긍정적이 되고 꿈이 긍정적이 되고 믿음이 긍정적이 되고 우리의 신앙고백이 긍정적이 되어서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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