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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히10: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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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조용기 목사 |
참고 : | 2009. 5. 24. 주일 4부 설교 |
차원이 다른 삶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히 10:38)
<서론>
오늘 저는 “차원이 다른 삶”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인간은 자기가 속한 차원에 따라 생각을 합니다. 농촌에 사는 사람은 농촌 생활의 차원을 따라서 모든 일을 판단하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도시에 사는 자는 도시 차원에서 생각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생각의 차원을 바꾸지 못하여 큰 시련을 겪었습니다. 시골 처녀가 도시 총각에게 시집을 오면 차원을 바꿔야 되는 것입니다. 아침에 물 길러 가지 않습니다. 수돗물이 나옵니다. 그리고 불 켰다가 불 껐다가 할 필요가 없습니다. 전등불이 들어왔다 나갔다 하는 것입니다. 모든 차원의 생각이 달라지는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살때의 차원과 그들이 해방을 얻어 애굽에서 나왔을 때 차원은 다릅니다. 생각을 달리해야지 그대로 했다가는 큰일 나는 것입니다.
<본론>
1. 이스라엘 백성이 체험한 두 차원
이스라엘 백성이 체험한 두 차원을 보면 애굽에 종살이 할 때의 생각의 차원은 종의 차원입니다.
출애굽기 12장 40절에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 거주한 지 사백삼십 년이라”
430년 동안 종살이 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것을 볼 때 종의 위치에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열등의식에서 생각하고, 차별 차원에서 생각하고, 절망 차원에서 생각하는 것입니다. 430년 동안 종살이 했으니 그럴만하지요. 그러나 해방을 받았을 때 생각 차원은 달라져야만 되는 것입니다. 그들이 모세와 아론을 따라서 애굽에서 나와서 이제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걸어가게 되었는데 그들이 홍해가에 왔을 때 홍해바다가 막히고 애굽의 군대가 그대로 도로 잡으러 뛰어 오는데 굉장히 혼돈에 빠졌습니다. 애굽에서 살던 종의 차원에서 생각하면 그들은 또다시 종으로 잡혀가서 무수한 고생을 할 것이 뻔한 일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을 따라 나왔으니 이제는 하나님의 차원을 따라 생각해야 되는 것입니다. 믿음의 차원을 따라 생각해야 되는 것입니다. 인간적인 이성이나 감각의 차원을 따라 생각하지 말고 믿음과 하나님의 기적의 차원을 따라 생각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 생각을 바꾸는데 굉장한 혼돈이 다가온 것입니다.
출애굽기 14장 10절로 11절에 “바로가 가까이 올 때에 이스라엘 자손이 눈을 들어 본즉 애굽 사람들이 자기들 뒤에 이른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심히 두려워하여 야훼께 부르짖고 그들이 또 모세에게 이르되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우리에게 이같이 하느냐”
이스라엘 백성들은 인간의 차원으로 생각할 때 도저히 살아날 길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원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모세야, 애굽에 장지가 없어서 우리를 이 홍해가에 데리고 와서 죽게 하느냐. 왜 우리를 그대로 내버려 놓지 않고 이끌고 나왔느냐.” 인간적인 생각, 인간적인 차원에서 하는 말인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의 대답은 완전히 틀립니다. 하나님의 생각, 하나님의 차원에서 말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육신적으로 감각적으로 인간적으로 생각할 때 애굽의 바로왕과 대군대를 결코 감당할 수가 없고 다 포로로 잡힐 것을 생각하는데 모세는 하나님의 차원에서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불러 내셨으니 하나님께서 책임을 지시고 하나님의 천군천사가 와서 애굽 군대와 싸워서 영원히 지상에서 멸해 버리고 말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똑같은 사건을 두고 우리가 보는 차원이 다릅니다. 육체와 감각과 인간 이성의 차원을 생각하는 사람은 인간적인 면에서 볼 때 절망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같이 있고 하나님의 차원에서 생각하고 믿음의 차원에서 생각하면 생각이 다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힘만 가지고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같이 계신 것입니다. 우리 플러스 하나님이 되기 때문에 기적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예수 믿는 우리들도 한가지입니다. 우리가 구원받지 못했을 때는 어찌할 도리 없이 아무리 고급교육을 받았을지라도 인간적인 차원에서 이성적인 차원에서 물질적인 차원에서 생각하지 그 이상은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회개하고 예수님을 구주로 모시고 거듭나서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 속에 와 계시면 이제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육신적인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되면 하나님의 차원에서 생각해야 돼요. 믿음의 차원에서 기적의 차원에서 천상 하나님의 차원에서 생각해야 돼요. 똑같은 일을 만나도 우리는 하나님이 어떻게 생각하시느냐. 하나님이 어떻게 하실 것이냐.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그 차원으로 생각해서 문제를 해결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차원에서 선언을 꼭 마음에 해야 될 것인 것입니다.
2. 인간의 차원에서 하나님 차원의 생각으로 바뀌게 된 계기
인간의 차원에서 하나님 차원의 생각으로 바꾸는 결정적인 계기가 갈라진 홍해와 기적적인 구원인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장차 이스라엘 백성뿐 아니라 온 세계에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어떤 차원에서 생각할 것이냐 그 기본 모델을 보여준 것입니다.
출애굽기 14장 21절에 “모세가 바다 위로 손을 내밀매 야훼께서 큰 동풍이 밤새도록 바닷물을 물러가게 하시니 물이 갈라져 바다가 마른 땅이 된지라”
보십시오. 그 홍해바다가 갈라져서 마른땅이 된다는 것은 오늘날 인간으로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과학이 이렇게 발달한 21세기 오늘날에도 펌프로 아무리 물을 퍼내도 홍해바닷물을 다 퍼낼 수 없어요. 터널을 파도 하루 만에 터널을 팔 수 없어요. 인간적인 차원에서 생각할 때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가라고 말씀하시면 눈에는 아무 증거 안 보이고 귀에는 아무 소리 안 들리고 손에는 아무것도 잡히는 것 없고 내 앞길 칠흑같이 어두워도 하나님 차원에서 믿고 하나님 차원에서 생각하고 따라가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홍해가 갈라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생들이 예수님 믿기 전에 생각과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이 같이 할 때의 생각과 차원이 다르게 생각해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 믿기 전에는 경제적인 어려움이 다가오고 인간적으로 아무리 계산해도 안 되는 것입니다. 직장도 잃어버리고 생활비도 감당할 수 없어 고난이 꽉 들어찼는데 어떻게 살 수 있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차원에서 생각하면 그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하라. 그리하면 모든 것을 내가 너에게 더하시리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염려하지 말라. 하나님의 차원에서 생각하면 완전히 다릅니다. 나는 간증하나 읽어봤는데 어떤 시골교회 목사님이 40대 젊은 나이에 병들어서 세상을 떴습니다. 젊은 아내와 자식들을 두고 세상을 떴는데 교회 당회에서 장사를 지내고 나니까 사모님댁에 봉투를 하나 주면서 “이것이 우리 교회가 당신들에게 드리는 마지막 돈입니다.”그 봉투를 갖고 그 사모님은 통곡을 하고 울었습니다. “젊은 나이에 자식들 데리고 어떻게 삽니까?” 간절히 하나님 앞에서 울면서 기도하며 그날 교회 나와서 철야기도를 하다가 그 마음에 문득 이런 생각이 났습니다. “하나님이 젊은 나이에 우리 남편을 데려갈 때는 다 계획이 있어야 그렇지 않겠느냐. 계획도 없이 나에게 젊은 남편을 빼앗아 가면 내가 자식 데리고 어떻게 살 것이냐? 하나님은 내가 자식들 데리고 살 수 있도록 다 계획을 짜놓았기 때문에 하나님은 걱정하지 말아야 될 것 아니냐?” 그래서 그는 헌금봉투를 헌금함에 다 집어넣었습니다. 빼보지도 않았습니다. 교회서 주는 봉투를 다 그대로 넣고서 그날부터 걱정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계획, 하나님의 생각대로 생각하고 믿으니까 사람들은 “아이고, 사모님 어떻게 삽니까? 어떻게 살아요?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이에요?” “걱정할 것 없습니다. 하나님이 다 계획이 있기 때문에 우리 남편 데려 갔으므로 하나님을 섬기고 믿으면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다 돌보아 줍니다.” 그런데 그 사모님은 좋은데 취직해서 잘 대접을 받고 애들을 대학까지 공부 다 시키고 훌륭하게 성공했다는 기록이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차원이 달라진 생각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차원의 모델적 교훈이 바로 홍해수가 갈라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활 속에 여러분 어떤 문제가 생겨나도 홍해수가 갈라지는 차원에서 우리는 보아야 되는 것입니다. 홍해수가 갈라지지 않고 애굽군대만 바라보면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믿는 사람이니까 이제는 애굽에서 종살이 하는 사람이 아니듯 그러면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계시므로 홍해수가 갈라지는 일이 생겨난다. 상상을 초월한 기적이 일어난다. 그것을 언제나 생각해야 되는 것입니다. 홍해수가 갈라지는 것이 우리 삶의 모델이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제네바의 피에르 렌치니크 박사는 “고아가 세계를 주도한다”는 글에서 인류 역사에 가장 큰 기여를 한 300여 명을 분석했는데, 이 가운데는 고아가 많았다고 발표했습니다. 알렉산더대왕, 시저, 루이 14세, 조지 워싱턴, 나폴레옹, 사르트르, 루소, 데카르트, 파스칼, 공자 등이 다 고아였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최초의 여성 총리이자 이스라엘 건국의 어머니로 불리는 골다 메이어도 고아였습니다. 또한 성경의 인물 가운데서 크게 쓰임 받았던 모세와 사무엘도 친부모 슬하에서 자라지 못한 고아였습니다. 그런데 피에르 박사는 이런 고아들이 세계를 주도했다고 말하면서, 이는 역경이 인물을 만들어 내는 것으로, 사람은 역경을 돌파해 가면서 누구도 얻지 못하는 놀라운 힘을 얻게 된다고 말했었습니다. 역경이 다가오지 아니하면 언제나 인간적으로 생각하고 인간적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역경이 다가오고 내가 갈 길이 없을 때는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 편에서 하나님적으로 생각하면 새로운 인생의 돌파구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스위스의 정신의학자인 폴 투르니에는 “슬픔이 크면 클수록 그 슬픔이 만들어내는 창조적 에너지는 더 크다.” 굉장히 슬프면 그 슬픔을 이겨낼 수 있는 창조적 에너지가 마음속에서 생겨나는 것입니다. 사람은 도전에 대한 응전을 합니다. 우리가 도전 당하면 거기에 대해서 응전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언제나 우리가 생각해야 될 것은 우리는 홍해수를 가르는 하나님이 같이 계신다. 그것을 잊어버려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홍해수를 가르는 하나님이 나의 사업에도 같이 계시고 나의 생활에도 같이 계시고 우리 가정에도 같이 계시고 우리 국가에도 같이 계신다. 그러므로 홍해수를 가른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이 생각하는 것처럼 생각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홍해수를 가르는 하나님을 생각하고 그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차원에서 모든 것을 계획하고 생각해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람이 마음속에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면 그 영속에 계신 하나님의 성령이 그를 통해서 여러 가지 새로운 계시도 주고 묵시도 주고 인도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부정적인 생각을 하면 아예 문을 딱 닫아 버리는 것입니다. 영적인 문을 닫아 버리기 때문에 아무런 계시도 인도도 없기 때문에 갈 길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어려움을 당할 때 아예 인간적인 차원에서 생각하면 절망이다. 안 된다. 끝났다고 하면 하나님의 역사에 대해서 문을 닫아 버리는 것입니다. 아무 일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려운 일을 당할 때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차원에서 기적이 일어날 차원에서 믿음의 차원에서 생각하고 기도하면 계시도 오고 묵시도 오고 인도도 오고 문제해결의 방법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일을 당할 때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말아야 되는 것입니다. 자동차를 운전할 때 전진 기어를 넣으면 차가 앞으로 나가고 후진 기어를 넣으면 차가 뒤로 갑니다. 방향은 기어에 따라 다르지만 엔진의 힘은 똑같이 사용합니다. 앞으로 나가는 엔진이 힘이나 뒷걸음치는 엔진이나 엔진의 힘은 같습니다. 여러분이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생각의 에너지나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에너지나 에너지는 똑같습니다. 똑같은 에너지를 쓸바에야 긍정적으로 사용해야지요. 그러면 우리에게 긍정적인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홍해수를 걷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차원에서 생각하는 것을 훈련시키기 시작한 것입니다. 우리 예수 믿고 난 다음에 우리는 하나님의 차원에서 생각하는 훈련을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훈련 받지 않고 그냥은 안 됩니다. 왜냐하면 인간으로 태어나서 너무나 오랜 세월동안 인간적인 차원에서 살았기 때문에 무엇을 보더라도 인간의 이성과 감정과 감각을 통해서 생각하고 하나님을 믿는 믿음과 기적의 차원에서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훈련을 시키는 것입니다. 그들이 홍해를 건너서 사흘 길을 갔는데 물이 없어요. 목이 말라 죽을 지경입니다. 그런데 연못물을 발견했는데 물이 써서 마실 수 없습니다. 자, 문제가 생겼습니다. 인생에 쓴물이 생겼습니다. 문제를 어떻게 해결 합니까? 여기에서 인간적인 차원에서 생각할 것이냐, 하나님 차원에서 생각할 것이냐 훈련을 시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은 모두다 원망을 했습니다. 인간적인 차원에서 쓴물을 마실 수가 없으니까 하나님을 원망하고 모세를 원망하고 목이 말라 죽겠다고 고함을 쳤습니다. 그런데 모세만은 하나님의 차원에서 생각했습니다. 틀림없이 쓴물이 있으면 달게 하는 길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하나님을 바라보니까 그 연못 옆에 나뭇가지를 지시한지라 나뭇가지를 꺾어 물에 던지니 물이 달아졌습니다. 물을 다 마셨습니다. 인간적 차원에서 생각하는 사람들은 전부 낙심하고 탄식했지만 하나님 차원에서 생각하고 기적을 기대하고 믿음의 차원에서 기도한 모세를 위해서는 하나님이 이미 쓴물을 달게 만들어 놓을 방법을 연못가에 나무를 심어서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출애굽기 15장 23절로 25절에 “마라에 이르렀더니 그 곳 물이 써서 마시지 못하겠으므로 그 이름을 마라라 하였더라 백성이 모세에게 원망하여 이르되 우리가 무엇을 마실까 하매 모세가 야훼께 부르짖었더니 야훼께서 그에게 한 나무를 가리키시니 그가 물에 던지니 물이 달게 되었더라 거기서 야훼께서 그들을 위하여 법도와 율례를 정하시고 그들을 시험하실새”고 말한 것입니다.
그 다음에 이제는 광야를 지나는데 한 일주일쯤 지나니까 그들이 애굽에서 사온 모든 음식이 다 고갈되었습니다. 보따리에다 밀반죽을 해서 걸머지고 왔는데 다 먹어버리고 먹을 음식이 없습니다. 한두명도 아닌 3백만 대국민입니다. 그러니까 그들이 인간적으로 생각할 때 자, 농사도 지을 곳도 없고, 거둘 음식도 없고, 잡아먹을 짐승도 없고, 나무가 있어 풀이 있냐, 과일이 있냐 절망입니다. 인간적인 차원에서 생각할 때 절대절망입니다. 그러니까 이 시험에서 또 낙제를 한 것입니다. 그들이 인간적인 절대절망은 하나님의 희망의 길인 것을 알아야 되는데 그것을 모르고 또 하나님께 원망하고 모세를 원망했습니다. 우리가 뭘 먹고 사느냐? 이제는 우리는 다 굶어죽었다. 그때 모세는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하나님 차원에서 생각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3백만 민족을 애굽에서 이 광야로 이끌어 내실 때는 계획이 계시고 하나님이 기적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했지 계획 없이 주먹구구식으로 데려오지는 아니하셨을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 우리에게 먹을 것을 주옵소서.” 하나님이 당장 대답해 주었습니다. 그때부터 매일같이 만나가 임한 것입니다. 만나를 그들은 거두워서 하루 삼시세끼 영양실조 없이 잘 먹었습니다. 하나님 만나에 온갖 음식이 영양이 풍부하게 들어 있어서 만나만 먹어도 건강하고 튼튼하고 여행을 할 수 있도록 그렇게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출애굽기 16장 14절로 15절에 “그 이슬이 마른 후에 광야 지면에 작고 둥글며 서리 같이 가는 것이 있는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보고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여 서로 이르되 이것이 무엇이냐 하니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이는 야훼께서 너희에게 주어 먹게 하신 양식이라”
출애굽기 16장 35절에 “사람이 사는 땅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 자손이 사십 년 동안 만나를 먹었으니 곧 가나안 땅 접경에 이르기까지 그들이 만나를 먹었더라”
보십시오. 하나님이 3백만 이스라엘 백성을 40일도 아닌 400일도 아닌 40년 동안 먹였습니다. 엄청난 하나님이 아닙니까? 여러분 인생 일생을 살면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그것 때문에 걱정하고 있다면 하나님 보기에 민망하지 않습니까? 인간적 차원에서 생각하니까 하나님 차원에서 생각하니 3백만 이스라엘을 40년 동안 굶기지 않고 먹이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안줄 리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순종하고 믿고 나가는 사람을 하나님이 결코 버리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도 이스라엘 백성은 또 시험에 낙제했습니다. 또 물도 그렇습니다. 가다가 물이 없어 목이 마르니까 또 원망하고 불평을 말한 것입니다. 문제가 생기면 인간 편에서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 편에서 생각하고 인간의 이성과 감각을 통해서 생각하지 말고 믿음과 하나님에 대한 기적을 가지고 생각해야 되는데 이스라엘이 인간적인 생각을 하니까 불평을 합니다. 믿음으로 생각하면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물이 없어서 목이 말라 죽겠다고 고함을 치니까 모세가 하나님께 믿음의 차원에서 하나님 차원에서 생각하고 기도하니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출애굽기 17장 6절에 “내가 호렙 산에 있는 그 반석 위 거기서 네 앞에 서리니 너는 그 반석을 치라 그것에서 물이 나오리니 백성이 마시리라 모세가 이스라엘 장로들의 목전에서 그대로 행하니라”
시편 105편 41절에 “반석을 여신즉 물이 흘러나와 마른 땅에 강 같이 흘렀으니”다.
반석에서 물이 강같이 흘러나온 것입니다. 도저히 생각할 수 없습니다. 이런 마른 땅에서 마른 반석에서 물이 나오되 그냥 나오는 것이 아니라 큰 시냇물같이 콸콸 흘러나온 것입니다. 하나님의 차원에서 생각하고 믿음의 차원에서 나가면 이런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적 차원에서 생각하고 감각적 차원에서 생각하고 불가능 하다고 생각하고 원망하고 불평하고 탄식하면 광야에서 목말라 죽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또 시험을 했는데 메추라기 시험인 것입니다. 백성들이 와서 모세 앞에서 통곡을 하고 울면서 “우리 애굽에서 고기 가마 곁에 있을 때 죽었으면 좋았을 것을.. 우리가 종살이하고 괴로웠지만 고기는 먹을 수가 있었어. 고기 가마에 고기를 삶아서 먹었지 않았느냐. 광야에 나와서 만나만 먹고 고기를 못 먹으니 도저히 못살겠다. 고기를 달라. 고기를 달라.” 고함을 쳤습니다. 너무 국민들이 고함을 치고 흥분을 하고 탄식을 하기 때문에 모세의 마음도 흔들렸습니다. 하나님 중심으로 생각하고 믿음 중심으로 생각하는 모세의 마음도 흔들렸습니다. 그래서 모세가 하나님께 말씀드리기를 “하나님이여 이 백성이 이 광야에서 고기를 달라 하는데 온 바다에 물고기를 다 건진들 이 3백만 백성들을 어떻게 다 먹게 하겠으며 온 산천에 들에 있는 짐승을 다 잡은들 3백만을 어떻게 먹게 하겠습니까?” 그러자 하나님께 꾸중했습니다. “모세야! 내 팔이 짧아졌느냐? 네가 고기를 하루를 먹을 것이 아니라 코에서 고기 냄새가 날 때까지 먹게 하겠다.”
민수기 11장 31절로 32절에 “바람이 야훼에게서 나와 바다에서부터 메추라기를 몰아 진영 곁 이쪽 저쪽 곧 진영 사방으로 각기 하룻길 되는 지면 위 두 규빗쯤에 내리게 한지라 백성이 일어나 그 날 종일 종야와 그 이튿날 종일토록 메추라기를 모으니 적게 모은 자도 열 호멜이라 그들이 자기들을 위하여 진영 사면에 펴 두었더라”
하나님이 메추라기를 바람을 불어서 모아오니 메추라기가 팔락팔락팔락 손 잡히는데서 날라 다녀요. 하루 종일 잡았습니다. 밤새도록 잡았습니다. 그 이튿날도 또 잡았습니다. 한두마리 잡은 것이 아니라 수 만 마리를 잡았습니다. 그것을 뜯어 가지고서 먹을 대로 먹고 그 다음에 또 말려서 포를 만들어서 먹었습니다. 얼마든지 먹을 수 있게 만들어 준 것입니다. 하나님 편에서 생각하고 하나님 차원에서 생각했으면 하나님도 기뻐하고 자기들도 기쁠 것인데 언제나 인간의 차원에서 생각하고 인간의 감각과 인간의 생각으로써 원망하고 불평하므로 하나님을 마음 상하게 하고 화나게 만든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이 아무리 훈련을 시켜도 훈련을 받지 못하는 비극이 있는 것입니다.
미국의 유명한 수정교회의 로버트 슐러 목사님의 글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보고 “절벽 가까이 오라.” 가까이 가니까 “더 가까이 오라” 더 가까이 와서 절벽 끝에 흔들흔들 하니까 하나님이 자기를 확 밀어 버렸습니다. 자기가 절벽에 고꾸라져 떨어집니다. 떨어지면서 갑자기 발버둥을 치니까 날개가 달린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떨어지다 말고 날기 시작한 것입니다. 안 떨어졌으면 여태까지 날개가 있는 것을 몰랐는데 그 날개는 믿음의 날개입니다. 고난을 당하기 전에는 믿음이 있는 것을 몰랐습니다. 그저 믿음 없이 인간적인 차원에서 살았는데 고난을 당하여 절벽에 떨어지자마자 죽으면 낙동강이 되는 그런 처지에서 비로소 믿음을 사용해서 믿음의 차원 하나님의 차원에서 살게 되어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간증을 한 것입니다. 맞습니다. 우리에게 여러 가지 시험과 환난이 다가오는 것은 믿음을 사용하는 법을 가르치기 위한 것입니다. 인간적인 차원에서 생각하지 말고 고난을 통해서 인간적 차원에 갈 길이 없을 때 믿음의 차원으로 기도해서 하나님이 기적을 가지고 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믿는 사람이 되어서 일반 사람들과는 다른 것입니다. 하나님은 크고 작은 벼랑을 우리 생활 가운데 보내셔서 하나님 차원에 훈련을 받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훈련을 통하여 우리의 생각을 인간의 차원에서 하나님 차원으로 하나님의 생각으로 바꿔서 담대한 믿음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다윗이 골리앗을 대하여 싸울 때 어땠습니까? 구척장신에 무장을 하고 나온 골리앗을 다윗은 목자의 옷을 입고 목자의 지팡이와 물맷돌을 가지고 나왔습니다. 골리앗이 보니 정말 사람 웃기는 일입니다. “네가 나를 개로 알고 지팡이를 가지고 나왔느냐? 내가 너를 죽여서 너의 고기로 공중의 새의 밥과 땅의 기는 짐승의 밥으로 주겠다.” 그때 다윗이 인간적으로 생각했으면 기절초풍을 하고 달아났을 것입니다. 임금 사울 왕과 그 군대들은 인간적인 차원에서 생각하기 때문에 골리앗만 나오면 사족을 못 쓰고 다 엎드렸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하나님 차원에서 생각하니까 그가 담대하게 말했습니다. “너는 창과 칼과 단창을 의지하고 나오냐? 나는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만군의 야훼의 이름으로 나오노라. 내가 오늘날 너를 죽여서 너의 고기로 공중의 새와 땅의 짐승의 밥으로 만들어 줄 것이다. 전쟁은 창과 칼에 달려있지 않고 하나님께 달려있다. 하나님께서 너를 내게 넘겨주리니 내가 오늘 너를 죽여 천하에 하나님 계신 것을 알게 하겠다.” 와~ 다윗은 몸은 작아도 믿음은 하나님 차원에서 생각하니까 믿음은 거인이었습니다. 그러나 골리앗은 육은 거인이었지만 믿음이 없기 때문에 아예 메뚜기 새끼 같았습니다. 다윗이 달려가면서 물맷돌을 들려서 던지니까 골리앗의 이마에 박혀서 땅에 쓰러졌습니다. 가서 골리앗의 칼을 가지고서 골리앗의 목을 베니 블레셋 사람들이 다 기절초풍하고 도망을 치고 패배를 한 것입니다. 여기에 보십시오. 차원이 다릅니다. 골리앗의 차원은 감각적인 차원, 인간적인 차원으로 생각하고 다윗은 믿음의 차원, 기적의 차원, 하나님의 차원에서 생각한 것입니다. 그리고는 내용적으로 보면 다윗은 믿음의 거인이요, 골리앗은 믿음에는 메뚜기였습니다. 오늘날 여러분, 하나님의 차원에서 생각할 수 있도록 믿음의 훈련을 받으면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큰 능력과 영광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3. 가데스 바네아에서의 낙제
이스라엘 백성은 마지막 시험에 낙제하고 만 것입니다. 하나님은 광야를 지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훈련하고 하나님의 차원으로 생각하고 살도록 가르치셨습니다. 이제 가나안 땅에 들어오기 위해서 가데스 바네아에서 정탐꾼을 보내어서 정탐을 하게 한 것입니다.
민수기 13장 31절로 32절에 보면 “그와 함께 올라갔던 사람들은 이르되 우리는 능히 올라가서 그 백성을 치지 못하리라 그들은 우리보다 강하니라 하고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그 정탐한 땅을 악평하여 이르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그 거주민을 삼키는 땅이요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우리는 그들이 보기에도 메뚜기 같다고 말한 것입니다. 12명의 정탐꾼을 40일 동안 가나안 땅을 정탐하고 오게 했더니 그중에 10명은 완전히 인간적인 차원에서 감각적인 차원에서 모든 것을 보고를 했습니다. 광야에서 그렇게 지나가면서 교훈을 배우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 중에 두 명은 민수기 14장 8절로 9절에 여호수아와 갈렙은 “야훼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다만 야훼를 거역하지는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의 먹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야훼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
하나님 차원에서 생각한 것입니다. 하나님 차원에서 생각하지 않고 인간적 차원으로 행할 때는 성은 높고 거기 사는 사람들은 네피림의 후손 아낙 자손 대장부라. 우리가 비교하면 우리는 메뚜기 같더라. 그랬는데 하나님의 차원에서 생각하는 사람은 그들은 우리 밥이라. 그들은 보좌가 이미 떠나가 버렸고 언제든지 우리 손에 달려있다. 우리 들어가서 점령하자. 하나님이 같이 계시면 못할 일이 어디 있느냐. 똑같은 사건을 볼 때 인간적인 차원에서 보면 부정적으로 말하고 하나님 차원에서 보면 긍정적으로 말했습니다. 그러니 온 이스라엘 백성이 부정적인 말을 하고 보고를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함께 울고 탄식을 하고 그들 장관을 세워서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했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돌로 쳐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 때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그 10명을 다 재앙을 받아 죽어 버리고 그 10명을 따라가던 사람들은 전부 광야로 돌이켜 40년 동안 방황하면서 다 죽어 버리고 하나님의 차원을 따라서 생각한 여호수아와 갈렙은 살아서 후손을 데리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훈련을 우습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오늘날 경제 환난이 다가온 것도 하나님이 세상을 시험해 보시는 것입니다. 네가 인간적인 차원에서 생각할 것이냐. 하나님 차원에서 생각할 것이냐. 하나님의 뜻을 순종할 것이냐, 인간의 뜻을 순종할 것이냐. 이런 것을 시험해 보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언제나 인간적인 차원에서 생각하면 인간적인 차원에서 그칩니다. 하나님을 따라 생각해야 되는 것입니다.
잠언서 4장 23절에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마음을 인간의 차원에서 하나님의 차원으로 돌려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긍정적이고 적극적이고 창조적인 생각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사야 55장 8절로 9절에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야훼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
우리 인간적인 차원의 생각과 하나님 차원의 생각은 완전히 틀립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읽고 기도하고 성령의 음성을 들어 하나님의 차원에서 생각해야 되는 것입니다. 인간적인 차원에서 생각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차원을 따라 꿈을 꿔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다 꿈을 꾸어야 되는 것입니다. 꿈이 없는 백성은 망합니다. 마음에 꿈을 꾸어야 그 꿈이 이루어지는 것이지요. 꿈을 꾸지 아니하면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 마음에 꿈은 우리 마음에 소원이 꿈으로 이루어지는 것 아닙니까? 다윗은 분명한 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가 들에서 양을 칠 때 곰이나 사자가 양을 빼앗아 가면 그 입에서 양 새끼를 빼앗아서 달려들면 주먹을 들고 하나님 이름으로 쳐 죽였습니다. 곰과 사자를 쳐 죽인 그 기억이 있기 때문에 사울에게 말하기를 “내가 아버지의 양을 칠 때 곰과 사자가 공격하면 그를 쳐서 죽였는데 저 골리앗은 곰과 사자보다 못한 인간이기 때문에 능히 죽인다.” 그 마음에 곰과 사자가 비교해서 골리앗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마음에 그 꿈이 확실히 있었기 때문에 그는 담대했습니다. 여러분도 꿈을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우리 한국은 그렇지 않지만 외국 사람들은 12월 31일이 되면 친한 사람들끼리 모여서 파티를 하고 명년에 어떠한 일이 생길지 우리 소원을 적자. 봉투에다가 소원을 적어서 봉투에 넣어서 딱 봉해서 명년 12월 31일에 봉투를 딱 뜯어 봅니다. 그런데 친구들이 다 적어서 봉투에 넣고 붙이고 12월 31일 다시 모였습니다. 봉투를 열어 보니 어떤 사람은 ‘더 행복해지기를 바란다.’고 했는데 그대로 되었어요. ‘더 잘살기를 바란다.’ 되었어요. ‘새 집으로 이사 가기를 원한다.’ 되었어요. 그런데 다른 봉투는 봉투주인이 참석을 안했습니다. 그 봉투를 뜯어 보니까 ‘명년은 나에게 일생일대에 중요한 해이다. 왜냐하면 우리 조상들이 60을 넘긴 적이 없는데 명년에는 내가 60이 되는 해이다. 그래서 내가 명년에 못살지 모르겠다.’ 그런데 진짜로 그날 못살고 참석 못했습니다. 똑같은 꿈을 가질 때 왜 60에 조상들이 죽었으면 자기는 70, 80년을 살 수 있다는 꿈을 가지지 못합니까? 꿈이 인생을 좌우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꿈을 마음속에 분명히 가져야 되는데 하나님을 따라 꿈을 가져야지 사람을 따라 꿈을 가지면 안 되는 것입니다. 네 입을 넓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 우리가 채우는 것 아닙니다. 하나님이 채우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꿈을 우리가 마음속에 품는 것이 입을 넓게 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꿈을 품고 늘 그 꿈을 보고 있으면 하나님의 기적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나는 마귀가 와서 ‘너 오래 못살고 죽을 것이다.’ 그런 말을 자꾸 합니다. 나에게 자꾸 와서 해요. 속삭여요. ‘너 힘도 없고 이제는 기운도 다 빠지고 이제는 오래 못살 것이다.’ 그러나 마귀가 도저히 빼앗아가지 못할 꿈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할아버지가 92살까지 살았습니다. 아버님이 94살을 살았습니다. 어머님이 94살을 살았습니다. 맏아들인 나는 얼마까지 살아야 되겠습니까? 아무리 꿈을 안가지려고 해도 안 가질 수가 없어요. 할아버지 “오냐 내가 92살 살았다.” 아버님 “94살 살았다.” 어머니 “94살 살았다.” “나는요?” “90살은 살아야지.” 그런 꿈을 가지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언제나 내일은 오늘보다 나아지며 금번 달은 명년 달보다 나아지며 장차는 현재보다 나아질 수 있는 꿈을 마음에 품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따라 꿈꾸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2장 13절에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소원이 바로 꿈입니다. 꿈을 통해서 하나님이 역사하는 것입니다.
시편 81편 10절에 “나는 너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야훼 네 하나님이니 네 입을 크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 하였으나”
여러분이 입을 딱 다물고 있으면 아무리 채우려고 해도 채울 수가 없는 것입니다. 입을 넓게 열어요. 주위 환경이 아무리 어두워도 하나님 앞에서 큰 꿈을 가지고 있으면 하나님이 채워 주겠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우리는 이 세상의 인간을 따라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을 따라 믿어야 돼요. 하나님을 따라서 기적이 일어날 것을 믿어야 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0장 38절에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믿음으로 살아야지 자꾸 어려움을 당할 때 뒤로 물러가면 안 되는 것입니다. 마귀는 와서 우리에게 유혹하고 협박하고 설득시켜서 낙심을 하고 뒤로 물러가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히4:12)는 힘이 있기 때문에 말씀을 의지하고 자꾸 믿고 나가라고 말한 것입니다. 앞으로 나가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17)고 항상 설교를 듣고 말씀을 읽고 그리고 거기에서 하나님을 믿고 눈에는 아무 증거 안보이고 귀에는 아무 소리 안 들리고 손에 잡히는 것 없어도 주여 믿습니다. 믿음대로 될지어다. 믿음으로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은 믿을 것이 없어요. 사람을 믿을 수 있습니까? 누구를 믿고 우리 인생이 삽니까? 이 세상에 믿을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그러나 예수 믿는 사람은 아버지 하나님이 사랑과 예수님의 은혜를 믿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저 하늘이 무너지고 이 땅이 꺼져도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은혜는 변하지 않습니다. 내가 이 예수님을 모시고 이 하나님 아버지를 아버지로 섬기고 사는 이상 나는 믿음을 가질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같이 계신데 누가 나를 헤칠 수가 있는 것입니까?
히브리서 11장 6절에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반드시 그가 살아계시고 내가 그를 간절히 찾으니까 결국에는 상을 주신다. 조만간 상을 주신다. 어떤 때는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반드시 하나님이 상 주신다는 긍정적인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따라 믿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따라 말해야 되는 것입니다. 인간을 따라 말하면 낭패와 실망을 당하고 맙니다. 하나님을 따라 긍정적으로 말해야 되는 것입니다.
잠언 18장 21절에 “죽고 사는 것이 혀의 힘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혀의 열매를 먹으리라”
죽고 사는 것이 혀의 힘에 달렸다. 혀에 힘이 없는 것 같지요. 그러나 여러분 말하는 대로 여러분 인생이 그리로 가는 것입니다. 큰 배의 밑에 있는 키의 방향을 따라 배가 항구로도 가고 대양으로 나가는 것처럼 우리 인생은 혀가 키가 되어서 혀가 움직임에 따라서 실패도 하고 성공도 하고 승리도 하고 패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을 잘 해야 돼요.
민수기 14장 28절에 “그들에게 이르기를 야훼의 말씀에 내 삶을 두고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겠다고 한 것입니다. 말을 잘못 듣게 하면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내가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네가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마 16:19)라는 것은 말로써 매고 푸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결론>
태어난 그대로의 인간은 교육이 없든 있든 인간의 차원을 건널 수가 없습니다. 이 세상에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인간의 차원에서 생각하지 거기서 뛰어 넘을 수 없습니다. 아무리 교육을 많이 받아도 인간적인 차원에서 감각적으로 생각하고 감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차원에서 살기 위해서는 우리가 예수 믿고 하나님 생명을 받고 하나님의 영의 감동을 받게 되면 이제는 인간적인 차원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사는 하나님의 차원에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는 하나님과 함께 살아요. 여러분 과거에는 여러분 혼자 살았지만 이제 여러분 속에 하나님이 와서 계신 것입니다.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요 14:20)고 말씀한 것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살므로 내 마음대로 생각하면 안돼요. 하나님과 함께 생각해야 돼요. 하나님과 함께 꿈꿔야 되고 하나님과 함께 믿어야 되고 하나님과 함께 말해야 되는 것입니다. 내 마음대로 말해 버리면 안돼요. 부부간에 같이 살 때도 어떤 일이 있으면 서로 의논해가지고서 같은 생각, 같은 말, 같은 행동을 해야지 남편 따로 말하고 부인 따로 말하고 하면 콩가루 집안이 되는 것입니다. 내 인생이 콩가루 집안이 되려면 내 마음대로 말하십시오. 내가 하나님 말씀을 생각하고 하나님 말씀대로 믿고 하나님 말씀대로 행하면 하나님과 내가 같이 하기 때문에 언제나 기적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늘나라를 볼 수 없다”고 했는데 예수 믿고 거듭나야 하나님이 계시고 하늘나라를 볼 수 있게 되고 우리는 하나님의 차원에서 생각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적인 차원에서 하나님 차원으로 넘어가는 생활 이것이 하나님이 바라는 것이고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아무리 교육을 해도 인간적인 차원에서 하나님 차원으로 넘어가지 못했습니다. 여러분에게 여러 가지 시험과 환난이 다가오는 것은 인간적인 차원에서 하나님 차원으로 넘어가라고 훈련시키는 것입니다. 아무리 해도 배우지 못하고 원망하고 탄식하고 인간적 차원에 떨어지면 나중에는 하나님이 버리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일이 있더라도 하나님 말씀을 부지런히 읽고 듣고 인간적인 차원을 뛰어 넘어 하나님의 차원으로 생각하고 꿈꾸고 말하고 믿고 나가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다같이 고개 숙여 기도드리겠습니다.
<기도>
사랑이 많으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
우리는 자기가 속한 그 위치에서 그 차원에서 모든 것을 보고 생각하고 말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고 성령이 우리 속에 있으므로 하나님의 차원에서 생각하고 말하고
꿈꾸고 행하게 도와주시옵소서. 하나님의 기사와 이적이 늘 마음속에 나타나게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히 10:38)
<서론>
오늘 저는 “차원이 다른 삶”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인간은 자기가 속한 차원에 따라 생각을 합니다. 농촌에 사는 사람은 농촌 생활의 차원을 따라서 모든 일을 판단하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도시에 사는 자는 도시 차원에서 생각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생각의 차원을 바꾸지 못하여 큰 시련을 겪었습니다. 시골 처녀가 도시 총각에게 시집을 오면 차원을 바꿔야 되는 것입니다. 아침에 물 길러 가지 않습니다. 수돗물이 나옵니다. 그리고 불 켰다가 불 껐다가 할 필요가 없습니다. 전등불이 들어왔다 나갔다 하는 것입니다. 모든 차원의 생각이 달라지는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살때의 차원과 그들이 해방을 얻어 애굽에서 나왔을 때 차원은 다릅니다. 생각을 달리해야지 그대로 했다가는 큰일 나는 것입니다.
<본론>
1. 이스라엘 백성이 체험한 두 차원
이스라엘 백성이 체험한 두 차원을 보면 애굽에 종살이 할 때의 생각의 차원은 종의 차원입니다.
출애굽기 12장 40절에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 거주한 지 사백삼십 년이라”
430년 동안 종살이 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것을 볼 때 종의 위치에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열등의식에서 생각하고, 차별 차원에서 생각하고, 절망 차원에서 생각하는 것입니다. 430년 동안 종살이 했으니 그럴만하지요. 그러나 해방을 받았을 때 생각 차원은 달라져야만 되는 것입니다. 그들이 모세와 아론을 따라서 애굽에서 나와서 이제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걸어가게 되었는데 그들이 홍해가에 왔을 때 홍해바다가 막히고 애굽의 군대가 그대로 도로 잡으러 뛰어 오는데 굉장히 혼돈에 빠졌습니다. 애굽에서 살던 종의 차원에서 생각하면 그들은 또다시 종으로 잡혀가서 무수한 고생을 할 것이 뻔한 일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을 따라 나왔으니 이제는 하나님의 차원을 따라 생각해야 되는 것입니다. 믿음의 차원을 따라 생각해야 되는 것입니다. 인간적인 이성이나 감각의 차원을 따라 생각하지 말고 믿음과 하나님의 기적의 차원을 따라 생각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 생각을 바꾸는데 굉장한 혼돈이 다가온 것입니다.
출애굽기 14장 10절로 11절에 “바로가 가까이 올 때에 이스라엘 자손이 눈을 들어 본즉 애굽 사람들이 자기들 뒤에 이른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심히 두려워하여 야훼께 부르짖고 그들이 또 모세에게 이르되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우리에게 이같이 하느냐”
이스라엘 백성들은 인간의 차원으로 생각할 때 도저히 살아날 길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원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모세야, 애굽에 장지가 없어서 우리를 이 홍해가에 데리고 와서 죽게 하느냐. 왜 우리를 그대로 내버려 놓지 않고 이끌고 나왔느냐.” 인간적인 생각, 인간적인 차원에서 하는 말인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의 대답은 완전히 틀립니다. 하나님의 생각, 하나님의 차원에서 말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육신적으로 감각적으로 인간적으로 생각할 때 애굽의 바로왕과 대군대를 결코 감당할 수가 없고 다 포로로 잡힐 것을 생각하는데 모세는 하나님의 차원에서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불러 내셨으니 하나님께서 책임을 지시고 하나님의 천군천사가 와서 애굽 군대와 싸워서 영원히 지상에서 멸해 버리고 말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똑같은 사건을 두고 우리가 보는 차원이 다릅니다. 육체와 감각과 인간 이성의 차원을 생각하는 사람은 인간적인 면에서 볼 때 절망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같이 있고 하나님의 차원에서 생각하고 믿음의 차원에서 생각하면 생각이 다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힘만 가지고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같이 계신 것입니다. 우리 플러스 하나님이 되기 때문에 기적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예수 믿는 우리들도 한가지입니다. 우리가 구원받지 못했을 때는 어찌할 도리 없이 아무리 고급교육을 받았을지라도 인간적인 차원에서 이성적인 차원에서 물질적인 차원에서 생각하지 그 이상은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회개하고 예수님을 구주로 모시고 거듭나서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 속에 와 계시면 이제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육신적인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되면 하나님의 차원에서 생각해야 돼요. 믿음의 차원에서 기적의 차원에서 천상 하나님의 차원에서 생각해야 돼요. 똑같은 일을 만나도 우리는 하나님이 어떻게 생각하시느냐. 하나님이 어떻게 하실 것이냐.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그 차원으로 생각해서 문제를 해결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차원에서 선언을 꼭 마음에 해야 될 것인 것입니다.
2. 인간의 차원에서 하나님 차원의 생각으로 바뀌게 된 계기
인간의 차원에서 하나님 차원의 생각으로 바꾸는 결정적인 계기가 갈라진 홍해와 기적적인 구원인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장차 이스라엘 백성뿐 아니라 온 세계에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어떤 차원에서 생각할 것이냐 그 기본 모델을 보여준 것입니다.
출애굽기 14장 21절에 “모세가 바다 위로 손을 내밀매 야훼께서 큰 동풍이 밤새도록 바닷물을 물러가게 하시니 물이 갈라져 바다가 마른 땅이 된지라”
보십시오. 그 홍해바다가 갈라져서 마른땅이 된다는 것은 오늘날 인간으로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과학이 이렇게 발달한 21세기 오늘날에도 펌프로 아무리 물을 퍼내도 홍해바닷물을 다 퍼낼 수 없어요. 터널을 파도 하루 만에 터널을 팔 수 없어요. 인간적인 차원에서 생각할 때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가라고 말씀하시면 눈에는 아무 증거 안 보이고 귀에는 아무 소리 안 들리고 손에는 아무것도 잡히는 것 없고 내 앞길 칠흑같이 어두워도 하나님 차원에서 믿고 하나님 차원에서 생각하고 따라가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홍해가 갈라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생들이 예수님 믿기 전에 생각과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이 같이 할 때의 생각과 차원이 다르게 생각해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 믿기 전에는 경제적인 어려움이 다가오고 인간적으로 아무리 계산해도 안 되는 것입니다. 직장도 잃어버리고 생활비도 감당할 수 없어 고난이 꽉 들어찼는데 어떻게 살 수 있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차원에서 생각하면 그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하라. 그리하면 모든 것을 내가 너에게 더하시리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염려하지 말라. 하나님의 차원에서 생각하면 완전히 다릅니다. 나는 간증하나 읽어봤는데 어떤 시골교회 목사님이 40대 젊은 나이에 병들어서 세상을 떴습니다. 젊은 아내와 자식들을 두고 세상을 떴는데 교회 당회에서 장사를 지내고 나니까 사모님댁에 봉투를 하나 주면서 “이것이 우리 교회가 당신들에게 드리는 마지막 돈입니다.”그 봉투를 갖고 그 사모님은 통곡을 하고 울었습니다. “젊은 나이에 자식들 데리고 어떻게 삽니까?” 간절히 하나님 앞에서 울면서 기도하며 그날 교회 나와서 철야기도를 하다가 그 마음에 문득 이런 생각이 났습니다. “하나님이 젊은 나이에 우리 남편을 데려갈 때는 다 계획이 있어야 그렇지 않겠느냐. 계획도 없이 나에게 젊은 남편을 빼앗아 가면 내가 자식 데리고 어떻게 살 것이냐? 하나님은 내가 자식들 데리고 살 수 있도록 다 계획을 짜놓았기 때문에 하나님은 걱정하지 말아야 될 것 아니냐?” 그래서 그는 헌금봉투를 헌금함에 다 집어넣었습니다. 빼보지도 않았습니다. 교회서 주는 봉투를 다 그대로 넣고서 그날부터 걱정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계획, 하나님의 생각대로 생각하고 믿으니까 사람들은 “아이고, 사모님 어떻게 삽니까? 어떻게 살아요?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이에요?” “걱정할 것 없습니다. 하나님이 다 계획이 있기 때문에 우리 남편 데려 갔으므로 하나님을 섬기고 믿으면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다 돌보아 줍니다.” 그런데 그 사모님은 좋은데 취직해서 잘 대접을 받고 애들을 대학까지 공부 다 시키고 훌륭하게 성공했다는 기록이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차원이 달라진 생각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차원의 모델적 교훈이 바로 홍해수가 갈라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활 속에 여러분 어떤 문제가 생겨나도 홍해수가 갈라지는 차원에서 우리는 보아야 되는 것입니다. 홍해수가 갈라지지 않고 애굽군대만 바라보면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믿는 사람이니까 이제는 애굽에서 종살이 하는 사람이 아니듯 그러면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계시므로 홍해수가 갈라지는 일이 생겨난다. 상상을 초월한 기적이 일어난다. 그것을 언제나 생각해야 되는 것입니다. 홍해수가 갈라지는 것이 우리 삶의 모델이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제네바의 피에르 렌치니크 박사는 “고아가 세계를 주도한다”는 글에서 인류 역사에 가장 큰 기여를 한 300여 명을 분석했는데, 이 가운데는 고아가 많았다고 발표했습니다. 알렉산더대왕, 시저, 루이 14세, 조지 워싱턴, 나폴레옹, 사르트르, 루소, 데카르트, 파스칼, 공자 등이 다 고아였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최초의 여성 총리이자 이스라엘 건국의 어머니로 불리는 골다 메이어도 고아였습니다. 또한 성경의 인물 가운데서 크게 쓰임 받았던 모세와 사무엘도 친부모 슬하에서 자라지 못한 고아였습니다. 그런데 피에르 박사는 이런 고아들이 세계를 주도했다고 말하면서, 이는 역경이 인물을 만들어 내는 것으로, 사람은 역경을 돌파해 가면서 누구도 얻지 못하는 놀라운 힘을 얻게 된다고 말했었습니다. 역경이 다가오지 아니하면 언제나 인간적으로 생각하고 인간적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역경이 다가오고 내가 갈 길이 없을 때는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 편에서 하나님적으로 생각하면 새로운 인생의 돌파구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스위스의 정신의학자인 폴 투르니에는 “슬픔이 크면 클수록 그 슬픔이 만들어내는 창조적 에너지는 더 크다.” 굉장히 슬프면 그 슬픔을 이겨낼 수 있는 창조적 에너지가 마음속에서 생겨나는 것입니다. 사람은 도전에 대한 응전을 합니다. 우리가 도전 당하면 거기에 대해서 응전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언제나 우리가 생각해야 될 것은 우리는 홍해수를 가르는 하나님이 같이 계신다. 그것을 잊어버려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홍해수를 가르는 하나님이 나의 사업에도 같이 계시고 나의 생활에도 같이 계시고 우리 가정에도 같이 계시고 우리 국가에도 같이 계신다. 그러므로 홍해수를 가른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이 생각하는 것처럼 생각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홍해수를 가르는 하나님을 생각하고 그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차원에서 모든 것을 계획하고 생각해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람이 마음속에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면 그 영속에 계신 하나님의 성령이 그를 통해서 여러 가지 새로운 계시도 주고 묵시도 주고 인도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부정적인 생각을 하면 아예 문을 딱 닫아 버리는 것입니다. 영적인 문을 닫아 버리기 때문에 아무런 계시도 인도도 없기 때문에 갈 길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어려움을 당할 때 아예 인간적인 차원에서 생각하면 절망이다. 안 된다. 끝났다고 하면 하나님의 역사에 대해서 문을 닫아 버리는 것입니다. 아무 일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려운 일을 당할 때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차원에서 기적이 일어날 차원에서 믿음의 차원에서 생각하고 기도하면 계시도 오고 묵시도 오고 인도도 오고 문제해결의 방법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일을 당할 때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말아야 되는 것입니다. 자동차를 운전할 때 전진 기어를 넣으면 차가 앞으로 나가고 후진 기어를 넣으면 차가 뒤로 갑니다. 방향은 기어에 따라 다르지만 엔진의 힘은 똑같이 사용합니다. 앞으로 나가는 엔진이 힘이나 뒷걸음치는 엔진이나 엔진의 힘은 같습니다. 여러분이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생각의 에너지나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에너지나 에너지는 똑같습니다. 똑같은 에너지를 쓸바에야 긍정적으로 사용해야지요. 그러면 우리에게 긍정적인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홍해수를 걷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차원에서 생각하는 것을 훈련시키기 시작한 것입니다. 우리 예수 믿고 난 다음에 우리는 하나님의 차원에서 생각하는 훈련을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훈련 받지 않고 그냥은 안 됩니다. 왜냐하면 인간으로 태어나서 너무나 오랜 세월동안 인간적인 차원에서 살았기 때문에 무엇을 보더라도 인간의 이성과 감정과 감각을 통해서 생각하고 하나님을 믿는 믿음과 기적의 차원에서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훈련을 시키는 것입니다. 그들이 홍해를 건너서 사흘 길을 갔는데 물이 없어요. 목이 말라 죽을 지경입니다. 그런데 연못물을 발견했는데 물이 써서 마실 수 없습니다. 자, 문제가 생겼습니다. 인생에 쓴물이 생겼습니다. 문제를 어떻게 해결 합니까? 여기에서 인간적인 차원에서 생각할 것이냐, 하나님 차원에서 생각할 것이냐 훈련을 시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은 모두다 원망을 했습니다. 인간적인 차원에서 쓴물을 마실 수가 없으니까 하나님을 원망하고 모세를 원망하고 목이 말라 죽겠다고 고함을 쳤습니다. 그런데 모세만은 하나님의 차원에서 생각했습니다. 틀림없이 쓴물이 있으면 달게 하는 길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하나님을 바라보니까 그 연못 옆에 나뭇가지를 지시한지라 나뭇가지를 꺾어 물에 던지니 물이 달아졌습니다. 물을 다 마셨습니다. 인간적 차원에서 생각하는 사람들은 전부 낙심하고 탄식했지만 하나님 차원에서 생각하고 기적을 기대하고 믿음의 차원에서 기도한 모세를 위해서는 하나님이 이미 쓴물을 달게 만들어 놓을 방법을 연못가에 나무를 심어서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출애굽기 15장 23절로 25절에 “마라에 이르렀더니 그 곳 물이 써서 마시지 못하겠으므로 그 이름을 마라라 하였더라 백성이 모세에게 원망하여 이르되 우리가 무엇을 마실까 하매 모세가 야훼께 부르짖었더니 야훼께서 그에게 한 나무를 가리키시니 그가 물에 던지니 물이 달게 되었더라 거기서 야훼께서 그들을 위하여 법도와 율례를 정하시고 그들을 시험하실새”고 말한 것입니다.
그 다음에 이제는 광야를 지나는데 한 일주일쯤 지나니까 그들이 애굽에서 사온 모든 음식이 다 고갈되었습니다. 보따리에다 밀반죽을 해서 걸머지고 왔는데 다 먹어버리고 먹을 음식이 없습니다. 한두명도 아닌 3백만 대국민입니다. 그러니까 그들이 인간적으로 생각할 때 자, 농사도 지을 곳도 없고, 거둘 음식도 없고, 잡아먹을 짐승도 없고, 나무가 있어 풀이 있냐, 과일이 있냐 절망입니다. 인간적인 차원에서 생각할 때 절대절망입니다. 그러니까 이 시험에서 또 낙제를 한 것입니다. 그들이 인간적인 절대절망은 하나님의 희망의 길인 것을 알아야 되는데 그것을 모르고 또 하나님께 원망하고 모세를 원망했습니다. 우리가 뭘 먹고 사느냐? 이제는 우리는 다 굶어죽었다. 그때 모세는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하나님 차원에서 생각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3백만 민족을 애굽에서 이 광야로 이끌어 내실 때는 계획이 계시고 하나님이 기적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했지 계획 없이 주먹구구식으로 데려오지는 아니하셨을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 우리에게 먹을 것을 주옵소서.” 하나님이 당장 대답해 주었습니다. 그때부터 매일같이 만나가 임한 것입니다. 만나를 그들은 거두워서 하루 삼시세끼 영양실조 없이 잘 먹었습니다. 하나님 만나에 온갖 음식이 영양이 풍부하게 들어 있어서 만나만 먹어도 건강하고 튼튼하고 여행을 할 수 있도록 그렇게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출애굽기 16장 14절로 15절에 “그 이슬이 마른 후에 광야 지면에 작고 둥글며 서리 같이 가는 것이 있는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보고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여 서로 이르되 이것이 무엇이냐 하니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이는 야훼께서 너희에게 주어 먹게 하신 양식이라”
출애굽기 16장 35절에 “사람이 사는 땅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 자손이 사십 년 동안 만나를 먹었으니 곧 가나안 땅 접경에 이르기까지 그들이 만나를 먹었더라”
보십시오. 하나님이 3백만 이스라엘 백성을 40일도 아닌 400일도 아닌 40년 동안 먹였습니다. 엄청난 하나님이 아닙니까? 여러분 인생 일생을 살면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그것 때문에 걱정하고 있다면 하나님 보기에 민망하지 않습니까? 인간적 차원에서 생각하니까 하나님 차원에서 생각하니 3백만 이스라엘을 40년 동안 굶기지 않고 먹이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안줄 리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순종하고 믿고 나가는 사람을 하나님이 결코 버리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도 이스라엘 백성은 또 시험에 낙제했습니다. 또 물도 그렇습니다. 가다가 물이 없어 목이 마르니까 또 원망하고 불평을 말한 것입니다. 문제가 생기면 인간 편에서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 편에서 생각하고 인간의 이성과 감각을 통해서 생각하지 말고 믿음과 하나님에 대한 기적을 가지고 생각해야 되는데 이스라엘이 인간적인 생각을 하니까 불평을 합니다. 믿음으로 생각하면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물이 없어서 목이 말라 죽겠다고 고함을 치니까 모세가 하나님께 믿음의 차원에서 하나님 차원에서 생각하고 기도하니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출애굽기 17장 6절에 “내가 호렙 산에 있는 그 반석 위 거기서 네 앞에 서리니 너는 그 반석을 치라 그것에서 물이 나오리니 백성이 마시리라 모세가 이스라엘 장로들의 목전에서 그대로 행하니라”
시편 105편 41절에 “반석을 여신즉 물이 흘러나와 마른 땅에 강 같이 흘렀으니”다.
반석에서 물이 강같이 흘러나온 것입니다. 도저히 생각할 수 없습니다. 이런 마른 땅에서 마른 반석에서 물이 나오되 그냥 나오는 것이 아니라 큰 시냇물같이 콸콸 흘러나온 것입니다. 하나님의 차원에서 생각하고 믿음의 차원에서 나가면 이런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적 차원에서 생각하고 감각적 차원에서 생각하고 불가능 하다고 생각하고 원망하고 불평하고 탄식하면 광야에서 목말라 죽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또 시험을 했는데 메추라기 시험인 것입니다. 백성들이 와서 모세 앞에서 통곡을 하고 울면서 “우리 애굽에서 고기 가마 곁에 있을 때 죽었으면 좋았을 것을.. 우리가 종살이하고 괴로웠지만 고기는 먹을 수가 있었어. 고기 가마에 고기를 삶아서 먹었지 않았느냐. 광야에 나와서 만나만 먹고 고기를 못 먹으니 도저히 못살겠다. 고기를 달라. 고기를 달라.” 고함을 쳤습니다. 너무 국민들이 고함을 치고 흥분을 하고 탄식을 하기 때문에 모세의 마음도 흔들렸습니다. 하나님 중심으로 생각하고 믿음 중심으로 생각하는 모세의 마음도 흔들렸습니다. 그래서 모세가 하나님께 말씀드리기를 “하나님이여 이 백성이 이 광야에서 고기를 달라 하는데 온 바다에 물고기를 다 건진들 이 3백만 백성들을 어떻게 다 먹게 하겠으며 온 산천에 들에 있는 짐승을 다 잡은들 3백만을 어떻게 먹게 하겠습니까?” 그러자 하나님께 꾸중했습니다. “모세야! 내 팔이 짧아졌느냐? 네가 고기를 하루를 먹을 것이 아니라 코에서 고기 냄새가 날 때까지 먹게 하겠다.”
민수기 11장 31절로 32절에 “바람이 야훼에게서 나와 바다에서부터 메추라기를 몰아 진영 곁 이쪽 저쪽 곧 진영 사방으로 각기 하룻길 되는 지면 위 두 규빗쯤에 내리게 한지라 백성이 일어나 그 날 종일 종야와 그 이튿날 종일토록 메추라기를 모으니 적게 모은 자도 열 호멜이라 그들이 자기들을 위하여 진영 사면에 펴 두었더라”
하나님이 메추라기를 바람을 불어서 모아오니 메추라기가 팔락팔락팔락 손 잡히는데서 날라 다녀요. 하루 종일 잡았습니다. 밤새도록 잡았습니다. 그 이튿날도 또 잡았습니다. 한두마리 잡은 것이 아니라 수 만 마리를 잡았습니다. 그것을 뜯어 가지고서 먹을 대로 먹고 그 다음에 또 말려서 포를 만들어서 먹었습니다. 얼마든지 먹을 수 있게 만들어 준 것입니다. 하나님 편에서 생각하고 하나님 차원에서 생각했으면 하나님도 기뻐하고 자기들도 기쁠 것인데 언제나 인간의 차원에서 생각하고 인간의 감각과 인간의 생각으로써 원망하고 불평하므로 하나님을 마음 상하게 하고 화나게 만든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이 아무리 훈련을 시켜도 훈련을 받지 못하는 비극이 있는 것입니다.
미국의 유명한 수정교회의 로버트 슐러 목사님의 글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보고 “절벽 가까이 오라.” 가까이 가니까 “더 가까이 오라” 더 가까이 와서 절벽 끝에 흔들흔들 하니까 하나님이 자기를 확 밀어 버렸습니다. 자기가 절벽에 고꾸라져 떨어집니다. 떨어지면서 갑자기 발버둥을 치니까 날개가 달린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떨어지다 말고 날기 시작한 것입니다. 안 떨어졌으면 여태까지 날개가 있는 것을 몰랐는데 그 날개는 믿음의 날개입니다. 고난을 당하기 전에는 믿음이 있는 것을 몰랐습니다. 그저 믿음 없이 인간적인 차원에서 살았는데 고난을 당하여 절벽에 떨어지자마자 죽으면 낙동강이 되는 그런 처지에서 비로소 믿음을 사용해서 믿음의 차원 하나님의 차원에서 살게 되어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간증을 한 것입니다. 맞습니다. 우리에게 여러 가지 시험과 환난이 다가오는 것은 믿음을 사용하는 법을 가르치기 위한 것입니다. 인간적인 차원에서 생각하지 말고 고난을 통해서 인간적 차원에 갈 길이 없을 때 믿음의 차원으로 기도해서 하나님이 기적을 가지고 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믿는 사람이 되어서 일반 사람들과는 다른 것입니다. 하나님은 크고 작은 벼랑을 우리 생활 가운데 보내셔서 하나님 차원에 훈련을 받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훈련을 통하여 우리의 생각을 인간의 차원에서 하나님 차원으로 하나님의 생각으로 바꿔서 담대한 믿음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다윗이 골리앗을 대하여 싸울 때 어땠습니까? 구척장신에 무장을 하고 나온 골리앗을 다윗은 목자의 옷을 입고 목자의 지팡이와 물맷돌을 가지고 나왔습니다. 골리앗이 보니 정말 사람 웃기는 일입니다. “네가 나를 개로 알고 지팡이를 가지고 나왔느냐? 내가 너를 죽여서 너의 고기로 공중의 새의 밥과 땅의 기는 짐승의 밥으로 주겠다.” 그때 다윗이 인간적으로 생각했으면 기절초풍을 하고 달아났을 것입니다. 임금 사울 왕과 그 군대들은 인간적인 차원에서 생각하기 때문에 골리앗만 나오면 사족을 못 쓰고 다 엎드렸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하나님 차원에서 생각하니까 그가 담대하게 말했습니다. “너는 창과 칼과 단창을 의지하고 나오냐? 나는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만군의 야훼의 이름으로 나오노라. 내가 오늘날 너를 죽여서 너의 고기로 공중의 새와 땅의 짐승의 밥으로 만들어 줄 것이다. 전쟁은 창과 칼에 달려있지 않고 하나님께 달려있다. 하나님께서 너를 내게 넘겨주리니 내가 오늘 너를 죽여 천하에 하나님 계신 것을 알게 하겠다.” 와~ 다윗은 몸은 작아도 믿음은 하나님 차원에서 생각하니까 믿음은 거인이었습니다. 그러나 골리앗은 육은 거인이었지만 믿음이 없기 때문에 아예 메뚜기 새끼 같았습니다. 다윗이 달려가면서 물맷돌을 들려서 던지니까 골리앗의 이마에 박혀서 땅에 쓰러졌습니다. 가서 골리앗의 칼을 가지고서 골리앗의 목을 베니 블레셋 사람들이 다 기절초풍하고 도망을 치고 패배를 한 것입니다. 여기에 보십시오. 차원이 다릅니다. 골리앗의 차원은 감각적인 차원, 인간적인 차원으로 생각하고 다윗은 믿음의 차원, 기적의 차원, 하나님의 차원에서 생각한 것입니다. 그리고는 내용적으로 보면 다윗은 믿음의 거인이요, 골리앗은 믿음에는 메뚜기였습니다. 오늘날 여러분, 하나님의 차원에서 생각할 수 있도록 믿음의 훈련을 받으면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큰 능력과 영광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3. 가데스 바네아에서의 낙제
이스라엘 백성은 마지막 시험에 낙제하고 만 것입니다. 하나님은 광야를 지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훈련하고 하나님의 차원으로 생각하고 살도록 가르치셨습니다. 이제 가나안 땅에 들어오기 위해서 가데스 바네아에서 정탐꾼을 보내어서 정탐을 하게 한 것입니다.
민수기 13장 31절로 32절에 보면 “그와 함께 올라갔던 사람들은 이르되 우리는 능히 올라가서 그 백성을 치지 못하리라 그들은 우리보다 강하니라 하고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그 정탐한 땅을 악평하여 이르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그 거주민을 삼키는 땅이요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우리는 그들이 보기에도 메뚜기 같다고 말한 것입니다. 12명의 정탐꾼을 40일 동안 가나안 땅을 정탐하고 오게 했더니 그중에 10명은 완전히 인간적인 차원에서 감각적인 차원에서 모든 것을 보고를 했습니다. 광야에서 그렇게 지나가면서 교훈을 배우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 중에 두 명은 민수기 14장 8절로 9절에 여호수아와 갈렙은 “야훼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다만 야훼를 거역하지는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의 먹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야훼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
하나님 차원에서 생각한 것입니다. 하나님 차원에서 생각하지 않고 인간적 차원으로 행할 때는 성은 높고 거기 사는 사람들은 네피림의 후손 아낙 자손 대장부라. 우리가 비교하면 우리는 메뚜기 같더라. 그랬는데 하나님의 차원에서 생각하는 사람은 그들은 우리 밥이라. 그들은 보좌가 이미 떠나가 버렸고 언제든지 우리 손에 달려있다. 우리 들어가서 점령하자. 하나님이 같이 계시면 못할 일이 어디 있느냐. 똑같은 사건을 볼 때 인간적인 차원에서 보면 부정적으로 말하고 하나님 차원에서 보면 긍정적으로 말했습니다. 그러니 온 이스라엘 백성이 부정적인 말을 하고 보고를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함께 울고 탄식을 하고 그들 장관을 세워서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했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돌로 쳐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 때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그 10명을 다 재앙을 받아 죽어 버리고 그 10명을 따라가던 사람들은 전부 광야로 돌이켜 40년 동안 방황하면서 다 죽어 버리고 하나님의 차원을 따라서 생각한 여호수아와 갈렙은 살아서 후손을 데리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훈련을 우습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오늘날 경제 환난이 다가온 것도 하나님이 세상을 시험해 보시는 것입니다. 네가 인간적인 차원에서 생각할 것이냐. 하나님 차원에서 생각할 것이냐. 하나님의 뜻을 순종할 것이냐, 인간의 뜻을 순종할 것이냐. 이런 것을 시험해 보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언제나 인간적인 차원에서 생각하면 인간적인 차원에서 그칩니다. 하나님을 따라 생각해야 되는 것입니다.
잠언서 4장 23절에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마음을 인간의 차원에서 하나님의 차원으로 돌려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긍정적이고 적극적이고 창조적인 생각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사야 55장 8절로 9절에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야훼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
우리 인간적인 차원의 생각과 하나님 차원의 생각은 완전히 틀립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읽고 기도하고 성령의 음성을 들어 하나님의 차원에서 생각해야 되는 것입니다. 인간적인 차원에서 생각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차원을 따라 꿈을 꿔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다 꿈을 꾸어야 되는 것입니다. 꿈이 없는 백성은 망합니다. 마음에 꿈을 꾸어야 그 꿈이 이루어지는 것이지요. 꿈을 꾸지 아니하면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 마음에 꿈은 우리 마음에 소원이 꿈으로 이루어지는 것 아닙니까? 다윗은 분명한 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가 들에서 양을 칠 때 곰이나 사자가 양을 빼앗아 가면 그 입에서 양 새끼를 빼앗아서 달려들면 주먹을 들고 하나님 이름으로 쳐 죽였습니다. 곰과 사자를 쳐 죽인 그 기억이 있기 때문에 사울에게 말하기를 “내가 아버지의 양을 칠 때 곰과 사자가 공격하면 그를 쳐서 죽였는데 저 골리앗은 곰과 사자보다 못한 인간이기 때문에 능히 죽인다.” 그 마음에 곰과 사자가 비교해서 골리앗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마음에 그 꿈이 확실히 있었기 때문에 그는 담대했습니다. 여러분도 꿈을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우리 한국은 그렇지 않지만 외국 사람들은 12월 31일이 되면 친한 사람들끼리 모여서 파티를 하고 명년에 어떠한 일이 생길지 우리 소원을 적자. 봉투에다가 소원을 적어서 봉투에 넣어서 딱 봉해서 명년 12월 31일에 봉투를 딱 뜯어 봅니다. 그런데 친구들이 다 적어서 봉투에 넣고 붙이고 12월 31일 다시 모였습니다. 봉투를 열어 보니 어떤 사람은 ‘더 행복해지기를 바란다.’고 했는데 그대로 되었어요. ‘더 잘살기를 바란다.’ 되었어요. ‘새 집으로 이사 가기를 원한다.’ 되었어요. 그런데 다른 봉투는 봉투주인이 참석을 안했습니다. 그 봉투를 뜯어 보니까 ‘명년은 나에게 일생일대에 중요한 해이다. 왜냐하면 우리 조상들이 60을 넘긴 적이 없는데 명년에는 내가 60이 되는 해이다. 그래서 내가 명년에 못살지 모르겠다.’ 그런데 진짜로 그날 못살고 참석 못했습니다. 똑같은 꿈을 가질 때 왜 60에 조상들이 죽었으면 자기는 70, 80년을 살 수 있다는 꿈을 가지지 못합니까? 꿈이 인생을 좌우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꿈을 마음속에 분명히 가져야 되는데 하나님을 따라 꿈을 가져야지 사람을 따라 꿈을 가지면 안 되는 것입니다. 네 입을 넓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 우리가 채우는 것 아닙니다. 하나님이 채우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꿈을 우리가 마음속에 품는 것이 입을 넓게 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꿈을 품고 늘 그 꿈을 보고 있으면 하나님의 기적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나는 마귀가 와서 ‘너 오래 못살고 죽을 것이다.’ 그런 말을 자꾸 합니다. 나에게 자꾸 와서 해요. 속삭여요. ‘너 힘도 없고 이제는 기운도 다 빠지고 이제는 오래 못살 것이다.’ 그러나 마귀가 도저히 빼앗아가지 못할 꿈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할아버지가 92살까지 살았습니다. 아버님이 94살을 살았습니다. 어머님이 94살을 살았습니다. 맏아들인 나는 얼마까지 살아야 되겠습니까? 아무리 꿈을 안가지려고 해도 안 가질 수가 없어요. 할아버지 “오냐 내가 92살 살았다.” 아버님 “94살 살았다.” 어머니 “94살 살았다.” “나는요?” “90살은 살아야지.” 그런 꿈을 가지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언제나 내일은 오늘보다 나아지며 금번 달은 명년 달보다 나아지며 장차는 현재보다 나아질 수 있는 꿈을 마음에 품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따라 꿈꾸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2장 13절에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소원이 바로 꿈입니다. 꿈을 통해서 하나님이 역사하는 것입니다.
시편 81편 10절에 “나는 너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야훼 네 하나님이니 네 입을 크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 하였으나”
여러분이 입을 딱 다물고 있으면 아무리 채우려고 해도 채울 수가 없는 것입니다. 입을 넓게 열어요. 주위 환경이 아무리 어두워도 하나님 앞에서 큰 꿈을 가지고 있으면 하나님이 채워 주겠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우리는 이 세상의 인간을 따라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을 따라 믿어야 돼요. 하나님을 따라서 기적이 일어날 것을 믿어야 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0장 38절에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믿음으로 살아야지 자꾸 어려움을 당할 때 뒤로 물러가면 안 되는 것입니다. 마귀는 와서 우리에게 유혹하고 협박하고 설득시켜서 낙심을 하고 뒤로 물러가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히4:12)는 힘이 있기 때문에 말씀을 의지하고 자꾸 믿고 나가라고 말한 것입니다. 앞으로 나가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17)고 항상 설교를 듣고 말씀을 읽고 그리고 거기에서 하나님을 믿고 눈에는 아무 증거 안보이고 귀에는 아무 소리 안 들리고 손에 잡히는 것 없어도 주여 믿습니다. 믿음대로 될지어다. 믿음으로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은 믿을 것이 없어요. 사람을 믿을 수 있습니까? 누구를 믿고 우리 인생이 삽니까? 이 세상에 믿을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그러나 예수 믿는 사람은 아버지 하나님이 사랑과 예수님의 은혜를 믿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저 하늘이 무너지고 이 땅이 꺼져도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은혜는 변하지 않습니다. 내가 이 예수님을 모시고 이 하나님 아버지를 아버지로 섬기고 사는 이상 나는 믿음을 가질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같이 계신데 누가 나를 헤칠 수가 있는 것입니까?
히브리서 11장 6절에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반드시 그가 살아계시고 내가 그를 간절히 찾으니까 결국에는 상을 주신다. 조만간 상을 주신다. 어떤 때는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반드시 하나님이 상 주신다는 긍정적인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따라 믿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따라 말해야 되는 것입니다. 인간을 따라 말하면 낭패와 실망을 당하고 맙니다. 하나님을 따라 긍정적으로 말해야 되는 것입니다.
잠언 18장 21절에 “죽고 사는 것이 혀의 힘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혀의 열매를 먹으리라”
죽고 사는 것이 혀의 힘에 달렸다. 혀에 힘이 없는 것 같지요. 그러나 여러분 말하는 대로 여러분 인생이 그리로 가는 것입니다. 큰 배의 밑에 있는 키의 방향을 따라 배가 항구로도 가고 대양으로 나가는 것처럼 우리 인생은 혀가 키가 되어서 혀가 움직임에 따라서 실패도 하고 성공도 하고 승리도 하고 패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을 잘 해야 돼요.
민수기 14장 28절에 “그들에게 이르기를 야훼의 말씀에 내 삶을 두고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겠다고 한 것입니다. 말을 잘못 듣게 하면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내가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네가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마 16:19)라는 것은 말로써 매고 푸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결론>
태어난 그대로의 인간은 교육이 없든 있든 인간의 차원을 건널 수가 없습니다. 이 세상에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인간의 차원에서 생각하지 거기서 뛰어 넘을 수 없습니다. 아무리 교육을 많이 받아도 인간적인 차원에서 감각적으로 생각하고 감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차원에서 살기 위해서는 우리가 예수 믿고 하나님 생명을 받고 하나님의 영의 감동을 받게 되면 이제는 인간적인 차원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사는 하나님의 차원에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는 하나님과 함께 살아요. 여러분 과거에는 여러분 혼자 살았지만 이제 여러분 속에 하나님이 와서 계신 것입니다.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요 14:20)고 말씀한 것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살므로 내 마음대로 생각하면 안돼요. 하나님과 함께 생각해야 돼요. 하나님과 함께 꿈꿔야 되고 하나님과 함께 믿어야 되고 하나님과 함께 말해야 되는 것입니다. 내 마음대로 말해 버리면 안돼요. 부부간에 같이 살 때도 어떤 일이 있으면 서로 의논해가지고서 같은 생각, 같은 말, 같은 행동을 해야지 남편 따로 말하고 부인 따로 말하고 하면 콩가루 집안이 되는 것입니다. 내 인생이 콩가루 집안이 되려면 내 마음대로 말하십시오. 내가 하나님 말씀을 생각하고 하나님 말씀대로 믿고 하나님 말씀대로 행하면 하나님과 내가 같이 하기 때문에 언제나 기적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늘나라를 볼 수 없다”고 했는데 예수 믿고 거듭나야 하나님이 계시고 하늘나라를 볼 수 있게 되고 우리는 하나님의 차원에서 생각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적인 차원에서 하나님 차원으로 넘어가는 생활 이것이 하나님이 바라는 것이고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아무리 교육을 해도 인간적인 차원에서 하나님 차원으로 넘어가지 못했습니다. 여러분에게 여러 가지 시험과 환난이 다가오는 것은 인간적인 차원에서 하나님 차원으로 넘어가라고 훈련시키는 것입니다. 아무리 해도 배우지 못하고 원망하고 탄식하고 인간적 차원에 떨어지면 나중에는 하나님이 버리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일이 있더라도 하나님 말씀을 부지런히 읽고 듣고 인간적인 차원을 뛰어 넘어 하나님의 차원으로 생각하고 꿈꾸고 말하고 믿고 나가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다같이 고개 숙여 기도드리겠습니다.
<기도>
사랑이 많으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
우리는 자기가 속한 그 위치에서 그 차원에서 모든 것을 보고 생각하고 말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고 성령이 우리 속에 있으므로 하나님의 차원에서 생각하고 말하고
꿈꾸고 행하게 도와주시옵소서. 하나님의 기사와 이적이 늘 마음속에 나타나게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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