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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히11: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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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한태완 목사 |
참고 : | http://je333.com |
믿음과 의심
본문: 히 11: 1∼6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히 11:1)
옛날 어느 곳에 오래된 고목이 한 그루 서 있었습니다. 이 큰 나무 위에는 매들이 날아와 둥지를 짓고 새끼들을 기르고 있었고 나무 밑에는 산돼지들이 새끼를 기르며 살고 있었습니다. 매들이 떨어뜨리는 나뭇잎과 찌꺼기들은 밑에 있는 돼지들의 먹이가 되었고 돼지들의 찌꺼기는 매의 먹이가 되었으므로 이들은 서로 공생하며 평화롭게 살았습니다. 이들의 사이가 샘이 난 여우가 이들을 갈라놓기 위한 한 가지 꾀를 생각해냈습니다. 여우는 곧장 매에게로 달려가 "나무 밑에 있는 돼지들은 너희 매를 잡아먹으려고 매일 나무 밑둥을 갉아먹고 있단다. 얼마 못 가서 나무가 쓰러지면, 네 새끼들은 떨어져서 돼지의 밥이 될 것이다. 이따금 나무가 심하게 흔들리지 않던? 그게 바로 나무가 넘어 지려는 징조야!" 하고 말했습니다.
이번에는 돼지에게로 달려가서 "나무 위에 있는 매들은 너희 돼지 새끼들을 잡아먹으려고 항상 기회만 노리고 있단다. 어미 돼지가 먹이를 구하러 멀리 가면 그때 새끼를 잡아먹기 위해 이따금 어미 매가 내려와서 너희 집을 기웃거리며 먹이를 찾지 않던? 그게 바로, 매가 새끼를 노릴 때란 말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이때부터 매와 돼지의 생활은 서로를 믿지 못하는 생활이 되었습니다. 매는 모이를 구하러 나갈 수가 없었습니다. 혹시 나간 사이에 나무가 쓰러지면 새끼들이 돼지에게 잡혀 먹힐 것을 생각하니 꼼짝 못하고 항상 새끼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이는 돼지도 마찬가지여서 먹이를 구하러 가지 못하고 매와 돼지는 서로 경계하면서 새끼들만 지키고 있었습니다. 결국 매도 돼지도 굶주려서 죽고 말았습니다. 사탄은 우리의 마음에 불신을 심어주어 우리를 파멸시킵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음을 가지고 주님을 의지하면 우리의 삶은 풍성해집니다.
우리에게 의심이 생기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첫째, 사단의 유혹과 불 신앙 때문입니다.(눅1:18- 20)
본래 의심은 사탄이 하와의 마음속에 심어놓은 독초였습니다. 이것이 들어가자 하나님을 의심하기 시작했고 결국 선악과를 따먹게 되었습니다. 물론 의심이란 때로는 진리 탐구의 자극제가 되기도 하지만 신앙에서는 큰 장애물이 됩니다. 왜냐하면 의심으로 인해 절망에 빠지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스피링 부인은 “의심은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지옥”이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의심은 지식의 현관문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믿음의 장애물이 되고 있습니다. 다음은 불신인데 이 불신은 거짓말의 믿음이요, 지옥으로 인도하는 안내자입니다. 불신은 개인적으로는 실패의 원인이 되며 사회적으로는 협동을 깨는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중요한 것은 의심과 불신 뒤에는 항상 사탄이 도사리고 있다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이 의심과 불신을 통해 사탄이 인간을 천국으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길을 차단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14장에 보면 밤에 예수님께서 물위로 걸어가신 사건이 나옵니다. 이때 베드로가 자신도 물위로 걸어가기를 간구했습니다. 주님은 허락했습니다. 처음에는 베드로가 믿음으로 물위를 걸었으나 나중에는 바람을 보고 무서워하며 의심하게 됐을 때, 물에 빠졌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베드로를 향해 “왜 의심하느냐”고 책망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에서는 의심을 경계합니다. 그러나 뉴턴이 ‘왜 사과가 나무 밑으로 떨어질까?’라는 의심을 하지 않았더라면 만유인력 법칙은 발견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따라서 세상에서의 진리 탐구에는 의심에서 시작해야 하지만 영의 세계는 믿음에서 시작한다는 차이점이 있습니다.
문제는 불신입니다. 지금 세상은 온통 불신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부부가 서로 불신하고 있고 목회자와 성도들이 서로 불신합니다. 정부와 국민도 불신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불신이 있는 곳에는 놀라운 역사도 없고 연합도 없으며 사랑도 없습니다. 오직 분열과 미움, 실패가 따를 뿐입니다. 그러므로 사탄의 불신이 더 이상 번지지 못하도록 막아야 합니다. 그것은 주님께 대한 믿음을 통해 사람들간의 신뢰를 회복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창3:4)
둘째, 체험이 없기 때문입니다.
알프레드 화이트헤드 교수는 영국의 대 철학자이며 위대한 수학자입니다. 그는 철학자 버드란트 러셀의 스승이기도 하며 러셀과 함께 여러 책을 저술하기도 한 분입니다. 화이트헤드는 교육가의 집안에서 태어났는데 그 집안은 대대로 기독교를 믿어오던 가문이었습니다. 그는 젊은 시절에 철학과 수학에 심취하면서 신앙에 대해 깊은 회의에 빠지게 되었고 급기야는 대대로 이어오던 신앙을 버리고 교회와도 담을 쌓고 살아갔습니다.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든 어느 날, 그 지방에 엄청난 폭설이 내렸습니다. 외출 중이었던 그는 서둘러서 집으로 돌아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디선가 가냘픈 노래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습니다. 눈 구덩이에 빠져 있는 늙은 할머니가 부르는 노래였습니다. 서둘러 눈덩이에서 할머니를 건져주었습니다. 할머니는 화이트헤드에게 정말 고맙다고 거듭 감사하면서 물었습니다.
"내게 이런 큰 은혜를 베풀어주셨으니 당신은 분명 신앙심이 깊은 분이겠지요. 어느 교회에 출석하고 계십니까?"
화이트헤드는 약간 겸연쩍은 듯 머리를 글쩍이며 대답했습니다.
"아뇨, 저는 교회에 다니지 않습니다. 신앙심도 없고요."
그러자 노파는 의외라는 듯이 "아니, 다 늙은 사람이 어쩌자고 아직도 예수님을 믿지 않는단 말이오! 그러다가 나처럼 뜻밖의 사고를 당하면 어떻게 하려고 그러시오? 나는 저 눈 구덩이 속에서 죽을 것이라 생각하고 계속 열심히 찬송을 부르고 있었다오" 하고 말했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그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리고는 생각했습니다.
'도대체 무엇이 저 할머니로 하여금 저토록 두려운 죽음 앞에서 큰 확신을 갖고 찬송을 부르게 하는가? 내가 탐구하고 있는 철학이나 수학, 아니 어느 학문이라도 저 할머니가 갖고 있는 저런 확신을 줄 수 없지 않는가?'
그 때부터 그는 자기가 탐구해 온 학문에 대해 회의하기 시작했습니다. 말하자면, 그가 젊어서는 신앙에 대해 회의하였으나 늙은 이제는 그토록 자신 만만해 하던 학문에 대해 회의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는 버렸던 신앙을 다시 찾기로 하고 교회에 출석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잃었던 확신을 찾게되었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눅24:38)
셋째, 무지하고 사실을 모르기 때문입니다.(요13:22, 행25:20)
어떤 사람이 공중 목욕탕에 갔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없어서 혼자 목욕을 하고 있었습니다. 얼마후 한 사람이 들어왔습니다. 먼저 들어와 있던 사람이 나중에 들어온 사람을 흘끔 보더니 슬그머니 나가 자기 옷장을 열고 지갑과 시계를 확인하고 돌아왔습니다. 그러자 나중에 들어온 사람도 먼저 들어와 있던 사람을 곁눈질로 본 후 나가 자기 소지품들이 잘 있는지 확인하고 들어왔습니다. 잠시 정적이 흐른 후, 먼저 들어와 있던 사람이 나중에 들어온 사람에게 말을 건넸습니다.
“우리 서로 등의 때를 닦아줄까요?”“그러시죠”
“혹시 예수를 믿으십니까?”“물론입니다. 저는 장로랍니다”“아이구! 이거 반갑습니다. 나는 목사입니다”
비슷한 이야기입니다. 만주 일대를 돌아다니며 교회를 순회하는 채필근 목사님은 가끔 선교부 돈을 가지고 각 교회에 나누어주곤 했습니다. 한번은 돈을 잔뜩 넣고 순회하는 도중 외딴 곳에 이르러 객주 집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손님들이 많아서 둘이 묵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서로 잠자리에 누웠으나 잠을 잘 수가 없었습니다.
`혹시 저놈이 내 가 잠든 사이에 돈을 훔쳐가지 않을까'생각 때문이었습니다. 두 사람은 뜬눈으로 밤을 새우고 난 다음날 주인이 차려다 준 상에서 겸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둘은 할 수 없이 서로 마주 앉아 식사기도를 하고 식사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마주 앉았던 사람이 "선생님, 예수 믿는 어른입니까?" 해서 "네, 저는 채필근 목사입니다." 라고 했습니다. 그는 깜짝 놀라면서 "저는 0 0 교회 장로입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지혜는 이 세대의 관원이 하나도 알지 못 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고전2:8)
넷째, 선입관 때문입니다.
외국에 어떤 사람이 신문을 보니까, 새 캐딜락 자동차가 50불에 판매한다는 광고가 신문에 났습니다. 60년대 당시에 그 차는 5,000 불이 넘었습니다. 보통 차가 1,000 불 정도였으니까 캐딜락은 상당히 비싼 차였습니다. 그러므로 보통 생각하기를 "이거 광고가 잘못 난 거겠지... 5,000 불인데 공(0)자를 잘못 빼놓고 났으니 다음 날에는 분명히 정정해서 나올 꺼야!" 하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다음날 보아도 50불이고, 그 다음날 보아도 50불이었습니다. 똑똑한 사람들은 신문사만 원망했습니다. "이거 광고를 어떤 부서에서 맡았는지 틀린 것도 모르고 매일 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일주일 후에 다시 신문에 났는데, 광고로 난 것이 아니라 큰 기사로 났습니다. 캐딜락이 50불에 팔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깜짝 놀라서 기사를 읽어보니까,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어느 콜롬버스에 있는 회사 사장이 죽으면서 유언을 했습니다. 내가 죽으면 회사는 누구에게 주고, 집은 누구에게 주고... 하면서 다 정해 놓았는데, 최근에 산 비싼 고급 승용차인 캐딜락은 팔아서 자기 '걸 프랜드' 아무개에게 주라고 유서를 남긴 것입니다. 이것을 부인이 보고서 얼마나 화가 나는지, 자기 몰래 걸 프랜드를 사귄 것도 못 견딜일인데 오천불짜리 자동차를 팔아서 그 여자를 주라니..... 이거, 여자의 마음으로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유서대로 안 하면 안되기 때문에 팔아서 주기는 주어야 하겠는데 5,000불 주기는 아까우니까... 생각하고 생각하다가 그 여자도 화가 나라고 50불에 팔아서 준 것입니다. 똑똑한 사람들은 못 사고, 어떤 바보 같은 사람이 그 기사를 그대로 믿고 산 것입니다.
"일어나 내려가 의심치 말고 함께 가라 내가 저희를 보내었느니라 하시니"(행10:20)
다섯째, 죄 때문입니다.
「천로역정」에서 ‘의심의 골짜기’보다 더 위험한 곳은 없습니다. 그 땅은 피곤한 나그네를 죽음에 이르는 깊은 잠에 빠지게 합니다. 하나님의 종인 한 사람이 전도 여행을 할 때 갑작스레 마음에 크나 큰 실망이 생겼습니다.
그로 인해 그는 많은 어려움을 당했고, 참으로 혼란하고 고통스런 세상으로 떨어진 것 같았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이미 자신을 저버렸다고 느꼈습니다. 그는 한 동굴 안에 들어가 자신의 괴로운 심정과 버린 바 된 상황을 하나님께 자세하게 기도로 올려 드렸습니다. 그는 계속해서 기도하며 자신의 마음속의 생각을 하나님 앞에 모조리 털어놓았습니다. 시간이 지나자 그의 눈은 동굴 속의 어둠에 익숙해져 사물의 형체를 알아볼 수 있게 되었는데, 그때서야 그와 매우 가까운 곳에 늑대가 그의 새끼와 함께 누워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늑대는 그를 잡아 삼키려고도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꼼짝달싹도 하지 않았습니다. 원래 젖먹이 새끼를 키우는 어미 늑대는 어떤 맹수보다도 더 흉악한 법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가 버림받았다고 여길 때 그를 십분 평안하게 보호해 주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당신이 낙심하여 실의에 빠졌을 때도 하나님은 여전히 찬양 받으실 만합니다! 실망하여 낙심되는 느낌은 죄라고 할 수 없습니다. 기꺼이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려 하지 않는 그것이 바로 죄입니다.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요16:9)
여섯 째, 믿음이 연약하기 때문입니다.
유명한 선교사 허드슨 테일러가 처음으로 중국에 선교하러 갈 때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범선을 타고 가고 있었는데, 바람이 전혀 불지 않아 배는 식인종들이 살고 있는 섬의 매우 근접한 곳에 멈추고 말았습니다. 바람이 거의 불지 않았기 때문에 배의 방향을 바꿀 수 없었고, 배는 서서히 식인 섬을 향하여 떠밀려가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위기를 느낀 선장은 테일러에게 와서 하나님께 기도할 것을 부탁했습니다. 이를 응낙한 테일러는 먼저 바람을 잡을 수 있도록 돛을 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바람이 불지 않는 상태에서 돛을 편다는 것은 어리석은 행동이었습니다. 선장은 테일러의 말대로 돛을 편다는 것은 자신을 웃음거리로 만드는 일이라며 거절했습니다. 이에 테일러는 "만일 돛을 준비하지 않는다면 나도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겠소."라고 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선장은 돛을 폈고, 테일러는 방에 들어가 기도했습니다. 한참 기도하고 있는데, 누군가가 방문을 두드렸습니다. "이제 그만 기도해도 되겠어요. 바람이 불어 이제 배가 움직이고 있답니다."
하나님께서는 기도하기 전부터 응답 받을 것을 확신한 그의 신뢰를 결코 저버리지 않으셨습니다.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심하는 바를 비판치 말라"(롬14:1)
극심한 가뭄으로 인하여 땀이 타들어 가고 농작물이 메말라 죽어가던 어느 날, 어느 작은 마을의 교회에서 비를 내려달라는 기도회가 있었습니다. 성도들이 기도하는 도중 하늘에 먹구름이 몰려왔고 드디어 장대같은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성도들은 환성을 지르며 기뻐했습니다. 그러나 우산이 없어 집으로 돌아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웅성거렸습니다. “비가 올 줄 알았다면 우산을 갖고 올 걸”“어떻게 하지? 비가 와서 집에도 못 가겠네”“누가 정말 비가 올 줄 알았나…” 모두들 발을 동동 구르고 있을 때 초등학교 1학년 어린 소녀가 활짝 웃으며 우산을 폈습니다. “너는 어떻게 우산을 다 갖고 다니니?”“갖고 다닌 것이 아닌데요”“그러면 어디에서 났니?”“오늘 하나님께 비를 내려주시라고 기도하러 왔잖아요?”
일곱째, 인간의 지혜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고전1: 18- 22)
옛날 부의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어느 관청에서 일을 보고 있었는데, 친구 몇과 함께 한 집에서 먹고 자고 하였습니다. 하루는 친구 한 사람이 휴가를 받아 고향으로 내려갔습니다. 이 친구가 고향에 내려간 후 이 방에서 도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남은 한 친구의 돈주머니가 없어진 것입니다. 친구는 남아 있는 부의를 의심하였습니다. 부의는 큰 일 났습니다. 아무리 자기가 가져가지 않았다고 말해도 그 말이 통하지를 않았습니다. 부의는 친구에게 물었습니다. “얼마를 잃어 버렸나?” “알면서 묻긴 왜 물어 30냥이잖아?” 부의는 돈을 빌려서 30냥을 친구에게 주면서 용서를 빌었습니다.
“미안하게 되었네, 한 번만 용서해 주게.”
“앞으론 결코 그런 짓을 하지 말게. 이번만은 용서해 주겠네.”
친구는 제법 자비를 베푸는 듯이 돈을 받아 넣었습니다. 며칠 후, 고향에 내려갔던 친구가 올라 왔습니다. 이 친구는 호주머니에서 돈 30냥을 끄집어내어 친구에게 주면서 말했습니다.
“대단히 미안하게 됐네. 내 주머닌 줄 알고 가져갔지 뭐야, 집에 가서 보니 내 돈주머니는 따로 있지 않겠나.”
부의를 의심했던 친구는 부끄러워 두 손을 비비며 부의에게 사과하였습니다. 이 일로 인하여 부의는 존경을 받게 되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눅18:8)
여덟 째, 영적으로 불안정 때문입니다.
어느 날 고향 후배가 내게 찾아왔습니다. 그는 대뜸 “형님 저는 이제 교회를 다니지 않겠습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눈이 아파 하나님에게 일 주일동안 새벽기도를 하며 아침 금식도 하고 이 눈을 위해 열심히 기도를 하였는데 그 눈이 일 주일 후에 좋아지기는커녕 더 나빠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더 이상 교회를 다니지 않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내가 “그것 잘 됐다”며 그만 교회에 나가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이 후배가 태도를 바꾸면서 “아니 형님 왜 그러세요”라며 붙잡지 않는 나의 태도에 놀란 표정이었습니다. 나는 의처증 환자 이야기를 비유로 설명을 하였습니다. 의처증 환자와 결혼을 하면 결혼하는 날부터 신혼이 아니라 감옥이 된다. 남편이 회사에 나가서 5분마다 전화를 하여 부인이 집에 있는지 없는지를 확인한다. 이런 부인은 마음놓고 목욕도 할 수 없다. 언제나 전화기를 붙잡고 있어야한다. 급기야 의처증이 심한 남편은 부인을 믿지 못하여 출근하면서 대문을 잠그고 나간다. 남편과 같이 길을 걸어가다가 동네 아저씨를 만나 인사라도 하면 부인에게 남편이 “저 남자 몇 번 만났느냐”고 따진다. 약국에 들어가서 약사 아저씨에게 쳐다보면 돌아오는 길에 남편이 부인에게 “당신 그 남자에게 보내는 눈길이 예사롭지 않아”하며 쏘아 부친다. 어떻게 이런 남편과 같이 살수 있겠는가?
우리가 신앙생활 한다는 것은 주님과 결혼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주님과 한번 결혼을 했으면 주님이 살아 계신 것에 대해 더 이상 의심을 하면 안됩니다. 기도해서 아픈 눈이 나으면 주님이 계시고 눈이 낫지 않으면 주님이 안 계시다고 생각하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한번 주님을 믿었으면 눈이 낫든 낫지 않든지 관계없이 주님을 믿어야 정말 주님과 결혼한 사람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는다면 나의 기도의 응답과 관계없이 언제나 주님을 믿어야 합니다. 주님을 믿는 가장 큰 이유는 그분이 우리를 위해 죽어주셔서 영원한 천국에 가는 것입니다. 영원한 천국에 가는데 눈이 좀 아프면 어떱니까? 기도의 응답이 없으면 어떱니까? 나의 얘기를 들은 후배는 아주 감사하면서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이런 글이 기억납니다.
‘나는 태양이 빛나지 않을 때에도 태양이 있음을 믿는다. 나는 사랑을 느끼지 못할 때에도 사랑이 있음을 믿는다. 나는 하나님이 침묵을 지키실 때에도 하나님이 계심을 믿는다. 무슨 일을 만나든지 하나님을 믿고 사는 그 사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한다’(히11:6)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엡2:8) 무릇 살아서 주님을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합니다. (요11:25- 26) 우리가 믿음을 끝까지 굳게 지키면 영광을 얻을 수 있습니다. 만일 도중에 믿음을 잃어버리면 손해를 입게 됩니다. 의심은 우리의 믿음을 소멸하여 결과적으로 실패의 위치에 떨어지게 합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약1:6,7)
외국인을 많이 상대하게 되면 그들의 생활 습관과 가치관 그리고 풍습은 말할 것도 없고 인간관계도 나라마다 모두 다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은 중국 사람이 의심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진작 의심이 많은 민족은 우리입니다. 중국 사람을 되놈이라고 하여 의심이 많다고 하지만 중국 사람은 한번 믿으면 목숨 거는 민족입니다. 한국 사람이 자주 쓰는 ‘빨리 빨리’라는 말은 전 세계 사람들이 다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성격이 급해서라고 생각하지만 아닙니다. 이것도 의심 속에서 나온 말입니다. 의심하기 때문에 빨리 빨리 해야 하고 믿지 못하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민족마다 물건을 살 때 보면 성격이 분명히 나타납니다.
프랑스 사람은 “이거 최신형입니까?”라고 묻고 독일 사람은 “이거 튼튼합니까?”라고 묻습니다. 중국 사람은 “이거보다 더 싼 건 없나요?” 한국 사람은 “이거 진짜입니까?”라고 묻습니다. 정말 슬픈 일입니다. 우리 민족이 회복해야 할 부분은 ‘믿음’이라는 부분입니다. 그렇다면 이 믿음이라는 부분을 회복시켜야 할 사명에 대해 누가 가장 큰 책임을 느껴야 할까요? 정치인이 아닙니다. 교육가도 아닙니다. 곧 믿음이라는 말을 가장 많이 쓰는 사람부터 회복해야 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기독교인들이 가장 많이 쓰는 단어입니다. 신앙은 곧 믿음에서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에 대해서는 책임을 져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이 믿음은 물론 하나님과의 믿음에서 시작합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습니다. 그러면 믿음은 어떻게 회복할 수 있을까요? 먼저 믿음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간단하게 함축하여 대답하면 ‘내가 누구냐?’ 이것이 곧 믿음입니다. 믿음은 누가 길게 기도하느냐, 누가 헌금을 잘 하느냐에 달린 것이 아니라 자기가 자기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빨리 발견하는 것입니다. 즉, 제 자리 찾기입니다. 쉽게 다시 말하자면 내가 누구이며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알면 믿음 있는 자입니다.
믿음의 싸움을 은사 싸움으로 끌고 가서는 안됩니다. 믿음의 싸움을 기적을 체험한 간증으로 끌고 가서는 안됩니다. 믿음의 깊이를 교회에 출석한 길이와 비교하면 안됩니다. 믿음 있는 자는 깨끗한 거울을 가지고 있어 자신을 늘 바라보는 자가 믿음 있는 자입니다. 이런 자들이 있어야 사회에서 믿음이 회복되는 것입니다. 그런 몸부림이 있는 자에게 주는 하나님의 선물이 믿음입니다.
성도 여러분 모두가 조금도 의심하지 말고 굳건한 믿음의 소유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 기도: 살아 계신 하나님 아버지, 우리에게 아브라함과 같은 굳센 믿음을 주시고, 좌절과 절망의 자리에서 주님의 옷깃만 잡아도 나을 수 있다는 믿음을 가졌던 여인처럼 우리도 간절한 믿음을 가지고, 주를 따르게 하옵소서. 우리의 신앙생활의 자리를 점검하게 하소서. 그리하여 올바른 믿음을 갖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한태완 목사
* 2부 성경공부
* 묵상과 나눔
0 신앙에 대해 의심이 생겼던 적이 있습니까? 그것은 무엇에 대한 것입니까?
0 나의 의심은 믿음을 위한 의심입니까? 믿기 싫어서 하는 의심입니까?
0 의심이 나쁜 영향을 미친 경험이 있으면 나누어 봅시다.
0 반대로 의심이 좋은 방향으로 이끈 경험이 있으면 나누어 봅시다.
* 물고기의 의심
물고기 두 마리가 싱싱한 지렁이 한 마리를 발견했습니다. 한 물고기가 그것을 집어삼키려고 하자 다른 물고기가 타이릅니다.
" 저 지렁이는 낚시 바늘에 걸려 있는 거야. 저것을 잘못 삼키면 바늘에 걸려 사람들의 식탁에 오르는신세가 되고 말아."
그러나 다른 물고기는 그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 그것을 누가 믿어? 아무도 그것을 증명하지 못했잖아. 어디 사람들의 식탁까지 갔다온 물고기가 있으면 증명해 봐. 네가 저 지렁이를 욕심내는 거지?"
그 물고기는 덥석 지렁이를 삼켰습니다. 그리고 다시는 바다로 돌아올 수 없었습니다.
이처럼 지옥과 천국을 말할 때 냉소적인 태도를 보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 천국이나 지옥에 갔다온 사람이 있으면 내게 그 증거를 보여줘. 그러면 믿을 테니까."
이런 사람들은 끝내 하늘을 보지 못합니다. 지렁이를 삼킨 물고기처럼 후회해도 이미 늦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불신에서 싹튼 교만은 사람의 판단력을 흐리게 만들어 멸망의 길로 인도할 뿐입니다.
본문: 히 11: 1∼6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히 11:1)
옛날 어느 곳에 오래된 고목이 한 그루 서 있었습니다. 이 큰 나무 위에는 매들이 날아와 둥지를 짓고 새끼들을 기르고 있었고 나무 밑에는 산돼지들이 새끼를 기르며 살고 있었습니다. 매들이 떨어뜨리는 나뭇잎과 찌꺼기들은 밑에 있는 돼지들의 먹이가 되었고 돼지들의 찌꺼기는 매의 먹이가 되었으므로 이들은 서로 공생하며 평화롭게 살았습니다. 이들의 사이가 샘이 난 여우가 이들을 갈라놓기 위한 한 가지 꾀를 생각해냈습니다. 여우는 곧장 매에게로 달려가 "나무 밑에 있는 돼지들은 너희 매를 잡아먹으려고 매일 나무 밑둥을 갉아먹고 있단다. 얼마 못 가서 나무가 쓰러지면, 네 새끼들은 떨어져서 돼지의 밥이 될 것이다. 이따금 나무가 심하게 흔들리지 않던? 그게 바로 나무가 넘어 지려는 징조야!" 하고 말했습니다.
이번에는 돼지에게로 달려가서 "나무 위에 있는 매들은 너희 돼지 새끼들을 잡아먹으려고 항상 기회만 노리고 있단다. 어미 돼지가 먹이를 구하러 멀리 가면 그때 새끼를 잡아먹기 위해 이따금 어미 매가 내려와서 너희 집을 기웃거리며 먹이를 찾지 않던? 그게 바로, 매가 새끼를 노릴 때란 말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이때부터 매와 돼지의 생활은 서로를 믿지 못하는 생활이 되었습니다. 매는 모이를 구하러 나갈 수가 없었습니다. 혹시 나간 사이에 나무가 쓰러지면 새끼들이 돼지에게 잡혀 먹힐 것을 생각하니 꼼짝 못하고 항상 새끼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이는 돼지도 마찬가지여서 먹이를 구하러 가지 못하고 매와 돼지는 서로 경계하면서 새끼들만 지키고 있었습니다. 결국 매도 돼지도 굶주려서 죽고 말았습니다. 사탄은 우리의 마음에 불신을 심어주어 우리를 파멸시킵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음을 가지고 주님을 의지하면 우리의 삶은 풍성해집니다.
우리에게 의심이 생기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첫째, 사단의 유혹과 불 신앙 때문입니다.(눅1:18- 20)
본래 의심은 사탄이 하와의 마음속에 심어놓은 독초였습니다. 이것이 들어가자 하나님을 의심하기 시작했고 결국 선악과를 따먹게 되었습니다. 물론 의심이란 때로는 진리 탐구의 자극제가 되기도 하지만 신앙에서는 큰 장애물이 됩니다. 왜냐하면 의심으로 인해 절망에 빠지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스피링 부인은 “의심은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지옥”이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의심은 지식의 현관문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믿음의 장애물이 되고 있습니다. 다음은 불신인데 이 불신은 거짓말의 믿음이요, 지옥으로 인도하는 안내자입니다. 불신은 개인적으로는 실패의 원인이 되며 사회적으로는 협동을 깨는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중요한 것은 의심과 불신 뒤에는 항상 사탄이 도사리고 있다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이 의심과 불신을 통해 사탄이 인간을 천국으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길을 차단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14장에 보면 밤에 예수님께서 물위로 걸어가신 사건이 나옵니다. 이때 베드로가 자신도 물위로 걸어가기를 간구했습니다. 주님은 허락했습니다. 처음에는 베드로가 믿음으로 물위를 걸었으나 나중에는 바람을 보고 무서워하며 의심하게 됐을 때, 물에 빠졌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베드로를 향해 “왜 의심하느냐”고 책망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에서는 의심을 경계합니다. 그러나 뉴턴이 ‘왜 사과가 나무 밑으로 떨어질까?’라는 의심을 하지 않았더라면 만유인력 법칙은 발견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따라서 세상에서의 진리 탐구에는 의심에서 시작해야 하지만 영의 세계는 믿음에서 시작한다는 차이점이 있습니다.
문제는 불신입니다. 지금 세상은 온통 불신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부부가 서로 불신하고 있고 목회자와 성도들이 서로 불신합니다. 정부와 국민도 불신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불신이 있는 곳에는 놀라운 역사도 없고 연합도 없으며 사랑도 없습니다. 오직 분열과 미움, 실패가 따를 뿐입니다. 그러므로 사탄의 불신이 더 이상 번지지 못하도록 막아야 합니다. 그것은 주님께 대한 믿음을 통해 사람들간의 신뢰를 회복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창3:4)
둘째, 체험이 없기 때문입니다.
알프레드 화이트헤드 교수는 영국의 대 철학자이며 위대한 수학자입니다. 그는 철학자 버드란트 러셀의 스승이기도 하며 러셀과 함께 여러 책을 저술하기도 한 분입니다. 화이트헤드는 교육가의 집안에서 태어났는데 그 집안은 대대로 기독교를 믿어오던 가문이었습니다. 그는 젊은 시절에 철학과 수학에 심취하면서 신앙에 대해 깊은 회의에 빠지게 되었고 급기야는 대대로 이어오던 신앙을 버리고 교회와도 담을 쌓고 살아갔습니다.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든 어느 날, 그 지방에 엄청난 폭설이 내렸습니다. 외출 중이었던 그는 서둘러서 집으로 돌아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디선가 가냘픈 노래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습니다. 눈 구덩이에 빠져 있는 늙은 할머니가 부르는 노래였습니다. 서둘러 눈덩이에서 할머니를 건져주었습니다. 할머니는 화이트헤드에게 정말 고맙다고 거듭 감사하면서 물었습니다.
"내게 이런 큰 은혜를 베풀어주셨으니 당신은 분명 신앙심이 깊은 분이겠지요. 어느 교회에 출석하고 계십니까?"
화이트헤드는 약간 겸연쩍은 듯 머리를 글쩍이며 대답했습니다.
"아뇨, 저는 교회에 다니지 않습니다. 신앙심도 없고요."
그러자 노파는 의외라는 듯이 "아니, 다 늙은 사람이 어쩌자고 아직도 예수님을 믿지 않는단 말이오! 그러다가 나처럼 뜻밖의 사고를 당하면 어떻게 하려고 그러시오? 나는 저 눈 구덩이 속에서 죽을 것이라 생각하고 계속 열심히 찬송을 부르고 있었다오" 하고 말했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그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리고는 생각했습니다.
'도대체 무엇이 저 할머니로 하여금 저토록 두려운 죽음 앞에서 큰 확신을 갖고 찬송을 부르게 하는가? 내가 탐구하고 있는 철학이나 수학, 아니 어느 학문이라도 저 할머니가 갖고 있는 저런 확신을 줄 수 없지 않는가?'
그 때부터 그는 자기가 탐구해 온 학문에 대해 회의하기 시작했습니다. 말하자면, 그가 젊어서는 신앙에 대해 회의하였으나 늙은 이제는 그토록 자신 만만해 하던 학문에 대해 회의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는 버렸던 신앙을 다시 찾기로 하고 교회에 출석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잃었던 확신을 찾게되었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눅24:38)
셋째, 무지하고 사실을 모르기 때문입니다.(요13:22, 행25:20)
어떤 사람이 공중 목욕탕에 갔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없어서 혼자 목욕을 하고 있었습니다. 얼마후 한 사람이 들어왔습니다. 먼저 들어와 있던 사람이 나중에 들어온 사람을 흘끔 보더니 슬그머니 나가 자기 옷장을 열고 지갑과 시계를 확인하고 돌아왔습니다. 그러자 나중에 들어온 사람도 먼저 들어와 있던 사람을 곁눈질로 본 후 나가 자기 소지품들이 잘 있는지 확인하고 들어왔습니다. 잠시 정적이 흐른 후, 먼저 들어와 있던 사람이 나중에 들어온 사람에게 말을 건넸습니다.
“우리 서로 등의 때를 닦아줄까요?”“그러시죠”
“혹시 예수를 믿으십니까?”“물론입니다. 저는 장로랍니다”“아이구! 이거 반갑습니다. 나는 목사입니다”
비슷한 이야기입니다. 만주 일대를 돌아다니며 교회를 순회하는 채필근 목사님은 가끔 선교부 돈을 가지고 각 교회에 나누어주곤 했습니다. 한번은 돈을 잔뜩 넣고 순회하는 도중 외딴 곳에 이르러 객주 집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손님들이 많아서 둘이 묵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서로 잠자리에 누웠으나 잠을 잘 수가 없었습니다.
`혹시 저놈이 내 가 잠든 사이에 돈을 훔쳐가지 않을까'생각 때문이었습니다. 두 사람은 뜬눈으로 밤을 새우고 난 다음날 주인이 차려다 준 상에서 겸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둘은 할 수 없이 서로 마주 앉아 식사기도를 하고 식사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마주 앉았던 사람이 "선생님, 예수 믿는 어른입니까?" 해서 "네, 저는 채필근 목사입니다." 라고 했습니다. 그는 깜짝 놀라면서 "저는 0 0 교회 장로입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지혜는 이 세대의 관원이 하나도 알지 못 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고전2:8)
넷째, 선입관 때문입니다.
외국에 어떤 사람이 신문을 보니까, 새 캐딜락 자동차가 50불에 판매한다는 광고가 신문에 났습니다. 60년대 당시에 그 차는 5,000 불이 넘었습니다. 보통 차가 1,000 불 정도였으니까 캐딜락은 상당히 비싼 차였습니다. 그러므로 보통 생각하기를 "이거 광고가 잘못 난 거겠지... 5,000 불인데 공(0)자를 잘못 빼놓고 났으니 다음 날에는 분명히 정정해서 나올 꺼야!" 하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다음날 보아도 50불이고, 그 다음날 보아도 50불이었습니다. 똑똑한 사람들은 신문사만 원망했습니다. "이거 광고를 어떤 부서에서 맡았는지 틀린 것도 모르고 매일 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일주일 후에 다시 신문에 났는데, 광고로 난 것이 아니라 큰 기사로 났습니다. 캐딜락이 50불에 팔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깜짝 놀라서 기사를 읽어보니까,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어느 콜롬버스에 있는 회사 사장이 죽으면서 유언을 했습니다. 내가 죽으면 회사는 누구에게 주고, 집은 누구에게 주고... 하면서 다 정해 놓았는데, 최근에 산 비싼 고급 승용차인 캐딜락은 팔아서 자기 '걸 프랜드' 아무개에게 주라고 유서를 남긴 것입니다. 이것을 부인이 보고서 얼마나 화가 나는지, 자기 몰래 걸 프랜드를 사귄 것도 못 견딜일인데 오천불짜리 자동차를 팔아서 그 여자를 주라니..... 이거, 여자의 마음으로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유서대로 안 하면 안되기 때문에 팔아서 주기는 주어야 하겠는데 5,000불 주기는 아까우니까... 생각하고 생각하다가 그 여자도 화가 나라고 50불에 팔아서 준 것입니다. 똑똑한 사람들은 못 사고, 어떤 바보 같은 사람이 그 기사를 그대로 믿고 산 것입니다.
"일어나 내려가 의심치 말고 함께 가라 내가 저희를 보내었느니라 하시니"(행10:20)
다섯째, 죄 때문입니다.
「천로역정」에서 ‘의심의 골짜기’보다 더 위험한 곳은 없습니다. 그 땅은 피곤한 나그네를 죽음에 이르는 깊은 잠에 빠지게 합니다. 하나님의 종인 한 사람이 전도 여행을 할 때 갑작스레 마음에 크나 큰 실망이 생겼습니다.
그로 인해 그는 많은 어려움을 당했고, 참으로 혼란하고 고통스런 세상으로 떨어진 것 같았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이미 자신을 저버렸다고 느꼈습니다. 그는 한 동굴 안에 들어가 자신의 괴로운 심정과 버린 바 된 상황을 하나님께 자세하게 기도로 올려 드렸습니다. 그는 계속해서 기도하며 자신의 마음속의 생각을 하나님 앞에 모조리 털어놓았습니다. 시간이 지나자 그의 눈은 동굴 속의 어둠에 익숙해져 사물의 형체를 알아볼 수 있게 되었는데, 그때서야 그와 매우 가까운 곳에 늑대가 그의 새끼와 함께 누워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늑대는 그를 잡아 삼키려고도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꼼짝달싹도 하지 않았습니다. 원래 젖먹이 새끼를 키우는 어미 늑대는 어떤 맹수보다도 더 흉악한 법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가 버림받았다고 여길 때 그를 십분 평안하게 보호해 주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당신이 낙심하여 실의에 빠졌을 때도 하나님은 여전히 찬양 받으실 만합니다! 실망하여 낙심되는 느낌은 죄라고 할 수 없습니다. 기꺼이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려 하지 않는 그것이 바로 죄입니다.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요16:9)
여섯 째, 믿음이 연약하기 때문입니다.
유명한 선교사 허드슨 테일러가 처음으로 중국에 선교하러 갈 때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범선을 타고 가고 있었는데, 바람이 전혀 불지 않아 배는 식인종들이 살고 있는 섬의 매우 근접한 곳에 멈추고 말았습니다. 바람이 거의 불지 않았기 때문에 배의 방향을 바꿀 수 없었고, 배는 서서히 식인 섬을 향하여 떠밀려가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위기를 느낀 선장은 테일러에게 와서 하나님께 기도할 것을 부탁했습니다. 이를 응낙한 테일러는 먼저 바람을 잡을 수 있도록 돛을 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바람이 불지 않는 상태에서 돛을 편다는 것은 어리석은 행동이었습니다. 선장은 테일러의 말대로 돛을 편다는 것은 자신을 웃음거리로 만드는 일이라며 거절했습니다. 이에 테일러는 "만일 돛을 준비하지 않는다면 나도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겠소."라고 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선장은 돛을 폈고, 테일러는 방에 들어가 기도했습니다. 한참 기도하고 있는데, 누군가가 방문을 두드렸습니다. "이제 그만 기도해도 되겠어요. 바람이 불어 이제 배가 움직이고 있답니다."
하나님께서는 기도하기 전부터 응답 받을 것을 확신한 그의 신뢰를 결코 저버리지 않으셨습니다.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심하는 바를 비판치 말라"(롬14:1)
극심한 가뭄으로 인하여 땀이 타들어 가고 농작물이 메말라 죽어가던 어느 날, 어느 작은 마을의 교회에서 비를 내려달라는 기도회가 있었습니다. 성도들이 기도하는 도중 하늘에 먹구름이 몰려왔고 드디어 장대같은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성도들은 환성을 지르며 기뻐했습니다. 그러나 우산이 없어 집으로 돌아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웅성거렸습니다. “비가 올 줄 알았다면 우산을 갖고 올 걸”“어떻게 하지? 비가 와서 집에도 못 가겠네”“누가 정말 비가 올 줄 알았나…” 모두들 발을 동동 구르고 있을 때 초등학교 1학년 어린 소녀가 활짝 웃으며 우산을 폈습니다. “너는 어떻게 우산을 다 갖고 다니니?”“갖고 다닌 것이 아닌데요”“그러면 어디에서 났니?”“오늘 하나님께 비를 내려주시라고 기도하러 왔잖아요?”
일곱째, 인간의 지혜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고전1: 18- 22)
옛날 부의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어느 관청에서 일을 보고 있었는데, 친구 몇과 함께 한 집에서 먹고 자고 하였습니다. 하루는 친구 한 사람이 휴가를 받아 고향으로 내려갔습니다. 이 친구가 고향에 내려간 후 이 방에서 도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남은 한 친구의 돈주머니가 없어진 것입니다. 친구는 남아 있는 부의를 의심하였습니다. 부의는 큰 일 났습니다. 아무리 자기가 가져가지 않았다고 말해도 그 말이 통하지를 않았습니다. 부의는 친구에게 물었습니다. “얼마를 잃어 버렸나?” “알면서 묻긴 왜 물어 30냥이잖아?” 부의는 돈을 빌려서 30냥을 친구에게 주면서 용서를 빌었습니다.
“미안하게 되었네, 한 번만 용서해 주게.”
“앞으론 결코 그런 짓을 하지 말게. 이번만은 용서해 주겠네.”
친구는 제법 자비를 베푸는 듯이 돈을 받아 넣었습니다. 며칠 후, 고향에 내려갔던 친구가 올라 왔습니다. 이 친구는 호주머니에서 돈 30냥을 끄집어내어 친구에게 주면서 말했습니다.
“대단히 미안하게 됐네. 내 주머닌 줄 알고 가져갔지 뭐야, 집에 가서 보니 내 돈주머니는 따로 있지 않겠나.”
부의를 의심했던 친구는 부끄러워 두 손을 비비며 부의에게 사과하였습니다. 이 일로 인하여 부의는 존경을 받게 되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눅18:8)
여덟 째, 영적으로 불안정 때문입니다.
어느 날 고향 후배가 내게 찾아왔습니다. 그는 대뜸 “형님 저는 이제 교회를 다니지 않겠습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눈이 아파 하나님에게 일 주일동안 새벽기도를 하며 아침 금식도 하고 이 눈을 위해 열심히 기도를 하였는데 그 눈이 일 주일 후에 좋아지기는커녕 더 나빠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더 이상 교회를 다니지 않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내가 “그것 잘 됐다”며 그만 교회에 나가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이 후배가 태도를 바꾸면서 “아니 형님 왜 그러세요”라며 붙잡지 않는 나의 태도에 놀란 표정이었습니다. 나는 의처증 환자 이야기를 비유로 설명을 하였습니다. 의처증 환자와 결혼을 하면 결혼하는 날부터 신혼이 아니라 감옥이 된다. 남편이 회사에 나가서 5분마다 전화를 하여 부인이 집에 있는지 없는지를 확인한다. 이런 부인은 마음놓고 목욕도 할 수 없다. 언제나 전화기를 붙잡고 있어야한다. 급기야 의처증이 심한 남편은 부인을 믿지 못하여 출근하면서 대문을 잠그고 나간다. 남편과 같이 길을 걸어가다가 동네 아저씨를 만나 인사라도 하면 부인에게 남편이 “저 남자 몇 번 만났느냐”고 따진다. 약국에 들어가서 약사 아저씨에게 쳐다보면 돌아오는 길에 남편이 부인에게 “당신 그 남자에게 보내는 눈길이 예사롭지 않아”하며 쏘아 부친다. 어떻게 이런 남편과 같이 살수 있겠는가?
우리가 신앙생활 한다는 것은 주님과 결혼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주님과 한번 결혼을 했으면 주님이 살아 계신 것에 대해 더 이상 의심을 하면 안됩니다. 기도해서 아픈 눈이 나으면 주님이 계시고 눈이 낫지 않으면 주님이 안 계시다고 생각하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한번 주님을 믿었으면 눈이 낫든 낫지 않든지 관계없이 주님을 믿어야 정말 주님과 결혼한 사람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는다면 나의 기도의 응답과 관계없이 언제나 주님을 믿어야 합니다. 주님을 믿는 가장 큰 이유는 그분이 우리를 위해 죽어주셔서 영원한 천국에 가는 것입니다. 영원한 천국에 가는데 눈이 좀 아프면 어떱니까? 기도의 응답이 없으면 어떱니까? 나의 얘기를 들은 후배는 아주 감사하면서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이런 글이 기억납니다.
‘나는 태양이 빛나지 않을 때에도 태양이 있음을 믿는다. 나는 사랑을 느끼지 못할 때에도 사랑이 있음을 믿는다. 나는 하나님이 침묵을 지키실 때에도 하나님이 계심을 믿는다. 무슨 일을 만나든지 하나님을 믿고 사는 그 사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한다’(히11:6)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엡2:8) 무릇 살아서 주님을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합니다. (요11:25- 26) 우리가 믿음을 끝까지 굳게 지키면 영광을 얻을 수 있습니다. 만일 도중에 믿음을 잃어버리면 손해를 입게 됩니다. 의심은 우리의 믿음을 소멸하여 결과적으로 실패의 위치에 떨어지게 합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약1:6,7)
외국인을 많이 상대하게 되면 그들의 생활 습관과 가치관 그리고 풍습은 말할 것도 없고 인간관계도 나라마다 모두 다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은 중국 사람이 의심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진작 의심이 많은 민족은 우리입니다. 중국 사람을 되놈이라고 하여 의심이 많다고 하지만 중국 사람은 한번 믿으면 목숨 거는 민족입니다. 한국 사람이 자주 쓰는 ‘빨리 빨리’라는 말은 전 세계 사람들이 다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성격이 급해서라고 생각하지만 아닙니다. 이것도 의심 속에서 나온 말입니다. 의심하기 때문에 빨리 빨리 해야 하고 믿지 못하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민족마다 물건을 살 때 보면 성격이 분명히 나타납니다.
프랑스 사람은 “이거 최신형입니까?”라고 묻고 독일 사람은 “이거 튼튼합니까?”라고 묻습니다. 중국 사람은 “이거보다 더 싼 건 없나요?” 한국 사람은 “이거 진짜입니까?”라고 묻습니다. 정말 슬픈 일입니다. 우리 민족이 회복해야 할 부분은 ‘믿음’이라는 부분입니다. 그렇다면 이 믿음이라는 부분을 회복시켜야 할 사명에 대해 누가 가장 큰 책임을 느껴야 할까요? 정치인이 아닙니다. 교육가도 아닙니다. 곧 믿음이라는 말을 가장 많이 쓰는 사람부터 회복해야 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기독교인들이 가장 많이 쓰는 단어입니다. 신앙은 곧 믿음에서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에 대해서는 책임을 져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이 믿음은 물론 하나님과의 믿음에서 시작합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습니다. 그러면 믿음은 어떻게 회복할 수 있을까요? 먼저 믿음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간단하게 함축하여 대답하면 ‘내가 누구냐?’ 이것이 곧 믿음입니다. 믿음은 누가 길게 기도하느냐, 누가 헌금을 잘 하느냐에 달린 것이 아니라 자기가 자기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빨리 발견하는 것입니다. 즉, 제 자리 찾기입니다. 쉽게 다시 말하자면 내가 누구이며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알면 믿음 있는 자입니다.
믿음의 싸움을 은사 싸움으로 끌고 가서는 안됩니다. 믿음의 싸움을 기적을 체험한 간증으로 끌고 가서는 안됩니다. 믿음의 깊이를 교회에 출석한 길이와 비교하면 안됩니다. 믿음 있는 자는 깨끗한 거울을 가지고 있어 자신을 늘 바라보는 자가 믿음 있는 자입니다. 이런 자들이 있어야 사회에서 믿음이 회복되는 것입니다. 그런 몸부림이 있는 자에게 주는 하나님의 선물이 믿음입니다.
성도 여러분 모두가 조금도 의심하지 말고 굳건한 믿음의 소유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 기도: 살아 계신 하나님 아버지, 우리에게 아브라함과 같은 굳센 믿음을 주시고, 좌절과 절망의 자리에서 주님의 옷깃만 잡아도 나을 수 있다는 믿음을 가졌던 여인처럼 우리도 간절한 믿음을 가지고, 주를 따르게 하옵소서. 우리의 신앙생활의 자리를 점검하게 하소서. 그리하여 올바른 믿음을 갖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한태완 목사
* 2부 성경공부
* 묵상과 나눔
0 신앙에 대해 의심이 생겼던 적이 있습니까? 그것은 무엇에 대한 것입니까?
0 나의 의심은 믿음을 위한 의심입니까? 믿기 싫어서 하는 의심입니까?
0 의심이 나쁜 영향을 미친 경험이 있으면 나누어 봅시다.
0 반대로 의심이 좋은 방향으로 이끈 경험이 있으면 나누어 봅시다.
* 물고기의 의심
물고기 두 마리가 싱싱한 지렁이 한 마리를 발견했습니다. 한 물고기가 그것을 집어삼키려고 하자 다른 물고기가 타이릅니다.
" 저 지렁이는 낚시 바늘에 걸려 있는 거야. 저것을 잘못 삼키면 바늘에 걸려 사람들의 식탁에 오르는신세가 되고 말아."
그러나 다른 물고기는 그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 그것을 누가 믿어? 아무도 그것을 증명하지 못했잖아. 어디 사람들의 식탁까지 갔다온 물고기가 있으면 증명해 봐. 네가 저 지렁이를 욕심내는 거지?"
그 물고기는 덥석 지렁이를 삼켰습니다. 그리고 다시는 바다로 돌아올 수 없었습니다.
이처럼 지옥과 천국을 말할 때 냉소적인 태도를 보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 천국이나 지옥에 갔다온 사람이 있으면 내게 그 증거를 보여줘. 그러면 믿을 테니까."
이런 사람들은 끝내 하늘을 보지 못합니다. 지렁이를 삼킨 물고기처럼 후회해도 이미 늦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불신에서 싹튼 교만은 사람의 판단력을 흐리게 만들어 멸망의 길로 인도할 뿐입니다.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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