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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히13:18-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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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이덕재 목사 |
참고 : |
기도와 소망을 나누는 코이노니아
본문: 히브리서 13장 18 - 25절
교회세습이 사회적 지탄을 받고 있는 오늘날에 자신의 정년보다 5년을 앞당겨 은퇴하여 아름다운 본을 보인 사랑의 교회 옥한흠 목사님께서 지난 주에 대구 경북지역 교회갱신 협의회에서 설교를 하셨습니다. 그 설교의 내용은 "지금 한국교회는 벼랑 끝에 서 있는 위기의 상황을 맞이하고 있으니 교회와 교회 지도자 여러분, 경성하여 신앙과 교회의 본질에 충실하십시오" 였습니다. 옥한흠 목사님뿐만이 아니라 많은 사람이 한국교회의 위기 상황을 진단하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 위기상황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과연 어떻게 하는 것이 교회의 본질에 충실한 것인가? 에 대한 명확한 해답을 얻고 실천하는 길입니다.
이에 대한 중요한 해답이라 할 수 있는 한 영역을, 대천덕 신부님은 그의 유언이라 할 수 있는 "한국교회에 드리는 글"에서 "성령의 코이노니아"를 제시했습니다. 교회의 교회다움의 회복을 위하여는, 예배 후 커피 한 잔을 나누는 정도가 아니라 마음과 삶을 함께 나누는 성령의 코이노니아의 회복과 성장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코이노니아, 우리 말이나 영어나 그 정확한 의미를 번역할 단어가 없어서 아쉬움이 있지만, 그 뜻, 먼저는 사랑의 나눔입니다. 사랑하는 마음에서 자기의 것을 자기의 것이라 주장하지 않고 함께 나누는 것을 말합니다. 체면치레 격으로 나누는 것이 아니라, 100% 함께 나누는 것을 말합니다.
조폭이 미화되는 사회적 현상은 우리 시대의 영혼들이, '하나를 위한 다수, 다수를 위한 하나"로 표현되는, 충성(忠誠), 결속(結束), 의리(義理)의 가치가 존중되는 공동체에 대한 갈망, 그리움 때문입니다. 교회의 주요한 특징은 공동체이며 교회의 생명력은 코이노니아의 여부에 있습니다.
코이노니아는 또한 영적인 나눔입니다. 100% 자기의 것을 함께 나누는 것이라 하여 "넌 부자이면서 왜 나한테 돈을 안 나누어 주는 거야" 한다면 그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공산주의자입니다. 성령 안에 거하는 자는 자신의 가난 때문에 부자를 원망, 질시하여 공격적이지 않습니다. 또 성령 안에 거하는 자는 자신의 소유가 많은 것 때문에 으스대려고 하지 않습니다. 성령의 코이노니아은 아름답게, 바르게 표현되는 사랑의 교제입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그의 서신을 끝맺으면서 부탁하며 강조하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이 성도의 코이노니아를 어떻게 시작하며, 어떻게 진행되어 가는가에 대한 구체적이고도 실제적인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성령 안에서 코이노니아를 이루어 갈 것인가? 그럼으로써 어떻게 세상을 이기고 교회의 본질을 회복하여 위기에 처한 한국교회에 맑은 물을 흘러낼 것인가? 이 실제적인 질문에 대하여, 오늘 본문은 명확한 대답을 해 줍니다.
첫째로, 성령의 코이노니아는 기도부탁을 주고받는 관계 속에서 세워져 갑니다. <18,19절>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 우리가 모든 일에 선하게 행하려 하므로 우리에게 선한 양심이 있는 줄을 확신하노니 내가 더 속히 너희에게 돌아가기를 위하여 너희 기도함을 더욱 원하노라" 무엇을 하는 장면입니까? 히브리서 저자가 히브리서를 받는 교회, 형제, 자매들에게 자신을 위한 기도를 부탁하는 장면입니다.
그의 삶과 사역에는 항상 핍박자와 비방자들이 따라 다녔습니다.
예) 인간이 어리석고 연약하기 때문에 사실은 그렇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여러사람이 나쁘게 평가하면, 많은 사람들은 그 사람이 뭔가 잘못되었구나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지지도를 중요시 여기는 정치인들은 언론 플레이를 대단히 중요시 여깁니다.
전도자의 삶을 보았고 그 명확한 가르침을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핍박자와 비방자들의 집요한 비난 때문에, 히브리서 저자의 가르침을 받는 사람들은 때론 흔들리기도 하곤 하였습니다. 그리고 교회가 흔들리는 모습을 바라보는 히브리서 저자 자신의 마음이 상하고 아픔이 있음을 그는 애써 감추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선하게 살고자 하고 양심에 거리낌이 없이 살고자 하는데, 오해하고 비난하고 혹평하는 사람들에 의하여 그 자신의 마음에도 상함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저자는 자신의 연약한 마음을 나누며 기도를 부탁합니다. 여러분, <18절>과 같은 기도부탁을 받았을 때, 여러분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기도해 주시겠습니까? <18절>에 구체적인 기도제목은 나오지 않았지만, 이런 내용임을 우리는 짐작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비난하고 혹평함에도 불구하고 제가 하나님 앞에 선한 양심이 굴곡되지 않고 한결같이 드려질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그 사람들 때문에 상심하여 치우치거나 싸우려고 하지 않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그리고 사랑하는 여러분, 보고 싶습니다.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주시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기도를 부탁합니다.
여러분은 자신의 마음과 삶을 기도부탁하며 함께 기도하며 살고 계십니까? 여러분의 신앙생활에는 함께 삶을 나누며 기도하는 교제, 성령의 코이노니아가 이루어지고 있습니까?
세상의 탁류가 교회에까지 넘쳐와 교회의 모습도 일그러지게 한, 큰 요인이 개인주의(個人主義)입니다. 개인주의는 나 밖에 모르는 마음, 생각을 말합니다. 그래서 신앙생활도 '나홀로 예배당에'를 현대인들은 선호합니다.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이 조용히 종교의무를 행사하고 와도 되는 교회를 현대인들은 선호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가르쳐 주는, 하나님이 부르신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은 '나홀로 예배당에'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부르심은 하나님의 가족으로서, 교회 공동체의 일원으로서의 부르심입니다.
그 개인주의의 신앙, 혼자 고고히, 고상히, 고결하게 하려고 하지만, 그것은 도리어 고독한 것이며, 고통스러운 것이며 고집스러운 것이며 더 나아가 사실은 고양이처럼 고약한 신앙생활입니다.
믿음은 사랑이고 사랑은 나눔, 코이노니아입니다. 그러면 무엇을 나누어야 합니까? 또 어떻게 나누시겠습니까? 먼저 기도를 부탁하십시오. 함께 기도하는 시간을 가지십시오. 예) <단2장> 느부갓네살왕(느네 부친이 갓 네 살에 낳았대? 해서 느부갓네살왕입니다) 이 꿈을 꾸었는데, 깨고 나니 가물가물 떠 오르지 않습니다. 당시의 석학들, 박사들에게 자신의 꿈을 알아맞히라고 하나, 아니 꿈의 내용을 이야기해 주어야 해몽을 해 주지, 어떻게 알아맞춥니까? 하자 왕이 대노하여 박사들을 다 죽여 버리겠다고 위협합니다.
그 소식을 들은 다니엘, 시위대장에게 꿈을 알아 맞히고 해석할 기한을 달라고 부탁하고 그리고 뭐합니까? <단2:17, 18절> 보십시오. 세 명의 친구들에게 기도를 부탁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다니엘에게 왕의 꿈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줍니다. 이것이 함께 기도부탁하며 함께 기도하며 사는 비밀의 능력입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가 그랬듯이, 기도를 부탁하고 함께 기도하고.. 그 가운데 하나님께서는 권능으로 역사하시고 도와 주십니다.
당신도 기도부탁을 주고받으며, 함께 기도하며 사십시오. 저희가 salt와 light 모임으로 구분하여 작은 공동체로 모이는 주요한 목적이 이것입니다. 내 마음과 삶의 기도제목을 함께 나누며 함께 기도하며 그 가운데 성령께서 사랑으로 교통하시는, 성령의 코이노니아를 누리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예수님을 보내시는 사랑의 나눔이 있어서 오늘 우리가 생명을 누림을 기억한다면, 또 그 예수님이 우리도 서로 사랑하라는 아름다운 가르침을 기억한다면, 우리도 마음의 사랑과 소망을 기도부탁하며 나누며 살아갑시다. 그것이 코이노니아의 삶입니다.
둘째로, 코이노니아는 서로를 향하여 영적인 기대와 소망을 갖는 것입니다. <20,21절> 보십시오. "양의 큰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를 영원한 언약의 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내신 평강의 하나님이 모든 선한 일에 너희를 온전케 하사 자기 뜻을 행하게 하시고 그 앞에 즐거운 것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속에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무궁토록 있을찌어다 아멘" 무슨 뜻인지 잘 파악하셨습니까?
표준새번역으로 읽어 드리겠습니다. "영원한 언약의 피를 흘려서 양들의 위대한 목자가 되신 우리 주 예수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이끌어내신 평화의 하나님이 여러분을 온갖 좋은 일에 어울리게 다듬질해 주셔서 자기의 뜻을 행하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 또 하나님께서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가운데 자기가 기뻐하시는 바를 이루시기를 빕니다. 예수그리스도께 영광이 영원무궁히 있기를 빕니다. 아멘."
무슨 장면인지 파악이 되셨습니까? 이번에는 저자가 교회를 향하여 무엇을 기도하는지를 밝혀 줍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들을 향하여 기대하고 바라는 소망이 무엇인지 밝혀 주는 것입니다.
제가 묻겠습니다. 여러분은 한 가족된 형제, 자매를 향하여 무엇을 바라며 무엇을 기대하십니까? "나 좀 도와 주십시오, 나 좀 인정해 주십시오, 내 편 들어 주십시오.." 이런 것 먼저 생각나면 그는 아직도 이기주의의 우물에 갇혀 있는 것입니다.
"잘 살아야 된다, 시집 장가 잘가고 아들 딸 잘 낳고 성공해야지.." 이런 바람과 격려도 인간다운 사랑이지만, 성령의 코이노니아, 영적이라 할 수는 없습니다.
저자가 그의 사랑하는 형제, 자매들을 기도할 때마다, 생각할 때마다 바라는 소망이 무엇입니까? "평강의 하나님이 모든 선한 일에 너희를 온전케 하사 자기 뜻을 행하게 하시고 그 앞에 즐거운 것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속에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무슨 내용입니까? 기도하는 핵심 내용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이 잘 준비되고 성숙하여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모습이 여러분 안에 이루어지를 기도합니다. 영적으로 잘 준비되고 강건하여져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예수님이 기뻐하시는 모습으로 세워져 가기를 간절히 바라고 소원하고 기도합니다. 영적 성숙을 향한 소망이고 하나님 앞에 아름다운 사람으로 바로 서기를 간절히 바라는 열망입니다.
<21절>의 "온전하게 하사"에 쓰인 헬라어 단어 카타르티조(katartidzo)는 원래 부러진 뼈를 바로 맞추거나, 찢어진 그물을 기우거나, 출항하기위하여 배를 수선하거나, 전쟁에 나가기 위하여 군인을 무장시키는 뜻을 지닌 단어입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어 거듭난 성도들도, 하나님 앞에 바로 서는, 영적 성숙, 무장이 필요합니다. 이 영적 무장이 잘 갖추어져야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영적으로 성숙, 무장할 수 있습니까? 이 카타르티조라는 단어가 쓰인 장면들을 보면, 해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1. 말씀으로서<딤전3:16,17>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하게 하려 함이라"
2. 기도로서<엡6:18> - 전신갑주를 입으라 하고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3. 지역교회의 교제를 통하여<엡4:11-12, 갈6:1>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4. 고난을 통해서<벧전5:10>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간 고난을 받은 너희를 친히 온전케 하시며 굳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케 하시리라"
히브리서 저자는 교회가, 형제, 자매들이 돈 많이 벌어서 부자 되거라, 꼭 성공하거라 이런 것 기대하지 않았고 이런 것 바라지 않았습니다. 영적으로 잘 준비되고 강건하여져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예수님이 기뻐하시는 모습으로 세워져 가기를 그는 간절히 바라고 소원하고 기도합니다.
교회의 코이노니아, 교회의 아름다움과 능력은 이 영적인 소망과 나눔이 얼마나 강건하냐, 얼마나 충만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교인이 많아도 교인들의 마음에 예수 잘 믿어서 세상에서 성공해야지, 넘 부럽지 않게 살아야지 이런 마음들이 지배적이면 그 교회는 세속적입니다. 영적인 교회는 서로서로를 향한 영적인 기대와 소망이 충만하고 지배적인 교회, 그 영적인 소망을 느낄 수 있는 분위기의 교회입니다.
영적 능력이라는 것은 세상에서 센세이션을 일으키거나 성공을 가져다 주는 힘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게 하고 예수님께서 기뻐하시는 모습, 예수님을 닮아가게 하는 능력이 영적 권능입니다.
예) (옥한흠 목사님의 설교) 설교 모두에 언급했던 옥한흠 목사님의 설교의 내용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지금 한국교회는 벼랑 끝에 서있는 위기의 상황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한국교회의 벼랑끝 위기의 제일 원인은 교회와 교회지도자의 거룩성의 상실입니다. 거룩성을 잃어버린 한국교회의 상황은 세속화의 위험 속에 구체적인 자기결단과 헌신은 결여한 채, 목소리를 높여 감성적인 찬송과 `주여 삼창'만 부르고 있는 것이라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 먼저 목회현장에서 잘못된 것을 고치는 것이 필요합니다. 냉철하게 분석해보면 지금 한국교회의 목회현장은 지나치게 비본질적인 것에 매달려 있습니다. 비본질적인 것에 매달려 소모하는 에너지가 너무 크다 보니 목회현장이 갱신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본질에 우선순위를 두고 과감하게 변화시켜도 좋을 것에 대해서는 결단하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교회가 성도 한 사람의 변화를 위해서 시간을 투자하고 우선순위를 두는 것, 그것이 바로 목회현장의 변화를 이끌어내는 출발점이 될 것입니다."
비본질적인 것, 세속적인 것에 소모하는 것에서 돌이켜 본질적인 것,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을 바로 세우는 것, 온전하게 세우는 것, 그럼으로써 직장에서, 가정에서, 국가와 사회에서 빛으로 소금으로 살아가게 하는 것에 교회는 초점이 맞추어져야 합니다.
제가 사랑하는 여러분들께 묻습니다. 당신은 하나님 앞에 바로 서셨습니까?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르며 살아갈 준비, 지혜와 용기가 준비되셨습니까?
우리 각자가 먼저 하나님 앞에 바로 서기를 소원하십시오. 이를 위하여, 말씀과 기도의 생활에 신실하고 지역교회에서 정상적인 신앙생활을 나누며 그리고 삶의 고난을 믿음으로 바라보며 믿음으로 승리하기를 도전하십시오.
한 걸음 더 나아가, 여러분은 서로서로를 향하여 어떤 기대와 소망을 갖고 계십니까? 우리가 서로를 향하여 서로의 모습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 각 사람을 하나님 앞에 바로 세우고 예수님의 뜻을 행할 수 있도록 무장시켜 주시는 모습을 바라는, 이 영적인 기대와 소망이 있을 때, 우리의 교회는 성령의 임재와 능력을 더욱 더 경험합니다.
성령의 코이노니아는 이 영적인 사랑과 소망의 마음이 공감되고 교통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 성령의 코이노니아는 예의(禮義)와 문안(問安)으로 나타나는 사랑의 인사입니다. <22-24절>,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권면의 말을 용납하라 내가 간단히 너희에게 썼느니라 우리 형제 디모데가 놓인 것을 너희가 알라 그가 속히 오면 내가 저와 함께 가서 너희를 보리라 너희를 인도하는 자와 및 모든 성도에게 문안하라 이달리야에서 온 자들도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히브리서 저자와 수신 교회와의 관계, 당연히 권면을 할 수 있는 관계이고 당연히 권면을 받아들여야 하는 관계임에도 불구하고 정중하게 "권면의 말을 용납하라"고 요청합니다. 어떻게 보면, 불필요한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는 정중한 인사를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긴 편지를 간단히 썼다고 하는 마음... 이 양반은 스케일이 참 큰 것같습니다. 자신이 수고와 진액을 쏟아서 글을 썼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수고를 간단한 것으로 돌리는 마음, 이런 마음이 예의이지요? 자신이 한 일은 쥐꼬리만큼 밖에 되지 않는데, 대단한 것인양 나팔을 부는 모습...무례한 것, 참 꼴불견이지요? 예의는 자신을 가리우는, 낮추는 마음입니다.
나아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근황을 나누고 서로서로에게 인사하는 모습.. 이것이 사랑의 문안이지요?
코이노니아를 나누는 또 하나의 방편이 예의와 문안입니다. 유교 전통의 폐해를 많이 겪은 현대의 우리나라 사람들은,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를 오해하여 예의를 갑갑한 것, 고리타분한 것이라 여기기 쉽지만, 예의는 사랑의 마음을 아름답게 표현하고자 하는 데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예기(禮記)에서 예를 이렇게 정의하였습니다. "예는 스스로를 낮추어 남을 존경하는 것이다." 자신을 낮추어 남을 존경하는 것, 이것이 사랑의 마음이지요?
물론 공자가 그랬듯이, 정중함과 예가 지나치면 고통이 되고 신중함도 예가 지나치면 비겁함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폼잡기 위한 지나친 예가 아니라, 사랑의 마음이 표현된 예의는 다른 사람에게 감동을 줍니다.
성령의 코이노니아라 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 자매의 교제라 하여 아무렇게나 관계하고 아무렇게나 행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의 마음은 아름답게 표현될수록 더욱 소중하게 나누어지고 전달되고 느껴집니다. 절제하지 못하고 마구 쏟아지는 말과 행동은 사랑이 아닐 경우가 많습니다. 욕망은 폭풍이나 사랑은 오늘 아침의 햇살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가족된 형제, 자매 여러분, 사랑으로 문안하기를 힘쓰십시오.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사랑하는 아름다운 마음을 적절한 예우로 표현해 보십시오.
예) 신발...예배당 물건 사용하기...
그리고 마지막으로 저자는 <25절> "은혜가 너희 모든 사람에게 있을지어다" 하나님의 은혜를 기원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성령의 코이노니아가 이루어지게하는 기반, 이 모든 사랑의 관계, 사랑의 나눔이 풍성하게 하는 근원이고 동력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깨달아 알면 알수록 그 마음은 부드러워지고 사랑이 풍성해지며 비로소 코이노니아를 나누는 마음, 기도부탁을 주고 받으며 영적인 기대와 소망을 나누며 사랑의 마음이 예의와 문안으로 아름답게 고백됩니다. 아니,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해야 성령의 코이노니아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합니까? 하나님의 은혜는 물과 같아서 낮은 마음을 향하여 흘러갑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가르쳐 주셨듯이, 우리로 살게 하고 우리로 참 사랑을 느끼게 하고 순전한 사랑을 드리우게 하는 하나님의 은혜는 오만한 마음, 도도한 마음에는 머물러 있지 못합니다. 도리어 가난한 심령, 자신의 죄인됨을 인하여 애통하는 심령에 하나님의 은혜는 물처럼 흘러 넘칩니다.
자신의 못됨을 깨달은 마음, 그래서 기꺼이 말씀을 받아들이고자 하는 마음, 기꺼이 예수님의 멍에를 매고 배우고자 하는 착하고 좋은 마음밭에 하나님의 은혜는 풍성히 내려집니다.
오늘 예배를 드리는 당신의 마음은 어떻습니까? 진정 가난한 마음,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임재를 사모하는 가난한 마음이십니까? 눈물이 날 정도로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임재를 사모하는 사람이라면 그는 복이 있는 사람입니다.
혹시 하나님 앞에 원망과 분노, 판단과 냉소로 혹시 얼룩져 있지는 않습니까? 그렇게 느껴진다면... 애통해 보십시오. 독버섯처럼 질긴 나의 이기의 습관을 십자가 앞에 토하며 애통해 보십시오.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합시다. 언제나 착하고 좋은 마음밭을 지킬 수 있도록,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에 가까이 나아갑시다. 빛이 눈부시다고 등 돌리지 말고 나를 깨우치는 예수님의 말씀을 더욱 사모하며 듣기를 힘씁시다.
그 은혜를 입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비로소 우리도 진정으로 서로 사랑하며 성령의 코이노니아를 이루어 갑시다.
나의 마음과 삶의 이야기, 하나씩 하나씩 기도부탁을 주고 받으며 함께 기도하며, 서로를 향한 아름다운 영적 소망의 마음 품으며 기도해 주며 그리고 예의와 문안으로 아름답게 표현되는 사랑의 마음... 넉넉히 나누며 교회를 이루어 갑시다.
은혜를 신뢰하는 믿음의 기초 위에 성령께서 사랑으로 교통하시는 능력의 공동체를 꿈꾸며 세워갑시다. 그럼으로써 세상을 이기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공동체를... 하나님께서 저희에게 기대하십니다.
/이덕재 목사
본문: 히브리서 13장 18 - 25절
교회세습이 사회적 지탄을 받고 있는 오늘날에 자신의 정년보다 5년을 앞당겨 은퇴하여 아름다운 본을 보인 사랑의 교회 옥한흠 목사님께서 지난 주에 대구 경북지역 교회갱신 협의회에서 설교를 하셨습니다. 그 설교의 내용은 "지금 한국교회는 벼랑 끝에 서 있는 위기의 상황을 맞이하고 있으니 교회와 교회 지도자 여러분, 경성하여 신앙과 교회의 본질에 충실하십시오" 였습니다. 옥한흠 목사님뿐만이 아니라 많은 사람이 한국교회의 위기 상황을 진단하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 위기상황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과연 어떻게 하는 것이 교회의 본질에 충실한 것인가? 에 대한 명확한 해답을 얻고 실천하는 길입니다.
이에 대한 중요한 해답이라 할 수 있는 한 영역을, 대천덕 신부님은 그의 유언이라 할 수 있는 "한국교회에 드리는 글"에서 "성령의 코이노니아"를 제시했습니다. 교회의 교회다움의 회복을 위하여는, 예배 후 커피 한 잔을 나누는 정도가 아니라 마음과 삶을 함께 나누는 성령의 코이노니아의 회복과 성장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코이노니아, 우리 말이나 영어나 그 정확한 의미를 번역할 단어가 없어서 아쉬움이 있지만, 그 뜻, 먼저는 사랑의 나눔입니다. 사랑하는 마음에서 자기의 것을 자기의 것이라 주장하지 않고 함께 나누는 것을 말합니다. 체면치레 격으로 나누는 것이 아니라, 100% 함께 나누는 것을 말합니다.
조폭이 미화되는 사회적 현상은 우리 시대의 영혼들이, '하나를 위한 다수, 다수를 위한 하나"로 표현되는, 충성(忠誠), 결속(結束), 의리(義理)의 가치가 존중되는 공동체에 대한 갈망, 그리움 때문입니다. 교회의 주요한 특징은 공동체이며 교회의 생명력은 코이노니아의 여부에 있습니다.
코이노니아는 또한 영적인 나눔입니다. 100% 자기의 것을 함께 나누는 것이라 하여 "넌 부자이면서 왜 나한테 돈을 안 나누어 주는 거야" 한다면 그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공산주의자입니다. 성령 안에 거하는 자는 자신의 가난 때문에 부자를 원망, 질시하여 공격적이지 않습니다. 또 성령 안에 거하는 자는 자신의 소유가 많은 것 때문에 으스대려고 하지 않습니다. 성령의 코이노니아은 아름답게, 바르게 표현되는 사랑의 교제입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그의 서신을 끝맺으면서 부탁하며 강조하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이 성도의 코이노니아를 어떻게 시작하며, 어떻게 진행되어 가는가에 대한 구체적이고도 실제적인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성령 안에서 코이노니아를 이루어 갈 것인가? 그럼으로써 어떻게 세상을 이기고 교회의 본질을 회복하여 위기에 처한 한국교회에 맑은 물을 흘러낼 것인가? 이 실제적인 질문에 대하여, 오늘 본문은 명확한 대답을 해 줍니다.
첫째로, 성령의 코이노니아는 기도부탁을 주고받는 관계 속에서 세워져 갑니다. <18,19절>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 우리가 모든 일에 선하게 행하려 하므로 우리에게 선한 양심이 있는 줄을 확신하노니 내가 더 속히 너희에게 돌아가기를 위하여 너희 기도함을 더욱 원하노라" 무엇을 하는 장면입니까? 히브리서 저자가 히브리서를 받는 교회, 형제, 자매들에게 자신을 위한 기도를 부탁하는 장면입니다.
그의 삶과 사역에는 항상 핍박자와 비방자들이 따라 다녔습니다.
예) 인간이 어리석고 연약하기 때문에 사실은 그렇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여러사람이 나쁘게 평가하면, 많은 사람들은 그 사람이 뭔가 잘못되었구나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지지도를 중요시 여기는 정치인들은 언론 플레이를 대단히 중요시 여깁니다.
전도자의 삶을 보았고 그 명확한 가르침을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핍박자와 비방자들의 집요한 비난 때문에, 히브리서 저자의 가르침을 받는 사람들은 때론 흔들리기도 하곤 하였습니다. 그리고 교회가 흔들리는 모습을 바라보는 히브리서 저자 자신의 마음이 상하고 아픔이 있음을 그는 애써 감추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선하게 살고자 하고 양심에 거리낌이 없이 살고자 하는데, 오해하고 비난하고 혹평하는 사람들에 의하여 그 자신의 마음에도 상함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저자는 자신의 연약한 마음을 나누며 기도를 부탁합니다. 여러분, <18절>과 같은 기도부탁을 받았을 때, 여러분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기도해 주시겠습니까? <18절>에 구체적인 기도제목은 나오지 않았지만, 이런 내용임을 우리는 짐작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비난하고 혹평함에도 불구하고 제가 하나님 앞에 선한 양심이 굴곡되지 않고 한결같이 드려질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그 사람들 때문에 상심하여 치우치거나 싸우려고 하지 않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그리고 사랑하는 여러분, 보고 싶습니다.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주시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기도를 부탁합니다.
여러분은 자신의 마음과 삶을 기도부탁하며 함께 기도하며 살고 계십니까? 여러분의 신앙생활에는 함께 삶을 나누며 기도하는 교제, 성령의 코이노니아가 이루어지고 있습니까?
세상의 탁류가 교회에까지 넘쳐와 교회의 모습도 일그러지게 한, 큰 요인이 개인주의(個人主義)입니다. 개인주의는 나 밖에 모르는 마음, 생각을 말합니다. 그래서 신앙생활도 '나홀로 예배당에'를 현대인들은 선호합니다.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이 조용히 종교의무를 행사하고 와도 되는 교회를 현대인들은 선호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가르쳐 주는, 하나님이 부르신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은 '나홀로 예배당에'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부르심은 하나님의 가족으로서, 교회 공동체의 일원으로서의 부르심입니다.
그 개인주의의 신앙, 혼자 고고히, 고상히, 고결하게 하려고 하지만, 그것은 도리어 고독한 것이며, 고통스러운 것이며 고집스러운 것이며 더 나아가 사실은 고양이처럼 고약한 신앙생활입니다.
믿음은 사랑이고 사랑은 나눔, 코이노니아입니다. 그러면 무엇을 나누어야 합니까? 또 어떻게 나누시겠습니까? 먼저 기도를 부탁하십시오. 함께 기도하는 시간을 가지십시오. 예) <단2장> 느부갓네살왕(느네 부친이 갓 네 살에 낳았대? 해서 느부갓네살왕입니다) 이 꿈을 꾸었는데, 깨고 나니 가물가물 떠 오르지 않습니다. 당시의 석학들, 박사들에게 자신의 꿈을 알아맞히라고 하나, 아니 꿈의 내용을 이야기해 주어야 해몽을 해 주지, 어떻게 알아맞춥니까? 하자 왕이 대노하여 박사들을 다 죽여 버리겠다고 위협합니다.
그 소식을 들은 다니엘, 시위대장에게 꿈을 알아 맞히고 해석할 기한을 달라고 부탁하고 그리고 뭐합니까? <단2:17, 18절> 보십시오. 세 명의 친구들에게 기도를 부탁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다니엘에게 왕의 꿈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줍니다. 이것이 함께 기도부탁하며 함께 기도하며 사는 비밀의 능력입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가 그랬듯이, 기도를 부탁하고 함께 기도하고.. 그 가운데 하나님께서는 권능으로 역사하시고 도와 주십니다.
당신도 기도부탁을 주고받으며, 함께 기도하며 사십시오. 저희가 salt와 light 모임으로 구분하여 작은 공동체로 모이는 주요한 목적이 이것입니다. 내 마음과 삶의 기도제목을 함께 나누며 함께 기도하며 그 가운데 성령께서 사랑으로 교통하시는, 성령의 코이노니아를 누리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예수님을 보내시는 사랑의 나눔이 있어서 오늘 우리가 생명을 누림을 기억한다면, 또 그 예수님이 우리도 서로 사랑하라는 아름다운 가르침을 기억한다면, 우리도 마음의 사랑과 소망을 기도부탁하며 나누며 살아갑시다. 그것이 코이노니아의 삶입니다.
둘째로, 코이노니아는 서로를 향하여 영적인 기대와 소망을 갖는 것입니다. <20,21절> 보십시오. "양의 큰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를 영원한 언약의 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내신 평강의 하나님이 모든 선한 일에 너희를 온전케 하사 자기 뜻을 행하게 하시고 그 앞에 즐거운 것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속에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무궁토록 있을찌어다 아멘" 무슨 뜻인지 잘 파악하셨습니까?
표준새번역으로 읽어 드리겠습니다. "영원한 언약의 피를 흘려서 양들의 위대한 목자가 되신 우리 주 예수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이끌어내신 평화의 하나님이 여러분을 온갖 좋은 일에 어울리게 다듬질해 주셔서 자기의 뜻을 행하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 또 하나님께서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가운데 자기가 기뻐하시는 바를 이루시기를 빕니다. 예수그리스도께 영광이 영원무궁히 있기를 빕니다. 아멘."
무슨 장면인지 파악이 되셨습니까? 이번에는 저자가 교회를 향하여 무엇을 기도하는지를 밝혀 줍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들을 향하여 기대하고 바라는 소망이 무엇인지 밝혀 주는 것입니다.
제가 묻겠습니다. 여러분은 한 가족된 형제, 자매를 향하여 무엇을 바라며 무엇을 기대하십니까? "나 좀 도와 주십시오, 나 좀 인정해 주십시오, 내 편 들어 주십시오.." 이런 것 먼저 생각나면 그는 아직도 이기주의의 우물에 갇혀 있는 것입니다.
"잘 살아야 된다, 시집 장가 잘가고 아들 딸 잘 낳고 성공해야지.." 이런 바람과 격려도 인간다운 사랑이지만, 성령의 코이노니아, 영적이라 할 수는 없습니다.
저자가 그의 사랑하는 형제, 자매들을 기도할 때마다, 생각할 때마다 바라는 소망이 무엇입니까? "평강의 하나님이 모든 선한 일에 너희를 온전케 하사 자기 뜻을 행하게 하시고 그 앞에 즐거운 것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속에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무슨 내용입니까? 기도하는 핵심 내용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이 잘 준비되고 성숙하여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모습이 여러분 안에 이루어지를 기도합니다. 영적으로 잘 준비되고 강건하여져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예수님이 기뻐하시는 모습으로 세워져 가기를 간절히 바라고 소원하고 기도합니다. 영적 성숙을 향한 소망이고 하나님 앞에 아름다운 사람으로 바로 서기를 간절히 바라는 열망입니다.
<21절>의 "온전하게 하사"에 쓰인 헬라어 단어 카타르티조(katartidzo)는 원래 부러진 뼈를 바로 맞추거나, 찢어진 그물을 기우거나, 출항하기위하여 배를 수선하거나, 전쟁에 나가기 위하여 군인을 무장시키는 뜻을 지닌 단어입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어 거듭난 성도들도, 하나님 앞에 바로 서는, 영적 성숙, 무장이 필요합니다. 이 영적 무장이 잘 갖추어져야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영적으로 성숙, 무장할 수 있습니까? 이 카타르티조라는 단어가 쓰인 장면들을 보면, 해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1. 말씀으로서<딤전3:16,17>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하게 하려 함이라"
2. 기도로서<엡6:18> - 전신갑주를 입으라 하고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3. 지역교회의 교제를 통하여<엡4:11-12, 갈6:1>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4. 고난을 통해서<벧전5:10>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간 고난을 받은 너희를 친히 온전케 하시며 굳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케 하시리라"
히브리서 저자는 교회가, 형제, 자매들이 돈 많이 벌어서 부자 되거라, 꼭 성공하거라 이런 것 기대하지 않았고 이런 것 바라지 않았습니다. 영적으로 잘 준비되고 강건하여져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예수님이 기뻐하시는 모습으로 세워져 가기를 그는 간절히 바라고 소원하고 기도합니다.
교회의 코이노니아, 교회의 아름다움과 능력은 이 영적인 소망과 나눔이 얼마나 강건하냐, 얼마나 충만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교인이 많아도 교인들의 마음에 예수 잘 믿어서 세상에서 성공해야지, 넘 부럽지 않게 살아야지 이런 마음들이 지배적이면 그 교회는 세속적입니다. 영적인 교회는 서로서로를 향한 영적인 기대와 소망이 충만하고 지배적인 교회, 그 영적인 소망을 느낄 수 있는 분위기의 교회입니다.
영적 능력이라는 것은 세상에서 센세이션을 일으키거나 성공을 가져다 주는 힘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게 하고 예수님께서 기뻐하시는 모습, 예수님을 닮아가게 하는 능력이 영적 권능입니다.
예) (옥한흠 목사님의 설교) 설교 모두에 언급했던 옥한흠 목사님의 설교의 내용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지금 한국교회는 벼랑 끝에 서있는 위기의 상황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한국교회의 벼랑끝 위기의 제일 원인은 교회와 교회지도자의 거룩성의 상실입니다. 거룩성을 잃어버린 한국교회의 상황은 세속화의 위험 속에 구체적인 자기결단과 헌신은 결여한 채, 목소리를 높여 감성적인 찬송과 `주여 삼창'만 부르고 있는 것이라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 먼저 목회현장에서 잘못된 것을 고치는 것이 필요합니다. 냉철하게 분석해보면 지금 한국교회의 목회현장은 지나치게 비본질적인 것에 매달려 있습니다. 비본질적인 것에 매달려 소모하는 에너지가 너무 크다 보니 목회현장이 갱신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본질에 우선순위를 두고 과감하게 변화시켜도 좋을 것에 대해서는 결단하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교회가 성도 한 사람의 변화를 위해서 시간을 투자하고 우선순위를 두는 것, 그것이 바로 목회현장의 변화를 이끌어내는 출발점이 될 것입니다."
비본질적인 것, 세속적인 것에 소모하는 것에서 돌이켜 본질적인 것,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을 바로 세우는 것, 온전하게 세우는 것, 그럼으로써 직장에서, 가정에서, 국가와 사회에서 빛으로 소금으로 살아가게 하는 것에 교회는 초점이 맞추어져야 합니다.
제가 사랑하는 여러분들께 묻습니다. 당신은 하나님 앞에 바로 서셨습니까?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르며 살아갈 준비, 지혜와 용기가 준비되셨습니까?
우리 각자가 먼저 하나님 앞에 바로 서기를 소원하십시오. 이를 위하여, 말씀과 기도의 생활에 신실하고 지역교회에서 정상적인 신앙생활을 나누며 그리고 삶의 고난을 믿음으로 바라보며 믿음으로 승리하기를 도전하십시오.
한 걸음 더 나아가, 여러분은 서로서로를 향하여 어떤 기대와 소망을 갖고 계십니까? 우리가 서로를 향하여 서로의 모습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 각 사람을 하나님 앞에 바로 세우고 예수님의 뜻을 행할 수 있도록 무장시켜 주시는 모습을 바라는, 이 영적인 기대와 소망이 있을 때, 우리의 교회는 성령의 임재와 능력을 더욱 더 경험합니다.
성령의 코이노니아는 이 영적인 사랑과 소망의 마음이 공감되고 교통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 성령의 코이노니아는 예의(禮義)와 문안(問安)으로 나타나는 사랑의 인사입니다. <22-24절>,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권면의 말을 용납하라 내가 간단히 너희에게 썼느니라 우리 형제 디모데가 놓인 것을 너희가 알라 그가 속히 오면 내가 저와 함께 가서 너희를 보리라 너희를 인도하는 자와 및 모든 성도에게 문안하라 이달리야에서 온 자들도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히브리서 저자와 수신 교회와의 관계, 당연히 권면을 할 수 있는 관계이고 당연히 권면을 받아들여야 하는 관계임에도 불구하고 정중하게 "권면의 말을 용납하라"고 요청합니다. 어떻게 보면, 불필요한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는 정중한 인사를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긴 편지를 간단히 썼다고 하는 마음... 이 양반은 스케일이 참 큰 것같습니다. 자신이 수고와 진액을 쏟아서 글을 썼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수고를 간단한 것으로 돌리는 마음, 이런 마음이 예의이지요? 자신이 한 일은 쥐꼬리만큼 밖에 되지 않는데, 대단한 것인양 나팔을 부는 모습...무례한 것, 참 꼴불견이지요? 예의는 자신을 가리우는, 낮추는 마음입니다.
나아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근황을 나누고 서로서로에게 인사하는 모습.. 이것이 사랑의 문안이지요?
코이노니아를 나누는 또 하나의 방편이 예의와 문안입니다. 유교 전통의 폐해를 많이 겪은 현대의 우리나라 사람들은,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를 오해하여 예의를 갑갑한 것, 고리타분한 것이라 여기기 쉽지만, 예의는 사랑의 마음을 아름답게 표현하고자 하는 데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예기(禮記)에서 예를 이렇게 정의하였습니다. "예는 스스로를 낮추어 남을 존경하는 것이다." 자신을 낮추어 남을 존경하는 것, 이것이 사랑의 마음이지요?
물론 공자가 그랬듯이, 정중함과 예가 지나치면 고통이 되고 신중함도 예가 지나치면 비겁함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폼잡기 위한 지나친 예가 아니라, 사랑의 마음이 표현된 예의는 다른 사람에게 감동을 줍니다.
성령의 코이노니아라 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 자매의 교제라 하여 아무렇게나 관계하고 아무렇게나 행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의 마음은 아름답게 표현될수록 더욱 소중하게 나누어지고 전달되고 느껴집니다. 절제하지 못하고 마구 쏟아지는 말과 행동은 사랑이 아닐 경우가 많습니다. 욕망은 폭풍이나 사랑은 오늘 아침의 햇살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가족된 형제, 자매 여러분, 사랑으로 문안하기를 힘쓰십시오.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사랑하는 아름다운 마음을 적절한 예우로 표현해 보십시오.
예) 신발...예배당 물건 사용하기...
그리고 마지막으로 저자는 <25절> "은혜가 너희 모든 사람에게 있을지어다" 하나님의 은혜를 기원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성령의 코이노니아가 이루어지게하는 기반, 이 모든 사랑의 관계, 사랑의 나눔이 풍성하게 하는 근원이고 동력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깨달아 알면 알수록 그 마음은 부드러워지고 사랑이 풍성해지며 비로소 코이노니아를 나누는 마음, 기도부탁을 주고 받으며 영적인 기대와 소망을 나누며 사랑의 마음이 예의와 문안으로 아름답게 고백됩니다. 아니,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해야 성령의 코이노니아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합니까? 하나님의 은혜는 물과 같아서 낮은 마음을 향하여 흘러갑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가르쳐 주셨듯이, 우리로 살게 하고 우리로 참 사랑을 느끼게 하고 순전한 사랑을 드리우게 하는 하나님의 은혜는 오만한 마음, 도도한 마음에는 머물러 있지 못합니다. 도리어 가난한 심령, 자신의 죄인됨을 인하여 애통하는 심령에 하나님의 은혜는 물처럼 흘러 넘칩니다.
자신의 못됨을 깨달은 마음, 그래서 기꺼이 말씀을 받아들이고자 하는 마음, 기꺼이 예수님의 멍에를 매고 배우고자 하는 착하고 좋은 마음밭에 하나님의 은혜는 풍성히 내려집니다.
오늘 예배를 드리는 당신의 마음은 어떻습니까? 진정 가난한 마음,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임재를 사모하는 가난한 마음이십니까? 눈물이 날 정도로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임재를 사모하는 사람이라면 그는 복이 있는 사람입니다.
혹시 하나님 앞에 원망과 분노, 판단과 냉소로 혹시 얼룩져 있지는 않습니까? 그렇게 느껴진다면... 애통해 보십시오. 독버섯처럼 질긴 나의 이기의 습관을 십자가 앞에 토하며 애통해 보십시오.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합시다. 언제나 착하고 좋은 마음밭을 지킬 수 있도록,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에 가까이 나아갑시다. 빛이 눈부시다고 등 돌리지 말고 나를 깨우치는 예수님의 말씀을 더욱 사모하며 듣기를 힘씁시다.
그 은혜를 입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비로소 우리도 진정으로 서로 사랑하며 성령의 코이노니아를 이루어 갑시다.
나의 마음과 삶의 이야기, 하나씩 하나씩 기도부탁을 주고 받으며 함께 기도하며, 서로를 향한 아름다운 영적 소망의 마음 품으며 기도해 주며 그리고 예의와 문안으로 아름답게 표현되는 사랑의 마음... 넉넉히 나누며 교회를 이루어 갑시다.
은혜를 신뢰하는 믿음의 기초 위에 성령께서 사랑으로 교통하시는 능력의 공동체를 꿈꾸며 세워갑시다. 그럼으로써 세상을 이기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공동체를... 하나님께서 저희에게 기대하십니다.
/이덕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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