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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의 평화 공동체

이사야 정용섭 목사............... 조회 수 2528 추천 수 0 2010.07.15 20:0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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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사2:1-5 
설교자 : 정용섭 목사 
참고 : http://dabia.net/xe/283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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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에 시작된 유대인들의 민족주의 운동을 일컬어 시오니즘이라고 합니다. 이 운동은 이스라엘이 2차 세계 대전이 끝난 뒤 1948년 팔레스틴 지역에 나라를 세우게 된 기초였습니다. 그 뒤로 그곳에서는 크고 작은 무력 충돌이 그치지 않았습니다. 중동은 지금도 세계의 화약고와 비슷합니다. 물론 유대인들은 그런 군사적 충돌을 원하지 않았겠지만 결과적으로는 그렇게 되었습니다. 시오니즘이 19세기에 갑자기 생긴 건 아닙니다. 그 이전에도 수차례에 걸쳐서 일어났습니다. 뿌리를 따라가면 구약성서 곳곳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이사야서도 그 사실을 말합니다. 2절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말일에 여호와의 전의 산이 모든 산 꼭대기에 굳게 설 것이요, 모든 작은 산 위에 뛰어나리니 만방이 그리로 모여들 것이라.” 여호와의 전이 있는 산은 시온 산, 즉 여호와의 산입니다. 때가 되면 그 산이 모든 산 중에서 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하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세계 모든 민족들이 그곳으로 몰려든다고 합니다. 유대인들은 이런 꿈을 꾸며 살아왔습니다. 지금도 그런 꿈을 잃지 않았겠지요.

 

객관적으로 본다면 그들의 이런 꿈은 허황하기 그지없습니다. 그들이 말하는 예루살렘의 시온 산은 정말 보잘 것 없는 작은 언덕에 불과합니다. 예루살렘도 그들의 주장과 달리 세상에 내세울만한 게 별로 없습니다. 스위스의 제네바, 체코의 프라하, 프랑스의 파리, 독일의 베를린에 비하면 초라합니다. 대한민국의 서울이나 북한의 평양과도 비교될 수 없을 정도로 척박한 곳입니다. 이스라엘 자체가 아주 작은 나라입니다. 주변의 제국에 의해서 끊임없이 시달렸습니다. 예루살렘은 역사적으로 여러 번 함락되었고, 예루살렘 성전도 똑같이 파괴와 재건이 반복되었습니다. 예루살렘의 시온이 세계의 중심이 되고, 이스라엘 민족이 인류 역사의 주인공이 된다는 그들의 꿈은 터무니없어 보입니다. 이는 마치 많은 북한 주민들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나라에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주제 파악이 안 되는 것이지요.

 

우리 기독교인들은 유대인들의 그런 망상에 가까운 꿈을 무시할 수만은 없습니다. 그들의 구약성서를 우리가 그들과 똑같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문제가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 사이에 계속되는 영적 긴장이고 충돌입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마르키온이나 하르낙의 주장처럼 구약성서를 우리가 성경에서 빼버리면 될까요? 또는 유대인들의 시오니즘을 그대로 인정해야 할까요? 양쪽 모두 우리에게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우리에게는 다음의 두 가지 작업이 필요합니다. 첫째, 유대인들의 시오니즘을 확증해주는 본문을 정확하게 해석하는 것이며, 둘째, 그것이 신약성서에서 어떻게 완성되었는지를 찾는 일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궁극적 관심

 

구약성서가 이스라엘을 선민으로 주장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온 세계 민족 중에서 이스라엘을 하나님이 특별하게 선택했다고 말합니다. 이런 선택 사상은 아브라함에서부터 시작됩니다. 하나님은 갈대아 우르에서 우상을 섬기고 있는 아브라함을 불러내시고 가나안으로 인도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들과 약속을 맺으셨습니다. 그 약속이 이스라엘 역사를 계속 관통해나갑니다. 이스라엘이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 떨어져도 하나님은 그들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이런 선택사상은 급기야 앞에서 말씀드린 시오니즘에서 볼 수 있듯이 이스라엘이 세계의 중심 국가가 된다는 생각으로까지 발전됩니다.

 

이런 배타적인 선민사상은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우리 기독교인들에게도 자리합니다. 그것의 극단이 칼뱅의 이중예정론입니다. 하나님이 구원할 사람과 버릴 사람을 이중적으로 예정해놓으셨다는 주장입니다. 이중예정까지는 안 간다고 하더라도 거의 모든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에게 특별히 선택받았다고 믿는다는 데에는 차이가 없습니다. 우리가 이스라엘의 배타적인 시오니즘을 불쾌하게 생각하듯이 세상 사람들도 기독교인들의 그런 생각을 불쾌하게 생각할 겁니다.

 

여기에는 예정론에 대한 오해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예정론은 어떤 대상을 구원의 자리에서 배척해내기 위한 교리가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말할 수 없는 감격의 표현입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이 살림을 받았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것을 종교적인 언어로 표현해보십시오. 하나님의 예정을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신앙고백적인 언어를 사실적인 언어로 오해하면 곤란합니다. 이런 오해는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서만이 아니라 교회 안의 사람들에게서도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선택을 자신들의 특권으로 받아들이는 일이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예수구원, 불신지옥이라는 팻말을 들고 사람들을 위협하는 겁니다. 이런 행태는 하나님의 구원 은총에 대한 모독입니다.

 

유대인들의 선민사상도 이와 비슷합니다. 그것은 유대인들이 다른 민족보다 우월한 권한을 행사한다는 데에 의미가 있는 게 아니라 그들의 사명에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청지기로 부르신 것이지 특권을 부여하기 위해 부르신 게 아닙니다. 그들이 감당해야 할 과제가 중요합니다. 그들의 과제는 자신들을 높이는 데 있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을 알리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선포하는 일입니다. 바로 거기서만 하나님의 선민이라는 이스라엘의 정체성이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 과제, 그런 사명을 망각하면 즉시 그들은 선민으로부터 제외됩니다.

 

기독교인의 신앙생활도 이런 방식으로 이해해야합니다. 공동체를 꾸리기 위해서 각각의 직분이 주어집니다. 그것은 결코 특권이 아니라 청지기의 사명입니다. 하나님의 일이 활성화되도록 숙제를 맡은 것뿐입니다. 여기서 숙제를 감당해야 할 직분을 맡은 사람이 자기 자신을 드러내려고 한다면 이미 청지기의 사명을 망각한 것입니다. 무엇이 하나님의 일에 집중하는 것이고, 무엇이 자기를 드러내는 것인지를 구분하기가 쉽지는 않습니다.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구원을 바르게 선포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독선적인 시오니즘에 빠지기도 하는 것처럼 우리에게서 두 가지 일들이 뒤섞일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둘은 구분됩니다. 구분되어야만 합니다. 그걸 구분하는 것이 곧 영적으로 깨어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것을 구분할 수 있는 작은 기준을 하나만 말씀드리겠습니다. 교회에서 자기가 맡은 직책을 내려놓는 것이 섭섭하게 생각되면 그것은 하나님의 일이 아니라 자기에게 마음을 둔 증거입니다. 목사가 목사 일을 그만두는 게 섭섭하게 다가오면 그는 이미 하나님의 일을 핑계로 자기 일을 한 겁니다. 저는 저 자신에게 늘 묻습니다. 목사를 지금 그만 두는 걸 섭섭하게 생각하지 않겠냐고 말입니다. 목사로 살든지 그 직을 내려놓든지 하나님과의 관계는 달라질 게 하나도 없습니다. 솔직하게 말하면 목사직은 짐입니다. 그 짐을 내려놓는 건 안식을 얻는 일입니다. 너무 이상적인 말인가요? 아닙니다. 저는 세상살이도 이와 똑같다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우리의 영성이 어떤 차원에 놓여 있는가 하는 거겠지요. 우리의 영혼이 무엇에 관심을 두고 있느냐 하는 데에 있겠지요. 나 자신인가요, 하나님인가요?

시온으로 모든 민족이 모여든다는 이사야의 선포는 단순히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선택해서 높이셨다는 사실을 말하려는 게 아닙니다. 그들을 높이신 이유가 중요합니다. 그들을 통해서 선포되는 말씀이 중요합니다. 이런 말씀이 없었다면 구약성서는 기독교의 경전으로 받아들여지지 못했을 겁니다.

 

보습과 낫

 

이사야가 전하는 그 말씀의 내용이 무엇인지 4절 말씀을 그대로 읽겠습니다. “그가 열방 사이에 판단하시며 많은 백성을 판결하시리니 무리가 그들의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그들의 창을 쳐서 낫을 맞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하지 아니하리라.” 앞에서 말한 내용과 비교하면 참으로 놀라운 말씀입니다. 이사야는 바로 앞에서 이스라엘이 세계의 중심 국가가 될 듯이 말했습니다. 모든 민족들이 예루살렘의 시온으로 몰려온다고 말입니다. 이런 초일류 국가가 되는 방법이 무엇일까요? 그걸 가능하게 하는 힘이 무엇인가요? 경제력과 군사력입니다. 지금 세계를 호령하고 있는 나라가 어딘지 보세요. 지난 부시 대통령 당시에 미국은 근거로 없이, 또는 없는 근거를 만들어서 이라크를 공격했습니다. 세계 경찰국가처럼 큰 소리 쳤습니다. 세계 모든 나라가 미국을 두려워하면서 그 나라로부터 인정을 받으려고 애를 씁니다. 그중의 일본과 대한민국이 선봉에 서 있겠지요. 미국이 세계 최강국으로 지위를 누릴 수 있는 근거는 바로 경제력과 군사력입니다. 현재 이스라엘이 중동에서 큰 소리를 치는 이유도 바로 경제력과 군사력이 막강하기 때문입니다. 그게 세상의 이치입니다.

 

이사야는 전혀 다른 말을 합니다. 마지막 때에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사람들은 칼을 쳐서 땅을 가는 보습을 만들고, 사람을 찌르는 창으로 풀과 나무를 베는 낫을 만들게 될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나라끼리 더 이상 칼로 치지 않고, 전쟁 연습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상한 예언입니다. 이런 방식으로 이스라엘이 세계 최고 국가가 될 수는 없는데도 이사야는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과감하게 전합니다. 본문과 똑같은 말씀을 전하는 미가는 이런 세계를 더 구체적으로 묘사합니다. “각 사람이 자기 포도나무 아래와 자기 무화과나무 아래에 앉을 것이라. 그들을 두렵게 할 자가 없으리니 이는 만군의 여호와의 입이 이같이 말씀하셨음이라.”(미 4:3)    

 

이사야와 미가가 전하는 이런 세상을 받아들지 못하는, 심심해하는, 기분 나쁘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겠지요. 우선 전쟁을 통해서 경제적인 이익을 찾는 이들이 그들입니다. 창과 칼로 농기구를 만든다면 군수산업체는 문을 닫아야 합니다. 전쟁 연습을 하지 않는다면 지금 별을 단 장성들도 모두 농사를 짓거나 산업현장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미국을 중심으로 소위 선진국의 군수산업체가 펼치는 로비는 막강합니다. 재고 무기를 소비하기 위해서 제삼국에서 전쟁을 일으킬 수 있을 정도라고 합니다. 바라기는 한반도가 다시 이런 군사 강국의 재고무기 소비나 신무기 실험장이 되지 않았으면 합니다.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어야 한다는 이사야의 예언은 오늘날 현실성이 있을까요?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를 희망하는 우리에게는 그런 현실성보다 예언자적 상상력이 더 중요합니다. 이런 예언자적 상상을 해봅니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다음 유엔 총회에서 이사야와 미가의 이 본문을 실제로 실천하자고 제안하는 것입니다. 각국의 대표자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반 총장은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핀잔을 들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특히 군사력이 강한 나라일수록 반대가 심할 겁니다. 유엔에 무기감축 논의가 없는 건 아닙니다. 그런데 대개 형식적입니다. 핵무기만 해도 그렇습니다. 지금 북한과 이란이 이 문제로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구상의 핵무기는 거의 대부분이 미국과 러시아가 나눠 갖고 있습니다. 그 뒤를 중국, 프랑스, 인도 등이 따릅니다. 먼저 기존의 핵보유국이 핵 감축의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하고 실천해야 합니다. 솔선수범을 보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실질적인 노력 없이 새롭게 핵무기를 개발하는 나라만을 통제하려고 한다면 핵무기 감축의 진정성과 형평성에 문제가 있겠지요.

 

지금 우리는 남의 걱정을 할 때가 아닙니다. 어제는 8.15 광복절 64돌이 되는 날이었습니다. 일제 치하에서 해방이 되면 이렇게 오랜 세월을 남북이 분단으로 지내리라는 걸 누가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남북한 모두 군사비에 지출하는 비용이 천문학적입니다. 국민 총생산에서 차지하는 국방비의 비율은 북한이 훨씬 높지만 총액은 남한이 훨씬 많습니다. 남한이나 북한 모두 칼과 창을 만들고, 전쟁 연습에 많은 국력을 낭비하고 있습니다. 이사야와 미가의 예언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읽는 우리 기독교인은 이런 분단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합니까? 나 몰라라 해도 되는 건가요? 아니면 국가가 시키는 대로 무작정 따라가야 하는 걸까요?

 

이런 정치 경제 문제를 신앙과 연결해서 판단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실제로 칼과 창을 지금 당장 보습과 낫으로 만드는 일은 양쪽이 서로 불신하고 있는 상태에서는 가능하지도 않습니다. 더구나 우리에게는 남북 전쟁이라는 경험이 있습니다. 이런 경험이 많은 국민들의 마음에 각인되어 있기 때문에 군사적 긴장과 충돌을 줄여나간다는 건 상상하기 힘듭니다. 현실이 그렇다고 하더라도 기독교인들은 국가보다 더 큰 나라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점에서 이 현실을 방관할 수는 없습니다. 그 나라는 바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통치입니다. 이사야와 미가의 예언에 따르면 그것은 분단체제를 넘어 평화공동체를 지향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해보십시오. 아무도 예수님이 전한 하나님의 나라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그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성이 말살되고, 폭력이 지배하며,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으로 작동되는 이 세상의 나라와 반대됩니다. 이 세상의 폭력은 하나님의 나라가 임박했다는 사실을 전하고 희망한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았습니다. 그건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그런 폭력은 오늘 우리에게도 일상화되었습니다. 개인적으로도 그렇고, 사회적으로도 그렇습니다. 남한과 북한이 64년 동안 적대적으로 살아오면서도 별로 불편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칼과 창을 만들고 전쟁연습에 돈을 쓰느라 정작 필요한 일을 하지 못하면서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십자가 처형은 지금도 반복되고 있습니다.

칼과 창이 승리한 것처럼 보이는 예수의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구원이 일어났습니다. 거기서 새로운 생명이, 새로운 창조가, 부활이 일어났습니다. 칼과 창이 인간을 구원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그걸 알고 믿는 사람들이라고 한다면 오늘 이 역사 앞에서 어떻게 대응해야할지 답을 알고 있을 겁니다. 남한과 북한이 군사적으로 대립하는 게 아니라 참된 평화, 공존의 나라로 하나 되는 길을 찾아 나서는 것입니다. 한민족의 평화공존의 미래가 우리의 기도이어야 합니다 그 평화 공동체는 이사야와 미가가 예언했으며,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서 완성된 하나님 나라의 징표입니다.(200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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