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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주의자 예수

이사야 김유진 자매............... 조회 수 2015 추천 수 0 2010.08.04 08:1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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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사32:16-18 
설교자 : 김유진 자매 
참고 : 새길교회 2010.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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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말씀증거 1, 평화주의자 예수

(이사야 32장 16-18)

2010년 6월 20일 청년회 헌신예배

김유진 자매

 

아이들에게 책을 자주 읽어주려고 노력합니다. 삶의 이유를 고민하게 하는 책이 대부분이라 불을 끄고 제가 책을 읽기 시작하면 아이들은 바로 쿠션을 꺼내고 눈을 감습니다. 자는 척 하면서 다 듣고 나중에 공부는 왜 하는지, 나에게 가장 의미있는 일은 무엇인지, 행복은 어디서 오는지 끄적끄적 써내려가는 아이들이 참 예쁩니다. 오늘 여러분께 그런 지루한 책을 소개하지는 않겠습니다. 6월을 맞아 들려 준 두 권의 동화책을 여러분께도 소개하면서 말씀을 시작하려고 합니다.

 

첫째 번 책은 아나이스 보즐라드 그림책 <전쟁>입니다.  “매일 아침 남자들은 전쟁터로 나갔습니다. 저녁이면 그들은 사망자와 부상자들을 짊어지고 돌아왔습니다. 너무 오래 전부터 전쟁을 하고 있는 중이라 전쟁이 왜 시작되었는지 아무도 알지 못했습니다.” 라는 말로 이 책은 시작됩니다. 파랑 나라와 빨강 나라, 두 나라가 있었습니다. 이유모를 전쟁으로 많은 이들이 죽고 이제 더 이상 싸울 사람도 없자 빨강 나라의 왕자 쥘은 파랑 나라 왕자 파비앙에게 결투를 신청합니다. 파비앙은 전쟁이 지겨웠으나 어쩔 수 없이 결투를 받아들입니다. 결과는 예상 밖, 결투를 신청한 빨강 나라 왕자 쥘이 결투에서 지고 말았습니다. 파비앙이 타고 간 암양의 울음 소리에 놀란 쥘의 말이 발을 드는 바람에 쥘이 떨어져 죽은 것이지요. 이기긴 했으나, 싸우지 않았다는 이유로 파비앙은 추방당하고 맙니다. 전쟁을 어떻게 멈출까 고민하던 파비앙은 어느 날 두 나라에 편지를 보냅니다. 그 편지에는 내일 노랑나라가 큰 군대를 이끌고 전쟁터에서 기다린다는 무시무시한 내용이 담겨 있었습니다. 파랑 나라와 빨강 나라는 전쟁터에서 마주쳤습니다. 여러 날이 지나도 노랑나라 군대는 나타나지 않았죠. 양쪽 군인의 가족은 온갖 먹거리와 가축을 데려와 그 곳에서 노랑 나라와의 전쟁을 대비하였습니다. 전쟁을 기다리던 그 곳은 어느덧 큰 마을이 되었습니다. 더 이상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둘째 번 책은 미하엘 엔데가 독일 통일 전 썼던 <냄비와 국자전쟁>이라는 동화입니다. 큰 산을 가운데 두고 오른쪽 나라와 왼쪽 나라가 있었습니다. 같은 날 두 나라에 왕자와 공주가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이 둘의 생일 잔치에 초대받지 못한 13촌 고모인 마녀는 그 사실에 화가 나서 수상한 선물을 내밉니다. 왼쪽 나라에게는 국자를, 오른쪽 나라에게는 냄비를 선물했습니다. 마녀는 “마법의 냄비와 마법의 국자가 만나면 맛있고 영양가 높은 수프가 계속해서 생긴다.”고 각 나라에 알려 주었습니다. 하나밖에 갖지 못한 각 나라는 나머지 하나를 갖기 위해 거짓말과 도둑질을 하며, 상대 나라를 끊임없이 미워하게 됩니다. 그러나 두 나라의 왕자와 공주는  산에서 만나 친구가 되었고, 결국 국자와 냄비를 각자 훔쳐 와서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스프를 끓입니다.

 

두 책에서 보듯 전쟁은 욕심 때문에 심지어는 너무 오래되어서 딱히 이유도 없는 채 반복되고 있습니다. 기원전 3000년부터 1950년까지 약 1만 4500 전쟁이 일어났고 5000년 인류 역사 중 전쟁이 일어나지 않은 평화기간은 단 8%라고 하니 인류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라 해야겠네요. 아이들은 겨우 13살, 태어나면서부터 남북으로 갈라져 있었기 때문에 우리나라가 왜 분단국가인지 왜 전쟁이 일어났었는지 알지 못합니다. 심지어 좋다, 싫다는 느낌조차도 없습니다. 책에서 일어나는 일이 실제로 일어나면 참 좋을텐데요. 현실은 암담하지만 두 책의 결말은 참 훈훈합니다. 특히 주목할 만한 점은 함께 음식을 나누며 끝이 난다는 사실입니다. 결국 평화란 함께 먹는 것이라는 결론을 아이들과 내리고야 말았습니다.

 

저는 그 동안 평화에 관한 세 가지 오류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첫째, 평화는 영적인 것이라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오늘 읽은 성서 구절을 살펴보면요.

16 사막에서도 정의를 찾을 수 있고, 기름진 땅에서도 공평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17 공평히 행함으로 평화가 찾아오고, 그 결과 영원히 평안하고 안전할 것이다.  18 내 백성이 평화로운 장소에서 살고, 안전한 집에서 살며, 평안히 쉴 수 있는 곳에서 살 것이다.

 

저는 그 동안 평화란 하늘에서 오는 신령하고 영적인 것이지 물질적인 것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 구절을 읽으면서 평화란 영적인 동시에 물질적이라는 것을 확신했습니다. 성서를 왜곡한 건 아닌지 염려스럽지만 저는 감히  ‘평화란 공평하게 나누는 것이며, 의식주가 보장되는 것’이라 해석하고 싶습니다.

 

아마존의 눈물에서 조에족의 삶을 보며 세상에서 가장 평화로운 곳이구나 생각했습니다. 필요한 만큼만 사냥을 하여 함께 나눠먹는 장면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사냥을 한 자나 하지 않은 자나 똑같이 나누어 먹습니다. 전자저울이 없는 그들은 똑같이 나누는 것이 무척 어렵지만, 1시간이 걸리든 2시간이 걸리든 그들의 눈에 보기에 최대한 똑같이 나눕니다. 그것이 평화 아닐런지요.

 

둘째, 평화란 갈등이 없는 상태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에베소서 2장 14절에 보면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라고 쓰여 있습니다. 그러나 마태복음 10장 34절을 보면 “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고 쓰여 있지요. 평화는 갈등을 회피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평화인 동시에 칼인 까닭은 평화에 이르지 못하게 하는 것들에 대한 선포라고 생각합니다. 참된 평화에 반하는 죽음, 욕망, 거짓은 근절시켜야 하는 대상인 것입니다. 한 스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던 것이 기억납니다. “요즘 종교인들은 눈물을 닦아주며 위로하는 것은 하지만, 눈물을 흘리는 원인을 제거하는 일은 하지 않는다.” 저 역시 종교는 이 두 가지 일을 모두 해야 마땅하다고 여겨집니다. 예수님은 평화인 동시에 칼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가진 평화에 대한 세 번째 오류는 평화란 기다리면 온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평화는 그냥 오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연습, 훈련, 운동이 필요했던 것이었습니다. 연습하면 실력이 느는 기능들이 있습니다. 여기서는 기능이라고 말하기보다는 일종의 '감수성'이라고 해야겠지요. 가시거리가 최대였다고 하던 맑은 날 운동장에 누워 하늘을 보며 아이들과 시를 썼습니다. 하루 종일 욕을 달고 사는 욕중독 아이들은 그런 하늘 처음 봤다며 눈물이 날 것 같고, 마음 속에서 뭔가 올라오는 것 같다고 했습니다. 대체 어디에 그런 시상을 숨기고 있었던 건지 아이들 스스로도 놀라워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평화적 감수성도 자꾸 노출시키면 점차 커지게 마련하며, 평화를 방해하는 것에 대해 불편해지기 시작합니다. 다른 친구가 아파하는 것, 지구가 파괴되는 것, 싸움이 눈에 거슬리는 것... 이런 일을 '불편'해하는 데에서 평화는 출발합니다. 즉, 평화는 기다리면 언젠가는 하늘에서 짠! 하고 내려와서 강같이 흘러넘치는 것이 아니라, 애써서 만들고 안 되면 될 때까지 연습하고 그것을 운동으로 전개해야 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내린 평화의 정의는 다양했습니다. 평화란 숙제없는 오후 같은 것. 평화란 경기에 져도 기분나빠하지 않는 것, 평화란 내 마음도 편하고 친구 마음도 편한 것, 평화란 기다려도 오지 않는 것, 평화란 폭력을 쓰지 않는 것, 평화란 꽃을 꺾지 않는 것, 평화란 마음먹기에 달린 것, 평화란 조용하지만 가장 힘이 센 것, 평화란 욕심 부리지 않는 것 등 아이들 수 만큼이나 다양한 정의였습니다. 평화에 대해 이렇게 훌륭한 정의를 내리는 우리반 친구들이지만 소소한 말다툼부터 맞짱 뜨기, 따돌림 등등 평화와는 먼 것들이 늘상 존재합니다. 몇 주 전, 우리는 교실 내 평화를 만드는 방법을 토의했습니다. 그 중 가장 많은 의견이 무엇이었을까요? 네. 그렇습니다. ‘친구들과 음식을 나눠 먹는다’였습니다. 그 다음이 ‘친구들의 기념일을 챙겨 준다.’ 3위가 ‘항상 입장을 바꿔 생각한다’ 4위는 ‘누구의 의견도 무시하지 않는다.’ 였습니다.

 

참 거창하고 멀게 느꼈던 평화가 결국 물질을 나누는 것에서부터 출발할 수도 있다는 것, 또한 모두를 공평하게 대하기 위해 마음을 다스리고 훈련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요한 크리스토프 아놀드의 <평화주의자 예수>에서 읽은 한 구절을 나누고 마치려고 합니다. “전쟁 반대로 충분한가? 아시아에서 수백만의 사람들이 굶어 죽어갈 때 북아메리카와 다른 곳에서 수백만 톤의 밀이 비축되어 있다면, 그것은 전쟁이 아닌가? 가난한 가족은 단칸방에서 살아야 하는데 부유한 사람들은 공원으로 둘러싸인 호화 저택에서 살고 있다면, 그러한 현실은 전쟁과 같지 않은가? 기본 생활비에도 못 미치는 돈을 버는 사람이 있는데 어떤 사람은 엄청난 은행 예금을 갖고 있다면, 이것은 전쟁과 같은 상황이 아닌가? 예수는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고 말씀하셨다. 진정 평화를 원한다면 평화를 삶의 총체적 영역 속에서 이야기해야만 한다. 평화는 희망과 용기, 비전과 헌신이 있어야만 꺾이지 않고 지속될 수 있는 혹독한 수행이다. ” 평화는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예수께서 선물로 주신 평화를 지키고 발전시키기 위해 그것을 애써 만들어 가야 한다는 것을... 그 운동은 나에게서부터 시작한다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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