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글모든게시글모음 인기글(7일간 조회수높은순서)
m-5.jpg
현재접속자

명설교 모음

택스트 설교

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和와 解

이사야 김성진 형제............... 조회 수 1866 추천 수 0 2010.08.04 08:19:51
.........
성경본문 : 사40:4 
설교자 : 김성진 형제 
참고 : 새길교회 2010.6.20 

sgsermon.jpg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말씀증거 2, 和와 解

(이사야 40:4, 누가복음 23:35)

2010년 6월 20일 청년회 헌신예배

김성진 형제

 

오랜만에 난생 처음이란 단어를 씁니다.

바로 설교를 하는 것이지요. 예전에는 감히 상상을 못 했었습니다. 저 높은 곳에 달린 십자가만큼 정중앙에 그리고 높은 곳에 있던 곳이 설교하는 강대상이었지요. 그 높이만큼 또한 거리만큼 이상과 현실의 괴리가 벌어지는 것은 당연지사! 그 차이만큼 명암이 있었던 거 같습니다. 흔히 회칠한 무덤이라고 불리는 교인으로 말이지요. 여전히 오십보백보지만 새길교회에 온지 어느덧 1년 반, 이 자리를 열어준 새길교회와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여러분과 나누고 싶은 이야기는 화해(和解)입니다. 제 자신에게 비추어 볼 때 부끄러운 화해라는 단어를 화할 화와 해체할 해로 나누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축구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피가 달아오르는 요즘입니다. 저 역시 그리스 전의 승리에 기뻐하고 아르헨티나 전의 패배에 슬퍼하며 대한민국 축구팀을 위해 아낌없는 응원을 보냅니다.

물론 축구를 통해 정치적`경제적으로 세력을 과시하고 확장하려는 모습도 보입니다. 그러나 2002년 월드컵 이후 고요한 아침의 나라에서 다이내믹 코리아로 탈바꿈하며 유전자에 새겨진 사냥본능이 발휘되면 동물과 사람, 인종과 나라의 경계를 넘게 되지요.

 

특별히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의 축구는 단순한 경쟁이 아닌 협동과 화합이며 정의와 민주주의를 실현시키는 주춧돌이었습니다. 남아공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자 인권운동가였던 넬슨 만델라도 로벤섬 감옥에 도착하기 전까진 축구에 큰 관심이 없었지요. 하지만 수감자들이 셔츠를 뭉쳐서 만든 임시 축구공으로 축구 투쟁을 하면서 감옥에 갇혀서도 반목했던 운동권 세력이 단합하는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축구는 야외에서 행해지는 인간적 충실함의 완성본’이라는 그람시의 말처럼, 개인의 욕구와 팀워크의 조화를 훈련받고 공격과 방어를 동시에 행하며 잘 보이기 위해서가 아닌 자신의 육체를 즐기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반면에 축구의 열기에 동참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저 역시 그 중 한명이지요. 종종 놀러 가는 절이 있습니다. 그곳에서 알게 된 처사님이 말씀하시길 “기운이 떠 있어요. 꾸준히 백팔배를 하면은 마음이 가라앉습니다.” 금강경에는 부처님의 일상이 나옵니다. 때가 되어 세존께서는 가사를 입으시고 걸식을 하며 발우를 씻고 자리를 마련하여 앉는 모습이 그려집니다. 배고프면 밥 먹고 졸리 우면 잠자는 어디에도 거리낌 없이 자유로운 모습 이지요(無?解脫). 반면에 저의 일상은 지금·여기를 도피하는 작위로 흐트러져 있거나 과거·현재·미래의 생각 퍼레이드가 펼쳐지지요. 한마디로 ‘기분이 나쁘다’는 것입니다.

 

기라는 것은 생명에너지이며 기독교식으로 이야기 하자면 Ruah(하느님의 숨결), Pneuma(성령)라 해도 무리가 없을 듯합니다. 기분을 한자로 풀이하자면 기가 나뉘어 있는 상태로서 생명에너지가 골고루 잘 나뉘어 있으면 기분이 좋고, 한쪽에 편중되어 있으면 기분이 나쁘겠지요. 대다수 교회의 기분도 나빠 보입니다. 하늘에 너무 매혹되어 이 땅의 삶에 흥미를 잃은 것 같으며 인간의 욕구와 필요에 따라 구획된 신을 쫓는 것 같습니다. 다행히 다른 모습도 보입니다.

남미의 신학자 Diego Irarrazaval은 안데스 산맥 속에서 원주민들과의 삶을 통해 ‘신 인식론’에 대한 새로운 대답을 합니다. 전통적인 신앙이 인간의 ‘이성’이 난파한 자리에서 하느님을 만나는 과정(Faith Seeking Understanding)이었다면 원주민들이 하느님을 아는 방법은 음악, 춤, 색깔, 음식들이 어우러진 ‘기쁨’(Joy Seeking Understanding), ‘축제’(Celebration Seeking Understanding)라는 것이지요. 기존의 지성과 영성의 관계에서 야성 혹은 감성과 영성으로 확장 되었습니다.

 

길희성 선생님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건을 ‘대속(代贖)’이 아닌 ‘대고(代苦)’로 풀이합니다. 전통적인 대속의 밑그림에는 구약의 희생제사와 로마시대 형법사상에 의한 것이며 이런 특수한 해석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가 기독교의 핵심 문제도 아니고, 성경의 기본 메시지도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 대신 고통 받는 하나님, 자기를 죽기까지 낮추신 하나님은 2000년 전 나사렛 예수의 고난뿐만 아니라 오늘날도 자블라니 축구공을 만들기 위해 눈이 먼 제3세계 아이들과 축구하는 날은 우울증 약을 덜 먹는 제1세계 사람과도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기분이 나쁜 것이 좋아지지 못하고 누적되다 보면 기가 막히게 됩니다.

음주를 즐기며 뼈마디가 쑤시고 담이 결린 형제님, 눈 밑이 검고 가슴이 두근거리고 어지러운 자매님, 중풍으로 반신불수가 된 어르신, 구역질과 딸꾹질을 하며 속이 답답한 아이에 이르기까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기가 막히고 아픈 분(不通則痛)들은 부지기수입니다. (자세한 정보는 http://suyunomo.net/?p=3632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기가 막히는 것은 몸만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도 청각은 멀쩡했지만 마음의 귀는 멀었었고 바리새인도 머리로는 율법에 박식했지만 정작 하나님의 본뜻은 몰랐습니다. 저에게도 예수님은 말씀하시겠지요. ‘눈곱도 띄어 내고 귀지 좀 파라’,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살이라‘고 말입니다.

 

'내가 춤 출수 없다면 혁명이 아니다.'라고 합니다만 혁명과는 상관없이 어여쁜 아가씨들을 만나기 위해 춤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처음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까지 좋았습니다. 15:3으로 청일점 분위기 이었지요. 말 그대로 대박! 하지만 하늘까지 늑대의 울음소리가 퍼졌을까요? 저의 첫 번째 짝은 어머니뻘의 댄스반 최고의 왕언니셨습니다. '아버지여 이 잔을 내게서 옮겨 주시옵소서'라고 간절히 기도 했지만 묵묵부답……. 큰누님의 손을 잡았지만 눈은 옆 자리에 있는 예쁜 아가씨를 향해 갑니다. 다행히 파트너를 바꿔가면서 춤을 출 수 있었지요. 한데 이상하게도 눈은 싱숭생숭 하지만 마음은 즐겁지 않았습니다. 바로 기가 막힌 분이었지요. 어여쁜 처자분의 몸은 뻣뻣하고 얼굴은 굳어 있으며 중간에 멈칫하기 일쑤여서 리듬을 타기가 힘들었지요. 반면에 큰누님의 배움에 대한 열정, 춤과 함께 발산하는 기쁨, 생기발랄한 몸부림은 저절로 전염이 되었습니다. 이때를 기점으로 여자라면 젊고 예뻐야 된다는 신화에 틈이 생겼지요.

 

실제로 사람들은 그 사회의 공통관념이나 자신만의 신화에서 살고 있습니다. DMB와 이어폰으로 눈과 귀가 막힌 사람들에게는 소녀시대나 2PM이 우선이지 집 대문 앞에 누워있는 불행한 생명과 거지 나사로를 외면합니다. 혹은 빵과 서커스의 달콤함에 생각하기를 멈추고 금송아지 앞에 자신의 자유를 맡기거나 타인을 억압하지요. 예수님의 수난 때 등장하는 처벌할 근거가 없는 것을 무리하게 조작하는 안나스와 가야바, '우리의 왕은 오직 한 사람, 로마 황제뿐이다!' 라고 하는 유대인들, 죄 없음을 알면서도 손을 씻는 빌라도, 손 안에 든 상대를 경멸하고 희롱한 헤롯과 병사들의 모습은 생각대로 살지 못하고 사는 대로 생각하는 사람들의 전형입니다.

 

두 번째의 짝은 저와 비슷한 잔머리형 이였지요. 모든 동작마다 구분합니다. 손의 동작은 정해진 틀을 벗어나면 안 되고 발맞춤은 박자에서 벗어나면 엉킵니다. 더욱이 둘 다 고집이 있어서 옥신각신이 펼쳐집니다. 저는 '너무 기대는 거 아니야'라고 투덜거리며 짝은 '남자가 왜 이리 힘이 없어!'라며 날카로워 집니다. 가관인 것은 똑같은 박자수를 느린 2박이니 빠른 4박이니, 손이 위니 아래니, 춤추는 것과 상관없는 것으로 신경전을 벌이지요.  

 

도덕경에서는 '배움이란 날로 더해지는 과정이요, 도를 행한다는 것은 날로 덜어내는 과정이다.'고 합니다. 춤도 마찬가지겠지요. 배울 때야 나누고 더해서 낯설음을 특정한 동작으로 구성해야 하지만, 춤을 출 때는 음악의 흐름에 맞추어 매순간 변화하는 나와 타자가 소통해야 하지요. 배울 때는 구성해야 하지만 삶을 살아갈 때는 용해되어야 합니다. 문제는 선악과와 바벨탑이 오늘날도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이지요. ‘나’와 다른 자들로 구분하는 선악과를 먹으며 ‘나야말로’라는 바벨탑을 쌓다보니 같은 언어를 사용해도 한 가정 또는 공동체 안에서 서로 몰라주는, 알려고도 하지 않는 남이 되어 버립니다. 분별심을 멈추지 않고 하느님을 놓아주지 않는다면 영영 잠들어 계실 것입니다.

 

기분 나쁘고 기가 막힌 이야기만 하다 보니 기진맥진 하는군요. 이제는 신(神)나는 이야기를 드리며 마칠까 합니다. “음메 기죽어! 음메 기살아!” 기가 죽으면 신도 죽습니다. 반대로 기가 살고 신이 날려면 ‘화해(和解)’해야 합니다.

화는 벼화(禾)와 입구(口)자가 합쳐진 것으로 사이좋게 밥을 먹으니 화목해지겠지요.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언덕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아니한 곳이 평탄하게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 이사야 40: 4” 하느님이 오시는 길을 예비하는 것입니다. 기분이 골고루 분포되면 기가 살게 됩니다. 신이 나게 됩니다.

 

해는 뿔각(角), 칼도(刀), 소우(牛)자가 합쳐진 것으로 칼로 소의 뿔을 해체하는 것입니다. "성소의 휘장이 한가운데가 찢어지더니. 누가복음 23: 35" 괴로웠던 사나이, 나사렛 예수는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그가 숨지자 성소의 휘장도 찢어졌다고 기록합니다. 자신이 구성한 삶을 부인하는 과정은 뼈아픈 고통뿐만 아니라 수많은 모험을 감당해야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가로막는 휘장을 해체한다면 기가 막힌 게 통해지겠지요. 神이 날 것입니다.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성경본문 설교자 날짜 조회 수
등록된 글이 없습니다.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본 홈페이지는 조건없이 주고가신 예수님 처럼, 조건없이 퍼가기, 인용, 링크 모두 허용합니다.(단, 이단단체나, 상업적, 불법이용은 엄금)
    *운영자: 최용우 (010-7162-3514) * 9191az@hanmail.net * 30083 세종특별시 금남면 용포쑥티2길 5-7 (용포리 53-3)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