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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사6:1-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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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정용섭 목사 |
참고 : | http://dabia.net/xe/349039 |
오늘 본문에 따르면 이사야의 활동 시기는 웃시야 왕이 죽은 기원전 734년입니다. 웃시야 왕은 유대 백성들에게 존경을 받은 몇 안 되는 왕 중의 한 사람인데, 병으로 왕위에서 물러나 있다가 죽은 것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남북으로 분단되어 있었습니다. 아주 작은 나라가 분단되어 있었으니 그 상황이 얼마나 불안했을지 불을 보듯 분명합니다. 기원전 721년에 북왕국은 앗시리아에 의해서 멸망당했습니다. 남왕국도 목숨을 부지했으나 구차스럽게 지냈습니다. 나라꼴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기원전 587년에는 남왕국마저 바벨론에 의해서 멸망당했습니다. 이사야의 오늘 예언이 있고 난 뒤에 남북왕국은 점점 쇄락의 길을 갔습니다. 이런 점에서 이사야의 예언은 보기 드물게 역사적 사실로 드러났습니다.
남북왕국의 몰락을 예감한 이사야는 하나님의 뜻을 알고 싶었습니다. 가능하면 조국의 멸망을 막아보고 싶었겠지요. 그는 성전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합니다. 스랍들의 찬양을 듣습니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사 6:3) 이사야는 누미노제, 즉 거룩한 두려움을 경험했습니다. 온 땅에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하다는 사실 앞에서 경험하는 두려움입니다. 그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도 자기를 내세울 수 없습니다. 우리의 죄성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우리는 순종하는 자세로 그의 뜻을 세상에 알릴뿐입니다. 그래서 이사야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하고 나섰습니다. 그는 위기에 처한 조국이 살아날 길을 이번 기회에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겠지요. 하나님의 뜻을 따라 회개하면 하나님이 용서하시고 살 길을 주신다는 말씀을 들을 거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그는 세상 끝까지 주님의 증거자가 되리라는 ‘비전’을 안고 “나를 보내소서.” 하고 대답했습니다.
이사야가 들은 하나님의 말씀은 전혀 예상 밖의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살리라는 말씀이 아니라 오히려 죽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희망이 아니라 절망의 메시지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관심을 가지라는 게 아니라 아예 관심을 끄라는 말씀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선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인 상태에 대한 진단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들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합니다.(9절) 참으로 놀라운 사실입니다. 여기에는 하나님 말씀의 신비와 인간 인식의 한계가 동시에 작용합니다. 하나님 말씀은 처세술이 아닙니다. 단순히 종교적 위로도 아닙니다. 그것은 전혀 새로운 영적 현실에 대한 계시입니다. 그런 쪽으로 마음이 열리지 않으면, 마치 클래식 음악의 세계에 문을 닫아둘 때 그 음악이 들리지 않는 것처럼, 하나님 말씀은 아무리 들어도 들리지 않습니다.
막힌 귀와 닫힌 눈
하나님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이스라엘 백성의 영성을 완전히 파괴하라는 명령을 이사야에게 주십니다.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며 그들의 귀가 막히고 그들의 눈이 감기게 하라.”(10절) 정말 이해할 수도, 받아들이기도 힘든 말씀입니다. 구원의 하나님이라고 한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의 무뎌진 영성을 회복시키는 게 당연한 일이 아닌가요? 그들이 회개하고 돌아올 수 있도록 예언자를 그들에게 보내야 하는 게 아닐까요?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 고침을 받을까” 걱정이라니요, 하나님이 어찌 이런 말씀을 하실 수가 있을까요? 하나님이 오히려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을 무디게 하다니요. 이런 상황이라면 이스라엘 백성들의 잘못을 그들에게서 찾을 수 없는 거 아닐까요?
이런 경우는 구약성서에서 흔하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로 나가서 하나님에게 제사를 드려야겠다는 모세의 요구를 이집트의 바로는 거절했습니다. 한 번도 아니고 아홉 번이나 거절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성서기자는 하나님이 바로의 마음을 강퍅하게 만드셨다고 설명했습니다. 욥기에는 동방의 의인이었던 욥이 사탄에게 극심한 시험을 당합니다. 재산은 물론이고 자식도 모두 잃습니다. 성서기자는 사탄이 하나님에게 허락을 받고 욥을 시험했다고 설명합니다. 그렇다면 바로나 사탄의 잘못이 결국은 하나님 책임이 아니냐 하는 질문이 가능합니다.
성서를 그렇게 읽으면 곤란합니다. 성서기자는 지금 인간과 인간 삶에서 벌어지는 고통, 불행, 죄의 뿌리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이 얼마나 완고한지, 얼마나 무감각한지를 말하려는 것입니다. 그런 완악한 마음은 인격을 도야하거나 심리치료를 받아서 해결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교양의 차원과도 다른 것입니다. 너무나 뿌리가 깊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만들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절망적인 상황입니다. 현대인들이 빠진 물질만능주의, 외모지상주의, 소유와 소비지향주의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생각해보면 성서기자들의 이런 표현이 이해가 갑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명령을 들었을 때 이사야의 심정이 어땠을지 긴 설명이 필요 없을 겁니다. 민족 구원을 위해서 “나를 보내소서.” 하고 나선 이사야의 선교비전이 완전히 허물어진 것입니다. 독 안의 쥐처럼 절망적인 상황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완전히 버리신 것처럼 느껴졌겠지요. 이런 상황에서 예언자는 무슨 말을 해야 할까요? 억지로라도 하나님의 생각을 바꿔야할까요? 더 간절히 기도해야 할까요? ‘나를 죽이고 대신 민족을 살려 달라.’고 매달려야할까요? 예언자마다 반응은 다를 겁니다. 이사야는 하나님께 매달리는 방식으로 하나님의 뜻을 바꿀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이미 성전에서 경험한 하나님 임재 현상에서 분명했습니다. 온 땅에 가득한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한 그가 하나님의 뜻 앞에서 다른 말을 할 수는 없었습니다.
이사야가 할 수 있는 일은 민족의 절망적인 영적 상태가 오래가지 않기를 바라는 것뿐입니다. 이사야는 이런 상황이 언제 끝나는지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이사야는 속으로 그렇게 오래지 않아서 하나님의 구원이 임할 거라고 기대했을지 모릅니다. 1년, 아니 10년이면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아니면 길게 잡아서 희년의 세월인 50년으로 이런 절망적인 상황이 끝나기를 기대할 수 있었겠지요. 기대가 허물어졌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완전히 망할 때까지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성읍들은 황폐하여 주민이 없으며 가옥들에는 사람이 없고 이 토지는 황폐하게”(11절) 될 때까지라고 말입니다. 이런 정도면 막가자는 이야기로 들립니다. 회개할 틈도 주지 않으면서 망할 때까지 가야 한다는 말씀이니까요. 이런 하나님을 자비와 긍휼의 하나님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이 말씀을 오해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어찌 회개할 기회를 송두리째 막아버리겠습니까? 그가 왜 자비의 하나님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은 탕자를 기다리는 아버지와 같으신 분이십니다.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분이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끝까지 붙드시는 분이십니다. 의인만이 아니라 죄인까지 사랑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지막 가능성까지 완전히 부정하셨다는 이사야의 진술은 그의 영적 고민과 통찰이 무엇인지를 말합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몇 가지 사회제도나 종교습관을 고쳐서 새로워질 수 있는 한계를 넘어버렸습니다. 이사야는 바로 그 사실 앞에서 절망하고 있습니다.
혹시 이사야 시대의 이스라엘은 우리가 지금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악했구나, 하고 생각하는 분들도 계실 겁니다. 하늘에서 유황불이 내려 멸망당한 고모라와 소돔과 비슷했나 하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상대적으로 악한 시대, 악한 나라, 악한 지역이 있긴 합니다. 그러나 이사야가 지금 절망하고 있는 이스라엘이 우리보다 질적으로 훨씬 악했다고 생각하면 곤란합니다. 당시에도 이만 하면 모든 게 좋은 거 아니냐 하고, 그것을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선전해대는 예언자들이 왜 없었겠습니까? 이사야는 그들과 달랐습니다. 그런 이들과 다른 영적인 통찰력으로 세상을 보았습니다. 겉으로 드러난 문제가 아니라 더 근본적인 죄를 볼 수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겉으로는 그럴 듯해도 하나님을 향한 근본적인 불신앙과 무관심이 팽배했습니다. 아무리 말씀을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아도 알지 못했습니다.
이사야가 오늘 한국교회의 목사라고 한다면 어떻게 설교를 할까요? 한동대학교 법대에 있다가 몇 년 전 경북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으로 옮긴 김두식 교수는 최근에 펴낸 책 <교회 속의 세상, 세상 속의 교회>에서 교회의 세속화를 비판했습니다. 세상의 가치와 기준이 교회를 지배하고 있다는 그의 지적이 아프지만 사실입니다. 그가 희망을 거는 교회는 다음과 같습니다. 사회적 약자에게 다가갈 수 있는 교회, 교회의 본질을 찾아가는 교회, 실험적인 교회가 그것입니다. 그의 비판이 아니라 하더라도 오늘 한국교회를 절망적으로 보는 이들이 많습니다. 부분적인 개혁으로 치유가 불가능하다는 겁니다. 철저하게 이기적인 집단이 되었습니다. 수년 전에 장로교 통합측을 대표하는 목사님들이 영락교회 예배당에서 삭발식을 했습니다. 사학법 개정 반대를 위한 퍼포먼스였습니다. 노무현 정권 당시에 목사님들 중에 어떤 분들은 좌파 정부다, 빨갱이가 정부에 숨어 있다는 식으로 설교 시간에 정치적인 발언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논조가 지금도 여전합니다. 그런 분들의 눈에는 저도 좌파 목사로 보일 겁니다. 오늘 목사들이나 일반 신자들이나 모두 자신들 교회의 성장만을 최고의 목표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신학대학교 교수들은 마땅히 감당해야 할 교회에 대한 신학적 비판을 포기했습니다. 대형교회의 목사와 장로들로 구성된 이사회에 찍힐까 두렵기 때문입니다. 한국교회가 절망적이라는 비판에 대해서 저는 아니라고 말할 자신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귀를 막고 눈을 감겨 놓고 아무 것도 듣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하게 하신 게 아닐는지요.
남아있는 그루터기
이스라엘의 역사는 이사야의 예언대로 몰락의 길을 속히 갔습니다. 남유대와 북이스라엘이 완전히 망했습니다. 그들이 자랑하던 예루살렘 성전은 파괴되었습니다. 제사도 없고 율법도 없어졌습니다. 심지어 자기나라 말도 모두 잃어버렸습니다. 이사야의 예언이 거의 문자의 차원에서 성취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사야의 예언은 저주라는 말인가요? 하나님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한 민족의 운명을 이렇게 제멋대로 파괴하는 잔인한 분이신가요? 그런 하나님 앞에서 공포에 떨어야 한다는 말인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고유한 영적 시각으로 이스라엘과 주변 세계의 역사를 뚫어보았습니다. 역사의 주인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것이 핵심입니다. 그것을 알 수 있는 근거는 역사가 우리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흘러간다는 사실입니다. 사람들이 두 손을 들 정도로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아니 그럴 때만 하나님은 행동하신다는 겁니다. 이사야는 바로 그 사실을 ‘그루터기’라는 단어로 설명했습니다. 나무를 베어내도 그루터기는 남아 있습니다. “거룩한 씨가 이 땅이 그루터기니라.”(13절) 거꾸로 그루터기는 거룩한 씨입니다. 그루터기와 씨는 생명의 원천입니다. 겉으로 보기에 보잘 것 없어도, 완전히 끝난 것처럼 보여도 때를 만나면 온갖 조화로운 생명 현상이 거기서 나옵니다. 이스라엘이 망해도 그들을 통한 하나님의 구원 역사는 포기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런 그루터기 개념은 구약성서가 말하는 또 하나의 다른 개념인 ‘남은 자’와 비슷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우상을 섬기는 세상처럼 보여도 하나님을 신신하게 믿는 사람들이 바로 ‘남은 자’이며, 믿음의 그루터기입니다. 이런 남은 자, 또는 그루터기로 비유되는 사람들의 신앙은 낭만적인 게 결코 아닙니다. 일단 그들은 소수입니다. 다른 이들의 주목을 받지도 못합니다. 실제로 교회와 세상을 바꿀 힘이 없습니다. 때로 무력감에 빠지기도 합니다. 미자립 교회에서 목회하는 목사들의 심정과 비슷합니다. 그러나 남은 자는 그렇게 존재해 있는 것만으로 충분합니다. 더 엄격하게 말해서 다른 업적을 이뤄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겠다는 야무진 꿈을 꾸지 않고 그렇게 ‘있는 듯 없는 듯’ 존재해야만 합니다. 땅속에 묻힌 씨가 봄이 오기 전에 싹을 내겠다고 서두르면 안 되는 것과 비슷합니다. 사람의 눈에 모든 게 끝이라고 생각하는 바로 그 때에 하나님은 남은 자들을 통해서 구원의 역사를 열어 가십니다.
지금 한국교회에서, 또는 한국사회에서 누가 남은 소수자일까요? 누가 거룩한 생명의 씨일까요? 작은 교회가 바로 남은 자일까요? 큰 교회일까요? 작은 교회만 기독교 진리와 맞닿아 있다고 무조건 말할 수도 없고, 거꾸로 큰 교회는 잘못이라고 무조건 말할 수도 없습니다. 최소한 교회에 나오는 사람일까요? 아니 교회 밖에 있는 사람일까요? 기도를 많이 하는 사람일까요? 어두운 현실 앞에서 기도마저 포기한 사람일까요? 그걸 단정적으로 말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가짜도 있겠지요. 허풍쟁이도 있겠지요. 그러나 분명히 누군가는 ‘남은 자’라는 겁니다. 그 남은 자가 바로 하나님이 숨겨놓은 거룩한 생명의 씨이겠지요.
사실 누가 하나님의 거룩한 생명의 씨인가에 대해서 신경을 쓸 필요는 없습니다. 그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기도 하고, 우리의 인식 능력을 벗어난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어떤 방식으로 구원 역사를 끌어가시는지에 눈을 떠야 합니다. 모든 나무가 베어져서 그루터기만 남아 있는 상황에서도 하나님은 그분만의 고유한 능력으로 새로운 생명의 역사를 펼치십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사실인가요? 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요? 얼마나 안심되는 일인가요? 얼마나 역설적인 일인가요? 우리의 절망이 오히려 하나님의 기회라니 말입니다. 우리의 침묵이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이라니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의 십자가는 모든 절망의 막장과 같습니다. 사람들의 웃음거리요, 저주의 대상이었습니다. 그 십자가야말로 참되고 거룩한 생명의 씨였습니다. 그것만이 그루터기였습니다. 거기서 부활의 생명이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에게만 가능한 전혀 새로운 생명의 시작이었습니다. 이 사실을 안다면 우리의 수고를 좀 내려놓아도 되겠지요. 대신 그분이 어떻게 구원을 일으키셨는지, 앞으로 완성하실지 마음을 열고 기대해 봅시다.(주현절 후 다섯째 주일, 2월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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