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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슥11:9-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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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이한규 목사 |
참고 : | 2013.12.12 http://www.john316.or.kr |
스가랴(34) 행복의 2대 필수요소
(슥11:9-14)
< 참된 목자 >
스가랴 11장은 메시야가 이 땅에 오실 때 인간이 어떤 모습을 취할 것인지를 묘사하는 장이다. 그때 인간의 교만이 극에 달해 패망하고(1-3절), 목자들이 무섭게 타락해서 양떼를 팔아 자기 배를 채운다(5절). 그러나 참된 목자가 나오면 2가지 역사가 생긴다. 하나는 ‘은총의 막대기’로 상징된 하나님이 친히 먹여주시는 역사가 생기고, 또 하나는 ‘연합의 막대기’로 상징된 마음과 마음이 통하게 되는 역사가 생긴다.
배우자가 자신을 잡아먹으려고 할 때 잡아먹혀 주면 배우자의 뱃속으로 들어가 배우자의 마음과 생각을 지배하게 된다. 성도들이 목회자를 잡아먹으려고 할 때 잡아먹혀 주면 목회자는 교인 뱃속으로 쏙 들어간다. 그처럼 성도 속에 들어간 목사는 위대한 목사이다. 반대로 목회자가 성도들을 잡아먹으려고 할 때 잡아먹혀 주면 성도가 목사 뱃속으로 쏙 들어간다. 그처럼 목사 속에 들어간 성도는 위대한 성도이다.
부자관계에서도 요즘 부모들은 자녀에게 잘하는 것 같지만 진정한 의미의 헌신과 희생은 옛날보다 못할 때가 많다. 그래서 부모들이 자녀들 속으로 들어가지 않고 겉으로 울타리만 열심히 치면서 자녀를 배려하며 교육하기보다는 부모의 경쟁심과 과시욕을 따라 교육해서 자녀가 부모를 생각할 때 눈물이 나기보다는 짜증이 나는 시대가 되었다.
어떻게 그 문제를 해결하는가? 자녀가 잡아먹을 듯이 달려들면 자녀 속으로 잘 들어가는 부모가 되어야 한다. “얘야! 내가 미안하게 됐구나!” 반대로 부모가 잡아먹듯이 달려들면 자녀도 “부모님! 죄송해요.”라고 하면서 부모 마음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순교자의 영성으로 배우자와 자녀와 공동체 속으로 들어가면 하나님의 은총이 넘치는 역사가 ‘축복’으로 나타나고 사람과 마음이 통하는 연합의 역사가 ‘변화’로 나타난다.
본문의 목자는 그런 참된 목자의 모습을 외면하고 잡아먹을 생각만 한다. 결국 하나님은 그런 목자를 끊으시고(7절), 결국 양떼를 버린 목자로 인해서 하나님의 은총의 막대기와 연합의 막대기가 꺾인다(9-14절). 이 말씀을 보면 목자와 교회는 항상 영혼이 사는 문제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 행복의 2대 필수요소 >
성도는 ‘주님의 교회’에 속해 있지만 ‘개 교회’의 소유물은 아니다. 그래서 평생 한 교회만 섬길 필요는 없고 하나님의 뜻이라면 교회를 옮길 수도 있다. 누군가 내 곁을 떠나면 섭섭하지만 더 좋은 미래를 위해서라면 기꺼이 풀어주어야 한다. 교회들은 대개 성도가 오면 절대 환영하고 성도가 떠나면 절대 반대한다. 그런 와중에 많은 성도들이 상처를 받기 때문에 교회를 옮길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한 성도들을 불쌍히 여겨야 한다.
무엇이든지 마지막이 중요하다. 교회에 충성할 때처럼 교회를 떠날 때도 그 영혼을 생각해주면서 마지막 정리를 잘해주고 보낼 줄 아는 목자가 진짜 위대한 목자이다. 새들이 먹이와 물을 찾아 국경을 넘듯이 성도가 행복과 평안을 찾아 교회 담장을 넘을 수도 있다. 그런 상황에서 목자는 처음이나 중간이나 끝이나 영혼이 사는 길과 평안한 길과 복 받는 길을 열어주어야 한다.
목회자는 신학교 때부터 3가지를 항상 준비하라고 배운다. 첫째, 하나님이 원하면 언제나 죽을 준비를 하라고 배운다. 둘째, 강단에 올라서면 언제나 말씀을 전할 준비를 하라고 배운다. 셋째, 하나님이 부르면 언제나 떠날 준비를 하라고 배운다. 그처럼 목회자가 떠나는 것은 사명적인 일이고 성도가 떠나는 것은 저주받을 일이라면 큰 모순이다. 결국은 성도들이 떠나는 것도 하나님의 섭리 하에 이뤄지는 일이다.
어차피 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면 기꺼이 보내주어야 한다. 양떼를 통해서 배를 불리려는 마음만 극복하면 된다. 보내는 것은 마음이 아프지만 잘 보내면 하나님의 위로가 있고 더 많은 것을 주신다. 또한 누군가 떠나면 재정적인 타격이 생길 수도 있지만 잘 떠나보내면 하나님이 재정도 채워주신다.
어느 날, 한 부목사가 새로 교회를 개척할 때 교인이 몇 명 따라오자 그 전 교회 담임목사가 부목사를 평생 원수로 삼았다. 반면에 어떤 목사는 교인을 지원해주고 개척에 수고한다고 목돈까지 지원하면서 부목사를 따라가는 교인들을 불러 말했다. “여러분! 목사님을 잘 모시고 최선을 다해 도우세요.”
누가 영혼을 생각하고 목회의 행복을 아는 목자인가? 후자 목자이다. 하나님은 양떼를 자기 소유처럼 생각하는 목자를 싫어하신다(8절). 반면에 양떼의 행복을 위해 길을 열어주는 목자를 사랑하신다. 그처럼 양떼의 행복을 위한 길을 찾아주는 넓은 마음을 훈련해야 한다. 내가 떠나는 것은 괜찮고 남이 떠나는 것은 안 된다고 생각하지 말라. 영혼이 살고 싶다고 하는 외침을 이해해주고 배려해주라.
행복한 공동체를 만들려면 2가지를 잘해야 한다. 기꺼이 먹혀주는 것과 기꺼이 놓아주는 것이다. 이 2가지는 행복의 2대 필수 요소이다. 그처럼 양떼 중심적인 사고를 가지고 남을 배려하며 살 때 하나님의 은총도 넘치고 삶도 풍성해진다. 나와 함께 하는 영혼도 생각해주고 나를 떠나는 영혼도 생각해주라. 그처럼 남의 형편을 이해해주며 너그럽고 기쁘게 어려움을 참으면 그 영혼에 하나님의 축복이 비켜가는 법은 없다.
< 좋은 목자를 만나는 축복 >
그처럼 메시야가 오실 때 인간들이 교만이 극에 달하다가 망하고 목자들이 무섭게 타락해 영혼을 잡아먹는 목자가 되다가 결국 어디까지 가는가? 참 목자이신 메시야를 배척하게 된다. 그래서 메시야를 은 삼십 냥에 팔아넘긴다(12절). 이 구절은 메시아를 은 삼십 냥에 팔 것에 대한 예언이다. 그렇게 얻은 돈을 하나님은 토기장이에게 던지라고 했다(13절). 이 예언은 훗날 가룟 유다가 예수님 몸값으로 받은 은 삼십 냥을 대제사장에게 돌려주고 대제사장은 그 돈으로 토기장의 밭을 사서 성취되었다(마 27:3-10).
그처럼 메시아를 배척하고 거짓 목자를 따르면 두 가지 심판이 임한다. 첫째, 은총의 막대기가 꺾인다(10절).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짐을 상징한다. 둘째, 연합의 막대기가 꺾인다(14절). 인간과의 관계가 끊어짐을 상징한다. 이 말씀은 좋은 목자를 만나는 삶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보여준다. 좋은 목자란 설교 잘하는 목자가 아니라 하나님과 오래 함께 하는 목자이다. 누구나 하나님이 함께 하는 은혜의 때가 있다. 그 은혜를 꾸준하게 유지해가는 것이 중요하다.
어느 날, 서울의 한 대형교회 성도가 불평했다. “저희 목사님은 80평집에 살고 자주 외국에 갔다 와서 느낀 얘기를 해주는데 그러면 어려운 성도들과는 전혀 상관없는 얘기라서 딴 세상에 사는 분 같아요.” 몇 만 명 교회 담임목사이면 80평의 큰집에 살 수도 있다. 그런 모습에 돌을 던질 필요는 없다. 너그럽게 이해해줄 수도 있고 “내가 그 입장이라면 어땠을까?”라고 생각하면 쉽게 장담하기 힘든 측면도 있다.
또한 어떤 대형교회는 교회에서 세운 기관에 담임목사의 가족들을 기관장으로 앉힌다. 그것도 이해하려면 이해할 수 있다. 정확한 내부사정을 모르는 남이 따질 일은 아니다. 다만 한 가지 문제는 분명히 해야 한다. 목회자가 성공했다고 초심을 잃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 목회자 밑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성도들의 축복 가능성이 낮아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결국 담임목사가 초심을 회복하는 문제는 이해 차원이 아니라 성도들의 축복 및 생존권과 직결될 수 있다.
성공한 목사들은 처음에는 하나님 보시기에 멋진 모습들이 많았다가 교회가 커지면서 그런 모습을 잃을 때가 많다. 그 문제는 목사님이 좋은 집에 살고 좋은 차를 타는 문제보다 더 중요한 문제이다. 목자는 성도들의 축복을 크게 좌우하기에 좋은 목자를 위한 기도는 어떤 기도보다 중요하다. 그런 기도와 더불어 자신이 훌륭한 작은 목자가 되는 꿈을 키워 가라. 그래서 인물이 되고 하나님의 뜻을 멋지게 이루는 복된 도구가 되라.
ⓒ 이한규목사 http://www.john316.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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