옹달샘한희철 › 1171. 우연한 일

한희철 | 2002.01.02 21:19:12 | 메뉴 건너뛰기 쓰기

□한희철1171. 우연한 일

 

그날도 군에 가는 꿈을 꿨다. 이미 제대 했다는 생각이 순간순간 들면서도 나는 또다시 생소한 내무반에 있었다. 제대에 대한 생각이 꿈에서는 자신이 없었다. 불안한 때면 꾸게 되는 꿈이 있다. 

그날처럼 군에 다시 가는 꿈을 꾸기도 하고, 어떤 땐 휴가를 나왔다가 귀대를 하기도 하며, 공부를 전혀 안한 수학 시험을 치를 때도 있다. 어떤땐 예배 시간 제단에 올랐는데 양말을 신지 않은 때도 있고, 막 설교하러 섰는데 설교 노트가 없는 경우도 있다. 

그날, 군에 가는 꿈을 다시 꾼 것은 몇며칠 계속된 불안하고 불편한 마음 때문이었다. 

인천 북구청 세금도둑 사건과 ‘지존파’ 사건을 보며 마음이 몹시 우울했다. 도대체 성한 곳이 어딘지, 우리가 살아가는 이 땅에서 믿을만한 구석이 도대체 어디인지. 

가난한 농촌 출신, 단란함 없었던 가정, 벗어날 수 없었던 가난의 굴레, 그 앞에 펼쳐진 가진 자들의 손쉬운 부정. 

무표정한듯 섬뜩하게 번뜩이는 범인들의 눈빛을 동정으로만 받을 수 없는 걸 알면서도 마음은 정말 우울함으로 흔들렸다. 

가난 때문에 고향을 떠난 아이들도 이곳 단강엔 많지 않은가. 불안과 살기가 한데 섞인 범인들의 표정 뒤론 고향 빼앗긴 이의 체념어린 아픔이 짙게 전해져 왔고, 그것이 이 땅 떠난 아이들의 삶하고 어떻게 구별되는 건지 자신이 없기도 했다. 

그런 흔들리는 마음을 밟고 주일이 다가오고 있었고, 잡지 「그말씀」 에서 부탁받은 감사절 설교문 원고 마감일이 지나고 있었다. 그런데도 난 설교준비와 청탁받은 원고 어느 것 하나도 시작을 못 하고 있었다. 시작은 커녕 안절부절, 이 책 저 책 어지럽게 책들을 꺼내 놓고서도 눈에 들어오는 것이 없었다. 

주일 아침까지 그 모양이었고, 결국은 설교 준비를 못했다. 용서를 빌자, 솔직하게 말하자. 무슨 말을 어떻게 할지 모르겠다고, 그나마 어렵게 찾은 본문 시편 11편 말씀이나 읽고 내려오자, 그러는 수밖엔 없었다. 

어디 도망이라도 가고 싶은 심정, 목사가 예배시간이 되도록 설교 준비를 못했다니.

 

딱 예배 시간에 맞춰 예배당에 들어서는데 원 낯선 사람 한복을 입고 수염이 덥수룩한 사람. 이현주 목사님 내외분이 기도를 하고 계셨다. 

이런 세상에 어떻게 여길, 아무 말씀도 없이. 

순간적으로 아찔했다. 초행길인 이곳 단강을 이른 아침 찾으시다니, 반갑고 고마운 마음 이 여간이 아니면서도 아무 할 얘기를 못 찾아 가장 초라하고 괴로운 모습으로 서는 날, 하필이면 그런 날 오시다니, 무엇보다 송구스러웠다. 그런 마음 메꾸기 위해 조용히 기도하고 계신 목사님께 말씀 부탁드리는 것은 도리가 아니지 싶었다. 

이상하게 생긴(?) 낯선 손님과 함께 예배는 시작되었고, 설교랄 것도 없는 설교는 우물쭈물 금방 끝나고 말았다. 

이어 광고시간 교우들께 두 분을 소개했고 인사를 부탁받은 이 목사님은 예의 그 낮고 조용한 목소리로 이 세상엔 결코 우연한 일이란 없는 것 같다고 모든 일은 그때 일어날 이유가 있어 일어난 것일 거라며 오늘 모처럼 정직한 설교를 들었노라 했다. 

확 얼굴이 뜨거워졌다. 예배 드리러 나오기 전에 마지막으로 빼들었던 책이 <옹달샘은 생이다> 이현주 목사님의 동화집이었다. 답답한 마음에 샘물 될까 싶어 꺼내들은 책이었다. 

그런데 정말로 이 목사님이 예배에 참석을 했고, ‘우연한 것은 없다’ 라니. 

점심을 같이 하고 목사님 댁이 있는 엄정까지 모셔다 드렸다. 차로 40여분, 생각보다 훨씬 가까운 거리였다. 사모님이 타 주시는 녹차를 마시며 댓돌 옆에 놓인 대나무 사이를 지나는 바람 소리와 같은 목사님 얘기를 들었다. 

돌아오는 길, 여러 날 나를 짓눌렀던 무거움이 어느샌지 덜어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남한강변 바람이 무척이나 시원했다. 

정말 우연한 일은 그렇게도 없는 것이었다. 

(얘기마을1994)

댓글 쓰기

목록 삭제
Copyright © 최용우 010-7162-35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