옹달샘한희철 › 190.전기밥솥

한희철 | 2002.01.02 21:19:12 | 메뉴 건너뛰기 쓰기

□한희철190. 전기밥솥


도라이버, 뺀찌등 연장을 챙겨가지고 이른 아침부터 작실에 올랐다. 단강에서 제일 허름하지 싶은 아랫작실 언덕빼기 박종구씨네 집. 아무도 없었다.
벌써 일터로 학교로 간 것이다.
30촉 백열전등. 컴컴한 방에 불을 켰다.
두꺼운 이불이 방 아래쪽으로 그냥 있고 윗목엔 철화로가 있다. 불기가 없는 화로위엔 커다란 까만색 남비가 있었는데, 그 위에 라면 부스러기가 둥둥 떠 있다.
익지도 않은 채 불은 라면이었다. 올라올 때 만난 학교가던 봉철이, 아마 그의 아침이었나보다.
두꺼비집을 찾아 전원을 내리고 천정을 가로지르는 두 개의 전선에서 선을 따 테이프로 감고 벽쪽으로 끌어내려 아래쪽에 콘센트를 달았다.
다시 전원을 올렸다.
콘센트에 불이 오는지 안 오는지 확인을 해봐야지 싶어 방안을 살폈다. 부엌, 방, 모두를 살폈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30촉 전등 외엔 전기를 사용하는 기구가 하나도 없었다.
일하고 있는 박종구씨를 만나 저녁에 다시 오겠다 말하곤 내려왔다. 원주에 나가 주보 인쇄를 해가지고 온 저녁에는 추적추적 가을비가 내리고 있었다.
아답터를 챙겨 우비를 꺼내입고 다시 작실로 올랐다. 일을 마치고 온 광철씨, 중학교 3학년 민숙이, 6학년 봉철이가 있었다.
전기 밥통이 와 있었다.
지난번 사 오고도 이적지 콘센트가 없어 사용치 못하고 친척네 보관돼 있던 전기밥솥, 안내책을 꺼내놓고 차례차례 민숙이에게 사용법을 가르쳐줬다.
“민숙아 가서 쌀 씻어올래. 한번 실제로 해 보자.” 민숙이가 나가 쌀을 씻어왔다. “자, 한번 해봐. 그렇지 밥통을 꼭 닫고 취사 버튼을 눌러.”
취사 단추 위에 빨간 불이 들어왔다. “한참 있다 김이 날 거야. 그리고는 취사가 보온으로 넘어가지. 보온으로 넘어간 다음 15분 정도 뜸을 들이면 밥이 되는 거야.”
이젠 됐지 싶기도 했고, 내일 주일 준비도 해야지 싶어 일어나려다 다시 앉았다. ‘이왕이면 밥 다 되는 걸 보고 가자.’
둘러 앉아 밥 되기까지 얘기를 나눴다.
광철씨가 지금도 자랑스레 국민교육헌장을 외고 있다는 것도, 민숙이의 꿈이 디자이너라는 것도, 자신은 산업체학교라도 가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공부하고 싶은데 집에서는 아예 고등학교에 안 보내려 하여 민숙이가 고민하고 있다는 것도, 썰렁한 윗방, 민숙이 잠자리엔 여름 비닐 돗자리 그거 하나 깔렸다는 것도, 민숙이가 저녁은 아예 안 먹고 잔다는 것도, 아침 기상 시간이 다섯시 반이라는 것도, 심심할 때면 성경을 읽는다는 것도, 동생 봉철이에게 알파벳을 가르쳐주고 있다는 것도, 봉철이가 책을 잘 읽고, 받아쓰기도 잘하는 것을 난 그때 처음 알았다.
어느새 밥이 끓고 뜸이 들어 뚜껑을 여니 맛있는 밥이 지어졌다. 재를 날리며 쾌쾌나무를 때 짓던 밥이었는데, 주걱으로 한 주걱 떠 먹어보니 맛이 기막혔다.
한 주걱씩 나눠 맛을 보았다.
“전기밥솥에 민숙이가 처음 지은 밥이 아주 맛있게 됐네. 오늘처럼만 하면 민숙인 일류요리사도 되겠다. 자 그럼 난 갈게. 내일 교회에서 보자.”
 더욱 굵게 내리는 어둠 속 찬비.
그러나 가슴 속엔 웬지 모를 따뜻함.
좀 더 기다려 박종구씨 오거들랑 함께 저녁을 먹고 오면 더 좋지 않았냐는 선한 꾸중이 그런 따뜻함으로 전해져 왔다.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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