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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항해하면서 발견한 다시 읽고 싶은 글을 스크랩했습니다. 인터넷 공간이 워낙 넓다보니 전에 봐 두었던 글을 다시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래서 스크랩할만한 글을 갈무리합니다. (출처 표시를 하지 않으면 글이 게시가 안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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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은총, 그 새로운 발견 - 녹색은총과 붉은색 은총
이정배/ (사)한국교회환경연구소 소장, 감신대 조직신학 교수
두 빛깔 - 녹색과 붉은 색
하나님의 은총을 빛깔로 표현한다면 먼저는 녹색이요, 다음은 붉은 색으로 나타낼 수 있다.
녹색은총이란 인간 삶의 근거이자 토대를 이루는 자연세계, 와 관계된 고백이며 적색은총이란 인간을 참된 인간으로 인도하는 하나님 사랑에 대한 그리스도교인들의 이해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적색은총 곧 십자가의 은총만을 강조하고 그것에만 강한 집착을 보여왔다. 실상 전자에 대한 고백 없이는 후자에 대한 믿음은 현실적이지 못하고 공허해지기 십상이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두 은총, 곧 '우주의 마음'이신 하나님이 자연 속에서 베푸시는 치유와 화목의 은총과 그리스도 예수에 의해 계시되고 베풀어진 은총, 고난과 희생의 은총은 서로 분리된 것이 아니며 상호연관 속에서 우주의 충만한 구원을 이루어가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민족들은 전 자연 속에서 거룩한 지혜를 만나고 영적 차원을 경험하였다. 예수님 역시 공중의 새와 들판의 꽃을 보며 하나님을 느끼고 체험하는 방식을 우리에게 알려 주셨다. 자연이란 이처럼 인간을 하나님에게로 인도하는 영적 안내자이다. 모든 종교와 도덕체계들은 한결같이 자연이 영구불변하다는 전제 속에서 자신의 가르침을 터닦아왔다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개발이데올로기, 곧 성장과 발전에 눈이 어두워 자연을 물질획득의 대상으로만 보아왔던 우리의 삶이 고쳐지지 않고서는 자연 내에서 하나님의 숨결과 현존을 느낄 수는 없을 것이다.
녹색은총을 받는다는 것
그렇다면 오늘, 이 각박한 경제의 시대에, 욕망만을 부추기는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우리들이 하나님의 녹색은총을 어떻게 받을 수 있을까? 이를 알기 원한다면, 아니 그 녹색의 의미를 깨닫기 원한다면 다음 질문에 응답할 준비를 갖추어야 할 것이다.
첫째는 공간에 대한 감각 곧 우리가 살고있는 장소를 성스럽게 깨닫는 일이며 우리의 근거를 파악하고 그 근거와 친밀해지는 것이 가능해야만 한다. 예컨대 우리가 매일 밟고 다니는 땅은 어떤 토양인가? 우리가 살고있는 지역에서 생산되는 식물 다섯가지 이상을 말할 수 있는가? 지난 1년간 어떤 생명체가 당신 지역에서 멸종되었는가? 당신이 오르는 산에서 만나게 되는 풀 종류 다섯가지의 이름을 댈 수 있는가 등이다.
둘째는 이러한 공간 지각력을 바탕으로 하여 생명, 생명력 그 자체에 대한 존엄성, 경외감이 있어야만 한다. 즉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를 '살려고 하는 의지들로 가득찬 곳'으로 보았던 슈바이쩌와도 같은 통찰이 요구된다. 이것은 들판의 꽃이 인간에게 꺾이우기 위하여 존재하지 않고 바다의 물고기가 인간에게 먹히우기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 모두 그 스스로 존재가치를 지니고 있는 생명체라는 자각이기도 하다.
셋째로 녹색은총은 우리 몸에 대한 자각과 긴밀히 연루되고 있다. 지금껏 우리 인간의 몸은 기계(시계)에 의해 조정되고, 길들여짐으로써 그의 자연성이 파괴되어 왔다. 따라서 지금껏 간과되어온 인간 몸의 재발견, 상처받은 몸에 대한 새로운 지각이야말로 하나님 녹색은총의 결과라고 생각된다.
끝으로 녹색은총은 우리고 하여금 다른 사람, 다른 존재의 소리를 듣게 해준다. 산에 올라 나무의 흐느끼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는가? 새의 울음소리를 진정 새 소리로서 들었는가? 바람 소리는? 오염되어 흐르는 강의 절규는? 지금껏 우리는 자기 소리만 내고 살아 왔었다. 하나님께 기도할 때에도 우리는 자기소리만 내었다. 정작 하나님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내적 고요, 기다림도 잊은 채 말이다.
적색은총의 새로운 발견
그렇다면 적색 은총은 무엇을 의미할까? 우리가 아는바, 노아홍수 이후 새 세상의 존립요건으로서 하나님은 인간에게 두 가지 단서를 지키도록 하셨다. 첫째는 사람들의 눈에서 억울한 눈물이 흐르지 않게 할 것이며 둘째는 동물들을 피째로 먹어서는 안된다는 명령이었다(창9:1-7). 동물들을 생명 그 자체로서 취해서는 안 된다고, 탐욕의 대상으로 삼아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전자가 인간세계 속에서 인간간의 형평성(정의) 물음이었다면 후자는 인간과 자연간의 생태학적 균형에 대한 언급이라 짐작된다. 바로 이 두 가지 단서가 지켜지지 않음으로 해서 오늘의 세게는 모든 피조물들이 탄식하고 고통하는 현실로 변해버리게 되었다. 롬 8:17에 '모든 피조물들이 탄식하며, 신음한 채 하나님 아들들의 출현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 바로 이러한 실상을 웅변하고 있다.
이러한 고통으로 인해 하나님의 적색은총, 곧 십자가 사건이 필요로 되는 것이다. 붉은색 은총이란 밖으로부터 들려지는 아픔, 고통, 비탄의 소리들을 듣게 하며 그 소리와 내적으로 하나되게 하는 힘이기 때문이다.
두 은총의 하나됨을 위하여
지금까지 한국 교회들은 붉은색 은총만을 강조하여 왔다. 이러한 입장이 정당하긴 하여도 충분하지는 않다. 붉은색 은총만을 강조한 나머지 모든 피조물들 속에 자리하신 하나님 현존에 대해 무관심하였으며 그 속에서 들려나오는 소리들이 고통과 탄식인 것을 종종 망각하여 왔기 때문이다. 종교개혁 신학이 크나큰 공헌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계시를 문자(성서)에 한정시킴으로 인해 자연 속에서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는 길을 축소시켜 버린 것이다. 이렇게 됨으로써 그리스도교는 인간만의 구원 인간의 이지적인 종교생활로써 그리스도인됨의 정체성을 말하게 되었다.
그러나 녹색은총만으로 우리가 충분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다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녹색은총은 우리 모두가 폭력적인 존재라는 사실을 예리하게 가르쳐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든 고통과 내적으로 연대할 수 있는 적극적 힘도 여기서는 기대하기 어렵다.
오로지 우리 모두가 이러한 두 빛깔의 은총을 함께 경험할 때 이러한 은총 속에서만 인간의 참된 삶(구원)이 영위된다고 믿을 때, 그리스도교 신앙은 세상에 새로운 희망이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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