옹달샘한희철 › 1594. 죽음의 복

한희철 | 2002.01.05 22:02:46 | 메뉴 건너뛰기 쓰기

□한희철1594. 죽음의 복

 

“목사님, 죄송해요. 제 입에서 술 냄새 나지요?” 주일 아침 예배를 마치고 예배당 현관에서 인사를 나눌 때, 박정숙 성도가 뜻밖의 얘기를 했다. 술 냄새가 나다니,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그날은 박정숙 성도가 육순을 맞은 생일날이었다. 바로 일주일 전, 예배를 마치고 인사를 나눌 때 박정숙 성도가 다음 주일 아침에 식사하러들 오라며 교우들을 청했다. 

“무슨 날이세요?” 물었을 때 “글쎄 제 육순이에요. 제가 육순이 됐어요.” 하며 대답을 했는데, 그렇게 대답하는 것이 스스로 쑥스럽고 부끄러운지 소녀처럼 손으로 입을 가렸다. 

마음과는 상관없이 어느덧 세월이 그렇게 흘러갔음을 함께 느끼는 순간이었다. 

주일이침. 이른 시간 우리는 박정숙 성도네로 가 육순을 축하하는 예배를 드렸다. 지금까지 함께하신 주님께 감사하며 앞날에도 은총이 더욱 함께하길 기원했다. 

그리고는 잘 차린 아침을 먹고 예배를 드리러 올라왔는데, 많은 손님이 왔음에도 예배를 드리러 올라온 박정숙 성도가 뜻밖에도 술 얘기를 하며 죄송하다 어쩔 줄을 모른다. 

 

“괜찮아요. 오늘 같은 날이야 거절하게 힘들잖아요?” 많은 손님이 모이다 보면 한잔 술 거절하기 힘든 손님도 있을 터, 그게 무슨 큰 흉이 될까 넉넉하게 이해했는데 얘길 듣고 보니 사연이 있었다. 

사실 술은 시어머니가 따라 준 술이었다. 시어머니가 술을 다 주시다니? 믿을 수가 없는 일이었고, 그만큼 거절할 수가 없었다. 처음 시집왔을 때만 해도 시어머니가 어렵고 무서워 감히 얼굴을 쳐다볼 수도 없었다. 여자가 술을 먹다니, 그건 시어머니 앞에서 용납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며느리가 육순을 맞던 날, 그동안 서울에 가 계시던 시어머니가 며느리 생일을 맞아 내려오셨는데 시어머니는 며느리 생일선 물로 신을 사 오셨다. 털이 푹신한 털신이었다. 생전 그런 일을 모르던 며느리로선 감격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다가 술까지 직접 따라 주시니 어찌 그 잔을 거절 할 수가 있을까, 한잔 더, 한잔 더 하시며 따라 준 술을 주시는 대로 받았던 것이다. 육순을 맞는 며느리를 보는 마음이 안스러웠을까, 아무튼 박 정숙 성도는 시머머니에게 처음의 술을 받았고, 그 사실을 송구함으로 털어놓고 있는 것이었다. 

“잘하셨어요. 얘길 듣고 보니 당연히 받아야 할 잔이었네요. 받기를 정말 잘했어요.” 그 잔을 교회 다닌다는 이유로 거절했으면 할머니 마음이 얼마나 서운하고 민망했을까. 

술잔 받기를 잘했다고 거듭거듭 인정을 했다. 

 

마침 그날 오후 예배의 성경 본문이 ‘죄인들의 친구가 되신 예수님’이었다. 설교 시간, 아침에 있었던 박정숙 성도 이야기를 하며 술잔을 받은 게 잘한 일이냐, 잘못한 일이냐 교우들에게 물었다. 

대답은 한결같았다. 잘했다는 얘기였다. 말이난 김에 교우들께 물었다. “이 한목사가 마을 사람들하고 가까워지기 위해서 마을 사람들 하고 술을 같이 마신다면, 그것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느냐?” 

의견은 대충 반으로 갈렸다. 그러나 굳이 대답의 강도로 따지자면 ‘괜찮다. 좋다’라는 의견에 무게가 실렸다.

그러면 마을과 흉허물이 없어지겠다는 시원한 대답들이 많았다. 죄인들의 친구가 되신 예수님을 이해하는덴 좋은 이야기가 되었다. 

며느리인 박정숙 성도에게 육순 술을 따라 주었던 이돌례 할머니는 며느리 육순이 지난 얼마 뒤 돌아가시고 말았다. 81세의 연세, 몸이 아프시다 하여 심방을 가 예배를 드렸는데, 그것이 임종예배가 되었다. 예배를 드리고 나서 한 시간 쯤, 주무시듯이 숨을 거두셨다. 

평소 할머니는 교회에 나오지 않으셨지만 며느리가 교회에 나오는데다 돌아가시기 전 하나님께 예배를 드린 일로 장례도 ‘교회식’으로 해달라고 부탁을 받았다. 웬일인지 마지막 예배를 드리며 할머니 머리에 손을 얹고 기도하고 싶었고, 가만 마음을 모아 머리에 손 얹어 기도를 드리며 할머니의 영혼을 지키시고 받아 달라는 기도를 드렸는데, 유족들에겐 그 기도가 마음에 남았던 모양이었다. 

 

입관 예배를 드리기 전, 염을 하는 시간이었다. 섬뜰의 최태준씨와 같이 할머니께 수의를 입혀 드렸다. 할머니 얼굴 손과 발을 닦을 때 박정숙 성도께 닦아 드리라고 권했다. 수의의 옷고름을 매는 일도 박정숙 성도에게 맡겼다. 

고운정 미운정 다 들었을 어머니, 그 어머니 얼굴과 손발을 닦아 드리고 마지막 옷고름을 매어 드리는 일이 그나마 마음에 남은 송구함이나 안타까움을 더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었고, 박정숙 성도는 내내 흐느끼면서도 정성스런 손길로 어머니 얼굴을 닦고 옷고름을 매어 드렸다. 

아직 일철이 나서지 않은 따스한 봄날, 할머니는 참 좋은 날을 택해 떠나셨다. ‘죽음의 복은 타고 나셨다’고 모두들 할머니 떠남을 부러워했다. ‘죽음의 복까지’가 아니라 ‘죽음의 복은’ 이라는 말이 담고 있는 아픔도 그 좋은 봄볕에 다 잊고 싶을 만큼 날이 좋았다. 

한 사람의 삶은 여러 사람과 얽혀있고 우리는 서로 서로의 삶을 지켜주고 돌아보게 하는 것임을 박정숙 성도와 박정숙 성도의 시어머니 이돌례 할머니 를 통해 본다.

(얘기마을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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