옹달샘이해인 › 일기-범일동 성당에서

이해인 | 2009.03.01 22:41:12 | 메뉴 건너뛰기 쓰기

이해인900.  <필 때도 질 때도 동백꽃처럼>


일기-범일동 성당에서


한국전쟁 때
범일동 시장터에서
가족들과 함께
하얀 손수건을 팔던
다섯 살 어린 소녀는
이제 수녀가 되어
60년 만에 이렇게
성당에서 특강을 하게 되니
감회가 깊어요


여러분의 모습이
다 정겨운 친척 같아요
아름다운 손수건으로
제 앞에 펄럭입니다
손수건 위에 수놓았던 꽃처럼
착하고 고운 마음으로
인사드리고 싶어요


피난 시절
함께 살던 가족은
거의 다
이 세상을 떠났고
저의 떠남도
그리 멀진 않았지만
오늘 이렇게
시장터에서 일하는 분들이 많은
범일동에 오니 고향에 온 것처럼
고맙고 반갑습니다


하도 추워서
울며 걸었던
철로에도 가고 싶고
세 들어 살았던 그 집에도
다시 가보고 싶은 오늘
하얀 손수건 흔들며
고운 춤을 추어드릴게요
“천사의 말을 하는 사람도
사랑 없으면 소용이 없고...”
이어지는 성가에 맞추어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춤을 추어드릴게요, 나비처럼, 바람처럼


 ⓒ이해인(수녀) <필 때도 질 때도 동백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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