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마태복음 › 시장의 논리와 하느님 나라의 논리

홍근수 목사 | 2003.09.08 00:00:22 | 메뉴 건너뛰기 쓰기
성경본문
마20:1-14
설교자
홍근수 목사
참고
새길교회
새길교회는 여러 가지 점에서 제가 두어 달 전에 자원 은퇴한 향린교회와 유사하다고 생각합니다. 16년 전이나 지금이나 새길교회의 모습은 50년 전의 향린교회의 그것을 띄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향린교회는 초교파 교회, 평신도 교회, 입체적 선교, 공동체적 선교라는 등의 창립정신을 내 세우고 교회를 창립하였으나 불과 6년 만에 한국기독교장로회에 소속함으로 말미암아 초교파 교회의 성격이 중단되었습니다. 여기에는 물론 여러 가지 사정이 있었을 것 같습니다. 어쨌든 제가 알기로는 새길교회는 창립한지 16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초교파 교회, 평신도 교회로 존립하고 있다는 점에서 향린교회와 다르다고 생각하고 이는 퍽 의미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교회에서  설교를 하게 되어 기쁩니다.  

  오늘 본문은 포도원 주인의 비유의 이야기로 매우 유명합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아주 어려워서 좀처럼 바로 이해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침 일찍부터 땡볕 아래에서 땀을 흘리면서 종일 일한 사람-사실 땅을 흘리면서 열심히 일했는지 추측할 따름입니다만-과 마감 시간에 와서 겨우 한 두 시간 일한 사람-빈둥거리며 놀았는지 모르겠습니다-과 같은 임금을 준다니 말이 되냐고 항의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제가 자주 받는 질문 가운데 하나는 기독교가 이 비유처럼 임금을 줄 수 있는가? 하느님의 나라가 이와 같다면 그런 하느님의 나라는 '공평의 원리'에 어긋나지 않는가? 라는 것입니다.  어떤 신앙 돈독한 분이 이 말씀에 따라서 직원들에게 모두 월급을 똑 같이 주었다가 혼났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사람의 잘못은 이 말씀이 경제적 상식과 경영학에 관한 문제를 취급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이 말씀은 회사에서 월급을 어떻게 주라는 구체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하느님 나라의 성격입니다. 즉, 하느님의 나라가 지금 우리가 보는 대로 불평등한가 아니면 평등한가입니다.

  우리는 우선 이 주인이 잘못한 것이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될 것 같습니다. 주인은 어디까지나 계약대로 이행했습니다. 그는 아침에 들어 와서 종일 일한 사람의 품삯으로 한 데나리온을 주기로 합의하였고 그대로 실천했습니다. 아마도 아침 첫 시간부터 일한 사람을 1 데나리온을 주고 마감 시간에 온 사람에게 그 8분의 1을 주었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었을 것입니다. 불평의 근원은 마감 시간에 와서 일한 사람에게 1 데나리온을 주었고 아침부터 열심히 일한 사람에게도 1 데나리온을 주었다는 데 있습니다. 그런 임금계산법이 어디 있느냐는 불평입니다. 이 사실은 우리가 얼마나 탐욕에 가득 차 있는가 라는 단면을 말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로 이 문제는 정의의 문제에서 볼 때 타당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의 개념, 즉, '배분적인 정의'에는 어긋납니다. 사실 우리 모두가 익숙하게 알고 있는 정의 개념은 바로 이 배분적 정의입니다. 그 정의 개념을 기본으로 하여 어디까지나 급부와 반대 급부가 일치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많이 일했다면 그에게는 많은 액수의 임금을 주고 어떤 사람이 적게 일했다면 그에게는 적은 액수의 임금을 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자본주의 사회의 임금 계산법이고 이것이 우리들이 익숙하게 알고 또 당연시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정의 개념의 전부가 아닙니다. 또 다른 원칙, 즉 이 비유에서 보는 원칙이 있습니다. 그것은 생존권의 원칙입니다. 기본적인 생존권은 모든 사람에게 필요로 하는 것으로써 허락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1 데나리온은 당시 일용노동자들의 하루 품삯이기도 하지만, 또한 네 식구를 거느린 가정의 일일 생계비라고도 합니다. 일일 생계비가 필요한 것은 누구나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은 어떻게 보면 기본적인 급여이고 모든 사람이 누릴 권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난한 민중이든, 그 사회에서 중산층이나 상류층이든 간에 모두 일일 생존비는 필요합니다. 물론 전자와 후자의 일일 생존비는 엄청난 차이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도의 금액은 모든 사람들에게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최소한도의 인간의 권리이자 필수적인 사항입니다. 룻소는 "아무도 사람을 살 수 있을 정도로 부유해서도 아니되며, 아무도 자기 자신을 팔 정도로 가난해서도 아니된다."(〈그리스도교대사전〉, 920쪽, 1972.)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룻소의 정의 개념에서 보면 모든 사람이 기본적인 생존권을 지불 받는다는 것은 타당한 것입니다.

  아무리 실업자라도 그러한 생존비는 있어야 한다는 것이 정의의 개념입니다. 즉 정의의 개념 가운데는 배분의 원칙에 따라서 기계적으로 적용하는 정의가 아니라 최소한도의 생존비는 보장되어야 한다는 정의 개념도 있습니다. 그런데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어떤 인정 사정 따위를 보는 것이 아니고 하루에 몇 시간을 노동했느냐? 그 노동하는 시간에 따라서 임금을 쳐 줄 수밖에 없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적용한 정의 개념은 그런 아리스토텔레스적인 기계적인 정의가 아니고 오히려 룻소적인 정의의 개념이라고 할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모든 사람들이 최소한도의 생존비는 해결할 수 있는 곳이라는 사상이 근저에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을 포함하여 모든 사람의 생존비는 정말 필요하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할 것 같습니다.

  모든 사람이 생존비를 지급 받아야 한다는 정의 면에서 보면 오늘 우리 사회는 문제가 매우 많습니다. 왜냐하면 빈부의 차이가 합법화되어 있는 사회, 시장의 논리가 지배하는 사회이기 때문입니다. 독일의 신학자인 두크로는 지금 세계 인구의 20%의 부자가 세계자원의 82.7%를 쓰고 있다고 합니다. 세계인구의 나머지 80%는 세계자원의 나머지 17. 3%를 쓰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맨 밑바닥 가난한 20%의 사람들은 세계 수입의 불과 1.4%을 쓰고 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떤 사람은 하루에 수 백만불 씩 벌지만, 어떤 사람은 하루에 1불도 벌지 못하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지금 이 세계에는 미화 1불 정도로 하루를 연명하는 사람들이 13억 명이나 있다고 하는 데 이들은 최소한도의 생존비를 벌지 못하고 있습니다. 소위 21세기 세계는 흔히 20대 80의 사회라는 것은 바로 이런 사회를 두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지금 우리는 시장의 논리가 지배하는 사회, 그런 세계를 봅니다. 여러 가지 중 두 가지만 꼽는다면 세계화가 그 중의 하나이고, 한반도 전쟁 위기고조가 다른 하나입니다. 우선 세계화가 왜 문제인가 의문할 분이 있을 것입니다. 지금의 세계는 지구 일일 생활권이 실현되어 지구화 내지 세계화는 원하든 원하지 않든 불가피한 것 같습니다. 어제 신문 광고란에 세계화 국제포럼 책,『세계화, 비판을 넘어 대안으로』라는 책의 선전에서 이렇게 세계화에 관해 말하고 있습니다: "빈곤을 증식시키고 지구를 구하는 데 필요한 돈을 벌기 위해 가난한 사람들은 착취당해야 하고 자연은 훼손돼야 하는가? 지금 세계화는 지구의 진정한 부를 파괴하고 원시적인 승자 독식의 경쟁을 심화시키고 있다."(한겨레신문, 2003.8.30, 광고.)

  지구화 또는 세계화란 것이 이런 것이라고 할 때, 그 미사여구(美辭麗句)에도 불구하고, 우리 기독교인들이 지지해야 하겠습니까? 지구화가 미국 자본의 무제한적이고 무제약적인 세계화를 의미할 뿐이고 그래서 가난한 나라는 계속 가난한 나라로 된다면, 지구화가 미국 자본과 미국의 재벌들을 위한 것이고 그들의 주도 하에 그들의 이익을 보장하고 그들 방식대로 하는 것이고 이 세계의 절대 다수인 민중들에게는 재앙을 의미할 뿐이라면, 그래도 우리 기독교인들은 우리가 믿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아멘?' 해야 할까요?

  하느님 나라의 경제 체제 또는 사회 체제는 사도행전에 나오는 첫 기독교회의 공산주의적인 삶을 차치하고라도 지금의 우리 인간이 가지고 있는 이념 체제와 관련하여 말한다면 사회주의에 가깝지 자본주의에 가까운 것은 아니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재화의 빈부 차이, 이에 의한 인격의 차이를 인정하는 상류층과 하류층을 전제하고 합법화하는 그런 사회, 자유와 정의란 이름 하에 무한정한 탐욕과 개인 소유권의 무한정 자유와 절대권을 인정하는 그런 사회, 그것이 자본주의 사회의 가장 특징적인 것이라고 한다면 하느님 나라는 그런 곳은 아닐 것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자본주의 경제체제나 시장의 논리가 지배하는 곳의 반복은 아닐 것입니다. 우리는 성서로 돌아가서 하느님 나라의 논리와 전제를 되찾아야 합니다.  

  우리가 이 말씀에 비추어서 생각해야 할 또 하나의 문제는 한반도의 전쟁 위기고조입니다. 이 정치-군사적인 문제가 정의의 문제와 무슨 관계인가 라고 의문할 분이 있을 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 양자는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소위 북한 핵문제로 어제 북경에서 남·북한과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가 참가하는 6자 회담이 있었습니다만, 2차 회담의 일자, 장소 등을 정하지 못하고 공동발표문도 채택하지 못한 채 폐막되었습니다. 예상대로 미국은 강경한 목소리를 반복하였고 북한은 북한대로 강경한 목소리를 반복했을 뿐이었습니다. 이를 두고 시민들은 낙관, 또는 비관적인 엇갈린 입장을 가지게 되었을 것 같습니다. "대화 기조를 이어가고 북핵 문제 논의 틀로 6자 회담이 일단 자리를 잡았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한다."(한겨레신문, 사설, "6자 회담, 긍정·미흡 엇갈린 출발.", 2003.8.30)고 서울에서 발간되는 한 일간지 신문 사설은 긍정적으로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회담을 지배한 것은 미국의 전쟁논리, 곧 시장논리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원칙적으로 한반도 비핵화에 찬성하고 있는 북한이 핵무기를 가진다면 그것은 미국의 전쟁논리, 곧 시장 논리 때문이라고 믿습니다. 지금 9·11 테러를 기화로 미국은 세계 도처에 전쟁을 일삼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아프카니스탄을, 그 다음에는 이라크를, 그 다음에는 한반도라는 것이 공공연히 되어 있어 우리의 불안이 높아가고 있습니다. 이것은 한 마디로 말하여 시장의 논리에 따른 것입니다. 미국이 전 세계의 부를 독차지하겠다는 의도로 초강대적인 군사력을 믿고 전쟁을 할 심산입니다. 미국이 진정 세계평화를 원한다면, 진정 하느님 나라의 논리를 조금이라도 관심 한다면, 오늘의 세계는 이렇게 전쟁의 세계는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의 중심 사상을 이루는 산상설교에서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즉, 의식주 문제를 걱정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태 6: 31) 예수님이 과연 경제의 중요성을 몰랐을까요? 더욱 신비로운 것은 예수님의 본래 청중들은 단순히 불특정 다수의 대중이 아니고 가난한 민중들이었다는 사실입니다. 배고프고 집 없고 직장 없고 '빽' 없는 지극히 가난한 민중들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을 향해서 의식주나 밥이나 경제 문제를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가르쳤다면 이는 과연 현실적이었을까 하고 의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말씀은 오늘의 경제 세계에 살고 있는 우리들이 삼키기에는 너무 어려운 것 같습니다. 한편 생각해 보면 부자들은 걱정하지 않고도 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들은 그런 따위의 문제는 이미 다 해결해 놓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가난한 사람들에게 이 문제는 어떻게 이해되어야 할까요? 가난한 사람들은 의식주, 직장 등의 문제들, 즉 경제 문제들에 대하여 걱정하지 않고서는 한순간도 존재할 수 없는 것이 그들의 현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간과하기 일쑤인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 즉 예수님이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의 정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이 너희들에게 주어질 것이다'(마태 6: 33.)고 하신 말씀을 주목하여야 하겠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먼저 우리들의 가치관, 의식체계 등을 전부 바꿀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경제문제에 대한 염려 보다 더 우선적으로 하느님의 나라와 그의 정의를 추구하라는 것입니다. 지상의 현실은 하느님의 왕국과 하느님의 정의에 따라 바꾸어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여기서도 하느님의 나라의 논리는 시장의 논리와 다르다는 것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고 봅니다.

  우리가 다시 생각해 보면 예수님은 이들에게 일부러 이런 교훈을 주었던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사회는 로마 제국의 식민지 지배 아래 있었고 또 불의하여 아무리 먹고살려고 애를 써도 소용없었던 사회로 알려졌습니다. 그런 사회에서는 어떻게 하겠는가? 이런 상황에서는 두 가지 방법이 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는 자포자기하는 방법일 것입니다. IMF를 당한 한국 민중들이 이 길을 택했던 사람들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또 한가지 방법은 그들을 그렇게 가난하게 만드는 불의한 사회구조 자체를 바꾸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것은 대량해고, 중소기업의 폐쇄, 전기, 철도, 우편 등 주요 공기업의 민영화와 해외매각 등을 의미하는 구조조정 보다도 더 근본적으로 IMF 경제체제와 제반 사회 자체의 정책과 체제 자체를 바꾸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여기 본문에 임금에 대하여 불평하는 사람에게 '네 것이나 가지고 가거라' 라고 한 말에 대하여 잠시 살펴보십시다. 이는 단순히 불평하는 사람들에게 불평하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회개하여 새로운 하느님 나라의 논리를 가지는 대신에 여전히 시장논리의 잣대로 만으로 모든 것을 재단하고 판단하겠다는 사람은 자본주의 사회, 로마 제국의 사회에는 어울릴지 모르지만, 하느님의 나라에 적합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자기 것인 시장의 논리나 가지고 그런 세계로 돌아가라는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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