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마태복음 › 위험한 만남

길희성 | 2007.12.19 23:57:32 | 메뉴 건너뛰기 쓰기
성경본문
마19:16-26
설교자
길희성 형제
참고
새길교회
지루했던 여름도 지나고 때아닌 늦장마의 충격도 어느 정도 벗어나서 모두들 알찬 가을걷이와 수확을 위해 활기찬 모습으로 삶의 바퀴를 굴리고 있는 듯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흩어졌던 신앙의 자세를 가다듬고 무엇보다도 우리의 삶을 신앙 위에, 말씀의 반석 위에 굳게 정초 해야 하겠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간단히 말하자면 예수와 만남으로 해서 삶이 변화되어 새로운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만나기 이전과 만난 후의 삶이 달라져야 하는 것입니다. 다른 가치관, 다른 시각, 다른 사고방식, 다른 삶의 방식이 우리의 삶을 지배해야 예수를 만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 믿는다는 것이 요즈음 조롱거리가 된 것도­심심지 않게 신문에서 큰 사건을 터트린 자들이 알고 보니 교회 다니는 사람이라 우리를 당혹케 하고 있으며, 엊그제는 어떤 가짜 승려가 사회봉사를 미끼로 사기행각을 벌여 충격을 주기도 했지만, 그런가 하면 뇌물을 주고 교육위원이 되는 세상이 되었으니, 종교도 썩고 교육도 썩고 무엇 하나 의지할 곳이 없게 되었다는 한탄의 소리가­바로 이러한 자명한 진리가 한국 교회에서 통하지 않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인생관과 세계관의 변화, 가치관의 일대 전환이 없이 단지 삶의 스타일만 변화했기 때문입니다. 예수 믿는다는 것은 교회를 열심히 다니는 일로 되어버렸습니다. 교회는 열심히 다니는데, 그리고 교회에서 살다시피 하고 교회를 중심으로 해서 모든 삶을 영위하도록 삶의 스타일은 바뀌었지만 정작 그의 인생관과 가치관, 삶의 방식은 조금도 변하지 않는 크리스천들을 양산하는 것이 현 한국교회의 기이한 모습인 것입니다.

이렇게 된 근본 원인은 무엇입니까? 교회가 예수와의 진정한 만남을 오히려 가리우는 역설적인 현상 때문입니다. 진정한 예수는 오히려 세상 사람들이 더 잘 인식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 분의 가르침을 따라서 살 자신이 없으니까 예수를 두려워하고 아예 예수 믿을 생각 못하고 교회 근처에는 얼씬도 안 하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세상에는 많이 있습니다. 가짜 예수를 믿는 것보다는 차라리 정직한 일입니다. 때로는 무신론자들이 예수의 정체를 더 깊이 이해하고 있는 것을 우리는 여러 사상가들이나 작가들을 통해서 볼 수도 있습니다. 실로 예수는 교회의 전유물이기는커녕 교회에 다니면 진짜 예수를 모르게 된다고 까지 극언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교회 따로, 예수 따로, 아마도 이것이 오늘날 한국교회의 최대 문제일 것입니다. 예수는 온데 간데 없고 교회만 성대하게 되고 성직자들만 대우받는 장소가 된 것입니다. 아니, 교회에서 하는 소리마다 예수, 말끝마다 주님을 부르지만, 슬프게도 진정한 예수의 모습은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는 데 역설의 극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심지어는 교회가 예수 장사하는 곳이며, 성직자들과 교회 지도자들은 예수 팔아먹고 사는 사람들이라는 극언마저 심심지 않게 듣게 됩니다. 왜,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지 그 근본을 따져 보면 문제가 그렇게 간단치 않습니다. 단순히 교회가 세속적으로 타락했다는 정도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을 위해서는 기독교 역사 전체를 다시 생각해야 될 판국입니다. 이것은 비단 한국교회만의 문제는 아니지만, 한국교회에서 문제가 더 극단적으로 드러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예수는 분명 2,000년 전 인류 역사에 한 위대한 혁명을 불러일으킨 존재였습니다. 그리고 그에 의해 시작된 혁명의 물결은 서서히 세계 곳곳으로 전파되고 확산되면서 면면히 이어져 오늘날에도 그 혁명의 여파가 이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근대사의 격랑 속에서 그 혁명의 물결은 마침내 한반도에까지 미쳐서 지금 우리도 이렇게 지리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시간적으로 너무나도 동떨어진 2,000년 전 팔레스타인의 한 의인이자 죄인인 예수라는 존재를 우리의 구주로 믿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모든 혁명이 그렇듯이 이 예수혁명도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변색되고 변질되어 갔습니다. 혁명 일 세대, 곧 예수를 직접 눈으로 보고 따라 다니던, 제자들이 떠나가고 1세기 후반의 혁명 2 세대 - 성서 기자들과 그 대상, 그리고 3 세대 즉, 아직 그리스도교의 도그마가 채 확정되지 않은 초기 교부들의 시대 - 2,3세기가 지나고 4세기로 접어들면서 콘스탄틴 대제에 의해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종교, 국교화되면서 마침내 예수혁명은 본래 정신과 충격성을 상실하고 완전히 변질되고 말았습니다. 이 변질을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땅 위의 예수, 역사의 예수, 인간 예수의 생생한 모습은 없어지고 신비화되고 추상화된 그리스도, 형이상학화된 도그마의 그리스도, 신격화된 하늘의 그리스도만이 남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말은 같은 예수를 말하지만 내용은 전혀 다른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 구체적인 인간 예수의 삶과 행적, 말씀과 사상을 접하면서 오는 충격과 변화는 없어지고 신비적 하늘의 구세주만 찬양하는 어처구니없는 기독교, 예수를 아무런 충격이나 삶의 변화 없이도 쉽게 받아들이는 관습적 기독교, 성례전화 되고 신비화된 기독교가 판을 치게 된 것입니다. 한 마디로 말해 역사의 예수에 대한 위험한 기억은 완전히 사라지고 알맹이는 쏙 빠진 내용 없고 추상적인 하늘의 그리스도만이 남게 되었습니다. 인간을 섬기고 하나님께 복종하다가 십자가의 고통을 당한 예수는 온데 간데 없고 부활 승천하여 하나님 우편에 앉아 군림하고 통치하는 영광의 그리스도 모습만을 흠모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오늘날 서구 신학자들은 그렇기 때문에 이 진짜 예수, 이 인간 예수를 어떻게 하면 다시 살릴 수 있을까 고심 중에 있으며, 이것은 불가피하게 이른바 교회의 전통적인 그리스도론적 사고의 해체작업을 수반하기 마련인 것입니다.
더욱 기가 막히고 한심한 것은 우리 한국교회입니다. 서구인들이 변질시켜 놓은 예수, 전통적인 그리스도론을 금과옥조인양 무엇이 두려운지 벌벌 떨면서 붙들고 있고 조금만 다른 생각하면 이단이니 뭐니 해서 매장해 버립니다. 그나마 전통적인 서구 신학의 깊이마저 없이, 한국 신학자들 성직자들은 그저 서구 그리스도교가 변질시켜 놓은 예수를 맹종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위기는 단순히 교회의 도덕적 위기가 아니라 신학적 위기, 즉 예수가 과연 누구이며 기독교가 과연 어떤 종교인가를 다시 물어야 하는 보다 근본적인 위기인 것입니다. 전 세계 교회의 위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진정한 예수와의 만남을 통해서 일어나는 인격의 변화, 삶의 혁명적 변화를 다시 실현하지 못하는 한 기독교는 희망이 없는 종교입니다. 우리 새길교회는, 제가 이해하는 한, 바로 여기에 모든 것을 걸고 나선 교회입니다. 우리는 가끔 우리 새길교회의 다른 점이 정말 무엇이냐, 무엇이 새길이냐고 묻곤 합니다. 그것은 평신도 교회라는 제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복음에 대한 새로운 이해, 예수의 새로운 발견에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오랜 교회의 관습과 잘못된 신학에 도전하는 우리의 길이 얼마나 어렵고 험난한 것인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좀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우리의 선택은 아주 간단히 말해, 진정한 예수, 위험한 예수를 만나든지 아니면 차라리 정직한 무신론자가 되든지 둘 중의 하나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우리는 모두 이 진정한 예수를 조금이나마 가까이 하려고 이 교회를 붙들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서론이 너무 길어졌습니다. 본론을 말씀드리자면, 예수를 만나는 데는 두 가지 방식이 있습니다. 하나는 쉽게, 쉬운 예수를 만나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어렵게 어려운 예수를 만나는 것입니다. 예수는 이것을 넓은 문과 좁은 문으로 표현하셨고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렵게 예수를 만난다는 것은 예수를 충격적으로, 위험부담을 안고 만남을 뜻합니다. 자기에게 아무런 희생도 요구하지 않고, 아무런 대가도 치르지 않고 예수를 믿는 것, 즉 자기 십자가를 지지 않고 주여 주여 떠들면서 예수 믿는 것은 쉽게 예수를 만나는 것입니다. 신비화된 예수, 주술화된 예수, 부활 승천하여 저 높은 하늘 위에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 예수를 믿는 것은 쉬운 만남이고, 구체적인 인간 예수, 지상의 예수, 십자가상의 예수를 믿는 것은 어렵게 예수를 만나는 일입니다.

오늘 읽은 복음서의 말씀에서 우리는 어렵게 예수를 만난 한 청년의 이야기를 대합니다. 이 청년은 그 만남이 너무나 어려워서 그만 물러서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너무 잘 아는 부자 청년의 이야기로 한 청년(누가복음에는 의회원이라고 하였음)이 예수께 나아가서 "선생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하겠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인간이 물을 수 있는 가장 근본적, 가장 중요한, 가장 숭고한 질문이라고 생각됩니다. 적어도 예수에게서 그는 세속적 축복이나 출세의 길을 묻지 않고 영생의 길을 물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세상적 축복을 구하고 있는 것에 비하면 이 청년은 예수가 어떤 존재인지를 바로 알고 있었던 사람인 것 같습니다. 진정, 예수는 영생의 길을 제시하신 분임에 틀림없습니다. 이 청년은 영생이 무엇이냐, 그것을 얻는 방법이 무엇이냐는 아직 제대로 알고 있지 못했지만, 적어도 예수에게서 하나님나라의 영원한 생명의 길을 찾아야 한다는 의식만은 가지고 있었고 그것이 그의 최대 관심사였습니다. 세상에서 갖출 것은 다 갖추었다고 생각했으며 부족한 것이 없다고 생각했으나, 아마도 그는 삶의 공허함을 느꼈으며 자기가 이룩한 모든 것이 언젠가는 그의 생명과 더불어 허무로 돌아가고 말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이런 질문을 한 것 같습니다. 영생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다른 모든 것을 얻어도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라는 것을 그는 깊이 자각한 자였던 것 같습니다.
우리는 흔히 이 이야기를 쉽게 넘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는 안 될 부정적 본보기의 이야기로 치부해버리기 쉽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이 부자 청년은 진짜 예수를 만났습니다. 어려운 예수를 만났다는 사실은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매우 솔직해서 나는 못하겠다고 예수를 떠나버린 정직성은 인정해야 합니다. 예수를 쉽게 만나서 이 세상에서도 잘 살고 내세의 복락도 누리겠다는 꿩 먹고 알 먹는 식의 파렴치한 신앙이 아니라 예수를 믿으려면 대가, 그것도 가장 비싼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사실만은 바로 인식했기에 결코 가볍게 넘길 얘기가 아닙니다.

이야기를 좀 더 자세히 고찰해 봅시다. 청년의 질문은 "무슨 선한 일을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이었습니다. 이 청년은 선한 삶, 선행이 영생의 조건이 된다는 지극히 상식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이 생각을 근본부터 흔들어 놓았습니다. 인간은 선한 일을 하기 어려운 존재이며, 선한 분은 오직 한 분뿐이며(예수는 심지어 자기 자신에게도 선하다는 말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하십니다. 마가복음 10:18), 영생이란 세상적 관점에서 선하다는 일을 통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보다는 차라리 이미 주어진 하나님의 계명을 지킴으로써 그의 뜻을 준행하는 것이 낫다는 것입니다. 예수는 특히 10계명을 들었습니다. 사실, 선한 일이란 다분히 주관적이고 애매한 개념으로, 사람은 누구든 자기가 하는 일은 다 선하다고 생각하기 마련입니다. 유대적 사고방식, 예수의 사고방식은 선한 것보다는 확실한 하나님의 계시, 그의 율법을 지키는 것이 인생의 길이었습니다. 청년은 어렸을적부터 계명을 착실히 지켰는데, 그런데 무엇이 아직 부족하냐고 묻습니다. 예수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레위기의 명령으로 그의 자만심을 도전합니다. 이 부분은 마가나 누가복음에는 없는 것으로, 아마도 마태가 이 청년의 자만심을 더 강조하기 위해서 가필했을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이웃 사랑에서 모든 율법의 완성이 있다는 예수의 생각을 반영한 것입니다. 청년은 이것도 자기는 지켰다고 장담합니다. 실로 대단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누가 나의 이웃입니까?"라는 질문으로 예수의 도전을 회피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불쌍한 사람을 보면 자선도 베풀고 사회봉사도 했으며 억울한 사람, 강도 만난 자를 돌보아 주기도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무엇이 아직도 부족하냐는 것입니다. 이 정도면 된 것 아니냐, 그 이상으로 요구하는 것은 예수께서 너무 가혹한 것 아니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다시 그에게 도전합니다. "네가 완전하게 되려거든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네가 하늘에서 보화를 가지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예수께서 왜 그렇게 가혹하리 만치 말씀하셨는지, 그리고 이 말의 충격은 그 청년의 반응에서 여실히 드러납니다. 청년은 근심하면서 떠나갔습니다. 그에게는 많은 재산이 있었기 때문이다, 라고 복음서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영생을 얻기가 이렇게 어려운 것인가, 예수를 따르기가 이렇게 가혹한 것인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어 하늘의 보화를 차지하기가 이렇게 매서운 것인지 그는 예전엔 미쳐 몰랐던 것입니다.

이 부자 청년의 문제는 과연 무엇이었습니까? 예수는 그에게서 어떤 문제를 간파하셨기에 그토록 그를 집요하고 가혹하게 몰아 세웠습니까? 한 마디로 말해, 그는 복음을 자기 인생의 부차적인 관심, 부분적인 관심으로 삼았다는 데에 있습니다. 복음, 영생, 하나님나라는 그의 인생에서 부차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었으며, 그가 그의 인생에서 진짜 믿고 의지하는 것은 그의 재산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결코 수전노 같은 사람도 아니었고 수단방법 가리지 않고 돈만 아는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모은 재산을 바탕으로 하여, 여유 있게 남을 위해 자선도 베풀 줄 알았으며, 계명도 잘 지키는 선량하고 모범적인 사람이었기에 그는 이만하면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서 예수 앞에 당당하게 나와서 그의 인정을 받으려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자기 인생의 최후 보루, 최후 안전판이라고 여겼던 것을 여지없이 내버리라는 예수의 청천벽력과도 같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말에 그는 그만 기가 막혀 더 할 말을 잃었던 것입니다. 자기 귀를 의심할 정도의 너무나도 예기치 못했던, 그리고 솔직히 말해 상식을 초월하는 말씀이었음에 틀림없습니다. 아니, 자기 인생의 안전판을 던져버리라는 말은 죽으라는 얘기나 다름없는 말이었습니다. 죽지 않으면 영생은 못 얻는다는 것입니다. 영생은 단순히 모범적인 사람, 선량한 시민, 도덕군자들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 가운데 누가 자기는 이러한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까? 모두 다 자기는 선량한 시민이요 도덕적이라고 생각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의 칼날 같은 요구 앞에서는 우리의 자만심, 우리의 의로움, 우리의 선은 무력한 것으로 드러납니다. 부자 청년과 같이 풀이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참다운 신앙은 우리 각자가 숨기고 있는 인생의 안전판을 포기하고, 우리 각자의 우상을 여지없이 허물어 버리는 용기입니다. 이 포기와 무너짐이 없이는 진정한 생명은 없으며, 이 자기부정과 죽음이 없이는 영원한 생명은 싹트지 못한다는 것을 예수는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오늘의 말씀은 결코 부자들만을 향해 하신 말씀이 아니며, 결코 물질적 삶, 경제생활에 대한 그리스도교적 원리를 제시하려는 데에 있지 않습니다. 단지 자기의 재산에 자기 인생의 안전판을 숨기어 놓고 예수를 따르고자 했던 한 부자 청년을 만났기에, 그리고 하나님나라와 영생을 너무 쉽게 생각했던 한 청년을 만났기에 그렇게 말씀하신 것뿐입니다. 부자가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구멍을 지나가는 것 보다 어렵다는 과장법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누구든지 당장 가족을 버리고 자기 재산을 모두 팔아 신앙촌으로 들어가거나 도를 닦는 수도자가 되라는 얘기가 아닙니다. 달란트의 비유를 보아도 그런 것이 반드시 예수의 생각이 아님을 알 수 있고, 더군다나 부정한 방법으로 재산을 모은 삭개오의 경우에도 재산의 반만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줄 것을 인정하셨습니다. 문제의 핵심은 무엇이든지 하나님나라에 장애가 된다고 여기면 가차없이 청산하라는 것이며, 이 청산, 이 부정 없이는 결코 하나님나라의 영원한 생명은 얻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눈이 범죄 하면 빼어 버리라, 손이 범죄 하거든 찍어 버려라, 눈 하나 없이, 손 하나 없이 하나님나라 들어가는 것이 멀쩡한 사지 다 가지고 멸망의 길로 가는 것보다 낫다는 예수의 말씀은 진정 가혹한 말씀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그 뜻은 분명합니다. 누구나 영생을 얻으려면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내게 오는 사람은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나 아내나 자식이나 형제나 자매를 버려야 한다. 또 자기 목숨까지라도 버리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그러나 역시 재산에 대한 집착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데 큰 장애가 된 다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인 것 같습니다. 그러기에 누가복음에는 계속해서 말합니다. "이와 같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누가 14: 25-33).

신앙은 결코 우리 인생의 악세사리가 아니며, 신앙은 단연코 부차적인, 부분적인 관심이 되기를 거부합니다. 신앙은 하나님 앞에서 숨겨놓은 카드(hidden card)라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며, 하나님 앞에서 딴 살림 차리는 것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신앙은 하나님 앞에서 감춤 없이 자신을 완전히 노출하는 행위이며 자신의 삶을 몽땅 내놓는 행위입니다. 예수는 결코 우리 인생의 뒷전에 서 있기를 거부하십니다. 신앙을 가볍게 여기는 사람에게, 영생을 자기부정 없는 자기확대로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나라를 세상적인 삶의 연장과 연속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예수의 신앙은 불가능한 요구를 함으로써 그의 안전을 위협하고 그의 상식을 뒤엎습니다. 그럼으로써 진정으로 새로운 삶이 무엇이며, 진정한 영생이 무엇인지를 보여 줍니다. 온갖 우여곡절 끝에 얻은 생명보다도 더 귀중한 아들 이삭을 바치라고 아브라함에게 내려졌던 하나님의 가혹한 명령은 사실 오늘 이 부자 청년에게 내린 명령보다도 더 납득하기 어려웠던 명령이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를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것이 오늘날 한국 기독교의 최대 병폐입니다. 예수는 만병통치약이요, 예수 믿으면 만사 O.K.이기에 예수는 복방망이가 되어버렸습니다. 고민도 없고, 비판의식도 없고, 문제의식도 없고, 뼈아픈 자기성찰도 없이 예수만 믿으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는 맹목적인 예수숭배에 빠진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전 세계인이 예수를 믿은들 세상 무엇이 달라지겠습니까? 학교 교정에서 열심히 기타 치고 노래하는 전도단을 볼 때 저는 착잡한 심정을 금할 수 없습니다. 나도 기독교인이고 전도하는 것은 필경 좋은 일인데도 왜 나는 그 옆을 지나갈 때 비기독교인들 보다도 더 낯이 뜨거워지고 얼굴이 일그러지는 거부반응이 일어나는지 나 자신을 이해 못할 지경입니다. 저 애들이 정말 예수가 누구인지나 알고 저렇게 날뛰는 것일까? 대학생으로서의 지성도 의심스러울 뿐만 아니라 그들의 이른바 신앙이라는 것이 지극히 의심스럽고 철없어 보여 안쓰러운 마음을 금할 길 없습니다. 그들에게는 예수가 너무나 친근하고 너무나 달콤하고 너무나 가까운 존재가 되어버렸기에 예수가 더 이상 그들의 삶에 어떤 충격을 안겨주지 못합니다. 그들은 예수를 너무 잘 알아 탈입니다. 모든 테레비죤 부흥사들의 설교도 마찬가지입니다. 달콤한 예수(sweet Jesus), 고등학교 단짝(highschool buddy)같은 예수, 애인 같은 예수를 그들은 전합니다. 그러나 예수는 언제나 타자로서 남아 있어야 하는 존재입니다. 나와는 다른 존재, 나에게 위험한 존재, 항시 새롭게 만날 수밖에 없는 영원한 이방인으로 남아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는 나의 문제를 해결해 주는 해결사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문제를 해결해주기는커녕 문제를 더 만들어 주는 분입니다. 신앙이란, 진정한 예수와의 만남이란 예수가 나에게 무슨 의미를 지녔는지(What does Jesus mean to me?)를 묻는 것이 아니라, 내가 예수 앞에서 어떤 존재인지를 묻는 일입니다. 예수가 누구인가가 아니라 내가 누구인가 하고 나 자신을 문제시하고 나 자신을 의문시하는 것이 진정한 신앙이요 진정한 만남입니다.

예수와의 만남은 진정 축복이며 은총임에 틀림없습니다. 그가 주는 멍에는 쉽고 가벼운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이 은총이 값싼 은총으로 변질되어서는 안 되고, 쉬운 길이 사기술이 되거나 민중의 아편이나 마취제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신앙의 멍에는 정녕 쉽고 가벼운 멍에입니다. 왜? 그것은 나를 전적으로 하나님께 맡기는 길이기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나를 부정하지 않고서는 하나님께 자신을 맡기는 방법은 도저히 없는 것입니다. 자기 부정, 자기 파괴, 죽음 없이 하나님나라의 영생은 없는 법입니다. 예수가 우리에게 은총이 되는 것은 바로 그를 만남으로 인해 이 세상적 나, 자만심과 허상으로 가득 찬 내가 철저히 깨어짐으로 인해 진정으로 회개하고 하나님을 만나 새로운 생명을 발견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통해 부활의 새 생명을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는 "구원이 그렇게 어려운 것이라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까?"라는 제자들의 놀라워하고 의아해 하는 질문에 "사람은 할 수 없으나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고 대답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은총입니다. 은총은 어려운 일을 가능하도록 해주는 힘이요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힘이지, 어려운 일을 면제해 주고 회피하도록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항시 이 어려운 예수를 멀리서나마 뒤따르기 위해 성령의 도우심을 간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성령이란 무슨 이상한 신비체험이나 방언을 하게 해주는 것, 무슨 초능력을 제공해 주는 힘이기에 앞서 바로 예수와 함께 그의 길을 가도록 인도해 주시고 절망하지 않고 포기하지 않도록 위로해 주시는 힘인 것입니다. 성령으로 예수는 그가 가신 길을 가셨고 우리도 하나님의 영, 우리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영으로 그가 가신 길을 따라갈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와의 만남은 진정 위험한 만남이 되어야 하며 어려운 만남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새 길이자 오래된 정도입니다. 위험부담 없는 신앙은 신앙이 아니라 환상이며, 회개를 통한 인생의 전환을 요구하지 않는 복음은 거짓이며 사기일 뿐입니다. 그러기에 예수께서는 그의 공생애를 시작하며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워 왔다고" 외친 것입니다. 예수를 만나 회개의 아픔, 자기부정, 자기 해체의 경험 없이는 하나님나라의 영원한 생명은 얻기 어렵습니다. 이 엄연한 진리를 교회는 종종 외면하고 대가 없는 신앙, 희생을 요구하지 않는 공짜 복음을 남발한 것입니다. 공짜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신앙세계에도 없습니다. 은총의 세계에도 없습니다. 행위 없는 신앙은 가짜 신앙이며, 회개의 아픔 없는 용서와 위로는 아무런 의미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가짜 신앙, 값싼 은총은 결코 새 역사를 창조할 수 없습니다. 어려운 예수를 만났던 한 청년에 대한 위험스러운 기억을 안고 더욱 더 새길의 순수한 신앙 생활에 매진하십시다.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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