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마태복음 › 인자, 그 영광의 재림과 심판

소재열 목사 | 2007.12.22 01:44:12 | 메뉴 건너뛰기 쓰기
성경본문
마25:31-46
설교자
소재열 목사
참고
의정부평안교회 http://www.uppch.org
어떤 교회 목사님이 일년 내내 남에게 사랑를 베풀라는 사랑에 관한 설교만 했습니다. 교인들은 퍽 지루하게 생각했습니다. 어느덧 한 해가 저물어 크리스마스가 다가왔습니다. 목사님은 사모님과 함께 거지로 변장하여 교인들의 집을 돌아보기로 했습니다. 교인들이 과연 말씀대로 실천하고 사는지를 시험해 보기 위해서였습니다.
제일 먼저 교회 장로님 집 초인종을 눌렀습니다. 성탄 준비를 하고 있던 장로님 사모님이 구걸을 부탁하는 거지 내외를 보고는 문을 도로 닫고 들어가 버렸습니다. 이번에는 권사님의 집으로 갔습니다. 역시 마찬가지의 반응이었습니다.
이번에는 집사님의 집으로 갔습니다. 문도 열어 주지 않았습니다. 실망한 목사님 내외분은 지난 주일에 처음으로 등록을 한 새 신자의 집으로 갔습니다. 그 집 부인이 얼른 들어가더니 따뜻한 음식을 갖다 주었습니다. 그 다음 주일 목사님은 설교 시간에 그같은 사실을 교인들에게 말하고는 그 교회를 떠났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성경은 우리들에게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7:21)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본문 말씀 역시 예수님께서 양과 염소의 비유를 통하여 우리들에게 준엄한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이같은 비유를 통하여 무엇을 의도하고 계신지를 깨달아 그대로 실천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1. 인자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광의 재림을 약속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본문 31절에서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라는 말씀으로 비유를 시작하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자기 자신을 가리켜 ‘인자’라고 말씀합니다. 이 ‘인자’(人子)라는 말씀 속에는 적대자들의 손에 팔려가 십자가를 지신 유월절 이틀 전에(마26:1-2) 예수님 자신이 무엇을 위해서 이 땅에 오셨는지를 함축적으로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다니엘서 7:13절에 다니엘이 환상 가운데 보았던 “인자 같은 이”가 기록되고 있습니다.
“그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자에게 나아와 그 앞에 인도되매 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각 방언하는 자로 그를 섬기게 하였으니 그 권세는 영원한 권세라 옮기지 아니할 것이요 그 나라는 폐하지 아니할 것이니라.”(단7:13-14)
예수님은 자신이 다니엘이 환상 가운데 보았던 “그 인자”라고 하십니다. 인자에 대한 예언의 성취자로 오셨기에 자신을 가리켜 “그 인자”라고 본문 1절에서 말씀하십니다.
다니엘서에서 인자 같은 이가 구름을 타고 왔다는 것은 신(神)적인 존재입니다. 성경에서 구름은 언제나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이었습니다. 영원부터 계신 하나님께서 그 인자에게 영원한 영광의 권세와 왕권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바로 그 인자로서 다니엘서에 예언되고 약속된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성취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이 언약의 백성들인 성도들에게 천국의 기업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다니엘 7:18에서 보면 “지극히 높으신 자의 성도들이 나라를 얻으리니 그 누림이 영원하고 영원하고 영원하리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구원을 영원한 권세를 가지신 ‘인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들에게 허락해 주셨습니다. 그 예수님께서 우리들을 대신해서 저주의 고통을 받으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죽으시고 다시 3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부활하셨을 뿐만 아니라 승천하셔서 하나님 영광의 보좌 우편에 높임 받으셨습니다.
천상에서 지금도 성령님을 통하여 지상을 다스리시고 계십니다. 우리들을 인도하고 계십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우리가 보호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성령님을 통하여 우리들을 지켜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 얼마나 벅찬 감격입니까? 이 얼마나 기쁨과 즐거움으로 가득한 영광의 메시지입니까? 이제는 내 혼자라는 생각을 하면 안됩니다. 우리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닙니다. 그분은 우리들을 버리시지 아니하실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구원계획이 완성될 때 예수님은 구름을 타고 영광 가운데 재림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계획이 20% 이루어졌다면 20%만큼 재림의 종말이 가까이 왔습니다. 그 계획이 30% 완성되었으면 30%만큼 재림의 종말이 가까이 왔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재림하시는 종말은 2천년 전이나 지금이나 동일하게 “곧 종말이 온다”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통하여 종말을 이루어 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전도하여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이 진행될수록 종말은 가까워집니다. 그 재림의 종말을 위해서 우리들을 사용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쓰임을 받고 있습니다. 긴장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방탕하며 살면 안됩니다. 우리의 생애가 이런 가치와 의미로 충만해야 합니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벧전4:7)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때를 기다리며 준비해야 합니다.

2. 예수 그리스도의 심판과 그 심판에 대한 기준은 무엇인가?

2천년 전에 유대 땅 베들레헴에 오신 예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원하려고 오셨습니다. 그러나 재림주로서 오신 예수님은 심판주로 오십니다. 심판주로 오시는데 마치 양과 염소를 구분하듯이 구분하셔서 심판하십니다.
당시 목장에서 양과 염소를 함께 방목하여 키우는데 양과 염소는 같은 초식동물이면서도 습성이 다릅니다.  그래서 서로 어울리지를 못합니다. 염소는 사나운데 반해 양은 온순합니다. 염소는 자기 멋대로 다니기를 좋아하지만 양은 주로 모여 다닙니다. 목자는 양과 염소를 함께 치지만 따로따로 무리 지어 다니도록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염소가 양을 마구 받으며 자신의 영역을 넓히려고 행패를 부리기 때문입니다. 목자는 질서를 바로잡고 염소들로부터 양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양과 염소를 떼어놓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와 같이 양과 염소가 구분되듯이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심판의 때에 구원받은 자와 그렇지 못한 자로 구분하십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본문의 비유에서 그 심판의 기준이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심판 때 무엇에 따라 구분하시고 심판하시습니까?
양으로 비유된 사람들을 살펴보자. 35-36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내가 주릴 때, 목마를 때, 벗었을 때, 병들었을 때, 옥에 갇혔을 때 관심을 가지고 도와주었던 자들입니다. 이런 자들은 37절에 보면 “의인들”인데 이들에게 무엇이 주어지습니까? 34절에 보면 하나님의 나라가 주어진다. 34절에 보면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고 하십니다.
반면에 염소로 비유된 사람들에 관해서는 42-43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아보지 아니하였느니라.”
염소로 비유된 자들은 내가 주릴 때, 목마를 때, 벗었을 때, 병들었을 때, 옥에 갇혔을 때에 관심도 보이지 않는 자들이며 도와주지 않는 자들입니다. 이들에게 어떤 판결이 떨어지겠습니까?
41절에 보면 “저주를 받은 자들”이라고 판단합니다. 41절에 보면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고 하십니다.
염소의 비유에 해당된 자들은 저주를 받은 자들로써 최후 심판이 주어집니다. 마귀의 사자들이 받게 되는 영원한 파멸의 심판을 받게 됩니다. 주를 잘 섬겼는가의 여부가 양들로 상징된 의인들과 염소로 상징된 저주받은 자들의 차이점으로 나타납니다. 최후의 마지막 심판의 기준은 얼마만큼 주님께서 신실하게 순종하고 섬겼습니까? 섬기지 못했는가로 심판을 내린다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주를 섬긴다는 뜻은 무엇인가?
주를 섬긴다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구체적으로 이야기 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께 순종하고 진실하게 섬긴다는 것은 추상적이거나 관념적인 것이 아닙니다. 아주 구체적으로 가난한 자, 나그네, 병든 자, 갇힌 자들을 돌본다는 뜻입니다. 즉 이웃을 구체적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그 이웃이 누구입니까?
예수님께서 선한 사마리아 비유에서도 그 이웃이 누구인지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들은 우리들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자들입니다. 우리들의 도움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는 자들입니다. 이들이 바로 본문에서는 주리고, 목마르고, 벗고, 병들고, 옥에 갇힌 자들입니다. 이런 지극히 작은 자들의 이웃을 어떻게 대했느냐에 따라 심판하신다고 합니다. 이런 약한 자들을 40절에 보면 “내 형제”라고 합니다. 이런 자들에 대해서 어떠한 태도를 취했느냐에 따라 심판이 주어집니다.
양과 염소의 비유를 통한 심판의 기준을 우리들의 믿음을 전혀 염두 하지 않고 인간의 행위에 의해서 심판이 진행되는 소위 인과응보의 원리로 본문을 설명하면 안됩니다. 즉 윤리와 행위만이 심판의 기준이 된다는 말은 아닙니다.

3. 적용 - 성도의 열매

그렇다면 본문의 비유를 통해서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깨닫고 우리들의 삶에 적용해야 할 것입니까?

첫째, 주님께서 “내 형제들”로 묘사된 주리고 목마르고 병들고 옥에 갇힌 자들은 당시 복음을 선포하는 제자들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마 10:40-42의 본문과 비교해 볼 수 있습니다.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의 제자라는 이유 때문에, 혹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선지자라는 이유 때문에 그들을 섬기고 영접했다는 것은 그들은 결국 예수님과 하나님을 영접했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순회 복음을 선포하는 약한 자들에게 헌신적으로 돕고 섬기는 것은 곧 주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심판 때 주님을 믿는 고백의 표현인 섬김은 심판의 기준이 된다는 뜻입니다. 복음을 증거 하는 자들은 의인들이요, 하나님의 백성들로서 구원을 받은 자들입니다. 이들은 심판 때에 양으로 비유된 자들로서 축복을 받게 됩니다.
우리들이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았다고 한다면 우리들의 생활과 행동들은 믿음의 고백, 혹은 표현입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의 특징입니다. 믿음의 특징은 반드시 섬김의 행동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믿음의 특징과 표현인 섬김의 행위가 없다는 것은 그의 믿음이 구원받게 하는 믿음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우리들은 심각해집니다. 정말로 심각해 져야 합니다.
마태복음 7장에서(15-21) 거짓 선지자의 특징을 말씀해 줍니다. 나무와 그 열매의 비유를 통해서 가르쳐 준 내용입니다.  원칙은 이렇습니다. 좋은 나무에서 아름다운 열매를 맺습니다.  못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습니다. 따라서  좋은 나무에서는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또한 반대로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결국 좋은 나무에서 좋은 열매,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것이 원칙이라면 우리들은 열매를 통해서 그 나무를 알 수 있습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니라”는 심판이 있습니다(마7:20).
그러므로 나쁜 열매를 맺으면서 구원받은 사람이라고 한다면 이런 책망을 받아야 합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7:21)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고 한다면 그 이름에 합당한 열매, 즉 구체적인 순종과 섬김의 모습이 우리들에게 있어야만 합니다. 우리들은 과연 구원받은 성도로서 그 이름에 합당한 생활의 모습이 보이고 있습니까? 그런 모습이 전혀 없으면서 구원받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을 더 이상 속여서는 안됩니다.

둘째, 예수님은 양과 염소의 비유를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하고 계신다는 점입니다.
즉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 하고 있습니다. 알곡과 가라지 비유에서도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교회 안에는 언제나 알곡과 가라지가 있기 마련입니다. 알곡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믿으면서 그 믿음대로 실천하고 순종하고 섬기며 사는 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라지는 어떤 자들인가? 말로만 믿는 자들입니다. 전혀 믿음에 따른 순종과 희생이 없습니다. 봉사와 섬김이 없습니다.
이런 자들이 과연 구원받은 알곡교인입니까? 이들은 예수님께서 만왕의 왕으로 영광 가운데 재림하실 때 불에 태우는 심판이 있을 것입니다. 나는 알곡교인입니까? 가라지 교인입니까? 우리는 한 번쯤 나는 과연 알곡교인이어서 구원받은 감격적인 성도인지 묵상해 봅시다.

셋째 이 비유는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원과 심판을 말씀합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구원을 받았다고 말한 자들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그 하나님께서 보내신 예수님을 거부했습니다.  불신하고 섬기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시기 질투했습니다. 그들의 이같은 행위는 결국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얼마나 큰 충격입니까? 그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거부했고 그의 제자들을 거부했고 이방인들을 거부했습니다. 그들은 심판 받아 마땅한 자들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볼 때 하나님의 백성에서 제외되어야 했던 이방인들은 오히려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심판을 면했습니다. 유대인들이 말한 대로 그들은 구원을 받지 못한 자로 알고 있었는데 구원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반대로 유대인들은 구원받은 자로 알고 있었는데 구원이 아니라 심판이라고 선언합니다. 얼마나 큰 지각변동입니까? 마태복음 자체가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기록하고 있다는 점을 명심하십시오. 이 말씀들을 우리들에게 구체적으로 적용해 보십시오. 내가 과연 구원을 받았다면 우리 이웃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보이므로 하나님을 소개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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