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마가복음 › 믿음이란 무엇인가?

권진관 | 2008.06.02 19:52:32 | 메뉴 건너뛰기 쓰기
성경본문
막10:46-52
설교자
권진관 형제
참고
새길교회
오늘의 주제는 믿음이란 무엇인가 입니다. 공동번역으로 본문을 보면 너의 믿음이 너를 살렸다고 되어 있는데 영문 번역을 보면 너의 믿음이 너를 치유해주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너의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혹은 치유하였다고 말하고 있는 것을 보면 분명히 믿음은 구원하고 치유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구원을 가져다주는 '믿음이란 무엇인가'하고 묻게 됩니다.
본문을 보면 바르티매오라는 앞을 못 보는 거지가 나옵니다. 이 사람은 티매오라는 사람의 아들이라고 하는데, 저는 본문이 굳이 이 앞 못보는 거지의 족보를 밝힌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곰곰이 생각하였습니다. 우리가 지금 알 수는 없지만, 추측해 본다면, 이 바르티매오라고 불리는 사람의 가족은 족보가 있고 뼈대가 있는 집안이 아니었던가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는 유대의 떳떳한 집안의 아들이었고, 그가 태어날 때 많은 축복을 받고 태어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는 시력을 잃었습니다. 그것이 언제 일어났는지는 알 수 없지만, 상당히 오래 되었을 것은 분명합니다. 아직 물불을 가리지 못하는 어린 시절에 뜻하지 않은 사고로 실명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가 비록 장님이 되었다 할지라도 그의 아버지가 살아 계셨을 때는 그는 분명 보살핌을 잘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죽고 의지할 사람이 없게 되면서 그의 운명은 급전직하로 떨어져서 바닥의 생활을 하게 되었을 것이라고 봅니다.
이러한 생각을 뒷받침해 주는 것은 오늘 본문이 거지가 소경이 된 상태라고 말하지 않고, 앞 못보는 거지라고 하면서, 그가 걸인이 된 것은 먼저 앞 못보는 상태에서 기인한 것이라는 인상을 짙게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앞 못보는 장님이었기 때문에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나자 집안에 있는 것들을 팔아서 돈을 만들어 양식과 필요한 물건들을 사서 살아갔을 것입니다. 먼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땅을 팔았을 것입니다. 땅을 잃고 그는 곧 집도 잃었을 것이고 이제는 완전히 거리에 나가 앉게 되고 만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가 노숙자가 된 것은 소경 됨에서 기인 된 것이요, 그 소경 됨에서 온 가난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그가 노숙자가 된 것은 긴 시간 속에서 이루어진 현실이지 그가 원래 노숙자로 태어났던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노숙자들, IMF로 인한 실직자들, 이런 사람들도 모두 처음부터 그런 운명으로 태어난 것이 아닌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돈을 주거나 직장을 마련해 준 것이 아니라 시력을 회복시켜 주셨다는 것을 볼 때 그에게 있어서 문제의 핵심은 바로 소경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시력을 회복하면 그의 경제적, 사회적 어려움이 해결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기본적인 삶을 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우리 모든 사람들도 이러한 문제의 핵심을 가지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바르티매오라는 앞 못보는 거지는 자기 문제의 핵심을 분명히 알고 그것을 예수께 구했습니다. 저는 오늘날 IMF의 실직자들에게 있어서 가장 필요한 핵심은 직장이라고 생각합니다. 노동할 수 있는 기회, 그것이 바로 인간을 인간 되게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조건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이 심리학자 프로이드에게 가장 정상적이고 행복한 삶을 사는 사람의 조건을 말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는 노동과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노동과 사랑을 할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노동만 하고 사랑을 하지 않는 사람은 일 벌레, 수전노와 같은 사람이 됩니다. 또 사랑만 하고 일정한 노동을 하지 않는 사람은 그 삶이 공허해지고 맙니다. 나아가서 이 둘이 모두 없는 경우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 경우는 대부분 노동을 상실할 때입니다. 오늘날 IMF의 상황 하에서 노동을 상실하니까 가정에서 부부싸움이 많아지고 가정이 파괴되는 것을 자주 보게 됩니다. 경험적으로 볼 때 노동과 사랑은 연결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수많은 가장들이 자살하고, 자기만 죽는 것이 아니라 가족들도 죽이고 있습니다. 잠자고 있는 자식들의 목을 졸라 죽이는 끔찍한 사건을 우리는 지난 주 동안 보았습니다. 그 집에는 지난 7월부터 내지 못한 공과금 고지서들이 수북히 쌓여 있었다는 보도를 들었습니다. 또, 자기 아들의 손가락을 잘라서 보험금으로 생활을 해보려고 했던 아버지와 아들의 비극도 바로 노동의 박탈에서 온 것이었습니다. 그 아버지는 노동할 수 있는 자리를 구하려 했지만 찾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사람에게 노동을 할 수 있다는 것은 구원이요, 치유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 앞 못보는 거지는 시력을 회복함으로써 이제 노동도 할 수 있게 되고, 사랑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노동과 사랑 이 둘은 우리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지만, 그러나 그 중에서 제일은 노동입니다.
우리 시대에 노동의 고귀함을 무시하는 이데올로기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신자유주의라는 것입니다. 이 신자유주의의 요체 중에 하나는 제한된 소수의 사람들이 노동을 해서 다수의 사람을 벌어 먹일 수 있다는 사상입니다. 소수의 능력 있는 사람들만이 고용되고 다수의 경쟁력이 없는 사람들은 노동으로부터 소외시키는 주의가 바로 신자유주의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니까 여기에서는 실직을 많이 시키는 것이 경제를 살리는 첩경이라고 합니다. 오늘날 IMF의 기조는 바로 구조조정이라는 명분으로 일자리를 줄이는 정책에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몇 사람에게 모든 일을 맡기고 나머지는 명퇴나 조퇴하게 하는 것이 바로 신자유주의의 기조입니다. 신자유주의는 노동의 기회를 박탈하는 사상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신자유주의를 이기기 위해서는 노동을 존중하고 모든 사람에게 노동의 기회가 보장되는 새로운 경제질서를 만들어야한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본문에서는 이러한 노동의 신성성을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있지는 않지만 간접적으로는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일자리가 많을 때 일자리의 중요성을 잘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IMF는 일자리의 중요성, 노동의 신성성을 우리들에게 가르쳐주었습니다. IMF가 가져다준 불행 중 다행한 선물입니다. 비록 IMF의 상황을 일으킨 신자유주의가 노동의 신성성을 짓밟았지만, 그 반동현상으로 노동의 신성성, 고귀함은 뼈저리게 경험되어지고 있습니다. 요즘 저는 예수님이 항상 남들을 위한 사랑의 행동만을 하시며 사셨던 것이 아니라, 사랑의 행동 뒤에는 목수라고 하는 노동이 뒷받침하였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바울의 선교활동에 대해서만 관심을 가졌지 천막을 만드는 노동을 했다는 사실을 잊고 지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잊혀진 측면을 생각하게 하는 것도 IMF 덕분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저는 본문에서 치유가 바로 구원이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우리 속에 맺혀 있는 그 한의 치유가 바로 구원이라는 것입니다. 노동력을 상실한 사람에게 노동할 수 있는 능력을 회복해 주는 것, 소경에게 시력을 다시 얻게 해주었다는 것이 바로 그 치유였습니다. 그 치유는 현재의 비참한 삶의 상태를 원래 상태로 회복시켜 줍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도 이러한 치유의 역사가 계속 일어나야 할 것입니다. 우리들 모두는 각자의 형편 속에서 치유 받아야 할 것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무엇인가에 상처받아 소경 바르티매오처럼 옴짝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바르티매오처럼 치유 받으면 원래의 모습을 회복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한 치유의 역사가 일어나는 과정을 오늘의 본문은 아주 전형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선 이 소경은 예수를 '다윗의 자손'이라고 불렀습니다. 인격적인 신뢰를 보인 것입니다. 당신은 믿을 만한 분이라는 것을 고백했던 것입니다. 예사 사람이 아니라 바로 다윗의 위업을 달성해서 이스라엘을 해방시키실 분으로 고백했던 것입니다. 이것을 오늘날의 신학에서는 그리스도론적 고백이라고 말합니다. 예수에 대한 호칭은 모두 그리스도론적 고백의 표현입니다. 메시아, 하나님의 아들, 인자, 말씀, 교회의 머리, 주님, 빛이요 길이요 생명이라는 고백, 이러한 모든 것들은 모두 그리스도 고백의 표현이었습니다. 바르티매오는 예수를 다윗의 자손이라고 고백했습니다. '다윗의 자손'이라는 칭호는 그 당시 유대 사회에서는 가장 존귀한 호칭이었을 것입니다. 이 소경은 그러한 신뢰를 표시했습니다. 믿음은 이러한 인격적인 신뢰 위에 성립되는 것이라고 말하겠습니다. 그러니 믿음은 일반적인 신념이나 확신과는 다릅니다. 또 믿음은 단순히 어떤 행동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믿음은 관계에서부터 옵니다. 예수와 나와의 관계를 고백할 때 믿음이 성립됩니다. 오늘날 우리는 예수를 나의 형님과 같은 분, 나의 친구와 같은 분으로 고백합니다. 이러한 신뢰의 관계를 먼저 고백해야 합니다.
고백이 있은 후에 나온 것은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라는 청탁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거지인 소경을 꾸짖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더욱 큰 소리로 자기의 요구를 외쳤습니다. 더욱 큰 소리로 외쳤다는 것에서 그의 행동성을 볼 수 있습니다. 온갖 방해자들의 훼방을 과감하게 물리쳤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입을 못 열도록 꾸짖을 때 이 사람은 부끄러움을 느꼈을지 모릅니다. 자존심도 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버텼습니다. 온갖 탄압을 이겨냈고, 자신 속에 도사리고 있는 자신감의 상실도 극복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이야기를 했던 것입니다. 자신의 문제를 이야기한다는 것은 치유의 중요한 단계라고 하겠습니다. 예수께서 걸음을 멈추시고 "그를 불러오라"고 말했습니다. 결국 예수에게 그의 이야기가 전달되었습니다. 자신의 이야기가 다른 사람에게 특히 내가 신뢰하는 사람에게 들려지고 그 사람이 그 이야기를 귀중한 것이라고 인정하게 될 때 치유는 시작됩니다.
최근에 미국에서 베스트셀러로 팔리는 책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애덜린 옌마(Adeline Yen Mah)라고 하는 중국계 미국인의 전기적 소설인 『낙엽』이라고 하는 책입니다(Falling Leaves: the True Story of an Unwanted Chinese Daughter). 이 책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애덜린 옌마가 태어난 곳은 중국이었습니다. 옌마의 아버지는 엄청난 부자였습니다. 그런데 옌마의 어머니는 그가 어렸을 때 죽었습니다. 공산 혁명이 난 후 이 가족은 홍콩으로 이사를 갔습니다. 옌마의 새 엄마는 굉장한 미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새 엄마의 농간으로 옌마는 집안에서 천대를 받았습니다. 아무 유산도 받지 못하고 쫓겨난 옌마는 어린 시절 많은 고생을 하다가 미국으로 건너갔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결혼을 해서 살게 되었습니다. 결혼 생활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고, 또 직장도 좋은 것이었는데도 옌마에게는 과거의 아픔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자기의 이야기를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자서전을 쓰게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를 읽고 감동을 받았습니다. 수십만 권의 책이 팔렸습니다. 제가 우연히 BBC 방송을 틀었다가 이 여자가 대담하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 대담에서 그 여자는 자신의 책을 통해서 구원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이 책으로 돈을 많이 벌게 되어서 행복하게 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이야기가 전달되었다는 것이 그녀를 기쁘게 했고 과거의 상처로부터 치유 받게 되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이렇게 볼 때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를 '네 이야기가 너를 살렸다'라고 말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구원은 이야기를 함으로 찾아오고, 옌마처럼 그 이야기가 들려지도록 적극적으로 행동에 옮길 때에만 치유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저는 지난 주일에 우리 교회가 지원하는 봉천동 나눔의 집에 가서 그 지역 주민들과 저녁을 함께 먹었습니다. 나눔의 집에서 차린 간단한 저녁식탁을 가운데 놓고 우리는 여러 가지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들의 아픔의 이야기를 들으며 저는 우리의 IMF는 가난한 사람들의 IMF이지 가진 자의 IMF가 아니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가진 사람들은 전혀 그런 어려움을 느끼지 못하거나 오히려 과거보다 더 형편이 좋아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서민들은 지난 몇 개월 동안 단 며칠도 일거리를 찾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어려움의 이야기가 지금 잘 들려지지 않고 있습니다. 겨울 나기에 어려움이 있는 사람들은 많은데 사회복지 기금은 쓰여지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사람들에게 구청에 찾아가서 당신의 요구사항이 들려지도록 외쳐라, 피켓을 들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변화가 전혀 없을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1948년 제주 4·3 사태에 의해 억울하게 죽은 영령들과 그 가족들의 명예회복을 위해 종교인 대회를 준비하면서 느낀 생각입니다. 제주도 사람들은 자신들의 억울한 한을 풀어달라고 여러 곳을 쫓아다니며 요청하고 자신의 요구를 외롭게 외치고 있습니다. 그 외침에 대해 응답이 있을 때 제주도의 상처는 치유됩니다만 아직 그 응답이 없었습니다. 우리 교회가 그들의 요구에 응했다는 것, 그래서 우리와 그들 사이에 화답하는 의사소통이 일어났다는 것은 곧 치유가 시작된다는 것을 의미할 것입니다. 아직 그 의사소통이 국가적으로나 전 사회적으로 일어나지는 못하고 있습니다만 우리는 이곳을 지원함으로써 그들의 아픔에 응답한 것입니다. 그들의 아픔을 치유하는데 우리가 동참하게 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 본문에는 두 가지 유형의 사람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의사소통이 일어나도록 지원하는 사람들과 막는 사람들 두 종류입니다. 지원하는 사람들은 예수와 소경 사이에 의사소통이 일어나도록 매개의 역할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예수께서 이 소경을 부르실 때, "용기를 내어 일어서라. 그분이 너를 부르신다"고 말한 사람들입니다. 우리 교회는 이러한 사람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치유의 사건이 일어날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양쪽의 의사소통이 되도록 이어주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께서 응답하셨습니다. "나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 소경이 말합니다. "제 눈을 뜨게 해 주십시오." 이 말을 하기 위해서 그는 온갖 탄압과 방해를 이겨냈던 것입니다. 그의 지나온 삶 전체가 이 이야기 속에 담겨 있습니다. 이로써 소경의 이야기가 완전히 전달된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이제 기독교 신학에서 가장 중요한 말씀으로 대답하십니다. "가라,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 그렇다면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믿음은 그리스도 고백을 포함할 뿐 아니라, 자기의 이야기를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즉, 자기에게 고통을 주는 어려운 문제나 아픈 상처를 드러낼 수 있는 용기,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치유되기 위해서 적극적으로 행동에 옮기는 것 이 모두를 포함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치유는 내가 어떻게 하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치유는 주어지는 것이지만 그것이 주어지기 위해서는 내가 먼저 움직여야 하고, 내가 내 이야기를 해야 하고, 그것이 들려지도록 행동에 옮기는 것이 바로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이러한 이야기들이 잘 들려지도록 열려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전달되도록 매체의 역할을 감당해야 할 것입니다. 몇몇 사람들의 이야기만 일방적으로 전달되는 제도주의적이고 비민주적인 교회가 아니라 우리 안의 모든 사람들이 품고 있는 모든 이야기들을 소통시키고 응답되도록 노력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오늘날 그 이야기가 들려지기를 원하지만 매체가 없고 힘이 없고 도와주는 사람들이 없어서 말도 할 수 없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우리 교회가 앞장서서 전달 매체의 역할을 하는, 그리고 그것을 통하여 그들을 위해 선교하게 되는 '믿음'의 교회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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