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마가복음 › 예수의 두 얼굴

박명철 목사 | 2008.12.06 21:58:36 | 메뉴 건너뛰기 쓰기
성경본문
막1:14-15
설교자
박명철 목사
참고
새길교회
제목: 예수의 두 얼굴
본문: 마가복음 1:14-15, 빌립보서 2:1-8
설교: 박명철 목사 (연세대학교 교목) (새길교회 2007.11.11주일설교)

1. 인사말

오늘 새길교회 교우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며 사귐을 갖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새길교회”에 대하여는 주변으로부터 종종 이야기를 듣고 있었던 터였기 때문에, 저에게 새길교회는 관심이 있었던 교회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오늘 새길교회의 강단에서 말씀을 증거하게 된 것을 영예스럽게 생각합니다.

처음 새길교회의 설교청탁을 받았을 때, 저는 참으로 특이한 교회라는 것을 느꼈습니다. 설교 청탁을 받은 것이 근 1년 전의 일입니다. 그래서

“1년 전부터 설교 청탁하는 교회가 어디 있습니까?” 하고 항의한 바 있습니다. 1년 후에 이날 이 시간은 새길교회 일 외에는 다른 것을 해서는 안 된다는 내용이 아닙니까? 1년 후에 내가 살아 있다는 보장도 어디 있습니까? 하는 것이 저의 내심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럴 자신이 없습니다.” 얘기했더니, 그러면 “여름휴가철이 지난 다음에 다시 한 번 문의하겠습니다.” 라는 대답을 받고 수락한 바 있습니다. 요즘 대선일자가 가까이 와서인지, 대단히 시끌벅적합니다. 신문 1면 톱기사들이 비자금, 비리문제로 연루된 기업과 기관, 인사들이 줄줄이 나열되고, 대통령 후보라는 정치인들은 신뢰, 도덕성의 문제로 사회를 왁자지껄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한편에선 “바르고 올곧게 살아야 한다.”고 “설교”하고, 다른 한편에선 “능력이 있으면 됐지, 도덕성이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교설”합니다. 한국사회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 지 헷갈리게 하는 장면입니다. 헷갈리는 사회, 두 얼굴을 가지 사회. 이것이 우리가 몸담고 있는 우리 사회의 현주소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예수님에게도 두 얼굴이 있습니다. 그의 생애를 들여다보면, 예수님의 얼굴도 야누스의 얼굴처럼 두 모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을 단도직입적으로 말한다면, 예수님의 반쪽 얼굴은 “망나니” 모습이요 다른 반쪽 얼굴은 “호탕아”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이 겉과 속이 다르고 위선을 하는 사람들, 자기도 구원을 구원받지 못하면서 남도 구원받지 못하도록 하는 사람들, 회당을 장사꾼과 강도의 소굴로 만든 사람들에게는 “회칠한 자식”, “독사의 새끼들”이라고 폭언을 하고, 심지어는 회초리를 들고 이들을 회당에서 쫒아내기까지 했습니다. 이런 모습을 보면, 예수님은 “망나니”임에 틀림없습니다.

반면에 예수님은 세상에서 비난받고, 아무도 사람으로 여기지 않는 세리나 창기들을 자신의 친구로 여겼고, 이들과 더불어 “먹고 마시기”를 즐겼습니다. 호탕하기 짝이 없는 예수님의 또 다른 모습입니다.

예수님의 이런 두 얼굴을 어떻게 이해하고 평가할 것인가? 오늘 이 시간 우리의 질문이요, 오늘 말씀증언의 내용이 되겠습니다.
2. 예수의 때의 감각

오늘의 성경말씀, 마가복음은 예수님이 행한 설교말씀입니다. 매우 간결합니다. 15분 내지 20분 설교가 아닙니다. 그 내용도 몇 마디 되지 않습니다. 4마디 말씀이 설교의 전부입니다.

“때가 찼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라.”
“복음을 믿으라.”

이상의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서 “때가 찼다.”라는 말씀은 예수님이 시대상황에 매우 민감하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은유를 많이 사용하셨는데, 시대변화의 흐름과 감각에 둔한 사람들에 대하여 (아래와 같이) 꾸짖은 바 있습니다.

너희는, 저녁때에는 '하늘이 붉은 것을 보니 내일은 날씨가 맑겠구나' 하고, 아침에는 '하늘이 붉고 흐린 것을 보니 오늘은 날씨가 궂겠구나.' 한다. 너희는 하늘의 징조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징조들은 분별하지 못하느냐? (표준새번역 마 16:2-3)

당시 갈릴리 지방을 다스리는 헤롯의 정치를 보며 예수님은 헤롯을 “여우”라고 비난한 바 있습니다. 독재시절 독재자에게 이런 발언을 하는 것은 매우 과격한 표현이 됩니다.

예수님은 요즘 말로 “정치평론가”나 “현실정치가”는 아니었지만, “바람이 어디에서 불고 있고, 어디로 가고 있는지”, 민감하게 인식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때가 찼다.”라는 표현은 예수님의 현실인식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낡은 시대의 유효기간은 끝이 나고, “하나님의 나라”라고 하는 새 역사가 시작되고 있다는 시대감각과 현실인식을 “때가 찾다.”라고 표현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요즘 우리 사회문제 가운데 하나인 “양극화문제”에 대하여 저는 전망이 보이지 않습니다. (환경문제는 웰빙 붐을 타서 차차 국민의 인식이 나아지고, 나아질 것으로 봅니다.) 그러나 경제적 양극화 문제에 대하여는 희망이 보이지 않습니다.

중산층이 다 허물어지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무역수출과 수익은 최고로 늘고 국민소득 또한 높아졌다고 합니다. 이것이 뜻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인구는 계속 줄고, 늘어나는 것은 노인인구하고 합니다. 출산인구는 주는데, 왜 실업률은 날로 높아 가고, 젊은이들의 취업경쟁률은 하늘 높은 줄 모릅니까?

기름 값은 사상 최고가로 올라갔는데, 연료소비량이 최고 많은 외제 고급승용차는 왜 불티나게 팔립니까?

이런 사회적 현상이 의미하는 바는 소위 한숨 쉬는 인구는 날로 늘어만 가고, 사회의 균열은 더욱 깊어 가고, 국민 간의 갈등의 골은 더욱 심화되고 있다는 이야기가 아닙니까?  이 상태, 이대로라면, 미래의 전망이나 청사진이 뚜렷하게 보이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예수님 당시, 그 시대가 안고 있는 문제, 인간의 문제―특히 인간고통의 문제―에 민감하였다 할 수 있습니다.

3. 예수의 마음

오늘 봉독한 바울서신, 빌립보 2장은 예수님의 마음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관심이 어디에 있었는가를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6 그분은 하나님의 모습을 지니셨으나, 하나님과 동등함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으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워서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과 같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자기 자신을 “종의 모습”으로 계속 낮추는 작업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낮은 자의 자리에 있었기에, 예수님은 인간의 고통과 눈물을 알고, 사회의 모순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의 주변사람들과 그의 벗들이 당시 사회적 약자나 소외계층이 되고 있었다는 점은 바로 이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독일의 여신학자 Hanna Wolff는 그의 저서, 『인간 예수』에서 예수의 성격적 특징을 언급하면서, 예수님은 감수성이 예민한 분이었음을 지적합니다. 그의 감정(감성, Gefuhl/feeling)은 흠과 티가 없을 정도로 너무 청결하였고, 그러기 때문에 외부의 오염되고 불순한 것들을 민감하게 식별하고 감지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예수의 행동양식에는 특징이 있었는데, 그 특징은 “Spontan”이라고 하는 “즉각적인 반응”입니다. 예수님은 자기가 느끼고 감지한 것을 곧 바로 행동으로 나타냈습니다. 예수님의 행동은 두 가지 양태로 표출되고 있는데, 하나는 “분노”로 나타나고, 다른 하나는 감싸 안는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불의나 외식하는 것에 대하여는 즉각적 분노를 나타냈고, 인간의 아픔과 눈물에 대하여는 무한한 연민을 가지고 감싸 안았습니다. 당시의 율법학자나 제사장에겐 예수님은 “망나니”로 보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병들고 가난한 자들에게는 맘씨 곱고 순박한 시골총각으로 보였거나 혹은 자기들과 함께 먹고 마시며 즐기는 “호탕한” 친구로 보였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의 인품 속에 공격적인 성격과 수용적인 성격의 양면을 지니고 있으면서, 그때마다의 상황과 대상에 따라 즉각적 반응을 보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그의 윤리적인 행동에 있어서 양면적인 모습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유대교의 제의(祭儀), 곧 예배, 제사규정에 대하여는 대단히 관대했습니다. 그러나 율법의 규범에 대하여는 철저하게 율법 본래의 정신에 충실할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은 당시 “안식일 법”과 “정결법”을 쉽게 어겼습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에도 병자들을 낫게 했습니다. 배고팠던 그의 제자들은 안식일에 이삭을 따서 먹는 “노동”을 하였습니다(비교, 마태 12:1이하, 막 2:23이하, 막 3:1 이하). 이것이 바리새파 사람들의 저항을 받게 됩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안식일에 선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악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옳으냐? 죽이는 것이 옳으냐?”(막3:4) 항변합니다.

세례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은 자주 금식을 하는데, 예수님의 제자들은 아예 이것을 하지 않습니다.(비교 마9:14) 이에 대한 항변이 들어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죄인과 세리들, 소위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할 자들”과 먹고 마셨습니다.

이상의 예들은 예수님이 제의나 제사규정에 대하여 매우 관대한 태도를 보여준 장면들이 됩니다.

반면에 예수님은 율법의 규범에 대하여는 매우 철저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말씀, “내가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왔다.”(마5:17)라고 하는 말씀이 암시하듯, 예수님은 율법규범의 철저한 완성을 요구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잘 아는 예수님의 유명한 산상설교의 6가지 반명제(反命題, 마태 5~7장)가 이를 반영합니다. 6가지 반명제 가운데 한두 가지 예를 들면,

“‘간음하지 말아라’ 하고 이른 것을, 너희가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사람은, 누구나 이미 마음으로 그 여자와 간음한 것이다.”(표준새번역 마 5:27-28) 상식적으로 음욕을 마음에 품은 것으로 현행법의 간음죄에 해당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간음”의 문제를 ‘인간의 속심과 중심이 어디에 놓여 있느냐?’라고 하는 원초적이고 근원적인 데까지 끌고 가고 있습니다.

너희가 좋아하는 사람끼리 사랑하는 것은 이방인도 다 하는 일이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이렇게 말한다. 너희의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라.”(마 5:44) 예수님은 “원수사랑”을 언급함으로 인간에 대한 사랑을 무제한으로 확대할 수 있는가, 물었습니다. 이것은 어느 면으론 인간 한계에 대한 도전이기도 합니다. 최소한 그 시도로서 ‘기도’는 할 수 있어야 것을 요청했습니다.

4. 예수의 행동 표준

예수님은 왜 율법의 규범에 대하여는 그 근본원리에 더욱 철저할 것을 요구하고, 유대교 예식의 규범에 대하여는 더욱 완화할 것을 요청했는가? 이것은 예수님의 관심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인간에 대한 예수님의 무한한 애정과 관심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간음하다 현장에 잡혀온 여인”과 같이, 엄격한 율법규정과 의무화된 이행으로 인하여 자유가 구속되고, 고통당하고 목숨까지 빼앗기는 수많은 사람들을 보아 왔습니다. 예수님은 “정결법”이나 ‘안식일법’으로 인하여 생계가 위협받는 하루 벌어 하루를 사는 사람들의 눈물을 보았습니다. 이와 같은 것으로 인하여 “죄인”으로 낙인찍혀 유대사회에서 사람노릇을 못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보아왔습니다. 동시에 유대의 율법과 제의규정을 운영하는 사람들의 냉혈적인 태도와 비인간적인 제도를 보아왔습니다. 예수님의 청결한 마음과 감정은 비인간적인 굴레에 대하여는 분노케 했고, 이것으로 인해 피해를 보는 사람들에게는 무한한 애정을 가지고 감싸 안게 했습니다. 인간을 향한 예수님의 사랑은 그로 하여금 중립을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5. 맺는말

저는 지난 7월 8일 상암경기장에서 10만 명이 되는 기독교인이 모여 “ 한국 교회 대부흥 100주년 기념대회”를 성대하게 치루는 모습을 눈여겨보았습니다. 동시에 바로 그 장소에서 (대표적인 기독교기업 가운데 하나로 알려진) E-Land 비정규직 해고자들이 모여 연일 계속되는 농성 장면을 보았습니다. 이 두 가지 장면이 한국 교회의 두 얼굴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았습니다.

이와 같은 모습은 우리 사회가, 아니 한국 교회가 몸살을 앓고 있는 현실이 아닌가 생각해 보면서, 이 같은 우리 사회의 모순을 아래의 예화로 비유해 보고 싶습니다. ‘비오는 날에는 짚신장수 아들을 생각하며 울고, 날이 좋으면 우산장수 아들을 생각하며 우는 아비의 모습’에 비유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왜 아비가 울어야 하는가? 그것은 어리석은 두 아들 때문입니다. 날이 좋은 날이나, 궂은 날이나 두 아들이 벌어온 돈을 한 항아리에 놓고 서로 나눠 쓰면 될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서로 나누고자 하는 마음, 더불어 살고자 하는 따듯한 온정, “너와 나” 사이에 오가는 열락한 사귐으로 인생의 낙으로 삼고자 하는 정신 등이 점점 소멸해 버리고 있다는데 있을 것입니다. 있는 것이라곤 “나”만 있고, “너”와 “우리”가 사라져 버린 현실입니다. 예수님의 마음과 그의 행동양태는 우리에게 살 길이 어디에 있고, 무엇이 사는 길인가를 암시합니다.

헷갈리게 하는 이 사회 속에 우리가 살고 있지만, 예수님의 말씀과 명령에 더 순종하는 믿음이 우리의 생활을 지배할 수 있기를 간구합니다. 우리의 마음과 생활이 우리 주변이웃의 고통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때가 찼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때의 감각을 가지고 살아가기 바랍니다.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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