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요한복음 › 하나님의 긍정

장윤재 박사 | 2003.10.03 08:22:11 | 메뉴 건너뛰기 쓰기
성경본문
요20:19-23
설교자
장윤재 박사
참고
새길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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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몇 해 전 미국의 한 유명한 잡지사가 미국의 저명인사 1백 여명에게 '지난 2천년 동안 인류의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발명품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 라고 물었습니다. 여러 가지 답이 나왔습니다. 자동차, 비행기, 컴퓨터, 민주주의 등... 여러분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런데 더글러스 러시코프라는 한 과학자가 매우 인상적인 답을 제출했습니다. 그의 답은 고무 지우개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거기에다 컴퓨터의 'del' 키, 화이트, 그리고 헌법의 수정 조항을 덧붙였습니다. 인간의 실수를 수정할 수 있는 모든 것을 그는 인류의 가장 위대한 발명품으로 꼽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참으로 기막힌 명답입니다. 만약 우리의 삶과 역사에 처음으로 되돌아가서 다시 시작하게 하는 지우개와 같은 것이 없었다면, 과연 오늘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을까요?

  저는 오늘 아침, 바로 그러한 지우개의 역사가 예수께서 부활하신 그 날 저녁 예루살렘의 한 다락방에서 일어났음을 여러분께 증언하려 합니다. 제자들의 실패와 좌절을 깨끗이 지우시고, 우리가 모인 이 교회라고 하는 신비한 공동체를 탄생하게 하신 그 날, 그 부활절 저녁의 사건을 여러분께 증언하려고 합니다.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들은 부활절 새벽의 찬란한 주님의 승리에만 도취되어, 그 뒤에 가려져 있는 제자들의 명백한 실패와 좌절을 보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 실패와 좌절의 폐허 위에서 어떻게 부활하신 예수가 그의 신앙 공동체를 다시 일으켜 세우셨는지를 보지 못합니다. 저는 오늘 아침 여러분께 이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인 예수의 부활사건은 악에 대한 하나님의 궁극적 승리뿐만 아니라, 제자들의 불신앙에 대한 하나님의 믿음의 승리를 의미했다는 것을, 여러분께 확신을 가지고 증언하고 싶습니다.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의 고난과 부활의 이야기는 곧 그를 따르던 제자들의 실패와 좌절의 기록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성서에서 이것을 발견하지 못하면 성서는 우리를 갱신하는 힘있는 말씀이 되지 못합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께서 체포되신 다음의 일들을 기억하시지요. 죽기까지 예수를 따르겠노라고 큰소리치던 제자들은 모두 오합지졸이 되어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바위'라고 불릴 만큼 믿음직스러웠던 베드로도 자신의 스승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예수께서 그 험한 골고다 언덕길을 오르실 때 멀리서나마 몰래 뒤따라간 제자가 있었다는 기록은 성서 아무 데도 없습니다. 오히려 제자라는 호칭도 받지 못한 여인들만이 슬피 울며 그의 뒤를 따랐다고 했습니다. 그 골고다의 길에서 지쳐 쓰러진 예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올라간 사람도 예수의 제자가 아니라, 아무 것도 모르고 시골에서 올라오고 있던 구레네 사람 시몬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그 처절한 십자가 형틀 위에서 신음할 때 제자들은 주위에 얼씬도 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예수의 시신을 거두는 일도 제자들의 몫이 아니었습니다. 아리마대 출신 요셉이라는 사람이 예수의 장사를 대신 지냈습니다. 상대적으로 위험이 덜해진 부활절 그 새벽에 예수의 시신에 향료라도 발라드리려고 무덤에 올라갔던 이들 역시 제자라는 호칭을 받지 못한 여인들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철저하게 자신의 제자들에게 버림을 받았습니다. 보십시오. 예수의 제자들은 이렇게 철저하게 예수의 고난과 십자가 사건에 참여하는 데 실패했습니다. 아니 부활사건에 참여하는 데도 실패했습니다. 요한복음에 의하면, 예수께서 부활하셨다는 막달라 마리아의 말을 듣고서야 뒤늦게 베드로와 요한이 빈 무덤으로 달려갔지만, 거기서 그들은 여전히 주님의 부활을 깨닫지 못하고 자기들이 있던 곳으로 돌아갔다고 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그 부활절 저녁의 사건이 벌어진 것은 바로 이 때입니다. 마지막까지 철저하게 예수의 고난과 십자가와 부활의 사건에 참여하는 데 실패한 제자들이 예루살렘의 한 다락방에 숨어 문을 안으로 걸어 잠그고 두려움에 떨고 있던 바로 그 때,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의 사건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문을 보니까, 그 날 저녁 제자들은 "유대인들이 무서워서"(for the fear of the Jews) 문을 모두 닫아걸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성서를 읽으면서 저는 이런 의문이 들었습니다. 과연 그들이 정말로 무서웠던 것은 누구였을까? 그 날 저녁 그 상황에서 예수의 제자들이 가장 마주치기 두려워했던 인물은 누구였을까? 예수께서 처형당하신 주후 30년경에는 아직 기독교인들에 대한 유대인들의 대규모의 박해가 시작되기 전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유대인들이 무서워서"라는 구절은 아마도 요한복음이 쓰여진 주후 90년경의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렇다면 제자들이 정작 무서워했던 것은 무엇일까요? 저는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 바로 그 날 아침 막달라 마리아를 통해 들은 부활하신 예수 바로 그 분이었을 것이다. 여러분, 무슨 낯으로 그들이 주님을 다시 뵌다는 말입니까? 예수의 가장 가까이에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던 제자로서의 자부심은 이미 땅에 떨어진지 오래요, 솟구쳐 오르는 자신에 대한 분노와, 그 분에 대한 한없는 죄송함과, 그 결정적인 시점에 자신들은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는 무력감에, 그들이 어떻게 주님을 얼굴을 다시 뵌다는 말입니까? 저는 이렇게 보았습니다. 제자들이 정작 걸어 잠그었던 것은 그 다락방의 문이 아니라 그들의 마음 문이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주님의 낯을 피해 이 세상 끝까지 도망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때에, 본문에 의하면 부활하신 예수께서 홀연히(suddenly) 그들 한 가운데 오시어 "salom alekem"(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Peace be with you!)라고 인사하십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이 짧은 본문에서 우리의 눈을 끄는 것은 두 번이나 반복된 이 예수의 평화의 인사입니다. 그리고 그것에 곧바로 이어진 예수의 말씀, 즉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는 새로운 사명의 위임의 말씀입니다. 우리 모두가 그 날 그 부활절 저녁에 예루살렘의 한 다락방에 숨어있던 제자들이었다고 생각해 보십시다. 우리들의 귀에 이 주님의 환한 평화의 인사가, 그리고 곧바로 이어진 이 새로운 위임이 말씀이 어떻게 들렸겠습니까? 야단과 질책이 쏟아져도 아무 할 말이 없던 그 제자들에게 주님의 이 인사와 위임이 어떻게 들렸겠습니까?

  저의 때 일이 기억납니다. 누구나 한번쯤은 겪었을 일입니다. 한번은 무언가를 대단히 잘못해서 교무실로 불려간 적이 있었습니다. 친구들은 겁을 주며 놀리더군요. '너 이제 큰 일 났다, 너 이제 죽었다' 이런 식으로 말입니다. 선생님의 입에서 질책과 꾸중이 쏟아질 줄 알았습니다. 아니 각오도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분이 전혀 뜻밖에 환한 얼굴로 '어서 와, 이리 앉아' 하시며 전혀 엉뚱한 주제로 저와 말씀을 나누시더니, '그만 가보라'고 하시더군요. 그래서 속이 타는 제가 먼저 물었지요. '저, 그런데 아까 그 일은...' 그랬더니 그 분이 하시는 말씀, '음, 괜찮아, 나 너 믿어' 그러시더군요. 그 때 제 눈에서 눈물이 쏘옥 나왔습니다. 매를 맞았을 때보다 더 아픈 눈물이 쏘옥 나왔습니다. 얼마나 고맙고 얼마나 안심이 되던지. '그래, 내가 저 선생님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서라도 이제는 잘하자' 이런 결심이 절로 솟아 나왔습니다. 여러분, 나를 믿어주시는 분 앞에서 우리는 그 믿음대로 꼭 되고야 말지 않습니까.

  질책과 꾸중이 쏟아질 줄 알았던 예수의 입에서 제자들은 뜻밖에 따스한 평화의 인사와 이제 주님이 이 땅에서 하시던 일을 대신 맡으라는 엄청난 위임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그들의 실패를 상기시키지 않으셨습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마치 지난 며칠 간 아무 것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부활하신 주님은 이전과 똑같이 제자들은 포용해 주시고 믿어주셨습니다. 일시에 제자들 마음 속 깊이 파고들었던 그 부끄러움과 무력감과 자신에 대한 미움은 봄눈 녹듯 사라졌을 것입니다. 그리고 대신 그 자리에 하나님 나라에 대한 뜨거운 열정과 소망이 다시 살아났을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는 긍정으로 긍정을 이끌어 내셨습니다. 믿음으로 믿음을 이끌어 내셨습니다. 아름다움으로 아름다움을 만들어 내셨습니다. 제자들은 그를 믿는 데 실패했지만, 그 분은 제자들을 믿는 데 실패하지 않으셨습니다. 제자들은 그 분을 부정하였지만 그 분은 제자들을 긍정하셨습니다. 그 분의 믿음이 제자들의 불신앙을 이겼습니다.

  지난 2002년 월드컵 때 16강만 되면 원이 없다던 한국팀이 4강에까지 진출하는 기적이 일어나 온 국민을 감동시킨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 유학중이던 저도 얼마나 좋았던지, 새벽마다 소리를 지르며 응원하다 윗집, 옆집 학생들로부터 2번 yellow card를 받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 때 우리 모두를 또 한번 감동시킨 일이 있었지요. 길거리 응원단말입니다. 70이 다되신 제 어머니를 포함하여 수백만의 시민이 길거리로 쏟아져 나온 것도 대단했는데, 그들이 휩쓸고 간 길거리가 깨끗이 치워져 있었다는 사실에 모두가 감동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런데 언론사 기자로 있는 친구들 말을 들어보니까 그게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혹시나' 하고 기대했더니 '역시나' 하는 부끄러운 현장들이 처음에 무척 많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기자들이 한번 부정적인 장면들보다 깨끗이 치워진 거리와 같은 긍정적인 장면들을 적극 부각시켜보았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자신들도 믿기지 않는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는 겁니다. 갑자기 모두가 달라졌다고 합니다. 우리의 작은 긍정적인 요소를 부각시켰더니 전체가 다 자기긍정이라는 거대한 집단 에너지를 분출해 내더라는 겁니다.

  바다의 맹수라고 불리는 범고래가 있습니다. 몸무게가 3톤이 넘는 거대한 녀석들인데도, 어떻게 조련사들이 훈련을 시켰는지, 놀이공원에서 물위 3미터까지 뛰어오르는 묘기를 선보입니다. 알고 보니 그 비결은 칭찬이랍니다. 조련사들은 인내를 가지고, 조금이라도 그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범고래가 행동하면 배를 쓰다듬어 주고 입을 맞추어 주는 등, 적극적인 칭찬 전략을 반복했다고 합니다. 기대에 따라주지 않거나 잘못했을 때는 못 본 척하며 빨리 관심을 다른 데로 전환시켰다고 합니다. 바다 속에 사는 범고래도 자신을 긍정해주고 기다려주는 것에 그렇게 변화하는 것입니다.  

  존경하는 새길교회 교우 여러분, 저는 믿습니다. 쇠를 만드는 것은 쇠이고, 사랑을 만드는 것은 사랑이며, 긍정을 낳은 것은 부정이 아니라 긍정이요, 아름다움을 만드는 것은 추함이 아니라 아름다움이라는 것을 저는 확신합니다. 나의 긍정이, 나의 아름다움이 또 다른 긍정과 또 다른 아름다움을 낳는다는 것을 저는 믿습니다. 나의 부정과 나의 추함은 나와 상대방 속의 부정과 추함을 불러냅니다. 그래서 변화를 원한다면, 나 자신과 가족과 이웃과 이 역사의 변화를 원한다면, 저는 나와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 있는 아름다움과 긍정을 불러 일으켜 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름다움을 불러내는 것은 아름다움입니다. 선을 불어내는 것은 선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믿음을 불어낼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성서의 말씀이 바로 그것을 증거합니다. 제자들은, 그래서 우리 모두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믿는데 실패했지만 (그리고 실패하지만), 주님은 죽기까지 우리 모두를 사랑하시고, 끝까지 믿어주십니다. 제자들은, 그리고 우리 모두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들고 이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일을 하다가 좌절하고 낙담하고 시시때때로 주저앉았지만 (그리고 주저앉지만), 부활하신 주님은 우리들보다 먼저 다시 갈릴리로 가시어 우리를 그 척박한 선교의 현장으로 부르십니다. 바로 그 분의 그 사랑과 믿음이, 그리고 우리의 역사에 대한 그 분의 그 열정과 긍정이 그 날, 그 부활절 저녁 두려움에 떨고 있던 소심한 제자들을 사자도 두려워하지 않는 예수의 사도로 변화시키고야 만 것입니다. 그 분의 그 열정과 거대한 긍정이 지금도 우리들을 다시 일으켜 세우시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요한복음 전체의 클라이맥스로 나아갑니다. 그 날, 그 부활절 저녁에 예루살렘의 다락방에서 일어난 놀라운 성령강림 사건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두 번의 따스한 평화의 인사로 제자들의 두려움을 깨끗이 지우시고, 곧이어 제자들을 세상에 파송하심을 선언하시고 나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로 숨을 내뿜으시며 "성령을 받아라" 라고 말씀하셨다고 했습니다. 바로 이 20장 22절이 요한복음 전체의 절정을 이룬다는 데 성서학자들 사이에 큰 이견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놀랍게도, 요한복음의 저자에 의하면, 성령강림 사건은 예수께서 부활하신 그 날 저녁 예루살렘의 그 다락방에서 일어났던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 보혜사 성령을 보내 주시겠다고 여러 차례 약속하였습니다. 우리를 '변호해주시는 분'(Advocate) 혹은 '도와주시는 분'(Helper)이라는 뜻을 가진 이 성령을 보내어 우리와 영원히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14:16-17). 그리고 그 영은 진리의 영이며 (15:26),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실 영이라고 (16:13)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이 약속을 그 부활절 저녁 예루살렘의 한 다락방에 지키셨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성령을 주실 때, 제자들을 향해 숨을 내뿜으셨다(emphysao) 라는 요한의 증언은 대단히 의미심장합니다. 신구약 성서 전체를 통틀어 하나님의 영을 '숨'으로 표현한 곳은 딱 세 군데뿐입니다. 첫 번째는 창세기 2:7에,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 코에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으시자 그 사람이 비로소 생명체가 되었다고 했을 때 이 말이 쓰였습니다. 두 번째는 에스겔서 37:9에, 마른 뼈들이 널려있는 죽음의 골짜기에서 하나님의 숨이 사방에서 불어와 그 마른 뼈들이 다시 살아나는 에스겔의 환상 속에서 다시 등장합니다. 그리고 세 번째이자 신약성서 전체에서 유일하게, 오늘 우리의 본문 요한복음 20:22에 마지막으로 이 표현이 등장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영을 '숨'으로 표현한 것은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를 의미할 때만 엄격히 쓰였던 것입니다. 흙에서 사람을 지으시고, 죽음의 골짜기에서 새 민족을 일으키신 것처럼, 제자들의 실패와 불신앙의 폐허 위에서도 하나님은 기어이 예수를 믿고 따르는 신비한 새 생명공동체를 창조하셨음을 요한복음의 저자는 힘있게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제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예수의 부활사건은 예수께서 사망에서 일어나신 그 날 새벽에 끝나지 않았습니다. 예수의 부활사건은 십자가의 사건 때 뿔뿔이 흩어져 두려움에 떨고 있던 제자들의 불신앙을 용서하시고 직접 숨으로 성령을 주신 그 날 저녁에 완성되었습니다. 때문에 예수의 부활사건은 죽음과 악의 세력에 대한 하나님의 궁극적 승리를 의미할 뿐만 아니라, 믿음 없는 우리들에 대한 하나님의 믿음의 승리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믿음은 실패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대한 하나님의 믿음은 실패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우리들은 열정은 식어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나라에 대한 하나님의 초대는 쉬는 법이 없습니다. 제자들의 실패와 우리들의 불신앙의 폐허 위에서도 하나님은 기어이 성령의 새 역사를 시작하시고야 맙니다. 예수에 대한 사랑과 헌신이 아무리 부족하고 불완전하더라도, 하나님은 우리의 작은 사랑과 믿음의 불씨로 세상 전체를 태워버리는 거대한 역사를 이루시고야 마는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가 부활의 주님을 믿는다는 것은, 단지 마지막날 우리도 주님처럼 죽음에서 부활할 것이라는 믿음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부활신앙을 가진다는 것은, 하나님 안에서는 다시 시작하지 못할 실패한 인생이 없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서는 부정과 추함과 오욕의 역사를 깨끗이 지우고 새로 시작하지 못할 민족이 없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과 역사는 하나님의 손에 쥐어진 몽당연필입니다. 하나님은 지우개입니다. 2천 년 전 그 부활의 사건에서 제자들의 삶과 교회의 역사를 다시 쓰게 하신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들에게 새 시작을 열어주고 계시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예수의 부활사건은 우리들의 'small no'에 대한 하나님의 'Big Yes'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부정과 추함과 불신앙을 불살라 버리시는 하나님의 'Big Yes,' 곧 거대한 우주적 긍정인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의 하나님은, 라인홀드 니버(Reinhold Niebuhr)가 말한 것처럼, 우리의 자신에 대한 평가를 뒤집어놓음으로써 우리를 창조적인 변화로 이끌어내시는 분이십니다 (God is the one who open us to creative transformation by reversing our self-evaluation). 교회는 바로 하나님의 이 거대한 긍정을, 이 'Big Yes'를 세상에 선포하고, 우리들의 아름다움과 사랑과 나눔으로 증거하기 위해 탄생하였습니다. 그것은 새로운 시작이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께서 걸어가신 새 길이었습니다. 이 새길교회가 감사와 찬양과 확신을 가지고 함께 걸어가야 할, 바로 그 길인 것입니다. 이 귀한 공동체의 일원이신 여러분께 진심으로 축하의 인사를 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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