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요한일서 › 세상을 이기는 힘.

길희성 | 2008.02.26 23:13:17 | 메뉴 건너뛰기 쓰기
성경본문
요일5:1-5
설교자
길희성 형제
참고
새길교회

어느덧 12월이 되어 한 해를 마감하는 때가 왔습니다. 여러 가지로 착잡한 생각이 드는 때입니다. 어떤 사람은 생각하기를, 시간이란 다 마찬가지이지 12월이라고 무어 특별한 것이 있겠는가 라고 합니다. 시간은 양적으로 보면 아주 균질적으로 흐르는 것이라 12월이라고 무슨 특별한 의미가 있겠습니까? 여느 달과 마찬가지로 일년의 12분의 1일 뿐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감각이 무딘 사람이라도 시간의 변화를 그렇게 기계적으로 양적으로만 대하기야 하겠습니까? 또 아무리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사는 사람, 그야말로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조차 모르게 바삐 돌아다니는 사람이라도, 연말이 왔음을 알리는 12월로 달력을 넘기느라면, 잠시나마 상념에 사로잡히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정신없이 지나간 한 해, 과연 나는 무엇을 하며 살았는지, 어떻게 살았는지, 그리고 또 앞으로 나에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나 남았으며 무엇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하는 생각들이 스치고 지나갑니다. 결실의 계절이라는 가을이 다 지나고, 이제 한 해가 저무는 이 때 과연 나의 인생에 무슨 결실이 있었는지 성찰해보게 됩니다. 무엇인가 보람된 일을 이루었다는 뿌듯한 마음이 있을 때는 그래도 허전한 마음이 덜하며, 지나가는 시간이 그렇게 아깝게 여겨지지도 않으련만, 역시 올 한 해도 아무것도 이룬 것 없이 허송세월 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 연말이라는 것이 허전하고 쓸쓸하게 느껴지는 법입니다. 우리는 모두 새 해가 시작할 때 각기 나름대로 크던 작던 새해의 결심이나 각오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연말 결산의 때가 되면 남은 것, 손에 잡히는 것이 하나도 없는 빈털터리가 된 허전한 느낌을 면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손해보는 장사, 번번이 적자 인생을 살았구나 하는 자책감마저 들게 되는 것이 보통 사람들의 모습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러나 신앙적인 관점에서 생각해 보면, 과연 나의 일년의 삶을 결산하는 연말정산의 기준이 무엇일까 하는 물음이 제기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연말정산의 기준은 어디까지나 세상적인 연말정산의 기준과는 달라야 할 것입니다. 어쩌면 사람들이 세우는 새 해의 약속과 각오란 애당초부터 지킬 수 없는 허망한 약속이었는지도 모릅니다. 해서는 안 될 허황된, 그러기에 깨어지는 것이 너무나도 당연한 꿈들이었는지 모릅니다. 자신의 출세와 영달, 세상적 욕심과 야망을 위한 약속이었을지도 모르며, 누구나 원하는 건강이나 가족의 평안을 비는 소박한 소원이었을는지도 모릅니다. 이런 것들은 다 그저 그렇게 흐지부지되고 깨어지기 마련인 것들입니다. 유독 나의 소망만이 꼭 이루어지리라는 보장도 없는 법입니다. 연말을 맞아 우리는 한 해를 성찰하면서, 연초에 내가 했던 약속, 품었던 꿈과 소망이 과연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해야 되는 약속과 다짐이었는지를 먼저 생각해 보아야 하며,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품어야했던 꿈이었는지를 반성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과연 어떤 기준에 의해 한 해의 삶에 대한 연말결산을 해야 할까요? 무엇에 의해 나의 삶의 실패와 성공, 알참과 부질없음을 판단해야 할 것인가를 먼저 물어야 할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해마다 찾아오는 연말이 아니라, 나의 인생의 연말을 정산하게 될 때, 과연 나의 삶 전체의 실패와 성공을 가늠하는 척도는 무엇일까 물어 보아야 합니다. 그것을 알아야 우리는 참다운 인생의 목표를 바로 세울 수 있고, 인생의 목표를 바로 세운 자만이 한 해의 목표도 바로 세우는 것입니다. 올바로 된 목표와 척도가 있어야 한 해의 연말정산도 궁극적으로 의미 있는 일일 것입니다. 극단적으로 말해, 가령 도둑놈이 올 해는 이만큼 도둑질을 해야 하겠다고 자기 나름대로 계획과 다짐을 했기로서니, 연말에 가서 그 계획을 달성했는지 못했는지 따져본들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애당초 세워서는 안 되었던 잘못되고 허황된 끔이었을 뿐입니다.

누구나 한 해를 돌이켜 보면 아쉬운 것들, 마음에 걸리는 것들이 있기 마련입니다. 사업이 시원치 않았다든지, 진급을 못했다든지, 교수들 같으면 논문을 많이 쓰지 못했다든지, 주위로부터 인정을 못 받았다든지, 혹은 가족이나 이웃에게 잘못했던 점들 후회스러운 일들도 많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 물론 이 모든 것들도 중요했으며 그런 일들로 인해 마음이 상하고 괴로워하기도 하며 희비가 엇갈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역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제일 괴로운 일은 솔직히 신앙생활의 괴로움이 아니었나, 또 그래야만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그리스도인답게 살지 못했다는 사실을 늘 마음에 멍에로, 괴로움으로 안고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더 괴로운 것은 그런 줄 알면서도 그러한 자신의 모습과 삶을 과감히 청산하지 못하고 구습에 얽매어 살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일년을 보내야만 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이렇게 신앙생활이 진척이 없고 마음에 괴로움만 안겨 줄 바에야 아예 신앙생활을 그만두어 버릴까, 교회를 떠나 버릴까 하는 생각도 여러 번 들었을 것입니다. 신앙의 재미도 못 보고 세상의 재미도 못 볼 바에야 화끈하게 양자택일을 해야 하는 것 아닌가 하고 말입니다. 그런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가 어차피 연약한 인간, 유한한 인간들인데 다 그런 것 아니냐, 뭐 내가 그렇게 특별히 나쁜 짓을 하고 사는 것도 아닌데 이만하면 된 거 아니냐고 자위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적 괴로움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그것은 무엇보다도 "세상을 이기지 못하고" 번번이 세상에 패하여 세상적으로 살았다는 데서 오는 것입니다. 신앙은 세상을 이기는 힘이건만 번번이 세상에 이끌리고 세상에 휩쓸려 살았다는 것입니다. "세상을 이긴다"고 하면 세상 사람들은 말하기를, 그리스도인들은 그야말로 꿈 하나 야무지다고 조롱할 것입니다. 도대체 너희들이 누구이기에 감히 세상을 이기겠다는 생각을 애당초 품는가 하고 비웃을 것입니다. 그것이야말로 허황된 꿈, 지킬 수 없는 각오가 아닌가라고 말입니다. 올라가지도 못할 나무를 쳐다보면서 공연히 마음만 괴롭히는 자학행위가 아닌가 하고 비웃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세상과 대결하고 세상을 이겨야 한다는 생각은 정녕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허무맹랑한 생각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세상을 이기면서 세상을 사는 것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이라고 기독교 신앙은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세상을 이기는 것이야말로 기독교인의 삶의 목표이며, 존재 이유이며, 사명이며 또 특권이며, 기쁨이요 축복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을 이기고 세상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세상을 변혁할 수 있는 능력, 이것이야말로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요 목표인 것입니다. 우리들 인생의 연말정산의 척도는 바로 이것일 것입니다.
신앙이란 바로 세상을 이기는 힘인 것입니다.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신앙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어차피 세상을 따라 그들과 매한가지로 산다면 굳이 신앙을 들먹이며 아까운 시간을 교회 생활에 허비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람들이 돈 버는대로 나도 벌고, 경쟁하는대로 나도 경쟁하고, 향락을 즐기는대로 나도 즐기면 인생이 편한 것 아닙니까? 올 한 해를 돌이켜보면서 역시 우리의 고민은 세상을 이기는 기쁨과 축복, 자유와 평안이 왜 내게는 없으며, 늘 이렇게 세상적 욕망의 종이 되어 살고 있는 것일까 입니다. 세상을 뛰어넘는 그 초월적 신앙의 확신이 왜 수십년 예수를 믿어 온 우리들에게 아직도 이렇게 약한 것일까요? 이런 것들이 늘 우리들의 마음을 괴롭혀 온 것입니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면, 세상에 걱정할 일도 많은 데 우리가 이렇게 신앙생활에 대해서 고민한다는 것 자체가 우리에게 아직은 쥐꼬리만한 신앙이 남아있다는 증거입니다. 세상과 싸워 이겨보겠다는 생각을 한 것부터가 가상하고, 그렇게 하지 못했다는 것을 괴로워하는 것도 대견스러운 일입니다. 진짜 바보는 자기가 바보라는 사실조차 모르고, 자기가 바보인줄 아는 바보는 진짜 바보가 아니듯이, 자신의 신앙의 부족함을 알고 괴로워하는 것은 역설적으로 조그마한 신앙의 불씨나마 꺼지지 않고 타고 있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괴로워하는 것은 우리가 아직도 그리스도에 사로잡힌 바 되어 그야말로 그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자의 반 타의 반 그 안에 머물러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때로는 그 손아귀를 벗어나려고 몸부림을 치기도 했지만 끝내 벗어나지 못하고 억지로 십자가를 지고 가야했던 구레네 사람 시몬처럼 지금까지 온 것입니다. 그리고 감히 그리스도를 닮지는 못하지만 멀리서나마 그를 흉내라도 내보고자 하는 마음이 아직 남아있기에 이렇게 추운 날에도 교회 문을 두드리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아예 세상과의 싸움을 포기해 버리는 자야말로 신앙을 포기하고 그리스도에게서 떠난 자일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나의 믿음이 연약함을 도와 달라고 기도할 수 있는 믿음만은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귀신 들린 아들의 괴로움을 안고 예수에게 다가가서 외친 한 아버지의 절박한 기도대로, "믿습니다, 나의 믿음 없음을 도와주소서"라는 역설적인 기도가 우리 믿는 이들의 진정한 기도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절대로 오해가 있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본래 신앙이란 우리에게 괴로움을 주려는 것은 물론 아닙니다. 확고한 신앙은 오히려 위로와 용기, 진정한 행복과 평화를 주는 것입니다. 다만 어정쩡한 신앙이 세상에도 속하지 못하고 그리스도에게도 완전히 속하지 못하는 어정쩡한 상태를 낳아 괴로움을 더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고통을 앞에 두고서도 "너희가 세상에서 시련을 당할 것이나 용기를 내라, 내가 세상을 이겼노라"고 말씀하면서 세상에 남기고 갈 제자들을 위로하시는 예수(요한 16:31-33)의 모습에서 우리는 진정한 신앙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또, 내가 달려갈 길을 다 달려가고 선한 싸움을 다 싸웠다는 승리의 노래를 부르는 사도 바울의 모습이야말로 진정한 신앙인의 모습일 것입니다. 세상을 이겼다는 것은 싸움의 상태를 벗어나 승리했다는 것이며 세상이 주지 못하는 평화와 기쁨, 초월과 자유를 얻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승리의 기쁨을 조금이나마 맛보려고 우리는 신앙 생활에 힘쓰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그러한 승리, 그러한 기쁨, 그러한 평화를 얻을 수 있겠습니까?

첫째, 우선 세상과 싸워야 합니다. 싸워 보지도 않고 승리를 얻는다는 것은 있을 수도 없고, 만약 있다면 그러한 승리는 무의미하고 무가치한 승리일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 기독교의 심각한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세상과 변변한 싸움조차 해보지도 않고 승리의 개가를 쉽게 부르는 병폐입니다. 더 한심한 것은, 신앙이란 세상과의 치열한 싸움, 영적 삶을 위한 육과의 끊임없는 전쟁이라는 가장 명백하고 기본적인 사실조차 무시하고, 신앙을 만사형통케 하는 마술방망이라도 되듯 생각하고, 신앙 생활을 대가 없이 공짜로, 쉽게 하려는 것입니다. 예수만 믿으며 세상일도 만사형통이고 사후의 구원도 따놓은 장상이라는 식입니다. 예수 믿는다는 것이 너무 쉽고 간단한 일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싸워 보지도 않고 이겼다고 큰 소리 치는 허위의식을 한국 교회는 조장합니다.
둘째, 세상과의 싸움이란 무엇보다도 나 자신과의 싸움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예로부터 세상을 정복하기보다 더 어려운 것이 자기를 정복하는 일입니다. 나는 세상에 의해 형성되었고, 세상이 내 안에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이기는 일은 곧 자기를 이기는 일입니다. 우리는 부처님, 공자님, 예수님에게서 세상을 정복한 정복자가 아니라 자기를 정복한 진정한 승리자들의 모습을 봅니다. 성인이란 바로 자기와의 싸움에서 이긴 자들인 것입니다. 이들이 자기와의 싸움을 전개한 방식과 그 승리의 비결도 각기 다르지만­부처님에게서는 세상의 모든 고통과 슬픔을 완전히 극복한 초연한 성자의 모습, 공자님에게서는 세계와 이웃과 완전한 조화를 이룬 성인의 모습, 그리고 예수에게서는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자기를 완전히 비어 버린 인간의 모습­공통적인 것은 모두 자기와의 싸움에서 승리했다는 사실, 그럼으로써 그들은 인류의 영원한 스승이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슬람교는 지하드(jihad) 즉 신앙과 종교를 위한 성전(聖戰)­한 손에는 칼 한 손에는 코란을­을 신자들의 의무로 가르치지만, 진정한 지하드는 자기와의 싸움이라는 것입니다.
신앙인들 가운데는 세상과의 싸움이 우선 자기와의 싸움이라는, 종교인이면 누구나 다 아는 명약관화한 가장 근본적인 진리를 무시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특히 민주와 정의를 외치고 사회참여와 개혁을 부르짖는 이른바 민주투사와 진보적 크리스천 가운데 많이 있습니다. 자기 안의 욕심은 그대로 남겨 놓은 채 민주를 외치다가, 정권이 바뀌니까 너도나도 하던 짓 집어치우고 한 자리 하려 들고, 국회의원 출마하고, 목적을 위해 수단방법 가리지 않는 행태를 우리는 많이 목격하고 있습니다. 옛 독재정권의 주역들보다도 어쩌면 더 추악한 모습을 연출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비판도 합니다. 우리 사회에 현재 제일 아쉬운 것이 있다면, 순수한 민주 지도자, 도덕적 권위를 인정받는 사회 지도자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는 데에 있다고 봅니다.
신앙생활은 무엇보다도 자기와의 싸움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악을 탓하기 전에 자기 자신의 악과 먼저 싸우지 않는 한 모두가 오십보 백보, 그 사람이 그 사람인 것입니다. 그렇다고 개인 윤리적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자기와의 싸움 없이는 만사가 허사로 된다는 것만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와의 싸움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경기장에서 달음질하는 사람들이 다 같이 달리지만 상받는 사람은 하나뿐이라는 것을 여러분은 알지 못합니까? 이와 같이 여러분도 상을 얻게 되도록 달려야 합니다. 경기에 나서는 사람은 모든 일에 자기를 절제합니다. 그것은 썩어질 월계관을 얻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없어지지 아니할 영원한 월계관을 얻으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목표가 불분명한 달음질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허공을 치는 권투를 하는 것도 아닙니다. 내가 내 몸을 쳐서 복종시키는 것은 내가 남에게 선교하고 나 자신은 버림을 받을까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고전 9: 24-27). 혹은 날마다 죽는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옛 사람의 관습을 벗어나기 위해 매일 매일 노력한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의 세상과의 싸움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세상을 차지하려고 남들과 아귀다툼을 벌리지만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삶을 본받아 세상을 이기고 자기를 이기려고 자기와 싸우는 존재들입니다.

사실, 이러한 영적인 싸움을 하는 사람이 없는 사회는 희망이 없는 사회입니다. 모두가 세상을 차지하려고 아귀다툼만 벌린다면 그 사회는 희망이 없는 사회가 될 것입니다. 요즈음 제가 몸담고 있는 서강대에서는 학부제 실시로 인해 교수들 사이에서 큰 논란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모두가 영문학, 신문방송학, 경영학을 전공한다고 합니다. 이러다간 대학은 이 세 과만 남을 것이라는 우스꽝스러운 얘기조차 나옵니다. 그런가 하면 인문사회계 서울대학생 절반 이상이 고시공부에 매달리고 있다는 얘기도 들립니다. 요즈음 아이들은 어찌 그렇게 현실주의적인지 기가 차다고 교수들은 개탄을 합니다. 우리 때는 그렇게 못 먹고 가난한 시절이었는데도 이상주의가 있었고 문학을 논하고 철학을 논했으며, 신앙과 인생의 문제로 많은 고민을 했는데 요즈음 아이들은 그저 먹고 즐기는 것 외에는 별 관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대학생들이 인생을 논하고, 철학, 종교, 문학을 논하며 이상주의에 불타보지 못하고 돈 버는 일만 대학에서 생각하다가 졸업하고 세상으로 나간다면 그 사회는 희망이 없는 사회입니다. 모두가 가난 귀신에 혼이 나고 가난에 한이 맺혀서인지는 몰라도 돈 잘 벌고 취직 잘되는 이른바 인가학과에만 몰리는 것입니다. 그 점에 있어서는 부모들이 더 극성입니다. 모두가 돈 버는데 환장이 된 사회, 우리는 그런 사회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사회는 역설적으로 경제도 제대로 되지 않는 사회가 되고 말 것입니다. 영적인 군사들이 없는 사회는 썩을대로 썩어지는 사회가 되기 마련입니다. 신앙의 이름으로 영토를 정복하고 지배하는 중세시대의 십자군이 아니라, 자기를 낮추고 비우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묵묵히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좇아가는 십자가의 군병들이 없는 사회는 희망이 없는 사회입니다.

그러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싸워야 합니까? 싸움에 이기는 방법, 비결이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병사가 전장에 나가 싸워 이기려면 훈련도 중요하고 전략도 중요하지만 우선 제일 중요한 것은 싸우려는 마음가짐과 힘이 있어야 합니다. 전의가 없고 힘이 없는데 아무리 작전이 좋고, 무기가 좋으면 무엇합니까? 모택동 군대에 쫓겨가는 장개석 군대밖에 안 될 것입니다. 그러면, 이 싸우려는 전의는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세상을 대항하여 거슬려 살고자 하는 이 영웅적 마음과 힘은 어디서 옵니까? 그 힘은 한 마디로 오직 하나님께로만, 오직 거룩한 영으로부터만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세상을 이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오늘의 말씀인 요한 1서 5장에 "하나님께로 난 자는 세상을 이긴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곧 영으로 난 자이며, 영에 속한 자들은 영에 속한 일들을 생각하고 육에 속한 자들은 육에 속한 일을 생각하고 세상의 일만 생각하기 마련입니다. 성령으로 거듭나서 영적인 것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순종하는 마음이야말로 믿는 이들이 세상과 대적할 때 필요한 전의를 가질 수 있고 싸울 수 있는 힘을 얻는 첫째 조건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미 하나님께 부름을 받고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이며 성령으로 거듭난 존재들입니다. 근본적으로 세상에 속한, 육에 속한 자들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아직 육의 힘, 세상의 힘을 완전히 막지 못하고 괴로워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 안에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의 영이 약하고 부족하다는 데에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성령의 힘을 간구해야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전의가 충천하고 싸울 힘이 솟구친다 해도 병사들은 무기가 없으면 싸울 수 없는 것입니다. 무장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의 무장을 다음과 같이 에베소 6장 10-20절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전신 갑옷을 입으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갑옷이란 하나님 자신이 입으시는 갑옷, 혹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갑옷이란 뜻입니다. 진리의 허리띠, 의의 가슴막이, 평화의 복음을 발에 차고 머리에는 구원의 투구를 쓰고 대적하라는 것입니다. 진리와 의와 복음과 구원이라는 하나님의 전신 갑옷을 입고서야 세상을 대적할 수 있고 자기를 방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국 하나님의 사람, 하나님으로부터 난 자, 영의 사람, 영으로부터 난 자가 아니고는 세상을 대적할 수 없다는 가장 기본적인 진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둘째, 믿음의 방패를 가지라고 합니다. 믿음은 세상의 유혹의 화살과 육의 공격을 막아내는 방패라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세상을 향하지 않고 하나님을 향한 마음,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리워하며, 하나님을 신뢰하고 순종하는 마음가짐을 말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오늘의 말씀 요한 1서도 "세상을 이기는 이김은 우리의 믿음입니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셋째, 성령의 검인 하나님의 말씀을 쥐라고 합니다. 결국 적극적으로 적을 물리치기 위해서는 방어무기만으로는 안 되고 공격무기가 필요한데 그것이 곧 성령의 검인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4장 12절에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어 양쪽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날카로와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낼 정도로 찔러 마음에 품은 생각과 의향을 판단합니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세상으로부터 오는, 육으로부터 오는 죄악의 생각과 유혹을 하나님의 말씀은 날카롭게 식별해서 잘라낸다는 말입니다.
넷째로, 바울 사도는 성령 안에서 언제나 기도와 간구로 기도하며, 그러기 위하여 언제나 깨어 끝까지 참고 모든 성도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권면합니다. 깨어 있고, 인내하며, 성령 안에서 기도로 서로 위하라는 것입니다.

이상과 같은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볼 때, 올 한 해 우리가 세상을 이기지 못하고 세상에 이끌려 다니며 산 것은 결국 성령의 힘을 충분히 힘입지 못했고, 튼튼한 믿음의 방패를 가지지 못했으며, 성령의 검인 하나님의 말씀을 사용하기를 게을리 했으며, 기도에 힘쓰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지극히 평범한 진리를 깨닫게 됩니다. 지극히 평범한 사실이지만, 우리 새길교회 식구들에게는 매우 아픈 곳을 찌르는 말씀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우리 새길교회는 신앙의 새길을 찾아 하나님 나라의 정의와 평화를 위해 세상과 싸우고자 각오하고 나선 사람들이 모인 신앙공동체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실천력이 부족했음을 고백하고 반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실천력이 부족한 것은 성령의 도우심을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 약했고, 하나님의 말씀을 간절히 사모하고 공부하는 열성이 없었으며, 기도의 정성이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면에서 특히 우리 새길교회의 남신도들은 더욱 반성하고 분발해야 할 것입니다. 기성 교회가 비판받아야 할 점이 많으나 말씀공부와 기도의 열심에서는 우리가 부끄러운 신자들임을 솔직히 인정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정의와 평화를 위한다 하지만 영적 싸움을 위해 무장이 되어있지 않은 사람들이 어떻게 세상의 덫에 걸리지 않고 세상을 위해 헌신하겠습니까? 우리는 위선을 범하는 교회가 되어서는 안되고, 기도도 안 하고 말씀 공부도 안하는 신자들을 길러내는 교회가 되어서도 안 될 것입니다. 세상일이 아무리 바쁘다 해도, 우리의 인생 연말정산 때 하나님께서 보시는 것은 우리가 무엇을 얼마나 많이 성취했느냐, 즉 우리의 업적을 보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인생을 어떻게 살았느냐 하는 우리의 삶의 방식과 자세를 묻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자녀로서 세상과 싸워 이기면서 살았느냐, 아니면 세상의 자식들로서 세상에 굴하여 세상의 종으로 살았느냐 하는 것뿐입니다. 연말을 맞아 한 해를 반성하며 새해를 위한 각오를 새롭게 할 때입니다.
12월은 한 해를 뒤돌아보는 회개와 반성의 때이지만 동시에 세상을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을 우리에게 심어주시려고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맞는 달입니다. 세상을 이기시고 영원한 승자, 영원한 자유인으로 사신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다리는 달입니다. 희망을 가지고 그나마 남은 한 달을 잘 마무리하십시다. 그리하여 우리도 우리 인생의 연말정산 때 그리스도와 더불어 "내가 세상을 이겼노라"고 승리의 노래를 부를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요한은 오늘도 우리에게 묻고 있습니다: "세상을 이기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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