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신명기 › 하느님의 나라, 동무들의 나라

박경미 | 2008.10.26 23:39:32 | 메뉴 건너뛰기 쓰기
성경본문
신10:19
설교자
박경미 교수
참고
이화여대 기독교학과/새길교회 2007.6.24주일설교
신명기 10:19, 누가복음 10:30-37]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 출애굽의 영웅 모세, 포로기 이후의 디아스포라에 이르기까지 구약성서의 인상 깊은 주인공들은 모두 “나그네”요, “떠돌이”였습니다. 구약성서에서는 이들이 하느님의 축복을 받아 엄청난 땅과 가축을 소유했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친척과 아비의 집을 떠나 아무런 보호도 받지 못한 채 기약 없이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이 이들의 삶의 실제 모습이었습니다. 하느님이 사랑했던 선택받은 자들의 삶은 아이러니칼하게도 늘 고달픈 나그네 삶이었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이 그랬고, 특히 이스라엘, 야곱이 그랬습니다. 추위와 굶주림, 모멸감, 이런 것들이 실제로 구약성서 족장들의 삶을 끈질기게 따라다니는 것들이었습니다. 낭만적으로 사막과 초원을 쏘다니기는커녕 삶의 풍성함과 안정, 쾌락을 누리는 길을 근원적으로 봉쇄당한 채 그들은 사막과 그 주변 지역에서 살았습니다.

구약성서의 족장들은 이미 정착해서 풍요로운 농경문화를 이루고 있던 가나안 종족들에 비해 훨씬 뒤떨어진 유랑민이었고, 사막과 목초지를 떠돌면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늘 정착지를 그리워했습니다. 그들은 한편으로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 약속의 땅을 간절하게 염원하고 풍요로운 삶을 갈망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정착 농경문화가 결국은 도달하게 되는 착취와 피착취구조, 계급사회에 대해 근원적인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구약성서 사무엘상하에 나오는 이스라엘 왕정 수립에 대한 이야기는 이러한 사정을 잘 반영합니다. 아마도 국가질서와 계급사회에 대한 거부감 때문에 이스라엘 역사상 왕정체제로 진입하는 것이 그렇게 늦고 어려웠을 것입니다.

국가나 돈 많은 유력자들을 의지하지 않는 대신 그들이 절실하게 필요로 했던 것은 사람 마음속에서 저절로 우러나는 우정과 환대였습니다. 누구나 굶주린 사람을 보면 밥 한 그릇을 나누고 싶고, 한데서 떨고 있는 사람을 보면 따뜻한 불 앞에 앉게 해주고 싶은 마음이 저절로 생깁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이 마음을 주셨습니다. 이 저절로 우러나는 따뜻한 마음 앞에서는 국가나 계급, 인종의 차이가 끼어들 여지가 없습니다. 이렇게 저절로, 스스로 우러나는 따뜻한 마음에서 우정이 생겨나고 서로 협력하고 도울 수 있는 환대의 그물망이 생겨납니다. 그리고 이것이 떠돌이 족장들의 생존 근거이자 토대였습니다. 받아주는 친구가 없으면 그들은 낯선 타향에서 생존할 수가 없었습니다. 친구가 있어서, 동무가 있어서 낯선 타향이 더 이상 낯설지 않게 느껴질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성서에는 다른 어떤 문서보다 나그네를 접대하라, 손님을 잘 접대하라는 가르침이 많이 나옵니다. 사실 이것은 인간이 본래 가진 상호부조의 본성을 잘 다듬은 고대인들의 삶의 지혜였을 것입니다.

족장들과 이집트의 히브리인들, 그리고 포로기 이후의 디아스포라에 이르기까지 구약성서는 바로 집 떠난 나그네들의 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후에 이스라엘 민족은 자신들의 신앙을 고백할 때 스스로를 “떠돌아다니며 사는 아람 사람”(신명 26:5)의 자손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삶 속에서 경험하고 가꾸어간 우정과 환대는 한때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협동적이고 위계질서가 없는 사회를 발전시키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그들의 이러한 경험은 구약성서에서 “모세계약”의 상호호혜적이고 협동적인 계명들로 구체화되었습니다. 안식일법이라든가 안식년제도, 희년법 같은 것들이 그러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을 나그네라고 여겼던 것은 구약성서의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초대교회 신자들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소종파였던 초대 기독교인들은 비기독교인들이 자신들을 바라보는 시선에서 당신들은 우리와 다른 부류라는 차별과 의심의 눈초리를 읽었습니다. 사람들은 기독교인들을 당나귀를 숭배하는 자들이라고 놀렸고, 밤에 모여서 갓난아이 살을 베어 먹는다는 소문을 퍼뜨리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세상 안에서 불편했습니다. 그들의 세상살이는 마치 나그네가 낯설고 물 설은 이국땅에서 살아가는 것과도 같았습니다. 히브리서나 베드로전서에서는 기독교인들을 그리스어로 παροικοι, ξενοι 같은 단어로 표현했습니다. 이 말들은 외국인, 거류 외국인, 나그네를 뜻하는 말이었습니다. 초대 기독교인들은 세계 안에서 낯선 자로 자신들을 인식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을 지상을 헤매는 나그네들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리고 구약성서에서 나그네와 외국인들을 잘 접대하라고 거듭 권면했듯이(레위 19:34; 25:35; 민수 35:15; 신명 10:18-19) 초대 교회 역시 외국인들이나 나그네들을 교회 안에 받아들이고 접대해야 한다고 했습니다(로마 12:13; 16:2; 빌레 22; 딤전 3:2; 5:10; 디도 1:8). 너희가 나그네였으니 나그네를 홀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초대 교회의 적극적인 나그네 의식은 사실 예수 자신에게서 유래했습니다. 당시에는 로마제국의 침략과 헤롯 가문의 수탈에 의해 전통적인 갈릴리 농경사회의 서로 돕는 자생적인 농민 협동조직이 거의 무너졌습니다. 로마제국과 헤롯 가문의 통치는 테러리즘과 폭력에 기반해 있었고, 그로 인해 민중들은 자긍심을 잃고 내면적으로 갈기갈기 찢겼습니다. 그 속에서 예수는 갈릴리 농민들과 함께 밥을 나누고 마음을 나누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로마제국의 지배 아래 파괴의 위기에 직면한 갈릴리 농민들 사이에 서로 돕는 관계, 친구관계를 회복시키고자 했습니다. 하느님 나라, 동무들의 나라를 다시 불러들이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들 모두를 피폐하게 만든 가난에 대해 서로가 서로를 비난하는 대신, 예수는 서로가 서로를 도울 수 있게 했고, 서로에 대한 의심과 원한 대신 연대의 정신을 되살릴 수 있게 했습니다. 그들은 서로 동무가 되어 빚을 탕감해주고, 삶을 나누고 물질을 나누었습니다.

보지 못하던 사람이 보게 되고, 앉은뱅이가 일어나고 수천 명이 보리떡 다섯 덩이와 물고기 두 마리로 배불리 먹었다는 기적 이야기들은 예수가 그들을 스스로 살아가는 주체적인 삶을 향해 회복시키고, 우정을 나눌 수 있는 인간으로 다시 탄생시킨 것을 말해줍니다. 그들은 예수의 하느님나라 운동을 통해 자기 삶의 주인이 되고 자기 인생을 스스로 살도록 요청받았습니다. 서로를 분열시키는 행동을 자제하고 협동하고 우정 있는 인간이 되도록 요청받았습니다. 동무들의 나라, 하느님나라로 들어오라는 초대를 받은 것입니다.

여기서 더 나아가서 요한복음에서는 하느님이 인간이 되셔서 낯선 세상 안에 나그네로 거하면서 사람들의 친구가 되셨다고 했습니다. 요한복음의 예수는 인간이 되어 낯선 세상 안에 거하는 나그네 하느님이십니다. 하늘이 고향이니 땅이 낯선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의 예수는 어둠이 지배하는 이 낯선 땅에 서로 사랑하는 하늘나라, 동무들의 나라를 만들어갑니다. 요한복음 15장에서는 나그네 하느님이신 예수가 제자들과 이별을 나누면서 “서로 사랑하라”고 거듭 당부하고, “이제부터 나는 너희를 종이 아니라 친구라 부르겠다”고 말합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더 이상 종이 아니라 친구이고, 예수는 제자들을 우정의 공동체로 초대한 것입니다. 우정과 사랑에는 한계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형제사랑의 의무에는 한계가 없고, 하느님이, 예수가 세상의 나그네였듯이 교회 역시 세상의 나그네로서 세상의 다른 나그네들을 자기 안에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초대 교회는 국가가 경영하는 복지제도나 돈에 의지했던 것이 아니라, 사람들 마음에서 저절로 우러나오는 단순하고 소박한 우정과 환대를 먹고 성장했습니다. 세상살이에서 소외되고 불편한 사람들이었지만 그들의 삶 한가운데는 기쁨이 넘쳤고, 사도행전에 의하면 늘 기도하고 기쁨의 찬송을 불렀다고 했습니다. 이제 그들은 더 이상 나그네, 낯선 사람이 아니라 친구였고, 함께 길을 가는 동무였으며, 하느님 안에서 형제요 자매였기 때문에 기뻐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것이 초대 교회의 코이노니아, 곧 사귐입니다. 초대 기독교는 무언가를 주겠다고 약속한 것이 아니라 그냥 너와 나 사이에 사귐이, 코이노니아가 있게 하자고 했습니다. 기독교는 친구가 되는 사귐을 목적으로 하는 종교였습니다. 사실 약속을 많이 하는 것일수록 우리 귀에는 좋게 들리지만 그런 것 중에 진실한 것은 별로 없습니다. 정말로 진실한 것은 담담한 가운데 있습니다. 생명의 샘물을 맨 처음 마신 초대 교회가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던 물도 삼삼하고, 담백하면서 생명을 소생케 하는 단순한 물이었습니다. 기독교의 생명은 겉보기에 휘황찬란한 때보다 도리어 아무것도 없던 때에 있었던 같습니다.

우리나라 교회도 지금보다는 가난했던 옛날에 훨씬 더 생명력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집안 이야기를 하나 하겠습니다. 저희 시어머님이 시댁에서 제일 먼저 예수를 믿기 시작했습니다. 시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해서 재산을 거덜내고 세상을 뜨자 30대 후반이었던 어머니는 당신의 늙은 시어머니와 어린 5남매를 데리고 고향으로 돌아와서 산 아래 임자 없는 오두막집에서 사셨습니다. 삶의 희망이 끊어진 상황이었습니다. 어느 날 어머니는 젖먹이 막내딸을 업고 복숭아나무 아래 서서 사립문 밖에서 하늘을 붉게 물들이며 지는 해를 보면서 “나도 이제 예수 믿고 살아야겠다”고 결심하고 산을 넘어 이웃마을로 교회를 다니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때만 해도 산이 무서워서 늑대가 나타났다고 합니다. 젊은 과부가 혼자 위험한 산을 넘어 이웃 마을로 교회 다니는 것을 본 동네 영감님 한 분이 저러다 실성하겠다 싶어 자기 부인에게 “동무해서 같이 가주라”고 했습니다. 그 인연으로 그 아주머니는 물론이고 영감님과 그 집안 모두가 예수 믿고 한 가족처럼 지내게 되었다고 합니다. 친구 된다는 것, 동무 된다는 것은 이런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80이 훌쩍 넘은 저희 어머니는 여전히 건강하십니다. 저희 딸이 너댓살 되었을 적에 교회를 갈 때면 어머니는 딸아이 손을 붙잡고 앞장서셨습니다. O자 형으로 다리가 굽은 할머니가 뒤뚱거리며 어린 손녀의 손을 붙잡고 걷는 모습은 교회에 대해, 기독교에 대해 오만가지 발칙한 생각을 하는 저를 겸손하게 만듭니다. 그 걷는 모습은 이천 년을 넘게 이어온 교회의 힘이 어디 있는지 눈앞에서 똑똑히 보여줍니다. 교회의 역사는 어머니에게서 딸에게로, 할머니에게서 손녀에게로 이어지는 살아 있는 삶의 행렬을 통해 이어집니다. 어머니는 교회에서 동무를 발견하셨고, 당신 스스로 다른 사람의 동무가 되어주셨습니다. 그러면서 기쁨과 웃음을 회복하셨습니다. 초대 교회에서는 이런 일들이 수없이 일어났을 것입니다.      

초대 기독교는 아무것도 달콤한 것을 약속하지 않으면서 도리어 가장 큰 것을 약속한 셈입니다. 세상에 동무들의 나라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사실 이보다 더 큰 일이 어디 있으며 이보다 더 긴급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사람 사이에 호의가 자라나지 못하고 사람과 사람이 동무로서 손을 잡지 못한다면 진보는 무엇이고 발전은 무엇입니까? 우리 사회는 전세계 어느 나라보다 빠르게 근대화, 산업화를 진행시켜 오면서 “하면 된다”는 ‘무대뽀’ 식 개발논리, 너를 적수로 삼아 먹어버리고야 말겠다는 경쟁논리가 참으로 견디기 힘들 정도로 무섭게 휘몰아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집을 장사꾼의 소굴로 만들었다”는 예수의 준엄한 질타는 오늘 우리 사회 어디나 해당합니다. 70년대 80년대 군사독재가 쫓겨간 자리에 더 지독한 시장 전체주의가 또아리를 틀었습니다. 군대귀신이 물러간 자리에 더 강력한 돈귀신이 좌정하고 앉아 더 꼼짝달싹 못하게 합니다. 이 돈귀신은 총칼로 사람을 죽이거나 신체에 위협을 가하는 것이 아니라 번쩍이는 상품과 미끈한 육체를 통해 우리 마음을 유혹합니다. 우리 마음을 현혹해서 우리로 하여금 자발적으로 복종하게 만듭니다. 종이 되는지도 모르고 돈귀신에게 종살이하게 만듭니다. 복음서에 나오는 어떤 귀신들린 사람의 처지가 오늘 우리 처지와 비슷한 것 같습니다. 어떤 사람이 귀신들렸다가, 간신이 귀신을 쫓아냈습니다. 그런데 나갔던 귀신이 제 살 집을 못 찾자, 이번에는 제 친구 귀신들까지 잔뜩 불러서 처음 살던 그 사람 안에 다시 들어가서 살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의 처지가 귀신을 쫓아내기 이전보다 더 어려워졌다는 것입니다. 돈귀신에게 종살이하고 있는 우리 처지는 이 이야기 주인공의 처지와 꼭 닮았습니다.

돈귀신이 지배하는 시장 전체주의는 비판적인 지성을 무력하게 하며, 무엇보다도 우정을 이루지 못하게 합니다. 요즘은 지식인들, 심지어 예술가나 성직자들까지도 경쟁시대에 뒤떨어져서는 안 된다는 집단적인 강박관념에 빠져 있습니다. 예전에 비하면 정말로 넘치게 살면서도 현재의 삶의 수준을 유지하기 위해, 뒤떨어지지 않기 위해, 끝없이 개발하고, 발전하고, 경쟁해야 한다고 노래를 부릅니다. 내가 살기 위해 기어이 너를 먹고야 말겠다고, 그렇게 사는 것이 선(善)이라고 말하는 세상에서 지성은 무엇이고 철학은 무엇이며, 또 종교와 도덕은 무엇입니까? 약한 자를 이기는 것이 어떻게 명예가 될 수 있습니까? 타인을 낮추어 보는 것이 무슨 자랑거리가 됩니까? 싸움에 이겨서 먹이로 삼을 존재를 가졌다는 것은 오히려 수치입니다. 그것은 인간의 세계가 아니라 야수들의 세계입니다. 그보다는 사랑하는 친구를 가지는 것이 명예입니다. 경쟁은 짐승들에게 맡기고 우리 인간들은 동무들의 세계를 만들어가야 합니다.

11세기 유럽의 수사였던 빅토르 드 휴는 친구 로놀프에게 참으로 아름다운 우정의 편지를 썼습니다. 저는 가끔 이 글을 읽고 힘을 얻습니다. 일부분만 읽어보겠습니다.

친애하는 형제 로놀프에게, 죄인 휴로부터. 사랑은 끝이 없다네. 내가 처음 이 말을 들었을 때 나는 금방 그게 진실임을 알았었네. 나는 이방인이었고, 나는 그대를 낯선 땅에서 만났었지. 그러나 내가 거기서 친구들을 발견한 이상 그 땅은 정말 낯선 곳이라고는 할 수 없었네. 내가 먼저 친구를 만들었는지, 혹은 내가 친구가 되었는지 나는 모르겠네만, 나는 거기서 사랑을 발견하였고 나는 그걸 사랑했으며 나는 그 사랑에 싫증난 적이 없었다네. …… 나는 이 소중한 선물의 무게에 짓눌릴 정도가 되었지만, 그러나 결코 짐스러움을 느끼지는 않았다네. 왜냐하면 내 온 가슴이 나를 지탱해준 까닭에. 그리고 이제 긴 여행 끝에 나는 내 가슴이 여전히 따뜻해짐을 느끼고, 그 선물이 조금도 상실되지 않았음을 느낀다네. 사랑에는 끝이 없는 탓이라네.

이 편지를 읽을 때마다 어디선지 모르게 마음속에 기쁨이 스며드는 것을 느낍니다. 우정은 참된 기쁨을 가져다줍니다. 사람은 동무가 있어야 기쁜 것입니다. 고독은 모든 기쁨을 말려죽입니다. 즐거움은 그것을 나눌 사람이 있어야만 즐거운 법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기쁨이 없는 것은 모든 사람을 적으로, 경쟁상대로 만들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적이 많은 사람, 경쟁자가 많은 사람은 고독합니다. 물론 그런 사람도 물건을 사고팔면서, 화려한 만찬석상에서 눈인사를 하면서 친구를 사귈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벗이란 결코 그런 것이 아닙니다. 벗이란 글자 友는 본래 손을 둘 그린 것입니다. 손과 손을 마주 잡은 사귐입니다. 그것은 악수고, 화해입니다. 사귐이란 것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적의가 없어지고 호의가 성립되는 일입니다. 벗이란 호의를 가지고 나를 대해주는 사람입니다. 경쟁하는 사람은 친구가 없고, 그래서 고독하고, 그래서 기쁨이 없습니다.

그러나 삶의 본질은 기쁨입니다. 삶이 우리에게 허락한 것들에 대해 만족하고 기뻐하는 것이 생명을 선사받은 우리 인간의 본분입니다. 들에 핀 백합처럼, 하늘을 나는 새처럼 명랑하게 피어나고 노래할 의무가 우리 인간에게 있습니다. 참새도 먹을 것을 구해서 먹고 난 다음에는 처마 끝에 날아와 명랑한 노래를 부르는데 어째서 우리더러 초조한 낯빛을 한 채 끝없이 경쟁하라고 합니까? 하루 종일 먹고만 있을 수도, 입고만 있을 수도 없는데 말입니다. 사실 욕망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욕망에 한계가 없다는 것은 자본주의 마케팅이 우리 마음에 걸어놓은 주술일 뿐입니다. 우리 삶은 욕망이 아니라 기쁨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샘물이 넘쳐흐르듯이 우리 뱃속에 기쁨의 샘이 넘쳐나야 합니다. 억제할 수 없는 기쁨의 노래가 영혼의 밑바닥에서부터 밀려나와야 합니다. 만일 교회가 이 일을 이루지 못한다면, 동무들의 나라, 기쁨의 나라를 이루지 못한다면 교회는 껍데기일 뿐입니다.

예수가 한 일은 무엇입니까? 예수는 당시의 내로라하는 지식인들과 고담준론(高談峻論)을 나누었던 것도 아니고,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 무슨 기적 쇼를 했던 것도 아닙니다. 그의 위대함은 만인에게, 아니 죄인들에게, 세리와 창녀에게 완전하게 자기 가슴을 열었다는 데 있습니다. 그들의 무거운 짐을 몸소 자기 어깨에 졌다는 데 있습니다. 그의 위대함은 이 냉랭하고 살벌한 세상에 형제애를 일으키고, 서슬 시퍼런 로마제국의 식민지에 우정과 환대의 나라, 동무들의 나라를 가져온 데 있습니다. 아무리 세상이 살기등등해도 사람들은 예수의 가슴에서 자기를 알아주는 마음, 받아들여주는 마음을 발견할 수 있었고, 따뜻한 벗의 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예수가 선포했던 하느님나라는 동무들의 나라였고, 우정과 환대의 나라였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동무들의 종교, 서로 친구하자는 종교입니다.

세상 권력은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지식이 있는 자와 없는 자, 지체가 높은 자와 낮은 자 사이에 온갖 금을 그어놓고, 거기 더해서 종교권력은 정결한 자와 부정한 자를 끊임없이 나누었습니다. 온갖 넘지 못할 선들이 사람들 사이에 그어졌습니다. 그 날카로운 면도날 같은 선을 가운데 두고 사람들은 서로 원수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싸울 수밖에 없습니다. 권력은 분리하고 싸움을 낳습니다. 그 분리선을 지우고 보면 누구나 따뜻한 가슴을 가진 이웃인데, 너나없이 권력이 그어놓은 경계선의 이쪽과 저쪽에서 서로를 원수 삼아 창을 겨누고 있는 것입니다. 그 경계선 아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피 흘리고 고통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그 경계선이, 분리하는 철조망이 없는 것처럼 행동했습니다. 마치 분리벽이 없는 것처럼 넘나들며 누구하고나 동무가 되었습니다. 누구하고나 밥을 먹었고, 밥을 먹으면서 마음을 나누고, 병을 고쳐주면서 영혼의 교류를 나누었습니다. 철조망 너머로 동무가 되자고 악수의 손길을 내밀었고, 먼저 다가와서 벗이 되어주었습니다. 분리의 나라, 두려움의 나라는 사실은 우리 마음이 만들어낸 도깨비 세상일 뿐, 친구의 따뜻한 눈길을 서로 주고받고, 도와주는 손길을 내미는 순간 맥없이 힘을 쓰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예수가 전한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는 이 점을 아주 잘 말해줍니다. 어떤 사람이 길을 가다가 강도를 만나 곤경에 빠지고, 지나가던 권세 있는 사람들은 그를 모른 척합니다. 곤경에 빠진 사람을 보고도 제사장과 레위인은 그냥 지나갔습니다. 그런데 사마리아인은 그를 “보고” 그에게 연민을 품고 불쌍히 여겼습니다. 사마리아인은 그 사람의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발라주고, 붕대를 감아주고, 여관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그는 여관주인에게 그를 잘 돌봐주라고 부탁하고, 돌아올 때 더 들어간 비용을 지불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여기서 연민을 나타내는 그리스어 단어, σπλαγχνιζειν은 원래 창자를 뜻하는 σπλαγξ와 관련이 있습니다. 고대인들은 깊은 사랑이나 슬픔 같은 감정이 일어나는 자리로 신체 깊은 곳, 내장을 생각했습니다. 아마도 우리말에서 ‘애(창자)를 끊는 것 같은 슬픔’, ‘애간장이 녹는다’는 말과 일맥상통할 것입니다. 사마리아인은 “그의 창자 깊은 곳에서부터 마음이 움직여졌습니다.”

아마도 예수의 이 비유를 들은 청중들은 사마리아인의 이 행동에 매우 놀랐을 것입니다. 사마리아인이 그런 행동을 하리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 비유는 기존에 유대인들이 사마리아인에 대해 가지고 있던 통념을 여지없이 무너뜨렸을 것입니다. 이 사마리아인은 단순히 어려움에 처한 사람에게 선행을 베푼 것만이 아니라,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사이의 갈등의 한 당사자로서 그 증오와 분리의 벽을 깨뜨리고 넘어와서 어려움에 처한 구체적인 한 인간을 향해 손을 내민 것입니다.

모든 분노에는 정당한 이유가 있습니다. 따지고 보면 유대인이든 사마리아인이든 서로에 대한 증오에는 뿌리 깊은 정당한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유대인 편에서 보면 사마리아인들은 예루살렘에서 드리는 유대인들의 예배를 거부했을 뿐만 아니라 바빌론 포로 이후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을 복구하는 것을 방해했습니다. 기원전 2세기에 유대인들이 시리아와 전쟁을 벌일 때도 사마리아인들은 시리아를 도왔습니다. 그러나 사마리아인 편에서 보면 유대인은 기원전 128년 그리심 산 위에 세운 사마리아인 성전을 불태운 원수였습니다. 유대인에게 사마리아인은 인간이 아니었고, 사마리아인에게도 유대인은 인간이 아니었습니다. 수 백 년 이어온 불행한 증오와 폭력의 역사 속에서 서로 상대방을 인간으로 대하지 않아도 될 정당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사마리아인은 미워할 정당한 이유에 매달리지 않고, 도움이 필요함을 자기 앞에서 온몸으로 보여주고 있는 한 구체적인 인간을 향해 손을 내밀었습니다. 사마리아인과 유대인이 아니라, 도움을 필요로 하는 한 인간과 도움을 줄 수 있는 한 인간으로서 가장 자연스럽게 만난 것입니다. 이것은 도움을 받는 사람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어쩌면 그는 사마리아인에게서 도움을 받느니 차라리 죽겠다고 뻗댈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온전히 도움 앞에 자신을 맡깁니다.

결국 이 이야기는 우정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어떻게 해서 원수가 친구가 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예수의 이 비유는 ‘우리’와 ‘그들’ 사이에 더 이상 민족적, 국가적, 계급적 분리의 벽이 존재하지 않고, 원수인 ‘그들’ 가운데 하나가 ‘우리’를 돕기까지 하는 새로운 세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무리 아름다운 선(善)에서 출발했다 하더라도 국가나 제도, 이념은 우리를 친구가 되게 하지 못합니다. 언제나 그것은 분리하는 경계선을 하나 더 만들 뿐입니다. 그리고 언제나 그 경계선을 넘는 것은 곤경에 처한 한 유대인으로 인해 마음이 움직여진 최초의 한 사마리아인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런 사람들이야말로 모두를 위해 새로운 세계, 동무들의 세계를 시작하는 것입니다.
끝으로 누구보다도 동무들의 세계를 그리워했던 분이고, 얼마 전에 우리들 곁을 떠난 권정생 선생의 시를 한 편 읽어드리겠습니다.

애국자가 없는 세상
                   권정생
이 세상 그 어느 나라에도
애국 애족자가 없다면
세상은 평화로울 것이다
젊은이들은 나라를 위해
동족을 위해
총을 메고 전쟁터로 가지 않을테고
대포도 안 만들테고
탱크도 안 만들테고
핵무기도 안 만들테고
국방의 의무란 것도
군대훈련소 같은 데도 없을테고
그래서
어머니들은 자식을 전쟁으로
잃지 않아도 될테고
젊은이들은
꽃을 사랑하고
연인을 사랑하고
자연을 사랑하고
무지개를 사랑하고
이 세상 모든 젊은이들이
결코 애국자가 안 되면
더 많은 것을 아끼고
사랑하며 살 것이고
세상은 아름답고
따사로워질 것이다.

이 시에서 노래하고 있는 “애국자 없는 세상”이야말로 예수가 꿈꿨던 하느님나라, ‘동무들의 나라’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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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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