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요한일서 › 사랑과 노동

배현주 | 2008.08.25 14:44:25 | 메뉴 건너뛰기 쓰기
성경본문
요일4:7-8
설교자
배현주 교수
참고
새길교회2005. 4.24 주일설교/ 배현주 교수(부산장신대 신학과 교수)
본문: 요한일서 4:7~8, 요한복음 5:17~18

오늘 말씀의 제목을 “사랑과 노동”으로 정했습니다. 우리나라에 잘 알려진 독일 신학자, 도로테 죌레가 쓴 같은 제목의 책도 있습니다만, 얼핏 들으면 상관이 없는 반의어 두개를 연결해 놓은 것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현대 사회에서 사랑은 사적인 감정놀음으로 취급되기 때문에, 사회적인 노동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으로 여겨지고는 합니다. 또한 노동은 인간적 정서나 의미와 상관없이, 기계적으로 돈버는 행위로 취급되기 때문에, 사랑 같은 인간적 가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여기기도 합니다. 노동은 일 중독자의 영역으로, 사랑은 쾌락을 소비하는 영역으로 대조되는 경향이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생산적인 행위와 헌신으로 표현되지 않는 사랑, 깊은 인간적인 의미에 뿌리내리지 않는 노동, 이 모두 공허하고 불완전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사랑과 노동”이라는 두 영역은 우리들의 건강한 삶을 위해서 통합되어야 하는 필수불가결한 요소들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 두 영역은 현대에 있어서 가장 타락한 영역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신앙인들이 걸어가야 하는 사랑과 노동의 길에 대해서 점검해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1. 무엇보다도 먼저 성경은 하나님의 창조적인 노동에 대한 증언으로 시작합니다. 하나님이 천지창조의 첫날 빛을 창조하실 때에, 땅은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이 혼돈과 공허와 흑암을 가지고 질적으로 다른 빛을 만들어 내셨습니다. 하나님의 노동은 창조적인 생명력으로 가득한 과정이었습니다.

6일에 걸친 천지창조는 남자와 여자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하는 것으로 절정에 달합니다. 인간은 이 땅을 지키고 보전하는 청지기의 노동을 감당하도록 명령받습니다. 에덴동산을 배경으로 해서 하나님의 천지 창조를 설명하고 있는 창세기 2장에서도 아담의 첫 임무는 에덴동산을 경작하고 지키는 노동이었습니다(창 2:15). 선악과를 제외하고는 자신이 생산한 소출을 마음껏 누릴 수 있었습니다. 인간은 자연의 품 안에서 노동하는 존재로 창조된 것입니다.  

동시에 인간은 사랑하는 존재로 창조되었습니다. 여자를 창조하였을 때 아담이 외친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는 외침은, 친밀한 관계를 나눌 수 있는 파트너를 만난 인간의 황홀경의 외침입니다(창 2:23).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았다는 표현은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내쫓는다”는 말씀을 연상시킵니다(요일 4:18).  

자연의 품 안에서 노동하고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는 삶에 대한 창조세계의 비전에는 자연에 대한 경외와 동료 인간에 대한 존중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노동과 사랑의 목적은 우주의 리듬과 질서를 존중하며, 공동체가 더욱 풍성한 생명과 희열을 누리는 데에 있는 것입니다.  

2. 현대 사회의 큰 위기는 이러한 성서적 비전에 들어있는 모든 요소들이 다 위협을 받게 되었다는 점에 있습니다. 서양의 이원론적 철학과 기계론적 세계관이 기초가 되어서 오늘날 과학기술 문명의 발전은 하늘을 찌를 듯하지만, 자연과 인간 사회의 신음 소리는 기하급수적으로 커져가고 있습니다. 자연과 생태계의 파괴는 위험 수위를 넘어섰고, 물질만능주의와 무한정한 이윤추구의 경제논리는 노동의 참 의미를 왜곡시켜 버렸으며, 극단적 개인주의와 경쟁주의는 인간관계의 해체, 인류공동체의 해체를 초래하게 된 것입니다. 현대 사회의 소비주의와 말초적 쾌락주의는 인간의 사랑을 천박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거룩함이 떠난 세속화된 사회 속에서, 사랑을 갈구하는 욕망은 범람하는데 진정 만족스러운 사랑의 길을 걷는 이들은 잘 보이지 않습니다. 소유욕과 집착의 세계를 사랑과 혼동하며, 채워지지 않는 갈증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도시의 노동자들은 자신의 노동으로부터 소외되고 점차 커져가는 빈부의 격차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신자유주의 경제세계화(neoliberal economic globalization)는, 경쟁력과 자본력이 없는 개인, 집단, 그리고 국가를 조직적으로 도태시키려고 합니다. 농민들의 현실은 더욱 어둡습니다. “녹색혁명”(Green Revolution)이라는 이름 하에 농촌에 도입되었던 생산 증진 모델은 “흑색혁명”(Black Revolution)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생산력을 증대하기 위해서 화학비료와 화학농약과 농기계를 도입하여 농민들의 노동력을 덜어주고 소출을 증대시키기는 하였지만, 땅과 작물을 오염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 것입니다. 농민들 스스로도 농약에 중독되는 죽음의 경험에 노출되었습니다. 인류 문명의 꽃이 도시라면, 문명의 뿌리는 농촌입니다. 농업 생산지에서 “죽임의 농법”이 존속하다면, 도시의 소비자들 역시 죽임의 그림자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것입니다.  도시와 농촌을 망라해서, 현대 사회는 풍성한 생명을 창조하는 데에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더욱이 21세기의 세계는 전쟁과 테러의 위협 앞에 놓여 있습니다. 역사의 유일한 교훈은 사람들이 역사에서 배우는 것이 없다는 것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20세기에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치룬 인류는 21세기의 시작을 또 강대국의 군사주의로 인한 전쟁과 테러로 장식하고 말았습니다. 우리의 현실은 “총체적 생명파괴의 상황”으로 진단할 수 있습니다.

3. 이러한 암울한 시대의 징조를 읽으면서, 아시아와 세계의 에큐메니칼 교회들은 인류의 모든 구성원들이 풍성한 생명을 누리도록 평화의 공동체를 세우는 것이 기독교의 과제라고 다짐하고 있습니다. 저는 작년 세계개혁교회 연맹(WARC) 총회와 올해 아시아교회협의회(CCA) 총회에 참석하면서, 지구촌의 다른 기독교인들과 함께 이러한 결단과 다짐을 함께 나눌 수 있었습니다. 믿음이야말로 “바라는 것들의 확신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입니다(히 11:1). 우리 신앙인들은 시대의 어두움에도 불구하고 절망에 빠지지도, 도피주의에 빠지지도 않습니다.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소망을 잃지 않고 이 시대의 도전에 응답하면서, 매일 매일 일하고 사랑하며 살려고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눈에 보이는 소망은 소망이 아닙니다. 보이는 것을 누가 바라겠습니까?”라고 말하고 있습니다(롬 8:24). 소망에는 분노와 용기라는 두 딸이 있다고 합니다. 분노는 헛된 것이 헛된 것으로 남아 있게 하려는 것이고, 용기는 있어야 할 것이 있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는 “총체적 생명파괴의 상황” 앞에서 깊은 분노를 느낍니다. 또한 용기를 내서서 내가 서 있는 현장에서부터 평화와 생명이 충만한 공동체를 일구어 가도록 노력하고자 합니다. 이 분노와 용기가 신앙인들을 21세기에도 계속 일하게 하고 또한 계속 사랑하게 할 것입니다.        

4. 요한복음과 요한 서신들은 흔히 요한문서라고 불리웁니다. 오늘 본문말씀인 요한문서의 말씀 속에서 우리는 예수의 노동과 사랑이 지니고 있는 두 가지 특징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예수의 노동은 세상의 고통을 치유하고 억압받는 자들을 해방하기 위한 사랑과 정의의 노동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이 들어있는 이야기는 예수가 안식일에 베데스다 못가에 누워있는 38년된 병자를 치유하였다는 사건입니다. 베데스다 못은 천사가 내려와 가끔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그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된다는 연못입니다. 많은 병자,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들이 누워서 물의 움직임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 병자는 자기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는 고독한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는 이 버림받은 인간을 치유합니다. 질병과 소외의 고통에서 해방시킵니다. 나사렛 회당 설교에서 분명히 선언하듯이 예수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고,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며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려는 삶에 자신을 헌신하였던 것입니다(눅 4:17-18).  

그러나 이러한 활동은 곧 생명을 억압하는 기존 체제와의 충돌을 초래하였습니다. 사람의 생명을 더욱 풍요롭게 하기보다 안식일이라는 제도에 노예가 되어있는 기존의 종교 체제와 예수는 여러 번 충돌하였습니다. 본문 말씀에서는 예수께서 안식일을 범하셨다는 헬라어 동사를, 동작의 계속과 반복을 나타내는 미완료형 동사로 나타내고 있습니다(요 5:18). 안식일에 배고픈 제자들이 밀이삭을 자른 일에 대해서 비난을 받자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는 선언을 한 적도 있지 않습니까(막 2:27). 예수의 노동은 억압적인 제도에 저항하고, 억압받는 인간을 해방시키는 혁명적 실천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안식일에 그러한 일을 하신다고 해서," 적대자들이 예수를 박해하기 시작하였다고 본문은 말하고 있습니다(요 5:16).

동시에 예수의 노동은 단순한 사회 개선 프로그램이 아니라 깊은 영성에 기초한 것이었습니다. 영성이란 초월적 세계와의 관계성을 뜻합니다. 하나님이 지금까지 일하시니까 나도 일한다고 하는 고백은, 또한 하나님이 사랑이시기 때문에 우리도 사랑한다고 하는 말씀은, 나의 노동과 사랑의 궁극적 근거가 나의 자아가 아니라 하나님이라고 불리우는 거룩한 궁극적 힘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말씀입니다. 더욱이 요한문서는 사랑의 힘으로 일하는 사람들을 예수의 친구로 부르고 있습니다. 서로 사랑하면 예수의 친구라는 것입니다(요 15:12-17). 교회 공동체는 예수의 친구들의 모임이 됩니다(요삼 15).  

사랑의 능력과 예수의 친구 되는 것 사이에는 함수관계가 있습니다. 사랑은 사랑하는 자와 사랑받는 자를 비슷하게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십자가의 성 요한). 히브리서에 의하면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 태워 없애는 불이십니다(히 12:29). 하나님의 사랑은 차가운 우리를 변화시켜서 뜨거운 하나님의 사랑으로 일하게 합니다. 마른 나무에 불이 붙으면, 처음에는 묻어 있는 물기 때문에 연기가 나서 고약한 냄새가 나지만, 결국 불이 옮아 타게 되면 딱딱한 나무도 활활 타오르는 불덩어리 자체가 되버리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은 놀랍게도 제자들의 종됨을 강조하는 공관복음과 달리, 인성 속에 담긴 신성을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신이라고 하셨다” (요 10:36)는 전통을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초월적 신성을 강조하는 유대기독교 경전에서 쉽게 발견되지 않는 표현입니다. 신비주의 전통에서 요한문서의 예수를 좋아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적대자들은 예수께서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한 위치에 놓았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더욱 더 예수를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5. 요한문서에서 발견되는 예수의 이 혁명적 실천과 신비주의의 결합은 21세기 대안적 영성을 모색하는 신앙인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하겠습니다. 오늘날 평화의 공동체를 수립하는 것이 전 지구촌의 절대절명의 과제입니다. 그러나 평화는 정의 없이는 이룩될 수 없습니다. 만델라의 말을 빌리자면, 정의는 또한 용서가 없이는 이룩될 수 없습니다. 용서는 영성의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평화와 정의는 정치적 과정일 뿐만 아니라 영성이라는 실체 위에서만 진정으로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대안적 세계의 비전은 대안적 영성의 문제입니다.        

이성이 극대화되는 시기가 도래하면 종교가 없어지리라는 일부 철학자들의 예측과 달리 21세기에 종교는 더욱 강화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개인주의적이고 세속주의화된 근대문명이 심어 놓은 영적인 사막을 떠나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종교와 소속감에 대한 열망을 이용하여 근본주의적인 종교가 힘을 얻고 있다는 데에 있습니다. 근본주의적인 종교들은 종교의 이름 아래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폭력의 사용을 합법화합니다. 일찍이 간디는 “눈에는 눈으로 보복하는 방법으로는 온 세상에 장님들만이 남게 될 것”이라고 경고한 적이 있습니다. 근본주의적인 종교의 활성화, 이것이 지금 세계적인 문제입니다. 우리 한국교회는 어떻습니까. 기존의 한국 교회는 한편으로는 성장제일주의, 물량주의, 가부장적인 권위주의를, 또 한편으로는 세상도피적이고 종파적인 신비주의를 벗어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 가슴 아픈 현실입니다.  

세상 속에서, 세상을 변화시키는 사랑의 불로 점화된 예수의 신비주의는 혁명적인 신비주의입니다. 선으로 악을 갚을 수 있는 인간, 오른편 뺨을 치는 자에게 왼편까지 내어놓을 수 있는 인간은, 내면의 자유와 힘으로 충만한 혁명적 인간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을 향한 혁명적 비전의 진정한 주체인 것입니다.

이러한 혁명적인 신비주의의 영성은 우리의 노동과 사랑의 모든 영역에 궁극적인 방향을 제시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억압에 대하여 투쟁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삶의 아름다움을 경축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내가 무너지면 하나님도 무너진다는 책임성을 지니고, 우리가 변화시킬 수 있는 것들을 변화시키는 용기의 삶을 살아갈 것입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내가 없어져도 지구와 세계는 계속 존속한다는 사실을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지금 당장 내 뜻대로 변화시킬 수 없는 것들을 빈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겸손을 지니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용기와 겸손의 차이를 알 수 있는 지혜도 추구하게 될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정의를 물같이, 공법을 하수같이 흐르게 하려는 예언자적 의지를 지니고 살아갈 것입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해를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사람에게나 불의한 사람에게 똑같이 비를 내려주시는 하나님에 대한 지혜전통의 깨우침을 묵상하면서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의 혁명적 신비주의는 우리 시대의 다중적인 문제를 절망과 도피의 양 극단에 빠지지 않으면서 직시할 수 있게 해주는 영성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1조에 해당하는 군사비용을 쓰면서 그 3분의 일을 지구의 기아 및 질병 해결로 돌리지 못하는 우리 인류에 대해서 생각하면 어떤 기분이 드십니까. 24,000명의 사람들이 매일 굶주림으로 죽어가는 현실입니다. 폭력은 날로 그 강도를 더해서 처참한 살인의 장면을 보면서도 이제 사람들은 무덤덤합니다. 작년 성탄절에 발생했던 동남아 쓰나미 참사와 그 이후의 지진 사건 등은 아시아 민중들의 삶을 끔찍할 정도로 황폐하게 만들었습니다. 우리는 35년 일본의 제국주의 경험의 파괴적인 결과를 지금도 체험하고 있는데, 웬만한 동남아 국가들의 식민경험이 350년이 넘습니다.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여성과 아이들의 인신매매, 성매매 관광, 가혹한 노동조건 속에서 일해야 하는 이주 노동자들, 가정 폭력, 인권의 유린과 부패, 인종 및 종교 간의 갈등과 분쟁, HIV/AIDS의 고통 등,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고난의 이야기들을 듣다 보면, 도대체 이 많은 세계의 문제들을 무슨 힘으로 직시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절망의 무게가 엄습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의 시대에 절망이 하나의 유혹이듯이 도피도 또 다른 유혹입니다. 이번 CCA 모임에서 “변화의 주역들(Changemakers)"이라는 노르웨이의 기독 청년 운동 단체의 대표가 자신들의 활동을 잠깐 소개한 적이 있었습니다. 9/11 사태 이후, 이라크 전쟁 등의 국제 상황 속에서 “평화의 축”을 만들려고 노력하는 그룹입니다. 15살 짜리 소년소녀들도 정부의 정책이 정의와 평화를 촉진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는다고 판단하면 계속 전화를 걸어서 정부의 각성을 촉구한다고 합니다. 몇 몇 국가들을 “악의 축”으로 규정하고 그 나라 국민들을 악마화시키는 “정신적 비인간화”에 저항하는 한 방법으로, 이라크 어머니들이 아기들을 재울 때에 부르는 자장가들을 모아서 “악의 축에서 온 자장가”라는 CD를 제작하였답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도 아기를 키우는 어머니인 국방부장관에게 이 CD를 보냈다는 것입니다. 이 국방부 장관은 럼스펠드의 절친한 친구로서 미국의 강경정책에 동조하는 입장의 여성이라고 합니다. 어쨌거나 이 기독 청년들이 시대의 위기 상황을 설명하면서 다른 청년들에게 접근할 때, “그런 일들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I don't care!)"고 말하는 청년들이 많이 있다는 사실이 충격적이었다고 이 단체의 대표는 고백하였습니다. 모두에게 영향을 미치는 지구촌의 사건들에 대한 공동의 책임으로부터 도피하는 것도 하나의 유혹입니다. 인간의 고난과 억압의 상황에 대한 무관심한 도피주의 배후에는 극단적 이기주의가 놓여 있거나, 아니면 우리의 힘으로는 아무 것도 변화시킬 수 없다는 무기력감이 놓여 있습니다.

혁명적 신비주의의 영성은 이러한 절망과 도피의 유혹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여 줍니다. 우리의 희망의 근거가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께 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정신으로 일하고 사랑하며 살아가는 기독교인들은 결코 낙관론자들이지 않습니다. 세계의 해방과 치유를 위해 일하는 것이 현 체제와의 갈등을 고난을 초래하는 것이 알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에게는 그리스도를 믿는 특권만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을 받는 특권도 주어졌음을 알기 때문입니다(빌 1:29). 그러나 비관적이지도 않습니다. 나의 프로그램을 고집스럽게 완수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선한 일을 시작하신 분께서 그 일을 완성하시리라고 확신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빌 1:6). 내 속에서 대안의 세계를 꿈꾸고 계신 분은 바로 하나님이시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예수에게서 발견되는 혁명적 신비주의의 영성은, 헌신의 결과나 성공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다. 본문말씀에 보면 이 병자는 예수 때문에 38년 된 병에서 나음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안식일에 네가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올바르지 못하다는 유대인들의 비난에 직면하자, 자기를 고친 자가 예수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병을 고쳐준 은인에 대해서 감사하거나 보호하는 태도가 아닙니다. 실망스러운 반응입니다. 그러나 예수는 하나님이 일하시므로 자기도 계속 일한다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주고 나서 보상이 없을 때, 헌신하고 나서 결과가 신통치 않을 때 상처를 입거나 실망하고는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에게 근거한 노동은 결과와 보상에 상관없이 하나님으로 인해서 계속 충만해지면서 진전하는 활동인 것입니다. 바울은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고전 3:6). 생명을 촉진시키는 전 과정을 하나님께 위탁하면서, 내가 할 역할을 최선을 다해 충실히 감당하는 자의 노동에는 참 자유가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죽든지 살든지 내가 주의 것이라고 평화 속에서, 스스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되었습니다(빌 1:20; 고전 9:19).

6. 21세기는 인류가 새로운 길을 찾아야만 생존할 수 있는 시대입니다. 새길교회는 이 새로운 길을 이미 발견하고, 더불어 함께 걸어가시는 분들의 공동체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 새로운 길을 걸어가는 여러분들에게 예수의 혁명적 신비주의의 영성이 늘 충만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볼 수 없는 것을 믿음으로 보는 것이야 말로 하나님 나라의 시작입니다. 예수는 하나님 나라를 겨자씨와 누룩에 비유하였습니다. 겨자씨는 어떤 씨보다 더 작은 것이지만, 자라면 어떤 풀보다 더 커져서 나무가 됩니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 나라는 누룩과 같아서 가루 서 말 속에 섞이면 온통 반죽을 부풀리게 됩니다. 먹음직스러운 생명의 빵이 만들어 지는 것입니다 (마 13:31-33)

새길교회의 아름다운 사랑과 노동의 삶을 통해서 많은 새들이 깃들일 수 있는 넉넉한 나무가 계속해서 자라나기를 기원합니다. 많은 이들의 허기를 달래줄 수 있는 생명의 식탁을 늘 차리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시대에 하나님과 인류가 진정으로 필요로 하는 “평화의 축”이 새길교회에서부터 이루어질 수 있기를 아울러 기원합니다.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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