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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항해하면서 발견한 다시 읽고 싶은 글을 스크랩했습니다. 인터넷 공간이 워낙 넓다보니 전에 봐 두었던 글을 다시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래서 스크랩할만한 글을 갈무리합니다. (출처 표시를 하지 않으면 글이 게시가 안됩니다.) |
출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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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
관상의 시작은 믿음입니다. 믿음에 대한 개념에 근본적인 잘못이 있으면 당신은 절대로 관상가가 되지 못할 것입니다. 믿음이 무엇입니까?
1). 믿음은 지성의 동의이다.
믿음은 무엇보다 지성적 동의입니다. 믿음은 어떤 감정도 느낌도 아닙니다. 믿음은 또한 의견도 신념도 아닙니다. 믿음은 무엇보다도 지성이 하나님을 '사랑함'으로써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나님에 대한 말을 받아들임으로써 만족하게 하는 지성적 동의입니다.
믿음은 어떤 감정도 느낌도 아닙니다. 믿음은 알 수 없는 어떤 초자연적 것에 대한 어렴풋이 의식하는 욕구를 맹목적으로 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단순히 영혼의 기본적인 필요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존재한다고 느끼는 것도 아닙니다. 단순히 자기가 그렇게 느낀다고 해서 자기는 구원을 받았거나 의로워졌다고 하는 신념이 아닙니다. 어떤 외적 동기와는 관계없는, 전적으로 내적이고 주관적인 어떤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영혼의 힘도 아닙니다. 그것은 영혼의 깊은 곳으로부터 솟아올라 모든 것이 다 잘되고 있다는, 형연할 수 없는 느낌을 갖게 하는 어떤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순수한 자기의 것이어서 그 내용을 누구와도 나눌 수 없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개인의 어떤 전설 같은 것이어서 다른 사람과는 나눌 수 없고 또 자기나 하나님 또는 다른 사람에게는 관계가 없는 객관적 타당성도 아닙니다.
믿음은 또한 의견도 신념도 아닙니다. 이성적 분석에 기초한 신념도 아닙니다. 과학적 증명의 결과도 아닙니다. 모르는 것을 믿을 수 있을 뿐입니다. 아는 즉시 더 이상 믿지 않습니다. 적어도 아는 것과 같은 방법으로 믿지는 않습니다.
믿음은 무엇보다도 지성적 동의입니다. 믿음은 정신을 완성시키지 파괴하지는 않습니다. 믿음은 이성이 혼자서는 알아들을 수 없는 진리를 이성이 알아듣게 합니다. 믿음은 우리에게 스스로 계시는 분으로서의 하나님에 대한 확신을 갖게 합니다. 믿음은 살아 계시는 하나님과 생생한 접촉을 갖는 방법입니다. 사물의 증명으로부터 나오는 삼단 논법으로 설명되는 추상적 제일의 원칙을 보는 관점이 아닙니다.
그러나, 믿음에의 동의는 볼 수 있는 사물의 내면적 자명성에 근거를 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의 행위는 우리의 자연적 체험으로는 연결되지 않는 두 입장을 하나로 묶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연결되지 않았다고 이성이 따질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믿음의 동의를 요구하는 주장들은 이성에 대해서 단지 중립적일 뿐입니다. 우리가 그들에 동의하는 것은 그들이 본질적 자명성 이외의 어떤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알려지는 그대로 그들의 진리를 받아들이고, 또 우리가 동의하는 동기는 그들에게 읽혀 주시는 하나님의 권위입니다.
믿음이 지성에게 완전한 만족을 주기를 기대하지 못합니다. 믿음은 지성이 인식하는 데에 적절한 조명을 주지 않고 어둠에 있게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은 지성을 좌절시키거나 거부하거나 파괴하지 않습니다. 지성이 아는 것은 지성이 사랑의 지도하에 합리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신념으로 믿음은 지성을 편안하게 해줍니다. 믿음의 행위는 지성이 하나님을 '사랑함'으로써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나님에 대한 말을 받아들임으로써 만족하게 하는 행위입니다. 이런 동의는 상당히 합리적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의 이성이 하나님에 대해서, 하나님의 본질에 대해서 우리에게 말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과, 또 하나님 자신은 무한하신 실재이시기 때문에 무한한 진리나 지혜, 능력이나 섭리, 그리고 당신이 원하시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당신을 절대적으로 확실하게 드러내실 수 있으시며, 외적 표시로써 당신 자신의 드러냄을 증명하실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데에 근거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근본적으로 지성의 동의입니다. 믿음이 단지 "드러나지 않는 것의 논증" 뿐이라면 그것은 완성된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동의 이상의 어떤 것이어야 합니다. 믿음은 이해, 접촉, 의지의 교통 "바랄만한 실체" 입니다. 믿음으로써 사람은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계획에 동의하고 또 지성과 이성만으로는 미칠 수 없는 진리에 도달할 뿐 아니라 하나님 자신에게도 동의합니다. 그는 하나님을 '받아들입니다.' 그는 하나님에 대한 말에만 "예"하는 것이 아니고, 보이지 않는 무한하신 하나님 자신에게 "예" 하고 말합니다. 그 말의 내용만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그 말을 하신 분도 전적으로 받아들입니다.
우리는 너무나 자주 믿음이 하나님에 '대한' 설명을 강조함으로써, 그리고 하나님의 빛과 진리와의 일치라는 사실을 잊어버림으로써, 믿음에 대한 우리의 개념을 왜곡합니다. 하나님의 권위에 대해서 믿음이 받아들이는 설명, 즉 주장은 하나님의 진리에 다다르기 위해 거쳐야 하는 매개에 지나지 않습니다. 믿음의 종착역은 설명이나 논법이 아니고 "하나님 이십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을 믿지 않고 주장이나 논법으로 믿는다면 믿음이 관상에로 이끌어 주지 않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 경우에는 반대로 불안하고 첨예한 다툼, 논쟁, 혼란 그리고 급기야는 증오와 분열로 이끕니다.
신학이 계시의 지성적 내용과 특히 계시된 하나님의 진리의 언어적 공식을 연구할 수 있고 또 연구해야 한다는 것은 물론 옮은 말입니다. 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이것이 믿음의 최종 목적이 아닙니다. 믿음은 말과 논법을 뛰어넘어 우리를 하나님 자신의 빛에로 인도합니다. 논법의 중요성은 논법이 목적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당신의 진리를 우리에게 전해 주시는 도구라는 것입니다. 그 도구들은 밝은 유리창 같아서 우리에게 오는 빛을 어둡게 하거나 차단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진리를 왜곡해서도 안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올바른 논법을 믿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말의 정확성에 너무 집착해서 말이 전하는 표현할 수 없는 실재에 대한 말을 넘어서지 못하면 안 됩니다.
우리는 목숨을 걸고 우리의 믿음을 수호하기 위해 준비를 해야 하는 것은 확실하지만, 무슨 일이 생기든 어떤 논증에 철저하게 매달리는 것이 믿음은 아닙니다. 무엇보다도 믿음은 내적인 눈, 마음의 눈을 뜨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빛이 가득 차도록 마음의 문을 여는 것입니다.
2). 믿음은 천국열쇠이다.
믿음은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는 오직 하나뿐인 열쇠다.인간 존재의 궁극적 의미와 우리의 모든 행복이 달려 있는 문제에 대한 대답은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찾을 수 없습니다.
3). 믿음은 변화의 첫 단계입니다.
살아 계시는 하나님, 우리의 눈이 볼 수 있거나 우리의 정신이 이해할 수 있는 그 어떤 것도 넘어 저 멀리 무한한 곳에 계십니다. 하나님에 대한 당신의 설명이 아무리 완벽하다 하더라도 당신의 그 개념은 하나님의 완전성의 어슴푸레한 비유에 지나지 않으며, 그 개념을 통해 당신이 알아들은 하나님은 글자 그대로의 그분이 아니시라는 것을 거기에 덧붙여야 합니다.
무한한 빛이신 하나님은 당신의 자명성1)이 너무나도 거대해서 우리의 정신은 그분을 암흑으로 밖에는 보지 못합니다. Lux in tenebris lucet et tenebrae eam non cornprehenderunt (빛은 어둠에서 비춥니다. 그리고 어둠은 그 빛을 알아듣지 못합니다).
볼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일 수도 없고 하나님을 우리에게 보여 줄 수도 없다면 하나님을 찾기 위해서 우리는 볼 수 있는 모든 것을 넘어 암혹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들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하나님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침묵에로 들어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상상할 수 있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해서 우리에게 말해 주는 어떤 상상도 결국에는 우리를 오해하게 합니다. 때문에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넘어서 상상도 없고 어떤 참조된 것과도 비슷한 데가 없는 불명료 속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을 사실 그대로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당신만이 아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이해하려 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어떤 형태로든 하나님으로 변화함으로써만 가능합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하나님이 당신을 아시는 것처럼 하나님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을 아시는 것은 당신의 어떤 표상(表象)을 통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 자신의 무한한 존재는 당신 자신에 대한 당신의 지혜이며 우리는 그분과 일치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당신을 아시듯 우리가 하나님을 그렇게 알지는 못할 것입니다.
이 변화는 상상과 표상이 없이 어둠 속에 살아 계시는 하나님과 사랑으로 일치하는 인식이기 때문에 믿음은 이런 변화의 첫째 단계입니다.
믿음은 단순히 감각을 통해서만 지성에 이르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직접 부어 주시는 빛으로 지성에 도달합니다. 이 빛은 우리의 눈이나 상상이나 이성을 통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만들어진 모습, 가시화(可視化)하거나 묘사할 수 있는 것 같은 과정을 거치지 않고 확신하게 됩니다. 우리가 동의하는 신조의 조목을 말해 주는 언어가 상상할 수 있는 것들을 제시해 주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상상하는 한에는 우리는 그들을 오해하고 길을 잃게 됩니다. 결국 우리는 명제의 두 마디의 연결을 상상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에게는 세 위격과 하나의 본성이 있습니다." 이것을 시도한다면 그것은 큰 실수일 것입니다.
만일 믿는다면2), 설명이 필요 없을 만큼 간단하고, 체험이라고 하기조차 거추장스러울 만큼 순수한 내적 빛을 선물로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빛은 순수한 빛이며 사람의 지성과 지식을 훨씬 뛰어넘어 완성시켜 줍니다.
믿음은 교권이 제시하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믿음으로 복종하는 이 요소가 너무 강조되어 그것이 믿음의 본질을 구성하는 것 같은 인상을 주거나, 마치 교권에 대해서 사랑도 없고 알지도 못하면서 철저하게 의지를 단순히 굽히는 것이 '믿는 사람'이 되기에 충분한 것처럼 보여져서는 안 됩니다. 의지의 이런 요소를 지나치게 강조하면 지성적 믿음과 의지의 단순한 순종과의 구분이 애매해집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이런 것은 대단히 바람직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믿음의 '빛'이 없으면 '하나님으로부터' 제시된 진리를 받아들이게 하는 은총이 정신을 비추어 주는 그 내적 빛이 없고, 그렇게 되면 그 경지에,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확인해 주시는 그 믿음에 이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면 정신은 필연적으로 평화와 마땅히 받아야 할 초자연적인 도움을 받지 못하게 됩니다. 그런 경우에 거기에는 진정한 믿음이 없습니다. 빛의 절대적 요소가 없습니다. 깊은 믿음으로 인한 마음의 열린 눈보다는 강제로 억압된 의심이 있습니다. 의심에 대한 강압적 억제만 있는데 믿음의 진정한 내적 은총을 받았다고 우리는 생각할 수 있습니까? 물론 이것은 대단히 민감한 질문입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진정으로 동의하는 깊은 믿음은 있어도 상상하고 이해하는 데에는 계속 어려움이 있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그 불분명이 바로 완전한 믿음의 논증입니다. 믿음은 우리의 나약함을 너무나 멀리 뛰어넘기 때문에 우리의 정신에게는 암혹입니다. 믿음이 완전하면 할수록 점점 더 어두워집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워지면 질수록 우려의 믿음은 만든 관념과 개념으로 더 희미해집니다. 우리의 확신은 이런 불확실과 함께 증가합니다. 그렇다고 고통과 구체적인 의심이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우려가 타고난 능력에는 의존할 것이 없는 빈 곳에 산다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지상에서 하나님을 가장 충만하게 소유하는 것은 가장 깊은 암흑에서입니다. 우리의 정신이 하나님의 빛과 비교하면 암혹인, 창조된 약한 빛으로부터 가장 확실하게 해방되는 것이 바로 그 암흑에서이기 때문입니다. 그때에 이성에게는 순수한 암흑같이 보이는 하나님의 무한한 빛으로 우리는 충만히 채워지는 것입니다.
믿음이 이와 같이 가장 위대한 완성을 이룰 때에 무한하신 하나님 자신은 어둠 속에 있는 영혼의 빛이 되시고 당신의 진리와 더불어 그 영혼을 완전히 소유하십니다. 형언할 수 없는 이 순간에 깊은 밤은 낮이 되고 믿음은 알아들음이 됩니다.
4). 믿음은 일치의 시작입니다.
이런 모든 것으로 보아서 믿음은 영성 생활의 한 순간이나 다른 어떤 것에로 나아가는 한 단계가 아니라는 것이 확실합니다. 믿음은 하나님을 받아들이는 영성 생활의 전반적인 분위기입니다. 믿음은 일치의 시작입니다. 믿음이 깊어질수록 일치도 믿음과 함께 깊어집니다. 그렇게 되면 믿음은 점점 더 강렬해지고 우리가 생각하고 행하는 모든 것에 영향을 미칠 수 있게 뻗어납니다. 이제는 우리의 모든 생각이 신앙적이거나 경건하다고 하는 말이 아니고 믿음은 단순성과 우리의 모든 이해와 체험에 대한 '깊이'를 준다는 말입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깊이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알려지지 않은 것과 의식 밖에 있는 것을 일상생활로 읽어 주는 것입니다. 믿음은 알려진 것과 알려지지 않은 것을 하나로 묶어 그들이 겹쳐지게 합니다. 또는 그들의 겹침을 우리로 하여금 '의식하게' 합니다. 사실 우리의 전 인생은 우리가 의식적으로는 아는 것이 거의 없는 신비입니다.
믿음은 단순히 알려지지 않은 것을 '설명하는' 것만이 아니고 거기에 신학이라는 꼬리표를 붙이고 서류로 정리해서 우리가 걱정할 필요가 없는 안전한 곳에 보관합니다. 이것은 믿음에 대한 개념 전체를 변조하는 것입니다. 그와는 반대로 믿음은 알려지지 않은 것을 우리의 일상생활에 생생하고 극적이며 현실적인 방법으로 융합시킵니다. 알려지지 않은 것은 알려지지 않은 것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것은 아직도 신비입니다. 그것은 하나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기능은 신비를 이성적 투명성으로 축소하는 것이 아니고 알려진 것과 알려지지 않은 것을 살아 있는 전체 안에 하나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 안에서 우리는 점점 더 우리의 외적 자아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음의 기능은 우리를 하나님의 권위와 접촉시켜 주고 또 하나님에 대한 진리를 우리에게 가르쳐 줄 뿐 아니라 우리 자신 안에 있는 알려지지 않은 것까지도 우리에게 밝혀 주십니다. 알려지지 않은, 발견되지 않은 자신은 실제로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의 자비로운 은총의 지도를 직접 받아서만 활동하며 움직이고 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너무 흔히 간과되는 믿음에 대한 절대적으로 중요한 측면입니다. 믿음은 단지 신봉이 아니라 '삶' 입니다. 그것은 삶의 모든 영역을 다 포괄하고 알려지지 않은 우리의 영적 존재뿐 아니라 하나님의 감추어진 본질과 사랑의 가장 신비롭고 접근이 불가한 깊이에까지 뚫고 들어갑니다. 전적인 믿음으로 하나님께 자기를 맡기기 전에는 사람은 자신에게 이방인이고 자신으로부터의 귀양살이일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 존재의 가장 의미 있는 깊은 곳으로부터 격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들은 이성으로는 알아듣기에 너무 단순하고 또 깊기 때문에 희미하고 알려지지 않은 채 남아 있습니다.
의문이 즉시 제기됩니다. 잠재의식을 말하는 것입니까? 여기에서 구별을 확실히 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표면에'있는 의식과 '의식 밑에' 있는 잠재의식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런 생각은 오도(誤導)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무의식은 '모든 면에 있어' 사람의 의식을 '능가합니다.' 의식적 이성 아래에만 암흑이 있는 것이 아니고 그 위와 그의 모든 주변에도 암흑은 있습니다. 우리의 의식이 결코 우리 존재의 정점은 아닙니다. 의식이 정점에서 우리 존재의 모든 면을 통제하지도 않습니다. 의식은 의식 밑에 있는 어떤 요소들을 통제할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의식은 번갈아, 의식 밑에 있든 위에 있든, 의식 '저 너머에' 있는 무의식에 의해서 통제됩니다. 그러나 의식은 밑에 있는 것의 통제를 받아서는 안 되고 위에 있는 것의 통제만 받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무의식의 동물적, 감정적 그리고 본능적 요소와 영성적 요소의 중요한 구분을 우리의 최고의 의식에 있는 '신적(神的)'요소라고 해도 됩니다.
5). 믿음은 무의식의 '모든' 것을 삶과 융화시킨다.
믿음은 실제로 무의식의 '모든' 것을 우리의 삶과 융화시킵니다. 그러나 특이한 방법으로 합니다. 우리의 속 저 아래에 있는 것들이 받아들여집니다(단순히 합리화함으로써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실 때에 거기에 동의합니다. 믿음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동물적 본능과 관계를 갖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랑에 따라 그 본능을 통제할 임무를 받아들일 수 있게 해줍니다. 동시에 믿음은 우리의 이성을 믿음보다 '상위에' 있는 감추어진 영적 힘에 굴복시킵니다. 그렇게 함에 있어 사람 전체는 자기보다 상위에 있는 '알려지지 않은 것'에 종속됩니다.
신비의 이런 최고의 의식 영역에는 사람의 영적 존재의 정점(자기 이성에게는 순수한 신비인)일 뿐 아니라 전해 오는 비유에 따르면 하나님의 임재가 숨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숨겨진 이 정점에 사십니다. 믿음은 사람이 자기의 가장 깊은 영적 깊이와, 그리고 바로 그 깊은 곳에 '임재하시는' 하나님과 만나게 해줍니다.
사람의 완전한 지위는 '영(spiritus or pneuma)'에 있습니다. 사람은 하나님과 '하나의 영'이 되지 않으면 온전한 사람이 아닙니다. 사람이 동시에 '영혼', '정신' 그리고 '영(spiritus)'일 때에 그는 '영(spirit)'이 됩니다. 그러나 이 셋은 숫자적으로 구별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하나입니다. 이 셋이 각기 자기의 특성을 유지하면서 완전히 하나가 될 때에 사람은 거룩한 삼위일체의 모습으로 다시 만들어집니다.
'영성 생활'은 육신이 욕정과 본능과 더불어, 정신이 판단력과 원칙에 대한 순응과 더불어, 그리고 영혼이 하나님의 사랑과 빛을 받아 하나님 안에 하나님과 함께 있고, 하나님으로부터 존재하며, 하나님을 위해 있는 완전한 사람을 만드는 완전히 균형을 이룬 생활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사는 그 한 사람은 모든 것 안에 모든 것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사는 그 한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아무런 장애를 받지 않고 수행합니다.
진정한 영성 생활은 지혜의 삶이며 하나님 사랑의 삶입니다.
6). 믿음은 일치, 능력, 빛, 사랑의 보다 높은 영역을 열어준다.
믿음은 우리에게 일치. 능력. 빛. 하나님 사랑의 보다 높은 영역을 열어 주는 것입니다. 그 영역에는 이성의 원칙이 제공하는 부분적이며 한정된 빛이 없습니다. 그러나 진리는 하나이며 나누어지지 않았으며 그 진리는 '하나님의 지혜'를 있는 그대로 다 가지고 있습니다. 바울이 사랑은 법의 완성이며 사랑이 사람을 법으로부터 해방시켰다고 말씀하셨을 때에 우리는 그리스도의 영으로 '하나님의 권능이며 지혜'인 당신 자신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어 그리스도 자신은 우리의 빛과 사랑과 그리고 지혜가 되셨다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전 영성 생활은 지혜 안에서의 삶이며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입니다. 믿음의 암흑은 지혜의 빛 안에서 열매를 맺습니다.
-----------1) 자명성(自明性) 【명사】더 논증하거나 설명하지 않더라도 직관을 통해서 직접 진리성이 실증되는 지식. 또는 그런 성질. the self-evidence.
자명(自明)【형용사】【여 불규칙】① 누구의 증명이나 설명이 필요 없이 그 자신으로 이미 명백함. 자명한 이치. ②자신의 직관(直觀)에 의하여 명백함. ①② self-evidence
2) 여기서 말하는 믿음이란, “당신의 교회를 통해서 외적으로 믿음의 어떤 항목을 제시하시는 하나님의 권위에 단순히 복종한다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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