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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돈 | 2010.05.23 20:17:27 | 메뉴 건너뛰기 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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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은 축복인가, 저주인가?

강원돈

거추장스러운 것으로 여겨지는 노동

벌써 여러 해 됩니다마는, 독일의 진보적인 신문 프랑크푸르터 룬트샤우에는 "노동이 쓰레기가 되고 말았다"는 제호 아래 노동시장에서 노동력이 형편없이 취급되는 현실과 그 원인이 분석된 기사가 실린 적이 있습니다. 기업 수익의 극대화를 추구하는 것이 시장자본주의의 미덕인 양 여겨지는 시대에 노동 쪽에 돌아가는 기회나 소득은 형편없이 나빠지고 있습 니다. 옛날만 해도 기업의 수익을 올리기 위해서는 투자를 많이 해서 보다 많은 일자리를 만들어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요즈음에는 정반대입니다. 천문학적인 투자가 이루어지고 고도로 현대화된 생산설비가 확충되면, 경제활동을 위한 노동력 투입은 최소화됩니다. 노동 력을 절약하는 합리화 투자가 일반화되고 있는 것입니다. 노동시장에서 일자리를 얻기는 하 늘의 별을 따는 것처럼 어려워지고, 실업 문제는 좀처럼 풀리지 않습니다. 설사 노동시장에 참여해서 일자리를 얻는다고 해도, 그 일자리는 대개 불안정하거나 인간적이고 문화적인 생 활을 뒷받침하는 소득을 보장하지 못합니다. 그러니 노동이 쓰레기처럼 취급된다는 분노의 함성이 거세지는 것입니다.

자본에 종속된 노동의 슬픈 운명

시장자본주의가 정착된 이후 노동은 자본에 종속되는 처지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시장자본주의에서 자본소득자들은 생산수단에 대한 지배권과 임의처분권을 갖고, 노동시장 에서 구입한 노동력에 대한 통제권도 갖습니다. 자본소득자들은 자본의 일반적인 요구, 곧 자본소득의 극대화를 위해 생산수단의 확대, 축소, 이전, 폐쇄, 폐기 등을 임의대로 결정할 수 있고, 구입한 노동력의 배치와 퇴출, 그리고 작업 통제권을 행사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시장자본주의의 조직원리와 운영원리 아래서 노동은 자본의 결정에 전적으로 종속 되어 있습니다. 가령 대표적인 생산수단인 공장의 이전이나 폐쇄가 결정되면, 대부분의 노동 자들은 졸지에 일자리를 잃고 거리에 나앉아야 합니다. 경영조건의 변화로 노동력이 과잉상 태에 있다고 판단되면, 과잉 노동력은 경영진에 의해 잘립니다. 노동력을 기업활동에 투입할 때에는 보다 많은 양의 일을 하도록 노동과정이 조직되고, 그 노동과정은 철저히 감독됩니 다. 그러니 자유로운 노동이나 즐거운 노동을 노래하는 것은 사정을 잘 모르는 철부지들의 얕은 생각이거나 노동에 대한 대가, 곧 임금의 크기가 노동의 부자유나 타율성을 보상한다 는 환각에 빠진 결과라고 하겠습니다.

 

벤처기업은 다르지 않느냐고 반론을 내세우는 사람도 있습니다. 벤처에서는 다른 사업장 과는 달리 숨막히는 위계질서도 없고, 노동 형태도 개인이나 팀의 자율에 맡겨진다고들 말 합니다.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중시되는 벤처일수록 창의성 개발에 걸림돌이 되는 조직 문화 는 재빨리 철거됩니다. 그것은 분명 환영할 만한 현상입니다. 그러나 속내를 들여다보면, 벤 처기업 역시 시장자본주의의 기본원리로부터 자유롭지 않습니다. 종업원들의 공동출자에 따라 종업원주주제를 확립한 극소수의 벤처를 제외하면, 자본과 노동의 갈등과 대립은 거기서도 예외가 아닙니다. 지난해부터 논란이 되어 온 벤처기업에서의 노조 설립 문제는 자본의 이해관계와 노동의 이해관계가 벤처의 틀에서 조화를 이루지 못하기 때문에 불거져 나온 것 입니다.

찰리 채플린의 "모던 타임스"

오래 전에 만들어진 영화이지만, 찰리 채플린이 감독하고 주인공을 맡은 "모던 타임스"는 자본에 종속된 노동의 슬픈 운명을 매우 잘 묘사한 영화입니다. 이른바 "과학적 경영"이 도입된 공장의 컨베이어 벨트에서 하루종일 나사를 조이는 단순반복 노동에 종사하는 주인공은 오늘이 어제 같고, 어제가 오늘 같은 시간감각의 상실에 시달리고, 여성의 옷 등 쪽에 난단추를 보면 그것을 조여야 한다는 일종의 강박에 시달립니다. 채플린의 희극적인 제스처를 보고 관객은 깔깔대고 웃을는지 모르지만, 그렇게 웃다가 노동의 슬픈 운명을 알아차리고는 답답한 마음을 억누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테일러의 이른바 "과학적 경영"에 따른 포드 자동차 공장식 노동은 이제 한물 지나갔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른바 "포스트포드주의"를 말하는 사람들이지요. 노동자의 작업과정을 주기적으로 교체하거나, 노동자 한 사람이 여러 가지 기능적인 작업을 동시에 수행하거나, 작업 팀을 꾸려 자율적으로 노동작업을 조직하도록 하되 팀 단위로 할당된 작 업량을 효율적으로 처리하게 하는 새로운 시스템이 도입되면서 전통적인 "포드주의"는 종말을 고하고 새로운 노동 문화가 도래했다는 것입니다. 전통적인 포드주의에서 노동자들이 단순반복 공정에 종사하던 것에 비하면, 포스트포드주의는 노동력의 공정 투입 분야에서 진일보한 것이 사실입니다. 기술의 발전이 그것을 뒷받침한 것도 놓쳐서는 안 되겠지요.

 

그러나 포스트포드주의는 결코 시장자본주의에서 확립된 노동과 자본의 관계를 종식시킨것이 아니고, 노동의 슬픈 운명을 제거한 것도 아닙니다. 노동비용을 최소화하면서 노동생산성을 최대화하려는 자본의 요구에 따라 기술화된 노동공정의 형태가 다소 바뀌어진 것입니다. 또한 "포스트포드주의"를 도입할 수 있는 것은 방대한 설비투자를 할 수 있는 거대기업들뿐입니다. 대부분의 중소기업들은 여전히 테일러가 효율성의 이름으로 극찬하였던 컨베이어 벨트 작업에서 크게 벗어나 있지 않습니다.

 

찰리 채플린이 여자 친구와 먼 길을 떠나는 "모던 타임스"의 마지막 장면은 시사적입니다. 그들은 어디로 향하고 있는 것일까? 이러한 궁금증을 풀고 싶지만, 오늘 컨베이어 벨트작업 마저 일감이 형편없이 줄어들어 일자리를 구하는 사람들의 아우성이 하늘을 사무치는 광경을 보면 마음이 답답해집니다.

노동은 저주인가?

시장자본주의에서 노동은 저주인 것 같습니다. 슬프게도 그렇습니다. 시장자본주의가 규정하는 노동과 자본의 관계를 생각해 보면, 어떤 형태의 노동이던지 그것을 천직(天職)과 연결시켜 직업윤리를 말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마르틴 루터는 어느 날 하녀가 빗자루를 들고 길바닥을 쓰는 것을 보고 "아, 저 하녀가 자기가 선 자리에서 하느님의 일을 하고 있구나" 하고 홀연 "선 자리 윤리"(Standesethik)와 "직업윤리"를 깨우쳤다고 하지만, 오늘날과 같은 시장 자본주의 사회에서 공연히 그런 말을 함부로 했다가는 뺨을 맞기 십상입니다.

 

게다가 사업자가 시장에서 노동력을 구입할 때 지불한 대가와 그 노동력을 쥐어짜서 시킨일의 가치를 비교해 보면, 뒤의 것은 앞의 것보다 월등히 크게끔 되어 있습니다. 노동자들에게 돌아가야 할 몫 가운데 일부가 사업자에게 돌아가게 되어 있는 것이지요. 노동자들의 처지에서는 억장이 무너질 일입니다. 자기 자신에게 속한 노동력을 자기로부터 분리시켜 사업자의 통제 아래 두고 그들의 지시에 따라 남의 일을 하는 것만도 서글픈 일인데 말입니다.

 

그런데도 노동력 이외에 다른 생계의 수단을 갖지 않은 사람들은 그러한 일이라도 없으면 당장 굶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기에 그것을 찾아 눈에 불을 켭니다. 이런 상황에서 루터의 "선 자리 윤리"를 선전하는 것은 무모한 일이고, 또 공업자본주의 단계에 접어든 19세기 독일 사회에서 직업을 인륜생활의 길로 미화했던 루터 제자들의 정교한 "직업윤리"를 되뇌는 것은 부질없는 짓입니다.

 

가령 어느 유명한 봉제공장에서처럼 기독교인인 사업주가 종업원들에게 장시간 미싱을 돌리게 하고 임금은 쥐꼬리처럼 주면서 목사를 청해 "여러분은 지금 미싱 앞에 앉아서 하느님의 일을 하고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는 거요" 라고 말하게 한다면, 그것은 노동자들을 속이고 하느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는 것이나 다를 바 없을 것입니다. 처음 미싱 몇 대로 시작한 그 봉제공장은 그런 식으로 해서 몇 해 지나지 않아 유수한 기업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고, 사업주의 농간과 착취에 저항하는 노동자들은 하느님의 이름을 내세우는 사업주의 협박과 외면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밀레니엄이 바뀌는 지난 몇해 동안 태양 아래서 엄연하게 일어났습니다. 노동을 저주처럼 여기게 하는 일이 하느님의 이름으로 버젓하게 일어난 것입니다.

그러나 과연 노동이 저주인가?

시장자본주의에서 자본에 종속된 노동은 많은 경우 슬픈 운명을 떨칠 수 없습니다. 제가 가르치던 학생들이 졸업을 하고도 취업을 하지 못해 안달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보거나, 설사 취업을 하였다고 해도 학력을 부끄럽게 하는 직업을 얻어 형편없는 급료를 받고 일한다는 소식을 들을 때, 저는 노동력이 쓰레기처럼 하찮게 취급되는 오늘의 현실을 개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노동을 저주라고 생각해야 하는 것일까?

갑자기 성서의 몇 구절을 들먹이며 이야기를 계속하면 여러분들이 의아하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저는 노동이 하느님의 축복 아래 있다는 생각을 접어본 적이 없습니다. 창세기 1장 28절을 보면, 하느님은 그 분과 닮은꼴로 지음 받은 사람들에게 그 분을 대신하여 생명 있는 온 피조물을 보살피게 하시고는 그들을 불러 축복하시고 다음과 같이 말을 건넨 적이 있습니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여라. 땅을 정복하여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 위에서 살아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려라."

 

여자와 남자가 가정을 꾸려서 자손을 두기 시작하면 인구는 당연히 늘어나고, 사람들은 땅을 가득 채우게 되겠지요. 그러면 땅을 가득 채운 사람들의 입에 무엇인가 먹을 것을 채워 넣어야 하는 일이 중대한 과제가 될 것입니다. "땅을 정복하여라" 하는 건넴 말은 먹을 입(食口)을 채우는 일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먹을 것을 얻기 위해 땅을 이용하라는 것이지요. 고대 사회에서 그것은 농사짓는 일이었습니다. 이처럼 살기 위해 땅을 경작하는 것은 프란시스 베이컨이 나중에 라틴어 성서를 인용하여 만들어낸 "땅의 지배"(dominium terrae)라는 관념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땅의 지배"라는 관념에는 땅으로 상징되는 자연 일반을 인간에게 종속된 것으로 생각하고 인간이 그것을 임의대로 지배하고 처분할 수 있다는 세계관이 깔려 있습니다마는, 하느님이 그것을 의도했을 리 만무합니다. 왜냐하면 땅과 땅위의 모든 생명은 하느님께 속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이 뜻하신 것은 사람이라면 모름지기 땅을 경작해서 늘어나는 인구의 먹거리 문제를 해결하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삶은이웃에 살고 있는 생물들과 공생관계를 유지하게끔 설계되어 있었습니다. 사람의 먹거리는 엄격하게 씨 있는 풀이나 열매로 한정되어 있었고, 동물들의 먹거리는 들의 풀로 규정되어 있었습니다(창세 1, 29-30). 그러니 먹을 것을 위해 사람들과 동물들이 서로 살육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지요.

 

사람이 세상에서 삶을 도모하는 방식인 노동은 하느님의 축복 아래 있습니다. 이러한 생각은 창세기 1장과 다른 문맥에 속하는 창세기 2장 15절이나 심지어 낙원 추방 이야기에도 보존되어 있습니다. 하느님은 사람을 기가 펄펄 살아 있는 생명체로 지으신 뒤 그를 에덴 동산으로 데려가셨고(창세 2, 7-8), 그에게 낙원을 돌보고 경작하라는 분부를 내리셨습니다(2, 15). 그러니 에덴에서도 사람은 일하며 살아가게끔 되어 있었던 셈입니다. 그것이 하느님 으로부터 인간에게 위임된 삶의 방식이었습니다.

 

흔히들 사람이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하느님의 명령을 어겨서 낙원을 쫓겨날 때 노동이 저주를 받았다고 생각하지만, 창세기 3장을 꼼꼼히 읽어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하느님이 인간의 죄를 보고 저주를 내린 것은 땅이지 노동이 아니었습니다. 하느님의 저주를 받은 땅은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었고, 사람은 낙원 바깥에 있는 이 땅에서 이마에 땀을 흘리며 일을 해야 비로소 먹을 것을 취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물론 에덴에서 상상할 수 없었던 고역을 동반하는 일이었지만, 사람이 노동을 하며 한 세상을 살아가야 한다는 하느님의 위임이 철회되거나, 하느님이 인간의 삶의 방식으로 승인한 노동이 폐지된 것은 아닙니다. 노동은 인간의 타락 이전이나 그 이후나 삶을 원하시는 하느님의 축복 아래 있는 것입니다.

노동이 저주가 되지 않으려면

노동이 시장에서 노동력을 팔아야 생계를 꾸릴 수 있는 사람들에게 슬픈 운명으로 받아들여지는 이 세상에서 성서의 말씀은 먼 나라 이야기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먼 나라 이야기일 수 없습니다. 노동이 삶을 꾸려나가는 방식으로서 하느님에 의해 승인되고 하느님의 축복 아래 있는 것이라면, 그 노동을 슬픈 운명처럼 받아들이게 하는 현실이 바뀌어 져야 합니다. 시장이 필요로 하지 않는 노동이 마치 쓰레기처럼 취급되는 현실이 바뀌어야하고, 노동이 삶을 꾸려나가는 방식으로 여겨지지 않고 상품을 생산하는 도구로 취급되는 현실이 바뀌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지 않는 한, 어느 누구도 건강하고 즐거운 노동을 향유할 수 없습니다.

 

노동을 저주처럼 여기게 하는 시장자본주의는 하나의 역사적 현상에 불과합니다. 그것의 역사적 시효는 점점 끝나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인류의 새로운 문화는, 시장자본주의가 역사적으로 극복될 때, 시작될 것입니다. 그 때가 오면, 건강하고 즐거운 노동에 터잡아 자매들과 형제들이 자유롭게 연대하는 세상이 실현될 것입니다. 그러한 세상이 왜 와야 하는가는 다음과 같이 질문을 던져 보면 금방 자명해 집니다.
이웃 사람을 위한 노동이 아무런 가치도 인정받지 못하고, 생명을 파괴하거나 제약하는 일이 시장에서 그 가치를 인정받는 까닭은 무엇인가? 어떤 노동은 사회적 대가를 부여받지 만, 어떤 노동은 사회적 업적 평가로부터 아예 배제되는 까닭은 무엇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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