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과 가까이 사귀라

운영자............... 조회 수 1286 추천 수 0 2004.08.09 17:4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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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과 가까이 사귀라

본문 : 야고보서 4:5~8

공자는 『논어(論語)』에서 “내게 유익이 되는 벗이 세 종류가 있고, 내게 해가 되는 세 종류의 벗이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유익이 되는 친구는 정직한 벗, 신의 있는 벗, 견문이 풍부한 벗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아첨하는 벗, 눈앞에서만 잘하는 벗, 말만 번지르르한 벗은 우리에게 해를 준다고 이야기합니다.
여러분은 어떤 친구를 만나고 계십니까? 이 세상에서 좋은 친구 한 사람 만나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돈버는 일도 어렵고, 우리 삶의 모든 순간순간들이 어려운 것이지만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 중의 하나가 바로 다른 사람의 마음을 얻는 일입니다. 그 바람 같은 마음을 얻을 수 있는 것은 누구에게나 결코 쉽지 않은 일인 것입니다. 만약 자신의 마음을 열어 놓을 수 있는 친구를 가지고 있다면 그는 정말 복 받은 사람일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진정한 친구를 만나고자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이런 친구를 만나고자 하는 기대가 우리의 마음속에 있습니다. 모든 것을 주어도 아깝지 않은 친구, 그 친구에게만 가면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싶은 친구, 그런 친구를 갖는다는 것은 우리 모두의 염원이기도 하지만, 결코 쉬운 것이 아님을 인생을 살면서 자주 겪는 것도 현실입니다. 왜 그럴까요? 분명히 인간의 한계성 때문인 것은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어쩌면 진정한 우정을 갖게 된다고 하는 것 자체가 우리의 본성과는 좀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러나 더 실제적인 이유는 어쩌면 우리가 그런 친구가 되려고 우리 스스로 노력하지 않고, 그런 친구만 우리 옆에 가까이 있기를 원하는 데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신앙이 무엇일까요? 이런 진정한 친구를 만나는 일과도 같습니다. 우리의 인생에서 최고의 친구, 영원한 친구, 이 친구를 만나면 우리의 모든 것을 내놓아도 아깝지 않을 그런 친구를 만나는 것이 신앙을 갖는 복인 것입니다. 친구에는 두 가지의 모습이 있습니다. 친구는 친구지만 싫어하는 친구가 있습니다. 어떤 친구를 싫어하는가 하면 자기 자랑에 푹 빠진 친구, 자기의 업적을 떠벌리는 친구, 그런 친구들은 대부분 만나기 꺼려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받아 주는 친구, 가까이 가면 편안한 친구, 또 멀리 떨어지면 보고 싶은 그런 친구는 우리들이 원하고 좋아합니다. 우리가 그렇게 사랑하는 예수 그리스도, 그분도 우리를 위해서 다가오십니다. 아주 겸손하게, 아주 낮은 위치로, 우리의 눈높이에 맞춰서 우리들에게 다가오십니다. 우리와 같은 연약한 모습으로 다가오십니다. 우리가 겪고 있는 질병의 아픔을 아시면서 다가오십니다. 우리가 그동안 고통 받았던 절망의 그늘을 손수 경험하면서 다가오십니다. 우리가 신음하는 이 죄악의 문제를 당신의 몸속에서 직접 다 겪으면서 다가오시는 그분이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은 우리보다 더 낮은 자리로 내려가셨습니다. 우리보다 더 많은 아픔을 경험하셨습니다. 우리보다 더 외로우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친구처럼 대하셨습니다. 우리의 업적이 많아서가 아닙니다. 우리 인품이 훌륭해서가 아닙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재산이 많아서가 아닙니다. 우리의 연약한 모습 그대로 우리를 대하고 찾아오시는 분이 바로 우리 예수님이십니다.
예수께서 낮아지셨기에 우리에게 한 가지 요구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교만한 마음으로 나를 만나지 마라! 나도 낮아졌기 때문에 너희도 나를 만나려 한다면, 겸손한 마음으로 나를 만나야 한다.”고 우리들에게 가르쳐 주십니다. 오늘 읽은 말씀 6절에 보면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나기 위해 요구하시는 한 가지 조건은 겸손한 것입니다. “내가 낮아진 그 자리에서 너를 초청했으니 너도 갖고 있는 모든 것, 네가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는 그 모든 것들을 내려놓고 내 앞에 나오라.”고 하는 초청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교만이 문제가 될까요? 교만은 친구 관계를 늘 파괴합니다. 여러분, 교만한 사람을 만날 때마다 우리는 기분이 나빠집니다. 교만한 사람은 자기만 자랑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기 자랑을 하기 위해서 우리를 부속품처럼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교만한 사람은 자기중심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남의 이야기는 들으려 하지 않고 자기 이야기만 하려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우리는 친구로 만날 수가 없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왜 겸손한 자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더하시게 될까요? 겸손한 사람들은 상대방에 말에 귀를 기울입니다. 들으려고 합니다. 다른 사람의 입장을 포용하려고 합니다. 다른 사람의 아픔을 마음에 품습니다. 더불어 가기를 원합니다. 즐거움에 함께 동참하기를 원하고 아픔을 나누기를 원합니다. 겸손한 사람들은 배우기를 원합니다. 겸손한 사람들은 사랑에 헌신하고자 합니다. 겸손한 사람은 인생에 감사할 줄 압니다. 고마워할 줄 압니다. 그래서 그를 만나면 따뜻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가서 하나님과 사귀려고 할 때 다른 조건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위해 자신의 업적을 많이 쌓아 놓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친히 우리의 연약한 모습으로 낮아지는 것처럼 우리도 겸손한 그분 앞에 나아가게 되면 그분은 우리를 받아 주시고 우리를 친구로 영접해 주신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친구가 된다는 것에는 또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요? 하나님께서는 진정한 친밀감 있는 친구가 되기를 우리에게 바라십니다. 친밀감이란 무엇입니까? 멀리서 바라보는 것이 아닙니다. 가까이 다가서서 가까이 만나는 것입니다. 가까이서 대화하는 것입니다. 신뢰하는 것입니다. 때로는 신비적인 교제와 연합의 자리에 들어가기도 하는 것이 친밀감입니다. 몇 십 년을 함께 살아온 부부라도 이 친밀감이 사라지게 되면 부부 관계에 위기가 다가오게 됩니다. 23년 동안 남편과 함께 살아온 아내가 이혼을 결심하고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저는 오랜 기간의 결혼 생활을 이제는 청산하려고 합니다. 남편은 괜찮은 사람입니다. 과묵하고, 신실하고, 작은 어려움이 있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큰 어려움은 없습니다. 그러나 남편은 제게 결코 자신을 드러내 보이지 않습니다. 마음에 큰 벽을 쌓고 있어서 그와 함께 있으면 때로 숨이 막혀 오기도 합니다. 남편과 함께 계속 살아야 할 이유를 도무지 찾을 수가 없습니다. 이제는 그와 함께 살기를 포기하고 떠나려 합니다.”
여러분, 친밀감이 사라진 부부는 지금 함께 살고 있다 해도 잘못하면 위기에 봉착할 수 있게 됩니다. 이 이야기 속의 남편은 왜 아내에게 자신을 열어 놓지 않았을까요? 왜 높은 방어벽을 아내에게마저 쌓았을까요? 분명히 남편에게도 아내가 필요했을 것입니다. 아내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싶어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남편의 중심을 들여다보면 마음속에 두려움과 불안이 있었습니다. 아내에게 자신의 연약한 모습을 조금이라도 보여 주면 아내가 업신여길지 모른다는 두려움, 나약한 남편이라고 깔볼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남편은 늘 아내에게 일정한 간격과 거리를 두면서 살아 왔습니다. 이러한 남편의 방어벽 때문에 아내는 떠날 준비를 하게 된 것입니다. 남편의 삶에 도무지 끼어들 자리가 한 군데도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이 사람과 평생 살 수 있을 것인가 자문하면서 말입니다.
여러분, 친밀감이라고 하는 것은 부부에게 있어서 아주 소중한 것입니다. 부부는 열정이 사라지고 나면 우정으로 삽니다. 부부는 섹스로만 사는 것이 아닙니다. 지속적인 우정 관계가 그들에게 있을 때 평생을 함께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신앙의 측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아무리 불러도 예수님과 친밀감이 없는 사람들이 종종 있습니다. 그래서 마치 친하지 않은 친구와 만날 때처럼 예수님을 불러도 어색합니다. 예수님을 불러도 서먹서먹합니다. 하나님을 믿어도 하나님과 친밀한 삶의 자리에 들지 못합니다. 그래서 마음이 외롭습니다. 마음이 시립니다. 마음이 춥습니다. 친밀감이 없는 신앙은 친밀감이 없는 결혼처럼 밋밋하고 때로는 건조한 사막을 걷는 것과 같습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도 인격이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것을 극복하는 비결은 어디에 있을까요? 오늘 본문 야고보서 4장 8절에서 야고보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하나님께 가까이 오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 속에 가까이 오신다고 말씀합니다. 여러분, 이 “가까이 오라”고 하는 명령은 조건부일까요? 하나님의 말씀을 보면 우리가 주님께 가까이 가기 전에 주님이 먼저 우리의 삶에 가까이 오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을 거부했습니다. 하나님과 우리는 상관없는 존재라고 그를 뿌리쳤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가까이하시고 사랑해 오신 짝사랑의 역사가 기록되어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내게 좀 가까이 와라! 내가 너를 좋아한다. 나는 너와 만나고 싶다. 너와 대화하고 싶다. 내 앞으로 좀 가까이 와라!” 그런데도 인간은 끊임없이 하나님을 거절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을 만드시고, 우리 인간에게 사랑받기를 원하십니다. 당신께서 만드신 존재에게 그 사랑을 거절당하심으로 가장 먼저 사랑의 아픔을 겪으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내가 만들고 내가 사랑하는데도 불구하고 너희는 내 사랑은 거절하는구나….” 하고 하나님께서 통탄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조금만 하나님을 사랑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좋아하실 수가 없습니다. “네가 나를 좋아하는구나! 나는 너한테 그냥 다 주고 싶다.” 또 우리가 멀리하면 섭섭하게 생각하고 눈물로 호소하시는 분이 바로 우리 하나님이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 5절에서 하나님께서 얼마만큼 우리를 사랑하는지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 하신 말씀을 헛된 줄로 생각하느냐”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속에 성령까지 주시면서 “너를 좋아한다. 너를 사모한다. 내가 질투하기까지 너를 좋아하고 너를 사랑한다.”고 고백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랑의 질투를 경험해 본 적이 있으십니까? “내가 너를 그렇게 좋아하는데도 이 사실을 모르다니…. 성령을 너희 안에 두고 질투하기까지 사랑하는데도…. 제발 앞으로 가까이 와라! 나는 너를 보고 싶다. 나는 너와 더불어 살고 싶다.” 어떻게 보면 하나님께서는 사랑의 아픔이 나타나는 모습까지도 보여 주시면서 당신의 간절한 애타는 사랑의 간구를 우리에게 이야기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의 약점입니다. “내가 너희를 사모한다. 사랑한다. 그런데 왜 안 오느냐?” 사랑이 거부되는 그 아픔, 그것이 우리가 언제든지 하나님 앞에 서게 되는 이유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는 특징이 있습니다. 바로 요즘 말로 표현하면 윈윈(win-win) 법칙입니다. 또 다르게 표현하면 상생의 원리입니다. 서로가 사는 것입니다. 서로가 이기는 것입니다. “내게 가까이 오라. 그러면 내가 너에게 가까이 가겠다. 너도 사랑으로 충만하게 되고, 나도 사랑으로 충만하게 될 것이다. 너도 이익이 되고, 나도 이익이 될 것이다. 너도 승리하고, 나도 승리할 것이다.” 여러분! 이런 인격적인 관계는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 모릅니다. TV 뉴스를 봐도, 신문을 봐도 우리 사회에는 갈등과 미움뿐입니다. 노사관계를 봐도 그렇습니다. 왜 함께 더불어 가지 못하고 그렇게 원수처럼 분노하는 것입니까? 정치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여야간에 우리의 민족의 앞날을 위해서 함께 토론한다고 하면서 왜 그 마음속에는 미움과 저주가 있는 것입니까? 우리 주위의 모든 관계는 윈윈이 아닙니다. 누군가가 승리하면 누군가는 패배당하는 철저한 경쟁만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의 원리는 다른 것입니다. 너도 승리하고 나도 승리한다. 너도 존재하고 나도 존재한다. 너도 큰 목적을 이루고 나도 큰 목적을 이룬다. 너도 나를 채우고 나도 너를 채운다. 너도 기뻐하고 나도 기뻐한다. 함께, 가까이 하나님의 이 놀라운 은총을 나누는 것이 우리 믿음의 이야기인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여러분은 하나님을 사랑할 때 너무 주저하지 마십시오. ‘혹시 나 혼자 하나님을 짝사랑하다가 버림당하는 것은 아닐까? 하나님께 모든 것을 드렸다가 너 같은 것은 보기도 싫다고 쫓겨나는 것은 아닐까?’ 그렇게 지레짐작하지 말고 하나님 앞에 나오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원래부터 우리를 짝사랑하셨습니다. 본래부터 우리 앞에 가까이 와 계십니다. 그리고 기다리고 계십니다. 우리가 돌아서기만을 원하십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조금만 다가오면 주님은 열 배 백 배로 우리 앞에 가까이 다가옵니다. 우리를 맞을 준비를 하고 계십니다. 우리 곁에 계시면서 우리에게 성령을 부어 주시고 “너는 하나님의 자녀다. 너는 나의 친구다.” 이렇게 우리를 초청하시는 분이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의 사랑에 반응한 아브라함이 “내가 믿겠습니다.” 그 한마디를 고백하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두고 “아브라함은 나의 벗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고통을 이겨 나가는 욥을 보면서 “봐라! 욥이 바로 나의 벗이다.”라고 선포하신 것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것과는 도저히 비교될 수도 없는 작은 믿음 하나로 인하여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친구로, 사랑하는 벗으로 맞아 주십니다. 참으로 놀라운 사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왜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하고 있을까요? 마음으로부터 깨닫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보고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는 사람이 되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헬렌 켈러의 자서전에 보면, 설리번 선생이 일곱 살 난 헬렌 켈러를 지도하게 되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헬렌 켈러는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고, 말하지도 못하는 삼중고의 장애인이었습니다. 설리번 선생을 만나기 전까지 이 소녀는 알아들을 수 없는 짐승 소리를 내면서 모든 것을 마구 던졌습니다. 식탁에 접시들을 팽개치고, 자신의 몸뚱이까지 마루 바닥에 내던졌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헬렌 켈러의 어머니에게 “아무래도 당신 딸은 백치요. 참 미련한 딸이요.” 그렇게 말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설리번 선생은 사랑과 정성과 헌신으로 이 헬렌 켈러를 가르쳤습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는 내용이겠지만, 어느 날 헬렌 켈러가 자기 손에 물을 떨어뜨리는 것을 보면서 설리번 선생은 다른 쪽 손에다가 ‘water’, 즉 ‘물’이라는 말을 써 주었습니다. 헬렌 켈러는 그 당시를 자서전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일은 내가 우물에서 펌프에 쏟아지는 물을 작은 컵으로 받고 있을 때에 일어났다. 앤―앤은 설리번입니다―은 펌프로 물을 푸면서 컵을 채우고 남은 물이 내 손바닥을 적실 때 또 다른 손바닥에 ‘water’라고 하는 말을 써 주었다. 갑자기 나는 알게 되었다. 병을 앓은 이후로 처음 느끼는 벅찬 기쁨에 사로잡혀 나는 앤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그리고는 무엇이든지 내가 만질 수 있는 것의 이름을 가르쳐 달라고 애원하였다. 의미의 불꽃이 연이어 이 손바닥과 저 손바닥에서 타올랐다. 그것은 기적이었다. 내 속에서 애정이 싹텄다. 우리는 어쩔 줄 모르고 서로 ‘헬렌!’, ‘선생님!’ 하면서 우물에서부터 걸어나왔다.”
여러분, 같이 있어도 깨달음이 나타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바로 우리 가까이 계셔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을 모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면 해야 할 것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8절 하반절에 보면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무슨 뜻입니까? 요즘 말로 하면 “한번 내게 마음을 주었으면 바람을 피우지 마라!”는 것입니다. 육체적인 바람이 아닙니다. “영적인 바람을 피우지 마라! 이제는 사탄을 적대할 줄 알고, 자기 몸을 성결하게 할 줄 알며, 두 마음을 품고 이쪽으로 왔다가 저쪽으로 왔다가 그렇게 살지 마라!”는 것입니다. 결혼 생활을 파탄으로 몰고 가는 것이 무엇입니까? 사랑하는 남편이, 또는 사랑하는 아내가 다른 이성을 찾아서 애정을 충족시키는 것입니다. 그것은 분노요, 불신인 것입니다. 모든 인격체가 똑같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격체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시면서 구약의 예언자들을 통하여 끊임없이 이야기해 주신 것이 무엇입니까? “나 여호와만을 사랑하라. 나는 하늘의 하나님이고, 땅의 하나님이고, 온 우주의 하나님이다. 어찌하여 너희들이 바알을 섬기고 있느냐? 우상 숭배를 거두어들여라!”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만을 사랑하라고 우리들에게 이야기해 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다른 것이 아닙니다. 인간 자신의 업적을 만들어 놓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큰 선물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한 가지입니다. 하나님과 더불어 있기를, 하나님과 가까이 있기를 열망하는 것입니다.
열 살 된 어린아이가 있었습니다. 그 아이의 아버지는 부자여서 모든 것을 선물로 다 주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이의 생일이 돌아왔습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이야기합니다. “내일이 네 생일이구나! 뭐 가지고 싶은 것 있니? 내가 뭐든지 사 주겠다.” 그랬더니 “아빠! 이제 물건은 필요 없어요. 그냥 내일 저와 함께 있어 주세요. 저와 함께 있어 주기만 해요.” 그러자 바쁜 아버지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미안하구나. 내일 급한 일이 있어서 나가 봐야 하는데….”
여러분, 자녀들을 사랑할 때도 그렇습니다. 무엇을 위해서 사십니까? 달려가기 위해서, 명예를 위해서, 돈을 위해서, 업적을 위해서 사랑하는 아내(또는 남편)와 자녀들을 떠나보낼 정도로 그렇게 인생이 바쁜 것입니까? 하나님의 관계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 하나님께 예배드릴 시간조차 없을 만큼 우리 인생이 바쁜 것입니까? 무엇이 그렇게 바쁘십니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그냥 내 옆에 있기만 해라! 내 앞에 가까이 오기만 해라! 나는 너와 함께 있기를 원한다. 나와 함께 사귀자! 나는 너와 친구가 되고 싶다. 나를 즐겨 보아라! 나도 너를 즐기고 싶다.” 가까이 나아가 하나님과 사귀는 것은 믿음의 사람의 선택 사항이 아닙니다. 필수 사항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우리를 사랑하고 계십니다. 또한 우리의 사랑을 요구하십니다. 여러분, 그냥 하나님 앞에 나오시면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 있기를 사모하는 마음으로 나오시면 되는 것입니다.
*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이 시간 주님 앞에 가까이 나아왔습니다. 저희의 육체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저희의 정신과 영혼도 주님을 갈급하며 사모하는 마음으로 나왔습니다. 저희 안에 계신 성령께서 저희를 어루만져 주옵소서. 저희가 하나님을 아는 기쁨, 하나님과 동행하는 기쁨, 하나님과 친구가 되는 기쁨으로 충만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김지철 목사(소망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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