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를 누립시다(108)

복음............... 조회 수 734 추천 수 0 2005.04.17 09:3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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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를 누립시다(108)

본문 : 에베소서 : 2장 11 - 22 절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롬12: 18)

사탄 마귀가 하는 중요한 일은 평화를 깨트리는 일입니다. 사탄 마귀가 행복하게 살던 아담과 하와에게 뱀의 모습으로 다가와서 저들을 유혹하므로 저들이 누리고 있던 평화를 깨트려버렸습니다. 하나님과의 평화를 깨트려버렸습니다. 부부간의 평화를 깨트려버렸습니다. 자녀들간의 평화를 깨트려버렸습니다. 맏아들이 둘째 아들을 쳐죽이는 비극이 발생했습니다. 사회적인 평화도 깨트려버렸습니다. 가인의 자손들이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의 창상을 인하여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을 인하여 소년을 죽였도다”(창4:23).
예수님이 하시는 중요한 일은 평화를 이루시는 일입니다. 평화를 이루시기 위해서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평화의 왕자’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니라”(사9:6). 여기‘평강의 왕’을 영어 성경은 ‘Prince of Peace’ 즉 ‘평화의 왕자’라고 번역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평화의 왕자’로 세상에 오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성탄의 아침 천군 천사는 이렇게 찬양을 했습니다. “땅에서는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2:14). Peace on earth among men!
평화는 모든 보화들보다도 더 위대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어떤 철학도 평화를 줄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철학이 죄를 깨끗이 씻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어떤 행위도 평화를 줄 수는 없습니다. 어떻게 행위가 인간을 의롭게 할 수 있겠습니까? 이 세상에 있는 어떤 광산으로 내려가든, 어떤 나무를 흔들든, 어떤 문을 두드리든 간에 이 가련한 세상은 당신에게 평화를 줄 수 없습니다. 평화는 오로지 하나입니다. 오직 한 분만이 평화를 가지고 있고, 오직 한 분만이 평화를 주실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말씀하시는 그분을 알고 있습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함이라." 그의 이름은 '평화의 왕'이십니다.
평화는 행복의 조건입니다.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하는 것이 육선이 집에 가득하고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잠17:1). “다투는 여인과 함께 큰 집에서 사는 것보다 움막에서 혼자 사는 것이 나으니라”(잠21:9).
평화는 행복의 조건이고 불화는 불행의 요건입니다. 그런데 인간에게 있어서 평화는 불가능합니다. 가인과 아벨이 불화했고 에서와 야곱이 불화했고 이스라엘과 팔레스틴이 불화하고 있습니다. 인류의 역사는 전쟁과 불화의 역사로 이어져왔습니다. 전쟁과 불화와 불행 가운데서 살아가는 우리 인간들에게 하나님의 아들이 ‘평화의 왕자’로 찾아오셨습니다. 평화가 없는 이 땅에 평화를 이루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평화의 왕자’를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중세기 어느 수도원에 신부복을 입은 낯선 구도자 한 사람이 찾아와 수도원의 문을 두드렸습니다. 그러자 수도원을 지키고 있던 사람이 나가서 물었습니다. 누구를 찾으십니까? 낯선 구도자는 대답했습니다. 저는 평화를 찾습니다. 바로 이 구도자가 저 유명한 신곡(Divine Comedy) 을 지은 단테라는 사람이었습니다. 평화를 찾습니다. 세계 인류는 얼마나 간절하게 이 평화를 찾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 시대에서는 점점 평화 대신 어두운 구름이 우리 앞을 가리고 있다는 사실을 어느 누구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은 이 세상에 왜 평화가 없는가, 그 이유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정치적인 수단으로, 혹은 외교적인 방법으로 평화를 누려 보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결코 한 번도 평화를 성취하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평화를 깨뜨리게 된 근본 문제를 치유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인류의 평화를 깨뜨렸습니까? 죄입니다. 사람이 죄를 범함으로 어떻게 되었습니까?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관계가 깨지고 말았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을 등지고 피하기 시작했습니다. 범죄한 인간은 하나님을 피해서 동산 나무 뒤에 숨었습니다. 사람이 죄를 범하면 누가 뭐라 하지 않아도 무서워집니다. 그래서 잠언에 보면 악인은 쫓아오는 사람이 없어도 도망한다고 했습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은 사람을 찾으시지만, 사람은 하나님의 음성을 외면하고, 말할 수 없는 가책과 갈등 속에서 하나님께 저항하기 시작했습니다. 죄는 이렇게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끊어 버립니다. 그러므로 죄 범한 사람의 마음에는 평화가 없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죄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깨뜨립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범한 후 그 들 사이에서 생긴 가인과 아벨을 보세요. 그들은 한 부모 사이에서 태어난 형제인데 이 형제 사이에서 인류 최초의 살인 사건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죄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도 갈라놓고 맙니다. 갈등과 살인, 시기와 증오, 그리고 전쟁이 인류역사 속에 계속 일어나고 있습니다. 사람과 사람, 계급과 계급,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지배하는 자와 지배를 받는 자 사이의 끊임없는 싸움이 인간 역사 속에서 신랄하게 벌어지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가 평화를 누릴 수 있습니까? 사람들은 평화를 잃어 버렸습니다. 성경이 사람을 나누는 방법은 우리가 나누는 방법과는 조금 다릅니다. 우리는 사람을 상대적인 기준에 의해서 나눕니다. 경제학자는 경제학자의 기준이 있어서 그 기준대로 사람을 나눕니다. 정치학자는 정치학자의 기준에 의해서 사람을 나눕니다. 사람은 저마다의 분류 기준을 가지고 사람을 나눕니다. 그러나 성경은 세 가지로 나눕니다. 고린도전서 10장 32절에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첫 번째는 유대인인데, 하나님이 맨 처음에 선택하셨던 백성이 유대인입니다. 두 번째는 헬라인인데, 그 당시 유대인을 제외한 이방인을 대표하는 명칭입니다. 세 번째는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교회는 건물이 아닙니다. 교회는 사람을 뜻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함을 받은 사람들의 공동체가 바로 교회입니다. 그러니까 예수 믿는 사람들의 모임이 교회입니다. 성경대로 말하면 사람은 유대인, 헬라인, 그 리고 그리스도인 이 세 가지 인간이 있습니다. 이렇게 사람을 분류하는 것은 오늘 주신 말씀을 이해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됩니다. 오늘 주신 말씀인 에베소서 2장에서는 처음 두 부류의 사람, 그러니까 유대인과 이방인이 어떻게 적대 관계를 갖고 있는가 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주신 말씀에 보면 평화라는 말이 강조되어 있습니다. 14절에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했습니다. 15절에 보면 원수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했습니다. 16절을 보세요.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 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했고, 17절에 보면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라고 말씀했습니다. 이렇게 짧은 말씀 속에 계속 평화를 강조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평화의 반대 개념인 원수라는 말도 나타납니다. 15절에 원수 된 것, 14절에 중간에 막힌 담 이란 말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사람과 사람 사이에 막혀 있는 벽을 평화이신 주님께서 헐어 버리셨다고 말씀했습니다. 사람과 사람, 다시 말하면 원수 된 두 유형의 사람 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방인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오늘 주신 말씀 11절을 보세요.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때에 육체로 이방인이요 했습니다. 바울에게 이 편지를 받을 에베소 사람들은 이방인이었습니다. 그들 유대인이 아니었습니다.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당이라 칭하는 자들에게 무할례당이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할례는 이스라엘 민족만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할례를 받는다는 사실에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이 사람을 경멸할 때 보통 사용하는 말 중에 하나가 할례도 받지 못한 사람이라는 말이었습니다. 다윗이 블레셋 사람 골리앗 장군을 무시할 때 쓴 말도 그것이었습니다. 사무엘상 17장 26절에 보면 이 할례 없는 블레셋 사람이 누구관대 사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겠느냐 했습니다. 할례 받은 민족은 유대인이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이방인이었습니다. 그러면 이방인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오늘 주신 말씀 12절에 바울은 이방인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그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했습니다. 이방 사람은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구원을 받지 못했습니다. 예수 안에만 구원이 있습니다. 예수 안에만 용서가 있습니다. 예수 안에만 평안이 있습니다. 예수 안에만 온갖 아름다운 것이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이 보기에 가장 비극적인 사람이 누구입니까? 무식한 사람입니까? 가난한 사람입니까? 병들어 고생하는 사람입니까? 권력 없는 사람입니까?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이 볼 때 가장 불쌍한 사람은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입니다. 그가 아무리 공부를 많이 했어도, 그가 아무리 재산이 많아도, 그가 아무리 권력의 자리에 있어도 그리스도 밖에 있 는 사람은 불쌍한 사람입니다. 노아의 시대를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께서 지상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을 홍수로 심판하셨을 때 그때 제일 행복한 사람들은 방주 안에 있던 사람들입니다. 방주 밖에서 사업 잘해 돈 많이 번 사람들이 행복했습니까? 방주 밖에서 공부 잘해서 박사 학위 받은 사람들이 행복했습니까? 방주 밖에서 권력의 자리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행복했습니까? 노아의 시대에 가장 행복한 사람은 방주 안에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이 시대에 가장 행복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입니다. 이방 사람들은 이스라엘 나라 밖에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부를 수가 없었습니다. 이방 사람들은 약속의 언약 밖에 있는 사람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하신 것과는 상관이 없었습니다. 성경에는 얼마나 위대한 약속이 많이 있습니까? 물론 가장 위대한 약속은 메시야에 대한 약속이지만 그밖에도 성경에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약속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성경을 읽다가 내게 하신 축복의 약속을 접할 때마다 그 약속에 줄을 그으세요. 그리고 그 약속을 하나 님 앞에 내놓고 주장하세요. 하나님, 하나님께서 이렇게 약속하셨습니다. 그 약속하신 말씀대로 제게 이루어 주실 줄 믿습니다. 이렇게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하신 것을 꼭 그대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환경 속에서도 마음의 평화를 누릴 수가 있습니다. 이방 사람들은 그 모든 하나님의 약속들에 대해서 외인들입니다. 그 약속과 상관이 없습니다. 성경에 그렇게 많은 축복의 약속들이 있지만 그 약속과 아무런 상관이 없이 살고 있는 사람들이 바로 이방인들입니다. 더구나 이방인은 세상에서 소망이 없는 사람입니다. 유대인들이 사람을 저주할 때 쓴 말 가운 데 하나가 바로 희망 없는 사람들이라는 말이었습니다. 사람마다 희망이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 희망은 이루어지지도 않고, 이루어진다고 해도 만족이 없고, 만족한다 해도 구름을 잡는 것처럼 지나가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의 희망은 참 희망이 아닙니다. 그러면 참된 소망이 어디에 있습니까? 이방 사람들은 그 참된 소망을 모릅니다. 소망이 없습니다. 단테는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지옥의 입구에는 이런 큰 글자가 새겨져 있을 것이다. 일체의 소망을 버리라. 아무 소망이 없는 곳, 거기가 지옥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고 있는 것은 소망이 있어서가 아닙니까? 아무리 어려운 환경 속에서 살고 있어도 소망을 가지고 있는 한 좌절하지 않습니다. 절망하지 않습니다. 포기하지 않습니다.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분명히 들으세요. 성경은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 복음을 알 지 못하는 이방인들을 가리켜 한 마디로 세상에서 소망이 없는 자 라고 말했습니다. 왜 우리가 전도 요원을 훈련하고 전도하기를 힘씁니까? 소망 없이 사는 저들을 예수께 인도해서 소망 가운데 사는 사람이 되게 하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닙니까? 더구나 이방인은 하나님이 없는 사람입니다. 창조주가 없이 살고 있는 사람들, 자기 생명의 근원을 알지 못하고, 그 하나님 없이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 그들이 바로 이방인들이라고 성경 은 말씀합니다. 우리가 바로 그런 이방인이었습니다. 그리스도 밖에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었습니다. 약속의 언약에 대해서 외인이었습니다. 세상에서 소망이 없었습니다. 하나님도 없이 살았습니다. 여기서 끝났다면 얼마나 불행했겠습니까? 그러나 오늘 주신 말씀 13절부터 상황이 달라집니다. 이제는 이라는 단어는 12절의 그때에 라는 단어와 비교가 됩니다. 그때, 하나님이 없었던 때, 소망이 없었던 때, 하나님의 약속과 상관없이 살고 있던 때, 이스라엘 나라 밖에 있던 때, 그리스도 밖에 있던 때가 있었는데 그러나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 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했습니다. 무엇이 가까워졌습니까? 가까워진 것은 이방인과 하나님뿐만이 아닙니다. 이방인과 유대인도 가까워졌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외국에 가서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의 실감이 좀 덜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 유대인과 이방인의 벽이란 것은 상상하기 어려울 지경이었습니다. 유대인이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기적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맨 처음 붙잡아서 복음을 전하게 만든 사람들이 유대인이었습니다. 바울도, 베드로도 다 유대인이었습니다. 그들을 통해서 복음이 이방인의 세계로 전해졌습니다. 처음에는 이 복음이 유대인에게서 유대인에게만 전파되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만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되 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제 이 유대인 제자들을 통해서 복음을 이방 사람에게 전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유대인들이 철저하게 이방인들을 경멸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왜요? 이방인들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 주님의 거룩함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 죄악에 빠져 있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그들을 경멸했습니다. 사도행전 10장에 보면, 이방인에게 복음이 전해지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이방인이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이 고넬료였습니다. 고넬료는 이방 사람이었지만 하나님을 경외하는 깊은 종교심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늘 기도하고 구제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한 번 도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해 듣지 못했습니다. 베드로가 찾아갔을 때에야 비로소 그가 복음을 듣고, 성령을 체험하고,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베드로를 통해서 이방인에게 복음 전하시기를 원하시는데, 문제는 베드로가 이방 사람을 찾아 나서기 원치 않았다는 데 있었습니다. 또한 이방인들도 자기들이 감히 유대인과 접촉할 수 있으리라고는 기대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기도하고 있는 고넬료에게 역사하셔서 네가 베드로라 하는 유대인을 청하라 고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천사는 베드로를 찾아가 환상을 보여 주셨습니다. 큰 보자기에 네 발 가진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새들을 보여 주시면서 잡아먹으라 하셨습니다. 베드로는 하나님, 제가 저 더러운 것을 어떻게 먹는단 말입니까? 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뭐라 하셨어요? 하나님께서 깨끗케 하신 것을 네 가 속되다 하지 말라 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유대인으로 하여금 이방인들을 받아들이도록, 하나님이 이방인을 변화시켜 예수를 믿게 하면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사실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유대인 과 이방인 사이에 두터운 벽을 무너뜨리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역사하신 것입니다. 베드로가 그 환상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을 때 고넬료의 집 사람들이 왔습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이방인 고넬료를 만났습니다.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위대한 역사가 여기서 시작된 것입니다.
평화는 예수님을 통해서 옵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요14:27). 두려운 상황에서도 두려워하지 않는 평화는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 주시는 근본적 평화입니다. 하나님과 나 사이의 평화입니다. 하나님이 죄인인 나를 영원히 사랑하셔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나를 끌어안아 주셨습니다. 이 평화가 우리 가슴속에 있으면 그 때부터 성령께서 역사하시므로 평화는 성령의 열매입니다. 성령 안에 기쁨과 평화가 있습니다. 성부 하나님의 평화, 예수님이 주시는 평화, 성령 안의 평화가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배할 때 우리는 주변에 전쟁과 갈등과 두려움이 있어도 참된 평화를 누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연의 평화도 주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풍랑을 향해 “잠잠하라”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은총이 있어야 비도 오고 햇빛도 나고 농사도 잘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육체의 치유를 통해서도 평화를 주십니다. “네 믿음이 너를 낫게 하였느니라. 네가 편안히 가라”(막5:34) 하십니다. 우리의 몸이 아플 때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몸을 고쳐 육신의 평화도 주십니다. 하나님의 평화는 육체에도 임합니다. 여러분이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날마다 하나님의 평화를 누리기 바랍니다. 예수 믿기 전에는 알지 못하던, 사람의 머리로 이해할 수 없는 “믿음 안에 있는 평화”입니다.
오늘 주신 말씀 14절을 보세요.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화평이십니다. 15절에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를 만드셨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평화이실 뿐만 아니라 화평하도록 하셨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예수 그리스도는 그 평화를 전하십니다. 16∼17절을 보세요.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했습니다. 평화이신 예수님이 우리를 화평하게 하시고 또 그 평화를 전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목적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중요한 목적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중요한 목적은 구원받은 사람과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지체가 됨으로 사람과 사람 사이를 막고 있는 모든 벽과 담을 무너뜨리고 그리스도 안에 진정한 평화를 누리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평화를 가지고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도저히 넘을 수 없었던 그 담을 무너뜨렸습니다. 무엇으로요? 십자가를 통해서, 자신이 희생되심으로, 보배로운 피를 흘리심으로 그 담을 무너뜨리고 평화를 선포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깨닫고 예수를 구주로 믿는 사람은 이 예수 안에 들어오게 되고,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되는 것을 믿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하나가 될 수 있습니까? 우리가 예수를 믿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순간 하나님은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가지고 화목케 하는 말씀인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내가 한 사람에게 복음을 전할 때 그 사람으로 하여금 예수 믿는 구원을 받게 할 뿐 아니라 그와 나, 사람과 사람 사이에 있는 벽을 헐어버리고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름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한 가족이 된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무엇을 해야 합니까? 그리스도인들에게 맡겨진 가장 중요한 책임은 평화의 직책입니다. 그것을 위해서는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중의 목적을 성취합니다. 복음은 받는 사람을 구원하고, 그래서 사람과 사람 사이의 모든 벽을 헐어 버리고 그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되게 합니다. 오늘 주신 말씀 21절을 보세요.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했습니다. 건물은 예수를 믿는 한 사람 한 사람 의 성도들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 하나 하나가 성전인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전서 6장 19절에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우리가 죄를 회개하고 예수를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했을 때, 우리 안에는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성령이 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의 이 몸은 성전입니다. 우리는 모두 외따로 떨어진 섬이 아닙니다. 내 안에 계신 예수님 때문에, 내 안에 계신 하나님 때문에, 내 안에 계신 성령님 때문에 우리는 연결이 되어 주안에서 큰 성전이 되는 것입니다. 22절을 보세요.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복음을 모든 사람에게 전해야 합니다. 억압하는 사람에게, 억압받는 사람에게, 가난한 사람에게, 부유한 사람에게, 무식한 사람에게, 유식한 사람에게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이 복음이 들어가서 그들이 그리스도인이 되는 순간, 그들 안에 하나님이 거하시고 우리는 다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 자매가 되는 것입니다. 사람의 방법으로 묶어 놓는다 하여도 그들은 연합되지 않습니다. 정치적인 방법으로 연결시켜도 연합되지 않습니다. 참으로 우리가 한 아버지를 섬긴다는 이 분명한 사실이 우리 마음속에 확실해질 때, 우리가 한 성령 안에 거한다는 사실이 분명해질 때, 우리가 서로 형제요, 자매임을 알았을 때 내 형제와 자매를 괄시할 수가 없습니다. 복음은 우리를 하나 되게 하십니다. 그렇다면 이 화목의 복음, 이 평화의 복음을 내 사랑하는 이웃에게 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 복음 없이 평화가 있을 수 없습니다. 이 복음이 없이 형제 화목이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 위해 세상에 오시고 화목의 제물 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를 묵상할 뿐 아니라 아직도 주님을 모르는 내 동포에게 이 복음을 전합시다. 그럴 때 하나님과 평화하고 우리 서로 화목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서 뜨거운 한 가족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립시다. 그런데 평화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평화 평화로다. 하늘 위에서 내려오네...” 이 땅에는 불안, 긴장, 갈등이 있어도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빌4:7)이 옵니다. 무슨 말입니까? 사람의 머리로 상상할 수 없는 영적인 평화입니다. 폭풍우 속에서 제자들은 벌벌 떨고 아우성을 쳐도 푹 주무시는 예수님의 평화, 그것이 하나님의 평화입니다. 여러분과 제 인생의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의 평화가 우리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 기도: 하나님, 감사합니다. 오늘도 우리에게 평강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새로운 하루를 주시고 일할 수 있는 터전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평화의 삶을 누릴 수 있는 여유를 주시옵소서. 세상이 아무리 소용돌이친다 하더라도 우리 크리스천은 세상이 줄 수 없는 참된 평화를 누릴 수 있도록 도와 주시옵소서. 세상에 평화를 심기 위해 애쓰고 있는 사람들과 함께 해주시옵소서. 특별히 이 땅에 하나님의 평화와 정의를 심기 위해 노력하는 기독 선교사들을 도와주시옵소서. 그들이 힘을 얻어서 지구촌 곳곳을 다닐 수 있도록 모든 여건을 허락해주시옵소서. 그들의 노력으로 이 땅이 더욱 살 만한 하나님의 나라 되게 해주시옵소서. 주님을 사랑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한태완 목사

* 2부: 분반(구역)공부 자료

1. 말씀: 평화의 원천

러시아의 작가 톨스토이는 원래 귀족 출신이었습니다. 그는 온갖 부귀 영화를 누리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인생의 참만족을 얻지 못했고, 작품을 통해 수많은 사람들에게 갈채를 받았으나 죄에 대한 공포와 불안한 마음을 어찌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한적한 시골 길을 걸어가던 중에 순박한 시골 농부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시골 농부의 얼굴에는 유난히도 평화가 깃들어 있었습니다. 톨스토이는 농부에게 가서 평화스런 삶의 비결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농부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기 때문이죠. 그래서 내 마음은 기쁨에 가득차 있습니다."
그 말을 들은 톨스토이는 그날부터 진지하게 하나님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그후 그는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고, 과거의 불안과 공포는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작곡가 '하이든'은 그가 세상을 떠나기 전에 친히 쓴 50항목에 이르는 유서의 한 구절을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나는 나의 영혼을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과 자비에 맡깁니다."

2. 묵상 및 토의
0 나는 평화를 어떻게 평화를 누리고 있습니까?
0 나는 평화를 이루는 사람인가?
0 나는 불화가 많은 세상에서 평화와 화해의 도구가 되고 있는가?
0 나는 하나님과의 원수되었던 관계를 깨끗이 청산하였는가?
0 오늘 말씀을 통해 내가 느낀 점이나 앞으로의 나의 결심, 각오, 다짐 등을 이야기 해보세요

3. 예화(1): 평화의 사도

역사가 윌 듀란트는 “역사의 증언”이란 그의 저서에서 지난 역사 시대 3,400년 동안 전쟁이 없는 시간은 268년밖에 안된다고 하였습니다. 어떤 자료를 보니 1945년부터 2000년까지 주 단위로 계산하면 모두 2,872주가 됩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 지구상에 전쟁에 없었던 주는 3주간 밖에 되지 않습니다.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는 전쟁 중입니다. 우리나라도 준전시라고 말합니다. 평화를 만드는 것보다 전쟁을, 갈등을, 폭력을 만들어내기 쉬운 우리들입니다.
성 프랜시스는 십자군 전쟁 이후에 서로 책임을 전가하고 갈등이 증폭될 때에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라고 노래했습니다. 간디는 힌두교와 이슬람의 갈등이 심화된 민족에게 화해와 평화의 사도가 되려고 애쓰다 피살됩니다. 대만의 전설적인 추장 오봉은 사람을 잡아먹는 자기 부족에게 마지막으로 사람을 잡아먹고 다시는 그 나쁜 짓을 하지 말라고 하고 자신이 부족의 마지막 희생자가 되어 살인성인(殺身成仁)의 본을 보입니다. 이 모두가 평화를 만드는 사람들입니다. 지금도 우리 주위에는 희생양으로, 화해자로, 평화를 만드는 사람으로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그런 사람들입니다.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왕노릇하고,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생명이 왕노릇한다고 로마서에는 말합니다. 한 사람 예수님의 은혜로 생명이 있습니다. 이제 우리로 말미암아 생명이 만나는 사람들에게 생동하고, 생명이 용솟음치는 우리의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모나코라는 아주 작은 나라가 있습니다. 국민들은 음악을 사랑하며 범죄가 없는 곳입니다. 모나코가 평화로운 나라임을 증명해주는 중요한 예가 하나 있습니다. 이 나라에는 유명한 국립교향악단이 있는데「사랑과 평화 의 노래」로 국민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습니다. 단원은 85명.이 나라의 군인은 82명입니다. 교향악단 단원 수가 육해공군을 합친 수보다 많습니다. 인류에게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은 무력이 아니라 아름다운 음악이라는 사실을 증명해주고 있습니다.

* 예화(2) : 평화하라

1월 15일은 말틴 루터 킹 목사의 생일입니다. 레이건 대통령이 제창하고 의회가 승인하여 이 날을 국가 공휴일로 제정한 것은(86년부터 시행) 킹의 위치를 높이 평가한 결과입니다. 개인의 생일이 국가 공휴일로 제정된 것은 워싱톤과 링컨 다음가는 일입니다. 킹이 암살되던 1968년 4월 4일은 미국이 떠들썩 했었습니다. 이날125개 도시에서 폭동이 일어났고 46명이 죽었으며 21,270명이 체포되고 폭동 진압을 위하여 연방군과 방위대 5만5천명이 출동했었습니다. 39세에 암살될 때까지 15회 감옥에 갇혔습니다. 흑인을 위한 인권운동과 가난과 평화를 위한 그의 투쟁이 인정되어 64년 노벨평화상을 받았는데 최연소 평화상 수상의 기록을 깼습니다.(35세) 63년에는 타임즈지가 이 해의 인물로 선정했었습니다. 킹을 혹평한 것은 FBI 후버 국장 정도일 것입니다. 후버는 킹을 나라에 으뜸가는 거짓말장이라고 공격했었습니다. 킹은 데모에 나갈 때 즐겨 복음성가인 우리는 극복하리라를 노래했습니다. 확실한 기약은 없어도 언젠가는 인종차별과 굶주림과 전쟁이 없어질 것을 그는 믿었으며 현재의 고통과 부조리를 극복할 것을 호소했습니다. 그의 집에서 폭탄이 터져 대파괴었을 때 이웃과 동지들은 무장하고 복수에 나서려 했습니다. 킹은 그들에게 원수까지도 사랑하고 용서해야 한다고 역설했던 것입니다. 킹의 모든 사상은 예수의 박애사상에 의한 비폭력 무저항의 방법이었습니다. 그의 신조는 이러했습니다. "모든 인간은 형제요 자매이다. 내가 내 형제를 해하는 것은 곧 나 자신을 해하는 것이다." 63년 워싱톤 대행진 때 "나는 꿈을 갖는다"는 유명한 연설을 남겼습니다. 킹은 꿈의 인물이었습니다. 아무리 뿌리 깊은 미국의 인종차별주의도 킹의 꿈을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 예화(3): 최초의 노벨상 수상자 앙리 뒤낭

스위스의 장 앙리 뒤낭은 최초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던 사람입니다. 그는 스위스의 유명한 은행장이었습니다. 그의 꿈은 그 당시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프랑스의 황제 나폴레옹을 만나는 것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을 개인적으로 만나는 것뿐만 아니라 나폴레옹의 프랑스와 함께 경제 협력의 기회를 마련하려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의 꿈이 이루어질 기회가 왔습니다. 1859년 6월 스위스의 경제 사절로 프랑스에 간 그에게 황제를 만날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나폴레옹은 프랑스와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을 위해 전쟁터에 가고 없었습니다. 그러나 뒤낭은 실망하지 않고 꿈을 이루고자 위험한 이탈리아 북부의 솔페리노 전쟁터로 달려갔습니다. 프랑스 및 사르디니아 연합군 그리고 오스트리아군 사이의 참혹한 전투가 막 끝난 카스틸료네 마을에 도착했습니다. 거기서 그는 피투성이가 되어 뒹굴고 있는 수많은 시체를 보게 되었고 전쟁의 참혹함과 인간 생명의 허무함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전쟁은 끝이 났습니다. 그러나 뒤낭은 더 이상 나폴레옹을 만날 생각은 하지도 않은 채 그곳에 머물면서 오랫동안 의사를 도와 부상병을 돕고 시체들을 치우는 작업을 계속했습니다. 뒤낭은 나폴레옹을 만나겠다는 꿈을 버리고 새로운 꿈 하나를 간직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평화에 대한 꿈이었습니다. "전쟁은 이 세상에서 반드시 사라져야 한다. 그리고 전쟁터에서 부상당한 사람들을 도와주기 위해 나는 어떤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그는 이 생각을 잠시도 잊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몇몇 친구들과 함께 1859년 적극적으로 이 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국제적십자 운동의 시작이었습니다. 그는 제1회 노벨평화상을 수상하였고 이것은 조국 스위스와 전 세계의 평화를 위한 조직이 된 것입니다. 적십자의 기(旗)는 색상과 순서 배치만 다를 뿐 스위스와 국가와 똑같은 깃발입니다.

4. 평화에 관한 성경연구

가. 평화의 종류
1) 개인적인 평화(눅8:48)
2) 가정의 평화(고전7:15)
3) 인간 관계에서의 평화(롬12:18, 롬14:19)
4) 국가의 평화(수14:15, 왕상5:4)
5) 국제적 평화(삼상7:14, 왕상4:24)
6) 깨져야 할 세상의 거짓 평화(마10:34)
7)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오는 평화(롬5:1)
8) 메시야 왕국의 평화(사2:4)
9) 장차 천국에서 누릴 완전한 평화(계21:3,4)

나. 평화를 누리는 방법
1) 대적을 막아주시는 하나님의 손을 의지함(삼상7:13,14)
2) 화평의 일에 힘씀(롬14:19)
3) 평화의 때를 기다림(전3:8)
4) 타인의 평안을 빌어줌(마10:12, 13)

다. 하나님께서 평화를 주시는 양상
1) 모든 대적을 이기게 하심(신12:10)
2) 대적을 재앙도 없게 하심(왕상5:4)
3) 평안의 지도자를 보내심(대상22:9)
4) 권능과 위엄으로 베풀어주심(욥25:2)

라. 평화에 대한 자세
1) 평화의 말을 해야 함(신2:26)
2) 선전 포고하기 전에 먼저 평화를 선언함(신20:10)
3) 평화를 싫어하는 자가 되지 말아야 함(신20:12)
4) 평화로이 돕는 자가 되어야 함(대상12:17)
5) 하나님을 찾음으로 평화를 구해야 함(대하14:7)
6) 평화할 때가 지속되는 것을 감사해야 함(사39:8)
7) 좋은 소식을 전하며 평화를 공포해야 함(사52:7)
8) 평화를 말하나 중심에 해를 도모하는 자를 조심해야 함(렘9:8)
9) 평화하기를 힘쓰고 위하여 기도해야 함(렘29:7)
10) 평화의 때일수록 재앙의 때를 대비할 수 있어야 함(마24:42,43)
11) 참평화를 누리지 못하는 이에게 우리의 평화를 나누어주어야 함(롬1:7)
12)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아야 함(눅19:42)
13) 할 수 있거든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해야 함(롬12:18)
14) 평화를 말하기보다 실천에 힘써야 함(약2:16)

마. 평화를 구해야 할 이유
1) 하나님께서 주실 것을 약속하셨으므로(레26:6)
2) 하나님께서 평화의 언약을 세우셨으므로(민25:12)
3) 평화를 해치는 자를 하나님께서 벌하시므로(렘9:8)
4) 화평케 하는 자가 복이 있으므로(마5:9)
5) 하나님의 명령이므로(롬12:18)
6) 주를 뵈올 자로서 마땅히 추구할 바이기 때문에(히12:14)

바. 평화 추구의 명령
1)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막9:50)
2)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롬12:18)
3)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을 힘쓰라(롬14:19)
4)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히12:14)

5. 찬송: (468장) 내 맘에 한 노래 있어

내 맘에 한 노래있어 나 즐겁게 늘 부르네
이 노래를 부를 때에 큰 평화임하도다
평화 평화 하나님 주신 선물
오 크고 놀라운 평화 하나님 선물일세

6. 평화에 관한 금언
0 평화는 폭력에 의해서 유지될 수가 없다. 그것은 오직 이해를 통해서만 유지될 수가 있다.(아인슈타인)
0 평화는 인간의 행복하고 자연스런 상태이다. 전쟁은 인간의 타락이며, 수치이다.(제임스 톰슨)
0 평화의 대안은 전쟁이 아니다. 전멸일 뿐이다.(스윙)
0 평화도 전쟁 못지 않은 유명한 승리를 얻는다.(죤 밀톤)
0 옳지 못한 평화는 전쟁보다도 더 나쁘다.(타깃스)
0 평화를 지키는 것은 전쟁에 이기는 것보다 더 국가를 사랑하는 행위이다.
0 마음의 평정이 가장 좋다.(홀랜드)
0 아무 것도 모르는 자라도 마음의 평화를 유지할 줄 알면 그의 지식은 충분하다.(귀조 부인)

예화포커스(1- 50권)
목사이자 현직 고등학교 교사인 저자가 엮은 예화 백과사전이다. 추상적인 진리를 구체화하는 데 유용한 예화 중에서도 아주 감동적이고 신선하고 생동감 넘치는 것들을 가려 실었다. 이 예화집은 가정, 감사, 건강, 교회, 믿음, 교육, 소망, 사랑, 성공, 용서, 찬송, 행복, 등 각 주제별(전 50권)로 되어 있으며, 성경말씀, 명언, 묵상자료 등이 함께 수록되어 있다.
본서를 통해 목회자들은 은혜로운 설교를 하게 되고, 성도들은 하나님 제일주의로 사는 새사람이 되어 늘 샘물같은 기쁨이 넘치는 삶을 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한태완 목사 지음, 좋은땅, 각 권 값4,3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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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의 삶의 목표는 많은 사람을 옳은 길, 의로운 길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저는 교사와 목사가 되었고, 예화포커스(전 50권), 성경의 인물, 사랑의 빛 (전 20권), 기쁨의 샘(전 4권), 사랑덩어리, 당신을 사랑하오 등 기독교 서적을 100권 가까이 저술하였습니다. 이번에는 저의 설교집을 출판하고자 합니다. 출판에 협조하실 분은 꼭 연락바랍니다. 아울러 기도와 후원을 부탁드립니다.

한태완 목사 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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