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31,157
나의 현주소
어느 작품을 보면 이런 것이 있습니다. 자기 이름을 갑자기 잃어버린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아침에 명함을 찾으러 다녔으나 명함도 없고, 편지에도 수신인 이름이 없어지고 이력서도 없는, 현대의 인간 상실을 풍자한 이야기입니다. 어느 간사님은 양로원에서 기도는 하는데 막상 자신의 이름을 잃어버린 분을 보았다고 합니다. 얼굴이라는 것도 절대 자기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요즘은 복사 인간에 대해서도 많이 생각을 하는 모양입니다. 이반 카라노프스키의 작품을 보면 거울 앞에 서서 거기에 비친 자기 얼굴을 보고 분노를 하고, 죽이고 싶도록 증오를 합니다. 또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을 보면 전부 분열증 환자들입니다. 악마의 변신같이 아주 무서운 증오의 대상인 자기 얼굴을 보고 분노를 합니다. 그리고 키에르케고르의 작품을 보면 '나는 두 개의 얼굴을 가졌다. 하나의 얼굴로는 울고, 하나의 얼굴로는 웃는다. '는 구절이 있는데 제 3의 얼굴이니 열 두 개의 얼굴이니 하는 것도 있듯이, 요즘은 얼굴이 많을수록 사람들이 처세를 잘합니다. 어떤 때에는 슬픈 표정을 하고, 어떤 때에는 학자의 얼굴인 척합니다. 모두가 변해 버린 것입니다. 내 주소도 변하고, 가족 상황도 변해 버리고, 육체도 울음도 얼굴도 없고, 내 업적을 기록해 놓은 것들도, 나를 기억해 줄 사람들도 없어져 버릴 것이고, 남겨 놓은 기념관이나 비석도 언젠가는 다 없어져 버릴 것입니다. 억만 년이라도 지나가 버리면 일초와 마찬가지로 무(無)입니다. 요즘 철학자들은 '시간은 무이다. 그러므로 존재도 무이다. '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내 원주소가 있습니다. 현주소가 있습니다. 영원한 집이 있습니다. 주님의 눈동자 속에, 주님의 손바닥 속에, 주님의 생각 속에 주님의 심장 속에, 주님의 사랑 속에, 주님의 의지 속에, 주님의 존재 속에 내 이름이 있고 새 이름을 기록했다고 했습니다. 새 이름을 기록했는데 믿는 자밖에는 알지 못합니다. 횐 돌을 줄 터인데, 횐 돌에는 이름이 있고 새 이름은 받는 자밖에는 알지 못합니다. 주님 안에 나의 주소가 있습니다. 주님 안에 나의 모든 것이 있습니다. 주님은 모든 것의 모든 것입니다. 알파와 오메가입니다. 그 안에 새 하늘과 새 땅이 있습니다. 새로운 생명이 있습니다. 그 새 것 속에 우리들의 모든 것이 들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 속에서 살아야겠습니다.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롬7:18∼24)
/김준곤 목사
청량고등학교 교사 (등대교회 협동목사) 한 태 완
http://allcome.ce.ro,
http://je333.ce.ro, http://yehwa.ce.ro
어느 작품을 보면 이런 것이 있습니다. 자기 이름을 갑자기 잃어버린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아침에 명함을 찾으러 다녔으나 명함도 없고, 편지에도 수신인 이름이 없어지고 이력서도 없는, 현대의 인간 상실을 풍자한 이야기입니다. 어느 간사님은 양로원에서 기도는 하는데 막상 자신의 이름을 잃어버린 분을 보았다고 합니다. 얼굴이라는 것도 절대 자기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요즘은 복사 인간에 대해서도 많이 생각을 하는 모양입니다. 이반 카라노프스키의 작품을 보면 거울 앞에 서서 거기에 비친 자기 얼굴을 보고 분노를 하고, 죽이고 싶도록 증오를 합니다. 또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을 보면 전부 분열증 환자들입니다. 악마의 변신같이 아주 무서운 증오의 대상인 자기 얼굴을 보고 분노를 합니다. 그리고 키에르케고르의 작품을 보면 '나는 두 개의 얼굴을 가졌다. 하나의 얼굴로는 울고, 하나의 얼굴로는 웃는다. '는 구절이 있는데 제 3의 얼굴이니 열 두 개의 얼굴이니 하는 것도 있듯이, 요즘은 얼굴이 많을수록 사람들이 처세를 잘합니다. 어떤 때에는 슬픈 표정을 하고, 어떤 때에는 학자의 얼굴인 척합니다. 모두가 변해 버린 것입니다. 내 주소도 변하고, 가족 상황도 변해 버리고, 육체도 울음도 얼굴도 없고, 내 업적을 기록해 놓은 것들도, 나를 기억해 줄 사람들도 없어져 버릴 것이고, 남겨 놓은 기념관이나 비석도 언젠가는 다 없어져 버릴 것입니다. 억만 년이라도 지나가 버리면 일초와 마찬가지로 무(無)입니다. 요즘 철학자들은 '시간은 무이다. 그러므로 존재도 무이다. '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내 원주소가 있습니다. 현주소가 있습니다. 영원한 집이 있습니다. 주님의 눈동자 속에, 주님의 손바닥 속에, 주님의 생각 속에 주님의 심장 속에, 주님의 사랑 속에, 주님의 의지 속에, 주님의 존재 속에 내 이름이 있고 새 이름을 기록했다고 했습니다. 새 이름을 기록했는데 믿는 자밖에는 알지 못합니다. 횐 돌을 줄 터인데, 횐 돌에는 이름이 있고 새 이름은 받는 자밖에는 알지 못합니다. 주님 안에 나의 주소가 있습니다. 주님 안에 나의 모든 것이 있습니다. 주님은 모든 것의 모든 것입니다. 알파와 오메가입니다. 그 안에 새 하늘과 새 땅이 있습니다. 새로운 생명이 있습니다. 그 새 것 속에 우리들의 모든 것이 들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 속에서 살아야겠습니다.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롬7:18∼24)
/김준곤 목사
청량고등학교 교사 (등대교회 협동목사) 한 태 완
http://allcome.ce.ro,
http://je333.ce.ro, http://yehwa.ce.r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