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함과 위선

운영자............... 조회 수 498 추천 수 0 2001.11.03 20:5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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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함과 위선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추한 말을 하며 즐기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문제는 기독교인들의 모임에서도 추한 말을 하는 사람들을 가끔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남의 흉을 보거나 심지어 음란한 말을 하기도 한다. 허물없이 지내는 신자들끼리 모였을 때는 더욱 그렇다. 그런 분위기를 부담스러워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게 위선자로 치부되기도 한다. 자기도 똑같이 흉보는 걸 좋아하고 또 음란한 생각을 하면서 왜 아닌 척하느냐는 것이다.


과연 이렇게 추한 생각을 드러내놓고 말하는 것이 솔직한 것이고, 그런 말을 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은 위선적인 것인가? 물론 마음에 있는 대로 말하는 것은 솔직한 것이다. 그러므로 추한 생각을 말하는 것도 솔직한 것이다. 그러면 사람이 솔직하게 살기 위해서는, 추한 생각이 들 때는 추한 말을 해야하는가? 추한 마음이 있으면서도 추한 말을 하지 않는 것은 위선인가?


그렇지 않다. 마음에 있는 악한 생각을 그대로 말하는 것은 솔직할지는 몰라도 옳지는 않다. 그것은 무절제한 것이다. 여기서 솔직함과 위선, 그리고 절제와 무절제를 생각해보는 것이 유익할 것이다.


솔직하다는 것은 실제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을 말한다. 마음에 있는 것을 그대로 드러내고 평소 자신의 모습도 그대로 보여준다. 반면에 위선(僞善)은 실제의 모습과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양상이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위선’이라는 단어는 배우들이 쓰는 ‘가면’이라는 단어에서 온 말이다. 배우가 가면으로 자신의 모습은 숨기고 가면의 모습을 한 다른 사람처럼 행동하는 것같이, 위선은 실제의 자기와는 다른 사람인 것처럼 행동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솔직함과 위선은 정반대가 된다. 솔직하면 위선적이지 않고 위선적이면 솔직하지 않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마음이 표현되는 두 가지 모습이 있다. 하나는 절제(節制)고 다른 하나는 무절제(無節制)다. 위선을 부리지 않고 자기 마음을 솔직하게 표현한다 하더라도 그 표현은 절제하며 표현되는 것일 수도 있고 무절제하게 표현될 수도 있다. 나중에 살펴보겠지만 절제가 반드시 위선은 아니다.


이렇게 볼 때 사람이 마음을 표현하는 방법에는 솔직함, 위선, 절제, 무절제가 있는데, 이 네 가지는 다음의 세 가지 모습으로 나타난다.


① 솔직하고 무절제한 경우


② 솔직하고 절제하는 경우


③ 위선적인 경우 : 이 경우는 거짓이므로 절제와 무절제의 차이에 별다른 의미가 없다.




위선은 절제와 다르다




이 중에 ‘솔직하고 무절제한 것’은 있는 그대로 다 보여주는 것이므로 분명히 위선과는 다르다. 그러면 ‘솔직하고 절제하는 것’과 ‘위선적인 것’은 서로 다른가?


솔직하면서 절제하는 경우는 결코 악한 마음이 있다는 사실 자체를 부인하지는 않는다. 예를 들어 많은 사람이 어떤 사람을 비난할 때 자기도 그 사람을 싫어하면 결코 그 사람을 사랑하는 체하지 않는다. 자신도 연약한 사람으로서 그 사람을 향한 나쁜 감정이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 사람을 비난하지는 않는다. 남을 비난하는 행동을 절제하는 것이다. 이것은 자신의 마음이 그렇지 않은 체하는 위선이 아니다. 다만 그 악한 마음이 행동으로 나오지 않도록 절제하는 것이다. 이런 절제는 성령의 열매라고 할 만큼 신앙생활에서 중요하다.


반면에 위선이란, 자기도 그 사람을 싫어하면서, 자기는 신앙심이 깊어 그 사람을 사랑하고 있는 것처럼 행동한다.


그러므로 절제는 자신의 부족함을 숨기지 않으면서도 그 부족함 때문에 발생되는 악한 언행은 피하려고 통제하는 것이고, 위선은 자신의 부족함을 숨기고 자신이 의로운 사람인 체하는 것이다.


그런데 많은 신자들이 절제와 위선을 구별하지 못하여 악을 자행한다. 그들은 악한 말을 쉽게 하면서 마치 자신은 솔직한 의인인 것처럼 착각하고 오히려 절제하는 사람을 위선자라고 비난한다. 이것은 심각하게 잘못되었다. 평소에 거룩하게 살 것으로 기대되는 사람들이 은폐된 장소에서는 이런 행동을 하는 경우가 많다. 이것은 연약한 인간이 악한 모습을 절제하지 못해 저지른 잘못된 행동이지 결코 솔직함에서 나온 옳은 행동은 아니다.


그러면 이제는 악한 마음이 언행으로 나타나지 않도록 통제하는 것을 넘어서 선한 마음이 없는데도 선을 행하는 문제를 생각해보려고 한다. 성경은 우리가 바른 마음으로 선행을 해야 참된 선행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그런 선행을 하고 싶은 마음이 없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마음에 없는 행동을 하는 것은 위선이니까 선한 마음이 생길 때까지 선행을 하지 말아야 할까?


이것도 위에서 살펴본 것과 같은 원리로 생각할 수 있다. 물론 선한 마음으로 선행을 하지 않고 기다려야 하는 것은 아니다. 선한 일을 하고 싶은 감정이 아직 생기지 않는다 하더라도 이성적으로 그 일을 해야 한다는 판단을 내리게 되면 그 일을 하는 것이 옳다.


예를 들어, 내가 미워하는 사람이 어려움을 겪는다고 하자. 나는 그가 잘 되기를 바라지도 않고 돕고 싶은 마음도 없다. 그러면 그가 잘 되기를 바라는 사랑의 마음이 생길 때까지 그를 돕지 말아야 하는가? 그렇지 않다. 내가 그를 사랑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를 돕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 줄 알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마음으로 그를 돕는다면 그것은 좋은 일이다. 그를 사랑하여 한 선행은 아니지만 최소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 행동을 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위선이 아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자신의 증오심을 극복하고 한 행동이기 때문에 좋은 일이다. 다만 이때 그를 사랑하는 체하며 자신의 행동을 과장하지 말아야 한다. 그 정도의 선행으로 자신이 훌륭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도 말아야 한다.


완전한 사랑의 선행이 아니어도 자신의 감정을 신앙으로 극복하고 선행을 하는 것이 우리에게 필요하다. 거기에는 세 가지 유익이 있다. 첫째, 그 행동 자체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둘째, 그것이 실제로 이웃에게 유익이 되며, 셋째, 그런 행동이 사랑을 자라게 한다. 마음에 없어도 하나님이 원하시므로 하나님을 생각하며 행동하다보면 우리에게 참된 사랑의 마음이 생겨나게 된다. 반대로 마음에 없다고 행동하지 않다 보면 그나마 조금 있던 사랑도 식게되고 마음은 더욱 삭막해진다. 이런 모습을 “내용이 형식보다 중요하지만, 형식이 내용을 지켜주기도 한다”는 말로 표현할 수 있다.


우리는 위선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위선자가 되지 않는 것과 절제도 하지 않는 것은 서로 다르다. 우리는 자신의 약함이나 추함을 숨기고 선한 체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면서 동시에 추한 마음을 절제하여 추한 언행을 삼가야 하고, 악한 마음을 극복하며 선행을 해야한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고, 아울러 우리 신앙도 성장될 수 있다.






청량고등학교 교사 (등대교회 협동목사) 한 태 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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