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터치

복음............... 조회 수 2216 추천 수 0 2004.04.26 14:3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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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터치



본문: 마27: 38- 50



예수님의 생애와 사역에서 성령 터치가 첫 번째였습니다. 성령 터치는 보통 사람을 특별한 사람으로 만드는 사건이었고, 자연적인 것을 초자연적인 것으로 만드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성령 터치로 시작하는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두 번째는 말씀 터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사탄의 유혹과 계략을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물리치셨습니다. 사탄을 내쫓는 방법은 하나님의 권능의 말씀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신명기에 기록된 말씀으로 사탄의 간악한 유혹을 물리치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세 번째는 침묵 터치였습니다. 성령님께서 임하시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마귀를 물리치신 후, 예수님의 사역에 초자연적 기적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병자들을 낫게 하시고 귀신들을 물리치시며 죽은 자를 살리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많은 기적을 행하시자 동시에 사람들의 환호와 갈채가 드높아졌습니다. 당시 사람들의 인기는 예수님께 집중돼 있었습니다. 사람들의 환호성과 박수 소리가 높을 때, 예수님께서 선택한 방법은 사람들의 인기에 야합하시지 않고 조용히 떠나 홀로 산으로 가셔서 밤을 새워 기도하신 것입니다. 고독하고 외롭게 단독으로 하나님 앞에서 침묵 터치하셨습니다.

네 번째는 기도 터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실 때까지 가시는 걸음을 조금도 흩뜨리지 않고 마침내 갈보리 산에 이르셨습니다. 예수님의 생애에서 마지막으로 겪어야 했던 시험은 십자가를 지는 일이었습니다. 사탄은 예수님께 십자가를 질 필요가 없다고 유혹했습니다. 사탄은 너무나 집요하고 광폭하게 예수님을 회유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겨야 하는 시간을 갖게 되었습니다. 사탄의 강한 유혹에도 예수님께서 승리하실 수 있었던 비결은 땀이 핏방울처럼 떨어지도록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기도 터치였습니다.



십자가는 ‘고난’

지금까지 살펴 본 바와 같이 예수님께서 성령 터치, 말씀 터치, 침묵 터치, 기도 터치를 통해 십자가를 지는 길을 흔들림 없이 가셨습니다. 이제 드디어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십니다. 십자가란 한마디로 고난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다는 것은 소풍가는 것도 아니고 낭만적인 일은 더욱 아닙니다. 인간이 겪을 수 있는 정신적 육체적 고통들이 모두 집중돼 있는 것이 십자가를 지는 일입니다. 예수님의 생애에서 정점은 십자가를 지시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토록 무섭고 고통스러운 저주의 십자가를 지실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요? 여기에서 예수님의 ‘고난 터치’가 시작된 것입니다. 고난 터치는 고난에 대한 예수님의 응답으로서 고난으로 고난을 이기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고난을 친히 담당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셔야 모든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마귀의 유혹이 계속 되는 가운데 예수님께서 어떻게 험한 십자가를 지실 수 있겠습니까?

사람들의 환호와 갈채의 유혹을 기도로 뿌리칠 수 있었다면, 고난의 현장은 어떤 방법으로 이길 수 있겠습니까? 해답은 한 가지뿐입니다. 고난 받기를 택하시고 직접 뛰어들어 고난을 이기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다섯 번째로 예수님의 ‘고난 터치’입니다. 모두 38절 말씀에 주목합니다.

“이 때에 예수와 함께 강도 둘이 십자가에 못 박히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참으로 묘한 상황입니다. 예수님께서 홀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아니라, 양쪽에 두 강도와 함께 매달리신 것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모욕하기 위해 양쪽에 있는 강도들과 동질의 죽음이라고 단정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특별한 것이 아니라 십자가 형을 선고받는 양쪽의 두 강도와 같은 죄인의 죽음이라며 애써 의미를 축소했습니다.



근본적으로 다른 예수님의 십자가

그러나 예수님께서 양쪽에 두 강도와 함께 십자가에 달리신 것은 세 가지 메시지를 던져 줍니다. 하나, 예수님께서 지신 십자가와 두 강도가 진 십자가는 형태가 같을지 몰라도 본질적으로 전혀 다른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곧 하나님 아들의 죽음입니다. 그러나 두 강도의 죽음은 죄를 지어 심판을 받은 죄인의 죽음입니다. 예수님의 고난은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고난입니다. 그러나 두 강도의 고난은 자신들의 범죄로 인해 죄인들이 받는 고난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모든 인류의 죄를 씻어주십니다. 하지만 두 강도의 죽음은 사람들의 죄를 씻어주지 못합니다.

둘, 두 강도는 인류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그림입니다. 두 강도는 자타가 인정하는 십자가 형에 해당하는 범죄를 저질렀습니다. 사형 당해야 할 죄인이 예수님 때문에 살아난 흉악범 바나바도 있습니다. 모든 인류는 십자가의 두 강도처럼 죄를 범해 하나님의 영광에서 떠나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 3장 23절에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예수님 바로 옆에 있던 두 강도들 중에 한 명은 구원을 받고, 한 명은 구원을 받지 못했던 사실입니다. 이는 모든 인류에 대한 구원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어차피 인간은 허물과 죄로 죽었던 진노의 자식들이요, 공중 권세 잡은 자를 따랐던 죄의 노예들입니다. 따라서 인간이 선택한 길은 죽음이고 지옥이며, 이미 사망 선고가 내려진 상태입니다.

예수님께서 중앙에 있고 양 옆에 두 강도가 있습니다. 한 강도는 계속해 예수님을 저주합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 너 자신이나 구원해 봐라’. 인류의 반은 예수님을 저주하는 왼편 강도와 같은 분류입니다. 자신이 지은 죄로 심판을 받아 죽음을 맞이할 뿐인데, 예수님에게 조롱하며 핍박을 가합니다.

인류의 나머지 반은 인간으로서 죄를 지어 십자가에 달린 것을 회개하고 예수님께 구원을 요청하는 오른 편 강도와 같은 분류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저주하는 강도에게 ‘너와 나는 죄값을 받아 마땅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무슨 죄가 있느냐’고 나무라며 오히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 나를 기억하소서’라고 부탁합니다.

셋, 사람이 과거에 어떤 죄를 지었든지 숨이 끊어지는 순간에 예수님께 구원을 요청하면 응답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자살한 사람을 두고 지옥으로 갔다고 함부로 단정할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사람을 두고 그가 구원을 받았다, 못 받았다고 함부로 말해선 안 됩니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속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의 아내가 미국에 있는 친구에게서 걸려온 전화를 받고 나서, 혼수상태에 빠진 사람이 세례를 받지 못하고 죽을까 봐 노심초사했습니다. 그러면서 저에게 어찌하든 그 사람에게 가서 세례를 주고 오라고 했습니다. 저는 하는 수 없이 미국에 있는 유진소 목사님께 부탁했습니다. 사람이 깨어나야 예수님을 믿으라고 전할 텐데, 그 사람은 깨어날 기미를 전혀 보이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래도 유 목사님은 병상으로 다가가 기도하고 있는데, 그 사람이 벌떡 일어나더랍니다. 너무 놀란 나머지 당신에게 세례를 주러 왔다고 하자, 세례를 받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세례를 주니 다시 쓰러져 하늘나라로 갔습니다. 이와 같이 사람의 구원 문제에 대해선 모르는 것입니다.



사탄의 조종을 받는 인간의 폭력성

최근에 ‘그리스도의 수난’(The Passion of Christ)라는 영화가 상영되고 있습니다. 온누리교회 성도님들은 모두 이 영화를 감상하셨으면 좋겠습니다. 그 영화는 우리에게 너무나 큰 충격과 동시에 감동을 안겨줍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까지 12시간 동안의 고난을 너무 실감나게 그려 놓아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게 만듭니다.

영화에 대한 후감은 한마디로 몸서리가 쳐집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무자비하게 얻어맞고 많은 모욕을 당하며 이리저리 끌려 다니다 마침내 사형 선고를 받으십니다. 저는 영화를 보는 동안 인간의 잔인함에 대해 내내 생각했습니다. 피에 굶주린 인간들은 예수님을 때리다가 끝 부분에 쇠붙이가 달려 있는 로마 당시의 채찍으로 막무가내로 후려칩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저는 인간의 원죄적 폭력성을 실감했습니다. 인간에게 내재된 폭력성은 이성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이와 비슷한 장면을 우리는 TV 뉴스에서 종종 보게 됩니다. 아프간과 이라크의 전쟁에서 발견되는 인간의 폭력성, 세계 곳곳에서 발생하는 자살 폭탄 테러, 국내는 현대그룹의 정몽헌 회장, 부산의 안상영 시장, 대우건설의 남상국 사장 등 자살의 영이 가득한 현상 등입니다. 국내뿐 아니라 세계 도처에서 자살의 영이 유행처럼 번져 이 땅을 점령하고 있습니다.

저는 한국이 잘사느냐 못사느냐 하는 문제엔 관심이 없습니다. 한국은 영적 부흥의 혁명이 일어나야 합니다. 사회적 약자와 어린이를 착취하는 사회 현상에서 더 많은 돈을 벌게 한다는 것은 인간 폭력성의 신장 외에 별다른 의미가 없다고 봅니다. 예수님을 모욕하고 십자가에 매달아 처형하는 사람들은 단순히 예수님을 때리고 사형 시키는 것이 아니라, 내면에 감춰져 있는 인간의 잔인함과 폭력성을 그대로 노출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분노를 발하며 폭력을 행사하는 사람들을 살펴보면, 그들의 배후에 사탄의 그림자가 맴돌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화를 내며 발버둥치는 사람을 보면, 제정신이 아닌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이는 인간에게 내재돼 있는 분노, 파괴, 폭력의 본능인 것입니다. 이를 인간들은 도덕, 교양, 이성이라는 이름으로 극도로 자제하고 있을 뿐입니다. 39~42절 말씀입니다.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가로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며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함께 희롱하여 가로되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저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러면 우리가 믿겠노라.”

조롱 뒤에 폭력이 따르게 마련입니다. 예수님에게 조롱하고 폭력을 휘두른 사람들 중에 로마 병정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유대 지도자들과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 매수된 하수인들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피에 굶주린 군중들이 있었습니다. 군중들은 분노를 발하며 성난 파도처럼 움직입니다. 이성을 잃고 정의라는 이름으로 순식간에 폭도로 돌변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폭력의 본질입니다.



고난으로 고난을 이기시다

우리는 인간의 분노와 폭력성을 자극해 자기 목적을 달성해선 안 됩니다. 요즘 TV를 보면, 자기 안에 있는 폭력성과 잔인성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선 우리는 예수님을 향한 사람들이 조롱하는 소리를 듣게 됩니다. 다음으로 우리는 채찍을 치는 소리를 듣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조롱과 폭력에도 변하지 않는 예수님의 얼굴을 발견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얼굴은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인류의 모든 죄를 지신 하나님의 아들로서 조금도 흩뜨려지지 않은 삶의 모습을 통해 예수님의 얼굴을 그릴 수 있습니다. 이는 ‘고난 터치’의 결과로 고난을 피하거나 거부하시지 않고 고난 속으로 들어가셔서 승리하신 모습입니다.

조롱, 폭력, 채찍, 가시면류관, 십자가의 처형을 원망하시거나 거부하시지 않고 그대로 수용하셨습니다. 많은 고난이 엎치고 덮쳐도 그대로 받아들이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고난을 통해 세 가지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께서 스스로 죽음으로 가셨다는 것입니다. 둘째, 상대방이 폭력으로 나올 때 비폭력으로 맞섰다는 것입니다. 셋째, 자신에게 고통을 주는 사람을 위해 기도하신 것입니다. 스데반은 사람들이 던지는 돌에 맞아 죽으면서도 ‘아버지여, 저들이 하는 일을 저들도 모릅니다. 저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고난 터치는 고난을 겪는다는 것이 아니라, 고난이 닥쳐와도 물러서지 않고 이겨낸다는 것입니다. 폭력에 맞서 비폭력으로 이기고, 미움에 맞서 중보 기도로 이기는 것입니다. 죽음을 받아들임으로써 죽음을 이기고, 고난을 받아들임으로써 고난을 이기는 것입니다. 43, 44절 말씀입니다.

“저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저를 기뻐하시면 이제 구원하실지라 제 말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도다 하며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도 이와 같이 욕하더라.”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핍박을 받으신 근본 이유는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하신 것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받으신 고난의 정점은 십자가에 달리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외면이었습니다.



십자가에서 버림받으신 예수님

우리는 조롱을 받고 핍박을 당하며 손가락질 받아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면 곧 위로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외면하신다고 느낀다면 망연자실하고 맙니다. 45, 46절 말씀을 봅니다.

“제 육 시로부터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여 제 구 시까지 계속하더니 제 구 시 즈음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가라사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갈보리산의 십자가 처형에서 절정은 예수님께서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외치신 부분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외면을 경험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외면하시고 떠나신다는 것은 너무나 힘들며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이를 좀더 자세히 말하면,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서 아주 떠나신 것을 뜻하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인류의 모든 죄를 지시고 십자가에 못 박혔기 때문에 죄와 상관없으신 하나님께서 예수님께서 담당하신 인간의 죄에 대해 외면하신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외면하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지신 인류의 죄를 대속하신 순간만큼 하나님께서 죄에 대해 외면하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죄를 외면하시고 예수님마저 버리셨지만 결과는 모든 인류가 구원을 받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47절에서 50절 말씀까지 읽습니다.

“거기 섰던 자 중 어떤 이들이 듣고 가로되 이 사람이 엘리야를 부른다 하고 그 중에 한 사람이 곧 달려가서 해융을 가지고 신 포도주를 머금게 하여 갈대에 꿰어 마시우거늘 그 남은 사람들이 가로되 가만 두어라 엘리야가 와서 저를 구원하나 보자 하더라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다.”

여기서 우리는 부활이 의미를 되새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님을 버리셨기 때문에 의미가 큰 것입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 죽음을 거부하지 않고 고난 받기를 수용하셨습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죽음을 피하셨더라면, 인간의 죄는 사함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온 인류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 고난을 피하시지 않고 고난 받기를 수용하시고 승리하셨습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께서 지시는 십자가의 의미를 이사야서 53장 4~6절 말씀에서 찾아봅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예수님께서 고난을 받으셨으므로 우리가 평화를 얻었고, 채찍에 맞으셨으므로 우리가 나음을 받았습니다. 할렐루야! 예수님의 고난을 묵상하는 한 주간이 되어 진정한 고난의 의미를 해석할 수 있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 기도합시다 :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이

우리의 죄를 씻어 주시고 예수님께서 맞으신 채찍이

우리의 병을 낫게 하시며, 우리의 절망을 치료해 주신

놀라운 은혜를 찬양합니다. 오늘 성도님들이 성만찬을 나눌 때 이 축복이 넘치게 하여 주옵시고 또 영상을 볼 때

십자가를 깊이 묵상하는 축복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용조 목사



하나님 코와 귀



임진왜란 때의 일이다.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으로 20만명의 왜군이 조선을 침략해 초토화시켰다. 일본군은 그 과정에서 상부 명령에 따라 조선인의 코와 귀를 베어갔다. 썩지 않도록 소금에 절여 일본 교토로 가져간 수만 12만6000개나 됐다고 한다.



영령을 위로한답시고 무덤까지 만들었는데, 귀무덤으로 불려왔다. 그 무덤이 400년 만에 한국으로 돌아와 지난달 초, 경남 사천의 모처에 안장됐다. 코와 귀까지 베이는 수모와 고난을 겪으며 우리는 참으로 가슴 아픈 역사를 이어가고 있다.

이 땅의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도 코와 귀가 베인 채 고난당하시는 분일 수밖에 없다. 썩고 타락하고 욕하고 죽임으로써 우리 자신의 코와 귀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코와 귀까지 베고 틀어막으며, 내 멋대로 살려고 하기 때문이다. 하늘이 울고 땅이 통곡할 노릇이다. 이를 어찌할꼬.

/박종화 목사<경동교회>



인생은 끝이 있고, 천국과 지옥의 갈림길이 있습니다. 당신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나요. 주님의 품만이 참된 평안과 축복 그리고 영원한 천국의 길입니다. 그 길을 하나교회에서 안내하고 있습니다. 하나교회 온 가족과 주님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 하나 교회에 오시면

1.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예배를 통해서 우리는 이 세상을 만드신 참 신이신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우리 교회에서 다양한 예배 형식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2. 좋은 말씀을 만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들려주시는 말씀은 성경말씀과 목사님의 설교를 통해서 주십니다. 알아듣기 쉽게 그리고 우리의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말씀을 통해서 들을 수 있고 깨닫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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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을 수 있는 사람, 친구를 만나기가 쉽지 않은 시절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사랑에 녹은 진실한 사람들이 여기 있습니다. 함께 사랑과 우정을 만들어 가고자 합니다.



하나교회의 비전

1. 365일 예배드리는 교회(히10: 25)

오늘날 죄악이 만연한 세상에서 매일 말씀을 읽고, 듣지 않으면 하나님이 기뻐하는 삶을 살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매일 거울을 들여다보듯이 말씀의 거울을 통해 매일 마음을 바르고 깨끗이 하여서 예수와 복음을 위해 헌신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막8:35)

2. 더불어 사는 공동체 (행2:42- 47)

하나님은 영의 하나님이실 뿐 아니라 우리의 육신까지도 돌보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천국에 대한 소망뿐 아니라 이 세상에서도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어야 합니다. 따라서 하나교회는 모든 성도가 그리스도안에서 한 가족이 되고, 교회 직영 사업을 통해 청장년의 일자리 마련, 노후생활 보장 등의 꿈과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3. 의와 평강과 희락이 넘치는 교회(롬14: 17)

정의롭고(선행에 힘쓰고), 근심, 걱정, 두려움이 없고(기도에 힘쓰고) 기쁨과 찬송이 넘치는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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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는 사랑의 종교입니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

이러한 꿈과 비전이 있는 교회를 개척하고자 합니다. 연락바랍니다.



하나 교회 한 태 완 목사

전화: 016-9219-3049, 자택: (02) 959-3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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