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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숙한 신앙
본문: 고전3:1-9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치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 너희가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어떤 이는 말하되 나는 바울에게라 하고 다른 이는 나는 아볼로에게라 하니 너희가 사람이 아니리요. 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뇨 저희는 주께서 각각 주신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뿐이니라. 심는 이와 물주는 이가 일반이나 각각 자기의 일하는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
할렐루야, 성숙한 신앙이라는 제목으로 말씀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성숙한 신앙의 특징이 무엇일까요? 성경지식이 많아서 성숙한 신앙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또 은사나 어떤 체험이 많으면 성숙한 신앙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혹은 말을 잘하면, 신앙고백을 멋들어지게 잘 하면 성숙한 신앙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아닙니다! 지식도 아니고 은사도 아니고 체험도 아니고 또 말을 잘해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성숙한 신앙은 그런데 있지 않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많은 장점을 가지고 있었던 교회였습니다. 지식이 풍성했습니다. 은사도 많았습니다. 체험도 많았습니다. 그리고 구변도 좋았습니다. 언변도 좋았고 나름대로 유창하게 복음을 고백하고 전할 수도 있었던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그러한 고린도 교회를 향해서 "너희가 아직도 어린아이다, 신앙적으로 미숙하다, 아직도 육신에 속한 신자들이다"라고 평가를 하고있습니다. 고린도 교회의 문제가 무엇이었습니까? 고린도 교회가 안고 있었던 문제는 하나되지 못하는 것에 있었습니다.
하나되지 못한 것..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인 교회가 하나되지 못하는 것만큼 비극적인 것은 없습니다. 세상에 가장 가치 없는 교회는 하나되지 못하는 교회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였는데 하나되지 못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지 않거나 부인하거나 혹은 알아도 잘못 아는 것입니다. 정말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라는 깃발 아래 모였다면 하나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교회가 하나되지 못하는 것은 가장 큰 비극이고 그래서 교회가 하나되지 못하면 교회는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는 것입니다. 세상에 존재할 가치가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러분 교회가 하나되지 못할까요? 왜 서로가 사랑하지 못할까요? 이유가 뭘까요? 그 이유는 한가지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고 사람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면 하나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서로를 바라보면 우리는 다투고 분쟁하고 질투하고 싸우는 것입니다. 특히 우리나라는 분열하는 것을 좋아하는 성격이 있습니다. 우리나라 역사를 보면 그렇게 당쟁이 많을 수 없습니다. 그렇게 파랑이 많을 수 없었어요. 우리나라는 유일한 분단국가예요. 남북만 분열된 게 아니라 동서도 분열되었어요.
하나되지 못하는 것.. 여러분 고린도 교회의 문제는 바로 하나되지 못하는 것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온갖 지식과 능력과 은사와 여러 가지 환상과 여러 가지 신비한 체험을 많이 가지고 있었지만은 그러나 그들이 모일 때마다 누가 더 큰 은사를 가졌고 누가 더 위대한 은사를 가졌으며 누가 더 똑똑하며 누가 더 영적이며 누가 더 신앙적이며 누가 더 상을 많이 받을 것인가 이런 등등의 문제를 가지고 서로 토론했고 때론 열띤 논쟁을 벌였고 그런 격렬한 논쟁 끝에 상대방을 무시하고 또한 상대방이 가진 은사들과 그 직분들을 무시 했습니다. 자기들이 받은 은사가 최고다 내가 받은 은사가 더 우월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서로 열띤 논쟁을 벌였고 또 내가 더 영적인 사람이라는 것을 내세우기 위해서 '나는 누구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 나는 바울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 나는 베드로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 나는 아볼로의 제자다' 이런 문제를 가지고 서로 바울파, 베드로파, 아볼로파.. 아니다 나는 예수파다 이렇게 사분 오열로 나뉘어지게 되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왜 그리스도의 몸이 나뉘어 졌습니까? 여러분, 신령하다는 것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오해하고 있습니다. 신령하다 혹은 거룩하다 혹은 영적이다 혹은 성숙하다 다 같은 말인데 어떤 지식이나 체험에 있는줄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절대로 그렇지 않아요. 지식이나 체험이나 어떤 은사에 있지 않습니다. 그런 것들이 성숙함의 표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그러한 것들이 많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도바울이 "너희가 어린아이다 네가 육에 속한 그리스도인이다 네가 아직도 미숙하구나 아직도 신앙에 있어서 초보자들이다"이렇게 평가를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사람을 크게 두 부류로 나눕니다. 하나는 거듭난 사람이고 하나는 거듭나지 못한 자연인입니다. 중생한 사람, 중생하지 못한 자연인.. 그리고 거듭난 사람도 역시 두 부류로 나눕니다. 중생한 사람들도 두 부류예요 하나는 영에 속한 그리스도인 또 하나는 육에 속한 그리스도인입니다. 똑같이 구원받았고, 거듭났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는 영적이고 하나는 세속적이고 하나는 신령하며 하나는 신령하지 못하며 하나는 성숙하며 하나는 미숙하지 못하며, 하나는 영에 속해있고 하나는 육에 속해 있습니다. 육에 속했다 혹은 영에속했다,, 말뜻이 조금 어렵지요? 그렇습니다. 우리가 성령과 말씀으로 거듭나면 곧바로 우리가 성숙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곧바로 영에 속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 속 사람이 변했지, 우리 육신과 우리의 마음은 여전히 그대로 남아 있는 거예요. 내 속에 새로운 영이 들어왔는데 그러나 그 영을 품고있는 우리의 마음과 우리의 육체는 여전히 옛 것이예요. 여전히 그렇게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거듭난 이후에는 영과 육이 싸우는 것입니다. 내 속에 있는 영은 끊임없이 하나님을 추구하는 반면에 이 육의본성, 이 육적인 본성은 끊임없이 세상을 추구하는 그런 속성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거듭난 이후에는 영과 육이 서로 전쟁에 있는 것입니다. 서로 싸우는 것입니다. 갈등 관계에 있어요. 이건 줄다리기와 같습니다. 이것이 영적 전투입니다. 이 영적 전투는 내 밖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전쟁이예요. 영과 육이 싸우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려고 하는 영적인 속성과 이유없이 하나님을 거부하고 세상을 바라보려고 하는 육적인 속성이 싸우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디에다가 물을 주느냐에 따라 달려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씀과 기도로 우리 영에 물을 주고 영에 비료를 주고 영에 우리가 투자를 할 때 우리 영이 살아나는 것입니다. 여러분 신앙이 성숙해간다는 것은 바로 육적인 속성을 벗어버리고 점점 영적으로 되어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영이 육신을 다스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 마음과 육체가 이 영의 지배아래 들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이 영적인 사람이고 신령한 사람입니다. 반대로 육적인 그리스도인은 어떤 사람입니까? 그 영은 살아있어요. 하나님을 인정합니다.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런데영이 마음의 지배를 받아요. 육신의 지배를 받아요. 영이 지배를 해야하는데 오히려 지배를 받는 거예요. 마음이 그리고 육체가 영을 지배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육에 속한 그리스도인입니다. 육신에 속한 사람의 특징은 크게 세 가지가 있습니다.
육신에 속한 그리스도인의 특징 첫 번째로 육신적인 신자는 사람을 좋아합니다. 그리고 사람중심으로 살아갑니다. '나는 베드로파, 바울파, 아볼로파..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 사람을 더 좋아해요. 나는 바울이 더 좋다, 나는 베드로가 더 좋다,,' 그런 문제를 가지고 다투는 거예요. 여전히 사람 중심으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영향을 더 많이 받는 거예요. 여러분 생각해보세요 내가 정말 사랑하는 사람, 내가 정말 존경하는 분이 내 스승이 되고 내 선배가 되고 나를 가르쳐주는 지도자가 되었을때는 신앙이 막 무럭무럭 자라다가 전혀 그렇지 않은 사람 아래서 내가 배우고 가르침 받을때는 금방 힘들어하고 그럴 때.. 여전히 육신적이라는 것이죠, 영적인 사람은 그런 사람의 속성에 흔들리지 않습니다.
두 번째 특성은 그렇기 때문에 감정의 기복이 심합니다. 상황에 따라서 잘 흔들려요, 무게 중심을 아십니까? 배가 무게중심이 얕으면 잘 전복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신앙의 무게중심이 얕으면 잘 넘어져요. 상황이 흔들리고 내 뜻대로 되지 않거나 갑자기 예상치 못하는 일이 닥쳤을 때 갑자기 당황하고 힘들어하는 것이죠. 무게 중심이 깊은 배는 왠만한 풍랑이 불어도 넘어지지 않습니다. 전복되지 않아요. 육에 속한 그리스도인은 사람을 바라보고 사람을 따라서 신앙이 올라갔다가 내려갔다가.. 또 때로는 감정과 상황에 따라서 기복이 심해요. 그러나 영적인 신자는 변함없어요. 흔들림 없습니다. 풍랑이 불어도 잔잔해도 제 갈 길을 가는 것입니다. 의의 길로 가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특징은 지각을 사용하지 못합니다. 본문 2절을 보시면 '내가 너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를 감당치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했다' 고 되어 있습니다. 히브리서 5장 11-14절 말씀을 보시면 젖이나 먹고 마찬가지로 육에 속한 신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잘 깨닫지 못해요. 그렇게 때문에 그들은 지각을 사용할 줄 모르고 감각을 사용합니다.. 예를 들어 '어젯밤 꿈이 두숭숭했어 오늘은..차를 몰고 가지말고 지하철을 타고 출근해야지' 하는 등 느낌에 의존하는 것입니다... 느낌과 상관없이 하나님 말씀이 뭐라고 말씀하는 것인지 관심이 없어요. 자기 감각에 의존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성숙한 신자, 다시 말해서 영적인 신자, 영에 속한 그리스도인의 특징은 그들의 특징은 밥을 먹을 줄 안다는 것입니다. 단단한 식물을 소화할 줄 안다는 것입니다. 밥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꿈이나 환상이나 계시를 통해서 하나님들 분별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나님의 뜻을 압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성경으로 충권합니다. 기도와 말씀으로 충권합니다. 느낌보다 사실을 더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자기 감정보다 하나님의 말씀이 뭐라고 말씀하는 것인지 그것도 또한 중요하다. 또 ,이 영적인사람의 특징은 지각을 사용할 뿐만 아니라 자기를 돌아볼 줄 알아요. 형제가 잘못했을 때 자기를 돌아봅니다. 이웃이 실패하고 넘어질 때 자기를 돌아보고 두려워할 줄 알아요 .그런데 성숙하지 못한 사람은 자기를돌아보지 못하고 남을 맹렬하게 비판하죠?.. 여러분! 오늘 어떻게 영적인 신자가 될 수 있습니까? 고린도전서 3장 1-9절 말씀을 보면 사도 바울이 말씀하는 것은 한가지입니다. 사람은 바라보지 말고 하나님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는 하나님의 밭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집이라는 것입니다. 자라나게 하시는 분은 사람이 아니고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물론 미숙할 때 젖이나 먹는 어린 아이일 때는 정말 인격적이고 훌륭하고 바울과 게바와 아볼로와 같이 탁월한 영적인 스승을 우리가 만나는 것은 대단한 축복입니다. 그러나 거기서 머물러 있으면 안되는 거예요. 사람에 따라서 믿음이 좌지우지되고 사람에 따라서 하나님을 섬기는 감정이 흔들리고 좌지 우지 되면 안 되는 거예요. 우리는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던지 우리는 하나님과 나 사이에 아무것도 존재하지 말아야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스승은 하나님입니다.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누가 뭐라하던지 간에 그리고 어젯밤 꿈이 어떠했던지 간에 이상한 꿈이나 환상이 있던 없던지 간에 우리에게 있어서 나침반은 말씀, 걷 하나님입니다. 말씀의 닻을 깊이 내리면 웬만한 풍랑이 몰아닥쳐도 넘어지지 않습니다. 믿음의 닻을 말씀에 두지 않고 감정에 두고 사람에 두고 환경에 두니까 자그마한 바람이 불어도 이리저리 흔들리고 난리법석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여러분.. 세 가지를 말씀드리려고 해요. 느낌이나 감정에 믿음의 닻을 내리지 말고 체험이나 어떤 우리 감각에 믿음의 닻을 내기지 말고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에 믿음의 닻을 내려야 합니다. 영원히 요동하지 않는 그분의 말씀에 견고하게 믿음의 닻을 내려야합니다. 세상이 아니라고 말을 해도 말씀이 "yes"라고 말하면 "그렇습니다, 아멘" 하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가 성숙한 신자인 것입니다. 부디 여러분 감정의 닻을 내리지 말고 말씀에 닻을 내리시길 바랍니다.
두 번째로 히브리서 5장에서 히브리서 저자는 우리가 지각을 사용해서 단단한 식물을 먹기 위해선 연단을 받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연단을 받아야 감각을 버리고 감각을 의존하지 않고 지각을 의존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강하게 연단하실 때 기쁘게 연단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시기와 분쟁은 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 시기하고 분쟁합니까? 시기와 분쟁은 다른 사람하고 분쟁하기 때문에 비교 의식 속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시기가 무엇입니까? 열등감에서 나오는 것이잖아요. 분쟁이 무엇입니까? 우월감에서 나오는 거잖아요 열등감과 우월감은 어디서 나옵니까? 비교 의식에서 나오는 거잖아요. 다른 사람과 비교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비교 의식을 버려야합니다. 영적인 사람은 사람과 비교하지 않아요. 오직 하나님을 푯대로 삼아야합니다. 어떤 일이 있든지 간에 분쟁은 절대 안됩니다. 우리는 한 가족입니다. 왜 비교합니까?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되어야 합니다.
부디 여러분들은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들 성숙한 신자들이 다 되어지기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합시다./김광락 목사
청량고등학교 교사(등대교회 협동목사) 한 태 완
http://jesusgospel.ce.ro, http://je333.ce.ro
본문: 고전3:1-9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치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 너희가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어떤 이는 말하되 나는 바울에게라 하고 다른 이는 나는 아볼로에게라 하니 너희가 사람이 아니리요. 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뇨 저희는 주께서 각각 주신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뿐이니라. 심는 이와 물주는 이가 일반이나 각각 자기의 일하는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
할렐루야, 성숙한 신앙이라는 제목으로 말씀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성숙한 신앙의 특징이 무엇일까요? 성경지식이 많아서 성숙한 신앙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또 은사나 어떤 체험이 많으면 성숙한 신앙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혹은 말을 잘하면, 신앙고백을 멋들어지게 잘 하면 성숙한 신앙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아닙니다! 지식도 아니고 은사도 아니고 체험도 아니고 또 말을 잘해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성숙한 신앙은 그런데 있지 않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많은 장점을 가지고 있었던 교회였습니다. 지식이 풍성했습니다. 은사도 많았습니다. 체험도 많았습니다. 그리고 구변도 좋았습니다. 언변도 좋았고 나름대로 유창하게 복음을 고백하고 전할 수도 있었던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그러한 고린도 교회를 향해서 "너희가 아직도 어린아이다, 신앙적으로 미숙하다, 아직도 육신에 속한 신자들이다"라고 평가를 하고있습니다. 고린도 교회의 문제가 무엇이었습니까? 고린도 교회가 안고 있었던 문제는 하나되지 못하는 것에 있었습니다.
하나되지 못한 것..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인 교회가 하나되지 못하는 것만큼 비극적인 것은 없습니다. 세상에 가장 가치 없는 교회는 하나되지 못하는 교회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였는데 하나되지 못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지 않거나 부인하거나 혹은 알아도 잘못 아는 것입니다. 정말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라는 깃발 아래 모였다면 하나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교회가 하나되지 못하는 것은 가장 큰 비극이고 그래서 교회가 하나되지 못하면 교회는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는 것입니다. 세상에 존재할 가치가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러분 교회가 하나되지 못할까요? 왜 서로가 사랑하지 못할까요? 이유가 뭘까요? 그 이유는 한가지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고 사람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면 하나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서로를 바라보면 우리는 다투고 분쟁하고 질투하고 싸우는 것입니다. 특히 우리나라는 분열하는 것을 좋아하는 성격이 있습니다. 우리나라 역사를 보면 그렇게 당쟁이 많을 수 없습니다. 그렇게 파랑이 많을 수 없었어요. 우리나라는 유일한 분단국가예요. 남북만 분열된 게 아니라 동서도 분열되었어요.
하나되지 못하는 것.. 여러분 고린도 교회의 문제는 바로 하나되지 못하는 것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온갖 지식과 능력과 은사와 여러 가지 환상과 여러 가지 신비한 체험을 많이 가지고 있었지만은 그러나 그들이 모일 때마다 누가 더 큰 은사를 가졌고 누가 더 위대한 은사를 가졌으며 누가 더 똑똑하며 누가 더 영적이며 누가 더 신앙적이며 누가 더 상을 많이 받을 것인가 이런 등등의 문제를 가지고 서로 토론했고 때론 열띤 논쟁을 벌였고 그런 격렬한 논쟁 끝에 상대방을 무시하고 또한 상대방이 가진 은사들과 그 직분들을 무시 했습니다. 자기들이 받은 은사가 최고다 내가 받은 은사가 더 우월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서로 열띤 논쟁을 벌였고 또 내가 더 영적인 사람이라는 것을 내세우기 위해서 '나는 누구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 나는 바울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 나는 베드로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 나는 아볼로의 제자다' 이런 문제를 가지고 서로 바울파, 베드로파, 아볼로파.. 아니다 나는 예수파다 이렇게 사분 오열로 나뉘어지게 되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왜 그리스도의 몸이 나뉘어 졌습니까? 여러분, 신령하다는 것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오해하고 있습니다. 신령하다 혹은 거룩하다 혹은 영적이다 혹은 성숙하다 다 같은 말인데 어떤 지식이나 체험에 있는줄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절대로 그렇지 않아요. 지식이나 체험이나 어떤 은사에 있지 않습니다. 그런 것들이 성숙함의 표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그러한 것들이 많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도바울이 "너희가 어린아이다 네가 육에 속한 그리스도인이다 네가 아직도 미숙하구나 아직도 신앙에 있어서 초보자들이다"이렇게 평가를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사람을 크게 두 부류로 나눕니다. 하나는 거듭난 사람이고 하나는 거듭나지 못한 자연인입니다. 중생한 사람, 중생하지 못한 자연인.. 그리고 거듭난 사람도 역시 두 부류로 나눕니다. 중생한 사람들도 두 부류예요 하나는 영에 속한 그리스도인 또 하나는 육에 속한 그리스도인입니다. 똑같이 구원받았고, 거듭났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는 영적이고 하나는 세속적이고 하나는 신령하며 하나는 신령하지 못하며 하나는 성숙하며 하나는 미숙하지 못하며, 하나는 영에 속해있고 하나는 육에 속해 있습니다. 육에 속했다 혹은 영에속했다,, 말뜻이 조금 어렵지요? 그렇습니다. 우리가 성령과 말씀으로 거듭나면 곧바로 우리가 성숙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곧바로 영에 속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 속 사람이 변했지, 우리 육신과 우리의 마음은 여전히 그대로 남아 있는 거예요. 내 속에 새로운 영이 들어왔는데 그러나 그 영을 품고있는 우리의 마음과 우리의 육체는 여전히 옛 것이예요. 여전히 그렇게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거듭난 이후에는 영과 육이 싸우는 것입니다. 내 속에 있는 영은 끊임없이 하나님을 추구하는 반면에 이 육의본성, 이 육적인 본성은 끊임없이 세상을 추구하는 그런 속성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거듭난 이후에는 영과 육이 서로 전쟁에 있는 것입니다. 서로 싸우는 것입니다. 갈등 관계에 있어요. 이건 줄다리기와 같습니다. 이것이 영적 전투입니다. 이 영적 전투는 내 밖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전쟁이예요. 영과 육이 싸우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려고 하는 영적인 속성과 이유없이 하나님을 거부하고 세상을 바라보려고 하는 육적인 속성이 싸우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디에다가 물을 주느냐에 따라 달려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씀과 기도로 우리 영에 물을 주고 영에 비료를 주고 영에 우리가 투자를 할 때 우리 영이 살아나는 것입니다. 여러분 신앙이 성숙해간다는 것은 바로 육적인 속성을 벗어버리고 점점 영적으로 되어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영이 육신을 다스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 마음과 육체가 이 영의 지배아래 들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이 영적인 사람이고 신령한 사람입니다. 반대로 육적인 그리스도인은 어떤 사람입니까? 그 영은 살아있어요. 하나님을 인정합니다.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런데영이 마음의 지배를 받아요. 육신의 지배를 받아요. 영이 지배를 해야하는데 오히려 지배를 받는 거예요. 마음이 그리고 육체가 영을 지배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육에 속한 그리스도인입니다. 육신에 속한 사람의 특징은 크게 세 가지가 있습니다.
육신에 속한 그리스도인의 특징 첫 번째로 육신적인 신자는 사람을 좋아합니다. 그리고 사람중심으로 살아갑니다. '나는 베드로파, 바울파, 아볼로파..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 사람을 더 좋아해요. 나는 바울이 더 좋다, 나는 베드로가 더 좋다,,' 그런 문제를 가지고 다투는 거예요. 여전히 사람 중심으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영향을 더 많이 받는 거예요. 여러분 생각해보세요 내가 정말 사랑하는 사람, 내가 정말 존경하는 분이 내 스승이 되고 내 선배가 되고 나를 가르쳐주는 지도자가 되었을때는 신앙이 막 무럭무럭 자라다가 전혀 그렇지 않은 사람 아래서 내가 배우고 가르침 받을때는 금방 힘들어하고 그럴 때.. 여전히 육신적이라는 것이죠, 영적인 사람은 그런 사람의 속성에 흔들리지 않습니다.
두 번째 특성은 그렇기 때문에 감정의 기복이 심합니다. 상황에 따라서 잘 흔들려요, 무게 중심을 아십니까? 배가 무게중심이 얕으면 잘 전복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신앙의 무게중심이 얕으면 잘 넘어져요. 상황이 흔들리고 내 뜻대로 되지 않거나 갑자기 예상치 못하는 일이 닥쳤을 때 갑자기 당황하고 힘들어하는 것이죠. 무게 중심이 깊은 배는 왠만한 풍랑이 불어도 넘어지지 않습니다. 전복되지 않아요. 육에 속한 그리스도인은 사람을 바라보고 사람을 따라서 신앙이 올라갔다가 내려갔다가.. 또 때로는 감정과 상황에 따라서 기복이 심해요. 그러나 영적인 신자는 변함없어요. 흔들림 없습니다. 풍랑이 불어도 잔잔해도 제 갈 길을 가는 것입니다. 의의 길로 가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특징은 지각을 사용하지 못합니다. 본문 2절을 보시면 '내가 너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를 감당치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했다' 고 되어 있습니다. 히브리서 5장 11-14절 말씀을 보시면 젖이나 먹고 마찬가지로 육에 속한 신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잘 깨닫지 못해요. 그렇게 때문에 그들은 지각을 사용할 줄 모르고 감각을 사용합니다.. 예를 들어 '어젯밤 꿈이 두숭숭했어 오늘은..차를 몰고 가지말고 지하철을 타고 출근해야지' 하는 등 느낌에 의존하는 것입니다... 느낌과 상관없이 하나님 말씀이 뭐라고 말씀하는 것인지 관심이 없어요. 자기 감각에 의존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성숙한 신자, 다시 말해서 영적인 신자, 영에 속한 그리스도인의 특징은 그들의 특징은 밥을 먹을 줄 안다는 것입니다. 단단한 식물을 소화할 줄 안다는 것입니다. 밥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꿈이나 환상이나 계시를 통해서 하나님들 분별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나님의 뜻을 압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성경으로 충권합니다. 기도와 말씀으로 충권합니다. 느낌보다 사실을 더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자기 감정보다 하나님의 말씀이 뭐라고 말씀하는 것인지 그것도 또한 중요하다. 또 ,이 영적인사람의 특징은 지각을 사용할 뿐만 아니라 자기를 돌아볼 줄 알아요. 형제가 잘못했을 때 자기를 돌아봅니다. 이웃이 실패하고 넘어질 때 자기를 돌아보고 두려워할 줄 알아요 .그런데 성숙하지 못한 사람은 자기를돌아보지 못하고 남을 맹렬하게 비판하죠?.. 여러분! 오늘 어떻게 영적인 신자가 될 수 있습니까? 고린도전서 3장 1-9절 말씀을 보면 사도 바울이 말씀하는 것은 한가지입니다. 사람은 바라보지 말고 하나님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는 하나님의 밭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집이라는 것입니다. 자라나게 하시는 분은 사람이 아니고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물론 미숙할 때 젖이나 먹는 어린 아이일 때는 정말 인격적이고 훌륭하고 바울과 게바와 아볼로와 같이 탁월한 영적인 스승을 우리가 만나는 것은 대단한 축복입니다. 그러나 거기서 머물러 있으면 안되는 거예요. 사람에 따라서 믿음이 좌지우지되고 사람에 따라서 하나님을 섬기는 감정이 흔들리고 좌지 우지 되면 안 되는 거예요. 우리는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던지 우리는 하나님과 나 사이에 아무것도 존재하지 말아야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스승은 하나님입니다.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누가 뭐라하던지 간에 그리고 어젯밤 꿈이 어떠했던지 간에 이상한 꿈이나 환상이 있던 없던지 간에 우리에게 있어서 나침반은 말씀, 걷 하나님입니다. 말씀의 닻을 깊이 내리면 웬만한 풍랑이 몰아닥쳐도 넘어지지 않습니다. 믿음의 닻을 말씀에 두지 않고 감정에 두고 사람에 두고 환경에 두니까 자그마한 바람이 불어도 이리저리 흔들리고 난리법석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여러분.. 세 가지를 말씀드리려고 해요. 느낌이나 감정에 믿음의 닻을 내리지 말고 체험이나 어떤 우리 감각에 믿음의 닻을 내기지 말고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에 믿음의 닻을 내려야 합니다. 영원히 요동하지 않는 그분의 말씀에 견고하게 믿음의 닻을 내려야합니다. 세상이 아니라고 말을 해도 말씀이 "yes"라고 말하면 "그렇습니다, 아멘" 하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가 성숙한 신자인 것입니다. 부디 여러분 감정의 닻을 내리지 말고 말씀에 닻을 내리시길 바랍니다.
두 번째로 히브리서 5장에서 히브리서 저자는 우리가 지각을 사용해서 단단한 식물을 먹기 위해선 연단을 받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연단을 받아야 감각을 버리고 감각을 의존하지 않고 지각을 의존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강하게 연단하실 때 기쁘게 연단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시기와 분쟁은 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 시기하고 분쟁합니까? 시기와 분쟁은 다른 사람하고 분쟁하기 때문에 비교 의식 속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시기가 무엇입니까? 열등감에서 나오는 것이잖아요. 분쟁이 무엇입니까? 우월감에서 나오는 거잖아요 열등감과 우월감은 어디서 나옵니까? 비교 의식에서 나오는 거잖아요. 다른 사람과 비교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비교 의식을 버려야합니다. 영적인 사람은 사람과 비교하지 않아요. 오직 하나님을 푯대로 삼아야합니다. 어떤 일이 있든지 간에 분쟁은 절대 안됩니다. 우리는 한 가족입니다. 왜 비교합니까?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되어야 합니다.
부디 여러분들은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들 성숙한 신자들이 다 되어지기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합시다./김광락 목사
청량고등학교 교사(등대교회 협동목사) 한 태 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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