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할 수 있으면 해답이 보인다

운영자............... 조회 수 2367 추천 수 0 2004.04.25 13:45:35
.........
사랑할 수 있으면 해답이 보인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로마서 5장 3∼8절



이 세상에는 끝없는 경쟁과 미움, 투쟁과 전쟁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오늘날 세계는 나라마다 민족마다 전쟁이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왜 이러한 일들이 계속 일어날까요? 그것은 타락한 인간의 마음에서 생겨난 비극입니다.



1. 아담의 타락과 부패한 인간 심성

아담 이후 타락한 사람의 마음은 언제나 자아중심적 자존심 때문에 상대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합니다. 무슨 일이 일어나면 그 일로 말미암아 자기를 되살펴보고 회개하려 하지 않고 ‘내 탓’이 아니라 ‘네 탓’이라고 몰아 부치며 그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전가합니다. 타락한 인간의 심성은 언제나 자기 주장만 옳다고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자기만이 정당하다고 생각하며 남을 비평하고 폄론합니다.

또한 타락한 인간은 자기의 유익을 먼저 구하는려는 것이 그 마음 깊이 뿌리 내려 있습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자기 유익을 최대로 유지하려고 노력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유익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아담과 하와가 타락하고 난 이후, 에덴동산에서 일어난 사건에서도 분명히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누가 네게 선악과를 따먹으라고 하더냐?”라고 물으시자 아담은 자기가 잘못한 것은 조금도 회개하지 아니하고 그 책임을 하나님과 하나님께서 주신 여자인 하와에게로 돌렸습니다.

창세기 3장 12절에 “아담이 가로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담은 자기만이 정당하다고 생각하고 자기의 체면을 유지하고 세워야겠다고만 생각했습니다. 자신의 잘못을 회개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타락한 아담의 마음 속에 생긴 부패한 심성입니다.

하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창세기 3장 13절에 “여호와 하나님이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여자가 가로되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하와는 구차스러운 변명이지만 뱀에게 그 모든 책임을 전가했습니다. 그리고 자기를 타당화했습니다.

그들이 에덴동산에서 쫓겨나 가정을 이루고 난 다음, 처음 낳은 아들이 가인이고 둘째가 아벨이었습니다. 두 아들이 장성하여 분가하였고 때가 오매 하나님께 제단을 쌓았는데 가인은 자기가 손으로 지은 농산물로, 아벨은 양을 잡아 그 피를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물은 돌보지 아니하시고 아벨의 제물을 돌보아 그 제물을 기쁘게 받으셨습니다. 그 결과 가인의 마음에 분노가 생겼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내 제물은 받아 주시지 않는가’라며 자신의 잘못은 회개하지 않고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장차 메시아가 오셔서 우리 죄를 대신 짊어질 것을 아담에게 가르쳐 주셨고 아담이 그 자손들에게 메시아를 상징하는 어린 양을 잡아 제물로 드리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가르쳤음에도 불구하고 가인은 자기 자랑으로 자기 손으로 지은 제물인 곡식을 제단에 얹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응답하시지 않았던 것입니다.

대신 아벨은 하나님의 뜻대로 양을 잡아 드렸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 제물에 응답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가인은 하나님께서 응답하지 않으시는 것은 아벨 때문이라고만 여기고 동생을 미워했습니다. 결국 그 미움으로 가인은 아벨을 죽이고 말았습니다. 인류 역사상 첫 살인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2. 사랑 이외에 해답은 없다

오늘날도 이와 같은 마음 바탕에 있어서 가정, 사회, 국가 간의 갈등과 분쟁이 그치지 않습니다. 어떻게 하면 자기 중심적 자존심과 자기만 옳다고 하는 자기 주장, 자기 유익을 최우선으로 하는 마음을 이기고 평화 공존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 방법은 무엇일까요?

유엔이 그 해결책입니까? 국가 기관이 해결책이 될 수 있습니까? 사회 단체가 해결할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인간은 역사 이후로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했지만 미움, 시기, 분노, 질투, 싸움, 분쟁이 그치지 않았습니다.

오직 문제의 해결을 위한 유일한 길은 자기 주장을 희생하고, 자기 타당화를 희생하고, 자기 유익만 구하는 마음도 희생해야 합니다. 그리고 남을 나보다 귀하게 생각할 수 있는 희생적인 마음이 생겨야 합니다. 그럴 때 인간사의 모든 분쟁의 문제가 해결될 수 있습니다. 바로 사랑입니다. 사랑 이외에는 절대로 그 어떠한 갈등과 미움으로 인한 분쟁을 해결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서도 사랑만이 자존심, 자기 고집, 자기 유익 등을 희생할 수 있는 힘이 됩니다. 그리고 그 힘이 발휘될 때 우리는 이웃과 화해하고 함께 손을 잡고 살게 될 수 있습니다. 남녀 간의 진정한 사랑도 진실한 부부의 사랑이 되어서 서로 화목하게 만들어 줍니다. 사랑이 있어야만 부부간에 서로 자존심, 자기 고집, 자기 유익 등을 희생할 수 있습니다. 남편은 아내를, 아내는 남편을 더욱 귀중히 여기고 함께 손잡고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부모의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모는 자식을 위해서 언제든지 자기의 자존심이나 자기 고집, 자기 유익을 버릴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부모의 사랑입니다. 소설가 조창인씨의 ‘가시고기’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가시고기는 암컷이 알을 낳고 도망가면 수컷이 그 알을 품어서 부화시키고 새끼가 자신의 살을 뜯어 먹게 합니다. 그래서 새끼들이 아버지의 살을 다 뜯어먹고 자라 떠나면 아버지는 죽게 됩니다. 그런데 가시고기라는 소설을 보면 부부가 이혼한 뒤 아내는 외국으로 떠납니다. 그러자 아버지가 아들을 키우며 홀로 살아 가는데 아들이 백혈병에 걸리게 됩니다. 아버지는 온갖 노력을 다해 아들의 병을 고치려고 합니다.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팔아 아들의 병원비로 사용해도 아들의 병은 차도가 없습니다. 주변의 아는 사람들에게 구걸을 해서라도 아들을 고치려고 노력을 합니다. 결국 아버지는 자신의 한쪽 눈의 망막을 팔아서까지 아들의 치료비를 마련합니다. 그러던 중 골수를 기증 받을 수 있어 아들은 구사일생으로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됩니다. 그러나 그 아버지는 과로로 인해 간암에 걸리게 되고 결국 죽음을 당하게 된다는 내용입니다.

이것은 부성애의 대표적인 모습입니다. 이와같은 부모의 지극한 사랑이 있었기 때문에 핏덩어리된 어린아이들이 자라서 어엿한 사회인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랑만이 이러한 일을 할 수 있습니다. 만일 부모가 자존심을 세우고 고집을 다 세우며, 자기 유익을 주장한다면 온전하게 길러낼 자식은 없을 것입니다.

오늘날 이웃과 평온하게 살려면 이웃 사랑이 실천되어야 합니다. 사랑은 자기를 희생할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자존심도, 자기 주장도 자기 유익도 사랑 앞에서는 버릴 수 있습니다. 사랑 이외에는 이와같은 심정으로 이웃을 섬길 수가 없습니다.

아프리카 오지에서 의료봉사로 일생을 바친 슈바이처 박사도 이웃 사랑을 실천했습니다. 루터교 목사의 장남으로 태어난 그는 철학 박사, 신학박사 학위를 받고 목사로 대학에서 신학을 강의하였습니다. 그는 또한 탁월한 파이프 오르간 연주자였습니다. 그러한 그가 아프리카 흑인들의 참담한 실상을 들은 후 의학을 공부한 뒤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아내와 함께 아프리카 가봉의 랑바레네로 가서 일생을 흑인들을 위해 살았습니다. 1952년 노벨 평화상을 받고 그 상금으로 나환자촌을 세워 사랑의 의술을 펴다가 90세에 건강이 나빠져 세계인의 애도 속에 별세했습니다.

그는 “30세까지는 내 자신을 위해 살고, 그 후로는 남을 위해 살기로 결심했다”고 합니다. 사랑이 아니고는 이렇듯 자기를 희생하고 남을 위해서, 남의 행복을 위해서 이러한 일을 할 수 없습니다.

사랑의 원자탄 손양원 목사님도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37세에 경남 여수 나환자 요양원에 전도사로 부임하여 평생을 나환자들과 함께 살았습니다. 그곳에서 손양원 목사님은 나환자들의 피고름을 입으로 빨며 정성으로 그들을 돌보았습니다. 그들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자신도 나환자가 되기를 소원할 만큼 사랑을 실천한 분입니다. 그는 일제시대, 신사참배를 거부하여 여수 경찰서에 투옥되어 옥고를 치르다가 해방을 맞았습니다. 그러나 1948년 여순 반란 사건 때 기독학생 회장이던 큰 아들 동인이와 둘째 아들 동신이 마저 폭도들에 의해 총에 맞아 숨졌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큰 슬픔에 통곡하고 울었으나 두 아들을 순교의 제물로 받아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국군이 순천을 탈환하고 주모자들을 잡아 사형에 처하고자 할 때 손양원 목사님은 자신의 두 아들을 죽인 원수가 사형장에서 죽임을 당할 때 혼신의 힘을 다해 사정하여 그를 구출했습니다. 이후 그를 자신의 양자로 삼고 그 청년을 신학교까지 보내어 훌륭한 목사로 만들었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한국 전쟁 발발 후 교회와 환자들을 돌보다가 인민군에게 잡혀 감옥에 갇혀서도 자기에게 들어오는 음식을 다른 사람들에게 돌려주면서 전도했습니다. 공산군은 그가 전도를 못하도록 군화발로 그의 입술을 짓밟았습니다. 그리고 그를 죽였습니다. 그는 사랑의 원자탄이었습니다.

테레사 수녀의 이야기는 너무나 유명합니다. 유고슬라비아 마케도니아에서 한 갑부의 막내딸로 출생한 테레사 수녀는 소명을 받고 수도원에 들어가 수녀가 되었습니다. 이후 인도 캘커타에 파견되었습니다. 36세에 테레사 수녀는 가난한 사람들 가운데도 가장 가난한 사람에게 봉사를 하라는 하나님의 계시를 받고 사랑의 선교회를 창립하여 빈민가에 뛰어 들었습니다. 극빈자들을 구하고 나환자들을 씻겨주고 에이즈 환자들을 희생적으로 돌보아 주었습니다. 테레사 수녀는 뜻을 같이 하는 다른 수녀들과 평생 사랑의 실천을 보이며 500개가 넘는 구호시설을 통해 가난한 자들과 병든 자들을 돌보았습니다. 매춘 여성과 길거리에서 죽어가는 자들을 돌보며 그들이 평안하게 죽음에 이르도록 도와주었습니다. 1979년 테레사 수녀는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며 받은 상금을 나환자 보호소 기금으로 사용했습니다. 그는 죽을 때 ‘서로 사랑하십시오. 진정한 사랑은 이것저것 재지 않습니다’라는 유언을 마치고 87세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사랑만이 인간의 타락한 자존심과 자기 고집과 자기 유익을 극복하고 희생하며 봉사할 수 있게 만들어 줍니다.



3. 가장 위대한 사랑

이 세상의 사랑 가운데 가장 위대한 사랑은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에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독생자를 내어 주셨습니다. 사랑이 아니고는 이러한 희생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아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자기 몸을 찢고 피를 흘려 우리를 위해 제물이 된다는 것 또한 사랑이 아니고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육신을 입고 오신 예수님도 사람인지라 살고 싶고, 존중 받고자 하는 자존심도 있고 자기 고집도 있습니다. 또한 자기의 유익을 구하는 마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랑이 이러한 것들을 모두 극복할 수 있게 한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위해 대신 채찍에 맞으시고 멸시를 당하시고 결국 십자가에 달리시어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의 고뇌를 보십시오. 예수님은 ‘자기를 살 릴 것이냐, 인류 구원이냐’라는 갈림길에서 고민했습니다. 마태복음 26장 36∼38절에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저기 가서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 하시고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실새 고민하고 슬퍼하사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죄를 알지도 못하는 예수님이 인류의 죄악을 담당하셔야 했으니, 얼마나 전율하고 고민하셨겠습니까?

마가복음 14장 33∼34절에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가실새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사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 하시고”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왜 고통과 괴로움을 당하셔야 합니까? 이는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향한 사랑으로 자기를 희생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앞에서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시옵소서’라며 하나님의 뜻을 따랐습니다. 누가복음 22장 42∼44절에 “가라사대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사자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돕더라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같이 되더라”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얼마나 간절히 기도하며 고민했던지 모세혈관이 터져서 땀 구멍으로 피가 흘렀습니다. 몸을 찢고 피를 쏟은 결과 마귀의 나라와 정사와 권세를 누르신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은 “내가 다 이루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그 때 마귀의 나라와 정사와 권세가 여리고 성처럼 무너지고 만 것입니다.

마귀는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아 인류 구원을 중지시키려고 했지만 오히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마귀의 나라가 파괴되고 만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을 통하지 않고는 우리가 사랑을 구할 데가 없습니다. 십자가를 바라보고 주님의 희생을 묵상할 때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는 사랑을 얻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나 위하여 십자가의 중한 고통 받으사 대신 죽은 주 예수의 사랑하신 은혜여’라는 찬송처럼 보배로운 피를 흘려 나를 위해서 대신 희생되신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가슴에 품을 때 비로소 우리 마음 속에 자신을 이기고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2장 5∼8절에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낮추고 희생시키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를 위한 희생 제물이 되어 주셨습니다. 그로 인해 우리는 구원의 은혜를 받게 된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십자가의 사랑을 우리는 바라보고 묵상하고 믿을 때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게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바라보지 않고는 우리는 우리 자신이 희생적인 사랑을 할 수 없습니다. 부부간에 싸움이 생길지라도 십자가를 생각하면 남편에게 복종할 수 있고 아내에게 복종할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성령님께 하나님의 사랑을 부어 주도록 구해야 합니다. 로마서 5장 5절에서 바울 선생은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령이 하나님의 사랑을 부어 주십니다.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와주기 위해서 이 자리에 와 계십니다.

제인 화이트 여사는 미국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우리나라 충북 제천으로 와서 38년 동안 1200여 명의 버림받은 아이들을 양육했습니다. 그녀는 갓 태어난 어린아이들이 부모에게 버림받는 것에 크게 충격을 받고 영아원을 세워 결혼도 하지 않고 사랑으로 그 어린아이들을 키웠습니다. 그리고 그 중 733명의 아이들을 입양시켜 훌륭히 자랄 수 있도록 했습니다. 화이트 여사는 ‘하나님이 부어주신 사랑으로 어찌할 수 없이 사랑의 포로가 되어 이 불쌍한 어린아이들을 돌보기 위해서 일생을 바쳤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만이 자존심, 자기 주장, 자기 유익을 극복하고 남을 위해 헌신하고 희생할 수 있게 합니다.

히브리서 12장 2∼3절에는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치 않기 위하여 죄인들의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자를 생각하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생각하고 예수님을 바라보고 예수님의 사랑을 본받으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 1∼3절에서 바울 선생은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내가 너희에게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항상 눈 앞에 밝히 보이는 십자가를 바라보고 살아야 합니다. 아름다운 교회를 짓는 것이 신앙의 목표가 아닙니다. 교회가 크고 작다는 것이 우리 신앙의 목표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 신앙의 목표는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몸을 찢고 피 흘려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사는 것이어야 합니다. 이러한 십자가를 잃어버린 사람은 종교인이라 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진정한 크리스천이라 할 수 없습니다.

오직 사랑만이 자기와 세상을 이기고 화해와 평안으로 함께 사는 세계를 만들 수 있습니다. 지금도 미국과 서양 자유 세계, 아프가니스탄의 테러리스트들은 전쟁의 긴장 속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 뒤에선 거대한 이슬람교 국가들이 있습니다. 이들 전체는 19억이 넘습니다. 이슬람권과의 문화 충돌은 지금보다 더욱 위험한 상황으로 이끌어 갈 수도 있습니다.

그들은 서로 자존심을 굽히지 않습니다. 서로 서로 자신들이 옳다고 주장합니다. 또한 서로 자국의 이익만을 지키고 유지하려 합니다. 아무리 정치적인 중재를 해도 이러한 문제는 해결되지 않습니다. 이는 어느 누구라도 십자가를 바라보고 사랑을 가지고 자기를 희생할 수 있어야 해결될 수 있습니다.

십자가를 받아 들이지 않으면 개인문제, 사회문제, 국가문제 뿐 아니라 국제정치 문제 역시 해결되지 않습니다. 항상 그곳에서는 무력이 충돌하고 분쟁이 있으며 이에 따라 살상이 있게 마련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 1∼8절에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타락한 인간의 자연적인 속성은 아닙니다. 이 사랑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항상 바라보고 매일 거기에 자기를 못박아야 합니다. 그럴 때 예수님의 사랑이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 가슴 속에 그리스도의 사랑을 부어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이를 위해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사랑만이 자기를 희생하며 화해와 공존의 원동력이 될 수 있습니다.

-기도- 거룩하고 영광스러우신 아버지 하나님!

오직 주님을 믿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아야 자기의 타락한 심성을 극복하고 자기를 희생하고 사랑을 실천할 수 있음을 믿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사랑이 아니고는 가정의 화평도, 이웃간의 화평도 사회와 국가의 화평도 없습니다. 십자가 사랑 이외에는 해결책이 없습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성령의 능력으로 자기 고집과 자아중심적 이기주의를 극복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남편으로서, 아내로서, 부모로서 그리고 자식으로서, 성도로서, 이웃으로서, 국민으로서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에 우리 자신을 못박고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이해와 동정과 사랑의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도와주시옵소서. 하나님 아버지, 사랑이 없으면 종교는 허위에 불과함을 압니다. 모든 종교적인 의식에 사랑이 없으면 소용이 없다는 것 또한 압니다.

하나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의 가장 근본적인 핵심과 중심은 사랑하는 것임을 압니다.

오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사랑으로 변화받고 이를 실천하는 우리들이 되게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조용기 목사



좋은 아버지를 둔 아이들은 행복합니다. 비록, 자기 자신은 가진 것도 없고, 연약해도 아버지의 사랑과 보호를 받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마냥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든든한 회사, 좋은 사장님 아래에서 일 하는 회사원들도 별 걱정 없이 살 수 있을 것입니다. 더욱이 그 회사가 평생 직장을 보장하고 있다면 더욱 신바람 날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람이 전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며, 하나님의 보호와 인정을 받으며 산다면 얼마나 더 행복하겠습니까? 예수님을 주님으로 인정하시고, 구원자로 믿어 보세요. 당신도 그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 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요10: 28,29)



하나교회의 비전

1. 365일 예배드리는 교회(히10: 25)

오늘날 죄악이 만연한 세상에서 매일 말씀을 읽고, 듣지 않으면 하나님이 기뻐하는 삶을 살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매일 거울을 들여다보듯이 말씀의 거울을 통해 매일 마음을 바르고 깨끗이 하여서 예수와 복음을 위해 헌신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막8:35)

2. 더불어 사는 공동체 (행2:42- 47)

하나님은 영의 하나님이실 뿐 아니라 우리의 육신까지도 돌보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천국에 대한 소망뿐 아니라 이 세상에서도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어야 합니다. 따라서 하나교회는 모든 성도가 그리스도안에서 한 가족이 되고, 교회 직영 사업을 통해 청장년의 일자리 마련, 노후생활 보장 등의 꿈과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3. 의와 평강과 희락이 넘치는 교회(롬14: 17)

정의롭고(선행에 힘쓰고), 근심, 걱정, 두려움이 없고(기도에 힘쓰고), 기쁨과 찬송이 넘치는 교회

4. 하나님과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교회(마22:37- 39)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입니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

이러한 꿈과 비전이 있는 교회를 개척하고자 합니다. 연락바랍니다.



하나 교회 한 태 완 목사

전화: 016-9219-3049, 자택: (02) 959-3049

홈페이지: http://allcome.ce.ro, allcome.wo.to

이메일: jesuskorea@naver.com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11985 역사상 가장 바보같은 발언 11개 운영자 2004-04-25 596
11984 역사상 가장 바보같은 발언 11개 운영자 2004-04-25 507
11983 오늘, 행복한 삶을 위한 10가지 충고 운영자 2004-04-25 1104
» 사랑할 수 있으면 해답이 보인다 운영자 2004-04-25 2367
11981 작은 부분까지도 겸손하게 운영자 2004-04-26 1528
11980 능력주시는 자 운영자 2004-04-26 640
11979 내 안의 어린아이 운영자 2004-04-26 467
11978 비전과 확신 운영자 2004-04-26 685
11977 바른 믿음과 신앙의 전수 운영자 2004-04-26 2360
11976 선택과 책임 운영자 2004-04-26 743
11975 하나 됨을 힘써 지키라 운영자 2004-04-26 935
11974 나는 좋은 땅인가? 운영자 2004-04-26 297
11973 해방과 선교 운영자 2004-04-26 589
11972 고난터치 복음 2004-04-26 2216
11971 자살하지 맙시다 운영자 2004-04-26 4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