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개의 길

복음............... 조회 수 421 추천 수 0 2005.03.04 15:4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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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길

본문 : 잠언 4: 10- 27

어렸을 때 일입니다. 대전역에서 기차를 탔는데 내가 가야 할 곳은 서울인데 기차를 타서 자리를 잡고 않아 있는데 왠지 좀 불안했습니다. 그러나 어린 나이에 남에게 물어 보는 것이 창피하게 느껴서 일어나 밖으로 나가서 그 기차 옆에 표시판을 보기로 하고 내리려고 하는데 기차가 출발하지 않는가 그래서 황급히 옆 사람에게 이 가차가 서울행 맞지요? 했더니 "아니야 학생 이 기차는 부산행인데" 나는 가까스로 서서히 출발하는 기차를 내릴 수가 있었습니다. 내려서 건너편을 보니 서울행이 기적을 울리며 출발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육교를 뛰어올라 쏜살같이 달려가 역시 출발하고 있는 서울행을 가까스로 탈수가 있었습니다. 신앙은 기차를 갈아타는 것과 같습니다. 어떤 분의 글귀가 생각납니다. 허무하고 불리우는 지하철에 탔다면 곧 갈아타십시오. 예수님은 당신에게 보람을 줄 것입니다. 교만이라 불리우는 비행기에 탔다면 곧 갈아타십시오. 예수님은 당신을 보통사람으로 만족케 하십니다. 성공이라 불리우는 과속택시에 탔다면 곧 갈아타십시오. 성실이라는 새 차표를 받으셔야 합니다. 욕심이라 불리우는 배에 탔다면 곧 갈아타십시오. 상륙해야 할 만족의 항구는 예수님입니다. 시기와 미움이란 호랑이 등에 탔다면 곧 갈아타십시오. 예수님의 사랑의 묘약을 받으셔야 합니다. 신앙생활은 차를 잘 갈아타는 판단과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한복음14:6)
본문에서 우리는 두 개의 길을 봅니다. 악인의 길과 의인의 길입니다. 시편 1편을 보면 복 있는 사람의 길과 악인의 길을 말하면서 복 있는 사람은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겠다고 하였고 그 행사가 다 형통한다고 하였습니다. 반면에 악한 사람은 바람에 나는 겨와 같아서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의인의 길은 하나님께서 인정하시지만 악인의 길은 망한다고 하였습니다. 신명기 30장 19절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오늘날 천지를 물러서 너희에게 증거를 삼 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의 길을 택하라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 축복의 길과 저주의 길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7장 13절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고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여기도 좁은 길과 넓은 길이 있습니다. 좁은 길의 마지막은 생명이고 넓은 길의 마지막은 사망이라고 하였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길을 가고 있습니다. 자기가 의식하든 의식하지 아니하든 어떤 길을 걸어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길은 여러 가지가 아니라 결국 두 가지 길뿐입니다. 생명의 길 아니면 사망의 길, 축복의 길이 아니면 저주의 길, 좁은 길이 아니면 넓은 길, 의인의 길이 아니면 악의 길입니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중립 노선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두 가지 길 가운데 하나의 길을 택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본래 우리 인간에게 선택의 자유를 주셨습니다. 적은 데서부터 큰 데까지 우리 자신이 선택해야 합니다. 우리는 매일 매일 사사건건 선택하며 살아갑니다. 가령 오늘 저녁 예배당에 나오시면서 무슨 옷을 입고 갈까 , 여러분 자신이 선택합니다. 고등학생들이 대학교를 진학할 때 어느 학교를 택하고 어느 과목을 전공하는가 하는 것도 여러분 자신이 정해야 합니다. 청년이 가정을 이루기 위해서 결혼 상대를 택하는 것도 본인들이 해야 합니다. 청년기에 배우자를 바로 택해야 평생을 행복하게 살며 사회를 위해서 큰 공헌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 한 번 잘못하면 크게 불행하게 되고 맙니다. 선택을 바로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선택 뒤에는 책임이 따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길을 선택할 때는 그 길의 끝이 어딘가를 알고 택해야 합니다. 전에 에서 같은 사람은 배고픈 김에 시장한 것을 못 이겨서 팥죽 한 그릇에 장자의 명분을 팔 아 버렸습니다. 나중에 후회하였지만 때는 이미 늦었습니다. 전에 아브라함의 조카 롯은 눈에 보이는 것, 당장 유리해 보이는 것만 택했다가 나중에 큰 망신하지 않았어요? 이것은 롯 뿐만 아닙니다. 오늘도 이것이 옳으냐 저것이 옳으냐가 아니라 항상 유리한 면만 택했다가 망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물질 방면에 꼭 옳은 선택을 할 줄 알아야 합니다. 청년 요셉은 육신을 택하느냐 하나님을 택하느냐 하는 자리에서 하나님을 택했습니다. 그래서 그것 때문에 애매한 고생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승리하지 않았습니까? 청년 모세를 보세요. 그가 바로의 공주의 아들 자리를 택할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을 받을 것인가 하나를 택할 수밖에 없는 때에,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겨 이스라엘 민족 편을 택했다고 하였습니다. 그 까닭은 상주시는 이 하나님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청년 다니엘이 어떻게 하였습니까? 바벨론에 포로가 되어 갔을 때, 그 나라의 유능한 청년들을 3년 동안 훈련(합숙)시키는데 포로 되어온 사람 중에서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가 특별히 선발되어서 훈련받게 되었습니다. 생각해 보면 이거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입니까? 포로로서 학대받아야 할 처지인데 바벨론의 우수한 청년들과 같은 대접을 받으며 훈련받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더구나 느부갓네살 왕이 많은 관심을 가지고 그들이 먹는 식사에도 왕이 간섭하면서 잘 대접하게 하여 몸이 조금도 축나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당부하였습니다. 그래서 왕이 지정하여 자기가 먹는 진미와 자기의 마시는 포도주로 마시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섬기는 다니엘과 그 친구들에게 문제가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에 그 나라에서 먹는 고기나 마시는 포도주는 우상 앞에 놓았던 것이므로 이것으로 몸이 더럽히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문제 될 것이 없지요. 아니 본국이라면 모르지만 포로되어 온 신세에 이렇게 왕으로부터 특별히 선발되어 훈련받은 것만도 다행 한 일인데 먹고 마시는 것 때문에 그럴 것이 있나? 더구나 이 나라에서 우상 앞에 그러면 고기는 전연 안 먹고 포도주는 아예 마시지 말고 살아야 하나? 그저 당분간 적당히 해 나가다가 기회를 봐서 해야지 공연히 왕의 마음만 건들면 우리만 손해날텐데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니엘과 그 세 친구는 뜻을 정하여 왕이 주는 진미와 포도주로 저희를 더럽히지 아니 하기로 하였습니다. 물론 어려움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차라리 어려운 편을 택했습니다. 결국은 그가 승리하였습니다. 바른 선택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선택은 이렇게 중요합니다. 그런데 다른 선택도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영적인 견지에서 내가 어떤 길을 택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혜자는 지혜로운 길, 의인의 길을 택하라고 말씀합니다. 11-13절 내가 지혜로운 길로 네게 가르쳤으며 정직한 첩경으로 너를 인도하였은즉 다닐 때에 네 걸음이 곤란하지 아니하겠고 달려갈 때 실족하지 아니하리라 훈계를 굳게 잡아 놓치지 말고 지키라 이것이 네 생명이니라. 지혜로운 길 정직한 첩경을 굳게 잡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의 마음을 흔들리게 하는 요소들이 너무 많이, 그리고 강하게 도전하여 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혜로운 길, 정직한 첩경, 의인의 길, 생명의 길, 축복의 길은 당시 눈에 보이는 것, 손에 만져지는 길이 아니기 때문에 보이는 것, 육신적인 것, 물질적인 것, 세상적인 것들이 우리에게 유혹할 때 이미 택했던 길, 잡았던 것도 자신도 모르게 놓쳐 버리기가 쉽습니다. 그래서 히브리 서 기자도 권면합니다. 히브리서 3장 12-14절에 형제들아 너희가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심을 품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염려할 것이요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강퍅케 됨을 면하라 우리가 시작 할 때에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예한 자가 되리라 하였습니다. 그러면 의인의 길은 어떠합니까? 18절에 의인의 길은 돋는 햇볕 같아서 점점 빛나서 원만한 광명에 이른다 고 하였습니다. 해는 빛을 의미합니다. 빛은 진리와 순결, 희락과 생명을 뜻합니다. 즉 주된 사상은 거룩한 기쁨일 것입니다. 더구나 의인은 언제나 빛 가운데서 행하지만 악을 행하는 자들은 그들의 행위가 드러날까 봐서 어두운 곳을 좋아합니다. 전에 로마의 케트 장군은 이웃 사람이 자기의 정원을 들여다보는 것을 조금도 꺼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다니엘은 그의 기도하는 모습을 누구에게나 공개할 만큼(이것은 자랑이나 위선이 아닙니다.) 여유가 있었을 것이라고 어떤 사람이 말했습니다. 그리고 이 빛을 따라 사는 사람은 세상의 다른 사람에게도 비추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우리를 향해 주신 말씀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 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하셨습니다. 돋는 햇볕 같아서 점점 빛나는 원만한 광명에 이른다 는 말씀은 성장을 의미합니다. 해가 뜨기 전에 해는 보이지 않으나 온 누리가 훤히 밝아 오는 것처럼 하나님을 따라 살기로 작정하고 믿음의 생활을 하는 사람은 뭐라고 분명히 꼬집어 말하기는 어렵지만은 마음도 평안하고, 기쁘고, 감사하고, 다른 이를 돕고 싶고 한단 말이오. 그러나 그 단계가 지나면 아침해가 먼동에 떠오르는 것처럼 점점 더 밝아지고 대낮이 되는 것처럼 원만하게 아주 밝아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개인의 경건이 성장하는 것을 말합니다. 가령, 은혜에 성장이 있습니다. 점점 더 깊은 은혜, 풍성한 자리로 나아갑니다. 지식의 성장이 있습니다. 진리의 빛은 성장하는 빛입니다. 지금은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것도 있지만 지나는 동안에 점점 더 밝히 알게 되는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사도 바울이 말씀한 것처럼 지금은 우리가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하였습니다. 기쁨과 평안에도 성장이 있습니다. 점점 더 큰 기쁨, 평안을 얻게 되는 것이 우리의 경험입니다. 찬송가에 있듯이(예수를 생각만 해도 내 맘이 좋거든, 주 얼굴 뵈올 때에야 얼마나 좋으랴. 예수의 넓은 사랑을 어찌 다 말하랴. 그 사랑 받은 사람만 그 사랑 알도다.) 사랑하는 부부의 사랑도 그렇습니다. 신혼 때가 제일 사랑이 큰 것 같지만 원만한 가정은 10년, 20년 지나는 동안에 원만한 사랑으로 익어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주님의 은혜 많이 받아서 좋습니까? 주님을 알게 되어 감격스럽습니까?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앞으로 점점 더 풍성한 은혜, 저 많은 지식, 더 큰 기쁨, 더 깊은 사랑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 얼마나 좋습니까? 생명의 길, 지혜의 길을 걷는 사람의 할 일이 무엇입니까? 23절에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하였습니다. 마음은 생활의 중심입니다. 육신의 건강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육신의 주인인 이 영혼이 더욱 중요합니다. 여기 어떤 사람이 집주인은 병들어 죽게 되었는데 병 고칠 생각은 하지 아니하고 돈 들여 집수리만 하는 사람이 있다면 얼마나 어리석다고 하겠습니까? 그런데 우리 생활 주변에는 그런 사람이 많습니다. 심령의 심각한 병은 생각지 않고 육신의 조그만 병 때문에 고민하고 낙심하고 절망에 빠져 눈물 흘리는 사람 없습니까? 내 심령의 병 때문에 눈물을 흘려 본 적 있습니까? 속사람 새롭게 할 생각은 하지 아니하고 천막처럼 낡아빠질 육신, 겉사람 다듬느라 얼마나 애쓰고 물질을 낭비합니까? 우리의 마음, 이 심령을 바로 지켜야 합니다.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나기 때문입니다. 심장이 왕성한지 약한지, 건강한지 병들었는지에 따라 모든 기관이 일을 잘하고 못하고 합니다. 먼저 우리의 마음을 돌보아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마음속에 깨끗한 피가 흘러 나와 원리의 대정맥을 지나 행실의 모세관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마음을 지킬까요?
첫째, 깨끗이 지켜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죄에서 씻음 받아 깨끗하게, 거룩하게 보존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샘에서 씻음 받을 수 있습니다.
둘째, 진실되게 지켜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의 특성은 진실에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신실하시기 때문입니다. 진실은 충성과 통하는 말입니다. 무슨 일이든지 진실한 마음으로 눈가림으로 하지말고 충성되게 해야 합니다. 셋째, 부드럽게 지켜야 합니다. 누가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피부는 거칠어도 부드러운 마음씨를 가지라. 그런데 많은 사람들 은 그와 반대입니다. 마음은 상관하지 아니하고 피부만 부드럽게 하려고 기름을 바릅니다. 사도 베드로의 권면을 들으십니까? 너희의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타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말고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 하였습니다. 우리 마음에 성령의 기름을 발라 부드럽게 하십시다. 온유와 겸손은 예수님의 성품이었습니다. 내 마음이 거칠어지지 않았습니까? 강퍅해지지 않았습니까? 신경질만 남지 않았습니까? 마음을 온유하고 부드럽게 간수합시다.
1) 24절에 입을 지키라. 왜냐하면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한 말에 우리가 책임져야 합니다. 야고보에는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는 곧 온전한 사람이라 하였습니다.
2) 25절에 눈을 바로 보라고 하였습니다. 현실의 득실보다는 하나님과 그리스도만을 응시하는 눈이 되라고. 위엣 것을 바라보고 위엣 것을 찾으라고. 지금은 보잘 것 없지만 높은데 계신 주님을 바라보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야 향상합니다.
3) 26, 27절에 발의 첩경을 평탄케 하고 발을 악에서 떠나게 하라. 궁극적인 질문은 우리가 어느 길을 가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청년 시절은 인생의 분기점입니다. 좁은 길은 생명의 길이요, 넓은 길은 사망의 길입니다. 신앙생활은 말하자면 좁은 길입니다. 절제, 극기, 훈련의 길입니다. 그러나 생명의 길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 길이 싫어서 보통 넓은 길, 절제도 극기도 필요 없고 걷기 쉬운 길을 걷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은 사망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길을 걷습니까? 기회란 언제나 있는 것 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생의 올바른 방향을 정했습니까? 생명의 길을 택했습니까? 아직 머뭇거리는 분은 안 계십니까? 이 시간 온전한 생명의 길을 택하기로 결단하십시오.
가을 한 철에만 농어낚시가 허용되는 호수에 아버지와 열 살 배기 아들이 낚시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 날은 농어잡이가 허용되기 바로 전날이었습니다. 밤이 으슥할 무렵 드디어 아들의 낚싯대 끝이 둥그렇게 구부러지며 큼직한 놈이 한 마리 걸려들었습니다. 농어였습니다. 아버지는 시계를 보았습니다. 밤 10시 30분, 농어잡이는 내일부터 허용되었고 지금은 농어 이외의 고기만 잡을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주위엔 아무도 없었고 호수엔 낚시꾼도 배도 없었습니다.
"얘야, 그 농어는 풀어주고 우리 다른 것을 잡도록 하자꾸나" 안돼요 아버지, 이렇게 큰 물고기를 잡은 건 처음이예요" 하지만 아버지의 단호한 결정에 아들은 농어를 놓아주었습니다. 그 후 세월이 흐른 뒤 사업가가 된 아들은 정직하고 모범적인 경영자로 뽑힌 자리에서 열 살 때의 그 사건을 통해 아버지로부터 '진정한 정직'을 배웠노라고 말했습니다. 사람의 마음속에는 정의가 있어야 합니다. 정의는 바른 길(正路)입니다. 그러므로 정의에 입각해서 살면 평안하게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양심의 바른 길(正路)을 따라 정의를 가지고 사는 것이 사람답게 사는 길입니다. 불의는 굽은 길이요, 불의를 가지고 산다는 것은 스스로 사람다워지기를 거부하고 파멸을 자초하는 것입니다.
"바른 길로 행하는 자는 걸음이 평안하려니와 굽은 길로 행하는 자는 드러나리라"(잠10:9)
지혜로운 사람은 정로(正路)로 걸어가는 사람입니다. 잠언 23장 19절에 보면 “내 아들아 너는 듣고 지혜를 얻어 네 마음을 정로로 인도할지니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정로로 걷기를 원하십니다(사 30:21). 정로는 바른 길입니다. 정로는 좌로나 우로나 치우침이 없는 길입니다. 정로는 성경의 원리를 따라 걸어가는 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올바른 원리, 올바른 과정, 올바른 방법을 통해 성공하길 원하십니다. 하워드 헨드릭스 교수는 “내가 염려하는 것은 당신이 성공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당신이 잘못된 방법으로 성공하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가장 위험한 것은 잘못된 방법으로 성공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세상에서 성공하고 인생에서 실패합니다. 돈은 남겼지만 사람을 남기지 못한 사람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성공은 했지만 죄책감으로 가득찬 사람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성공은 했지만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진 사람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그 까닭은 정로로 행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정로로 행하는 사람은 세상에서 실패자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인생에서 성공한 사람입니다. 그에게는 깨끗한 양심이 남아 있고 아름다운 관계가 남아 있습니다. 참된 승리의 비결은 정로로 행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추구하는 승리는 일시적인 승리가 아닙니다. 조급한 승리가 아닙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승리는 최후의 승리입니다. 정로로 걷는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 이유는 정로로 걸어가는 것이 너무 느려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정로로 걷는 것처럼 우리 인생을 복되게 하는 것은 없습니다. 지름길이 빠른 길이 아닙니다. 사실 지름길이 가장 먼 길입니다. 가장 빠르게 보이지만 가장 늦은 길이 지름길입니다. 정로로 걷기 위해서는 조급함을 경계해야 합니다. 조급한 사람은 방향보다는 속도에 관심이 많습니다. 의보다는 순간의 유익에 집착합니다. 그런 까닭에 변칙을 씁니다. 조급한 사람은 쉬운 길을 선택합니다. 순간의 쾌락에 집중합니다. 그러나 정로로 걸어가는 사람은 좁은 길을 선택합니다. 어려운 길을 선택합니다. 순간의 쾌락이 아닌 참된 기쁨을 선택합니다. 고통을 먼저 선택하고 즐거움을 나중에 누릴 줄 압니다. 참된 지혜는 우리를 정로로 인도해 줍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성공보다는 성실에 관심이 있으십니다. 인기보다는 인격에 관심이 있으십니다. 양심 없는 성공, 성품이 결여된 성공, 도덕이 결핍된 성공은 참으로 우리가 경계해야 할 일입니다.
어느 길로 가느냐에 따라 인생의 방향이 달라지고 목적지가 달라집니다. 이 세상을 떠날 때 어디론가 가야 합니다. 그 길은 사망의 길과 생명의 길, 지옥의 길과 천국으로 가는 길입니다. 이 두 갈래 길에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아 영원한 생명과 풍성한 복된 삶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세상의 넓은 길과 의의 길인 좁은 길.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 의인의 길과 악인의 길 이 두 개의 길 중에 좁은 길, 생명의 길, 의인의 길을 선택하시는 지혜로운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 기도: 행복의 근원이신 주님, 세상에는 악의 길, 불신앙의 길이 많습니다. 세상에는 죄악과 불의의 길이 많이 있습니다. 주님, 악한 자가 꾈지라도 악의 길로 가지 말게 하옵소서. 악의 길에 보화가 있고 성공이 있다 해도 가지 말게 하옵소서 악한 자와는 함께 하지도 말게 하옵시고. 오직 선한 길, 의의 길로만 가게 하옵소서 주님, 우리의 걸음걸음마다 보혈의 강물을 떠나지 않게 하시고, 한 순간이라도 말씀의 길을 벗어나지 않게 하옵소서. 주님, 우리의 마음속에 생명이라는 푯대가 있게 하시고, 주님, 우리의 마음속에 주님의 나라라는 푯대가 있게 하옵소서. 언제든지 이 푯대를 벗어나지 않게 하시고, 언제든지 이 푯대를 향하여 가도록 도와주옵소서. 주님, 우리들이 무엇이 선한 길인지 깨닫는 지혜를 주옵시고 주님, 우리가 항상 진리의 길, 말씀의 길을 갈 수 있는 믿음과 용기를 허락해 주옵소서. 오늘 우리의 마음과 걸음에 보혈의 피가 흐르게 하심을 감사드리오며,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우리 이웃을 축복하며 기도드립니다. 아멘.
/한태완 목사(하나교회)

* 묵상 및 토의
0 당신은 참 길이요 진리요 생명되시는 예수님을 증거하며 인생을 설계하고 있습니까?
0 하나님의 도를 지키는 것이 축복의 길, 평강의 길임을 자녀들에게 교훈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받은 복을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해 사용합니까?
0 지금 내가 가고 있는 길은 의의 길인가?
0 나는 지금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 구원의 반석이신 하나님인가, 아니면 잠시 후 멸망할 세상인가?

* 주님께 가까이 가는 길

서 아프리카에 크리스천들이 살고 있는 한 작은 마을 사람들에게는 기도하는 밀실이 없었다. 그리하여 그 마을 크리스천들은 오두막 뒤 숲속에 들어가서 하나님께 늘 기도하곤 했다. 그래서 모든 오두막 뒤에는 숲속으로 들어가는 길이 생기게 되었다. 기도하러 들어가고 나가는 발걸음으로 인하여 생긴 거룩한 발자취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열대 지방에서는 식목이 빨리 자라므로 이 길을 조금만 사용하지 않으면 잡초가 곧 무성해진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다른 크리스천들이 지나다가 그 길에 잡초가 무성한 것을 보면 근심스런 표정으로 "형제여, 그길에 뭐가 많이 생겼군요."라고 한다는 것이다. 마치 이 길이 그의 신앙의 척도로 판단하게까지 되었다. 기도는 크리스천들의 신앙 생활의 호흡이라고 할 수 있는데 호흡이 원할하지 못하다고 하는 것은 신앙의 건강이 좋지 않다는 증거다. 건강이 좋지 않을 때 빨리 고침을 받아야지 오래 가면 갈수록 합병증이 병발한다. 마찬가지로 신앙의 건강이 좋지 않을 때 속히 고침을 받아야지 그렇지 않으면 신앙의 건강이 한 모퉁이로부터 계속 무너져가는 것이다. 마치 기도하러 들어가는 길에 잡초가 무성하듯 우리의 신앙의 길에 마귀가 뿌린 잡초가 무성하게 자랄 것이다

* 찬송: (421장) 나는 갈 길 모르니

나는 갈길 모르니 주여 인도합소서
어디 가야 좋을찌 나를 인도합소서
어디 가야 좋을찌 나를 인도합소서

* 우리가 매일 수염을 깎아야 하듯 우리 마음도 매일 다듬지 않으면 안됩니다. 한번 소제했다고 언제까지나 방안이 깨끗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마음도 한번 반성하고 좋은 뜻을 가졌다고 해서 그것이 늘 우리 맘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제 먹은 뜻을 오늘 새롭게 하지 않으면 그것은 곧 우리를 떠나고 맙니다. 하나교회는 성령충만한 교회입니다. 우리 교회는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나교회의 비전
1. 365일 예배드리는 교회(히10: 25, 행17:11)
오늘날 죄악이 만연한 세상에서 매일 말씀을 읽고, 듣지 않으면 하나님이 기뻐하는 삶을 살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매일 거울을 들여다보듯이 말씀의 거울을 통해 매일 마음을 바르고 깨끗이 하여서 예수와 복음을 위해 헌신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막8:35)
2. 더불어 사는 공동체 (행2:42- 47)
하나님은 영의 하나님이실 뿐 아니라 우리의 육신까지도 돌보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천국에 대한 소망뿐 아니라 이 세상에서도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어야 합니다. 따라서 하나교회는 모든 성도가 그리스도안에서 한 가족이 되고, 교회 직영 사업을 통해 청장년의 일자리 마련, 노후생활 보장 등의 꿈과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3. 의와 평강과 희락이 넘치는 교회(롬14: 17)
정의롭고(선행에 힘쓰고), 근심, 걱정, 두려움이 없고(기도에 힘쓰고), 기쁨과 찬송이 넘치는 교회
4. 하나님과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교회(마22:37- 39)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입니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
이러한 꿈과 비전이 있는 교회를 개척하고자 합니다. 연락바랍니다.

하나 교회 한 태 완 목사
전화: 010-7676-3049, 자택: (02) 959-3049
홈페이지: http://comesee.ce.ro, je333.ce.ro
이메일: jesuskore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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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70 삼위일체 하나님의 신비 복음 2005-03-04 690
8169 한국 초대교회와 축첩제도 복음 2005-03-04 1012
» 두 개의 길 복음 2005-03-04 421
8167 눈물 양식 복음 2005-03-04 490
8166 끝이 아닌 새로운 시작 복음 2005-03-05 609
8165 빛으로 어둠을 결박해라 복음 2005-03-05 594
8164 슬픔(22) 복음 2005-03-05 812
8163 좋은 친구를 사귀십시오(84) 복음 2005-03-05 719
8162 축복과 고난의 비빔밥 복음 2005-03-05 571
8161 징계의 복(51) 복음 2005-03-05 680